가장 평범한 이름 '김지영'. 작가는 평범한 여성의 삶을 대변하려고 가장 평범한 이름을 골랐는지도 모르겠다. 김지영씨의 딸 지원이보다 다섯 살 많은 딸이 있다는 작가의 글을 읽고 팬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 사회에서 여자로 살아간다는 일은 녹록지 않다는 것을 과격하지 않고 세련되게 표현한 조남주 작가. 태어날 때부터 30대 중반이 된 지금 이 순간까지 수도 없는 불합리와 편견에 감정을 소모하게 되는 주인공 김지영. 그녀는 출구가 없는 거대한 미로 속에서도 징징거리지도 않고, 매번 내뱉고 싶은 말을 삼키며 담담하게 상황을 모면한다.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는 여사우의 복지를 위해 어린이집도 운영하고, 모성보호 제도를 운용하고, 대부분의 여직원들이 육아휴직을 꽉 채우고 돌아온다. 비교적 남녀가 평등한 회사에서 나는 차별받지 않는 터울 안에서 지낸다고 생각하다가도, 더듬어 생각해보면 여자는 사회의 여러 가지 제도, 회사의 복지제도 등 법적인 테두리, 보호의 테두리를 만들지 않으면 남자와 동등한 사회생활은 꿈도 못 꾸는 사회에 살고 있으니... 역시 평등을 논하기에는 아직 아쉬운 점이 많다.


결혼을 포기하고, 육아를 포기하고 점점 많은 것들을 포기하는 여성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는 요즘. 아직도 가정 내에서 잃는 것은 오롯이 여자의 몫이어야 하는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이 서글프기만 하다.




# 1995년~2000년


- 61p.

"따뜻한 거 많이 먹어야 한다. 옷도 따뜻하게 입고."

아버지께 꽃다발을 받았다는 친구도 있었고, 가족들과 케이크를 자르며 파티를 열었다는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에게는 엄마, 언니, 여동생과만 공유하는 비밀일 뿐이다. 귀찮고 아프고 왠지 부끄러운 비밀. 김지영 씨네 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머니는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직접 언급을 피하며 라면 국물만 떠주었다.

그날 밤 불편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언니의 옆에 누워 김지영 씨는 자신에게 벌어진 일들을 차분히 되짚어 봤다. 월경과 라면에 대해 생각했다. 라면과 아들에 대해, 아들과 딸에 대해, 아들과 딸과 집안일에 대해 생각했다.



- 109p.

몇 번의 시도 끝에 얼핏 육각형 모양이 살아 있는 커다란 눈송이가 남자 친구의 검지 끝에 살며시 앉았고, 김지영 씨는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물었다.

"너 회사 잘 다니게 해 달라고. 덜 힘들고, 덜 속상하고, 덜 지치면서, 사회생활 잘하고, 무사히 월급 받아서 나 맛있는 거 많이 사 달라고."

김지영 씨는 가슴속에 눈송이들이 성기게 가득 들어차는 느낌이었다. 충만한데 헛헛하고 포근한데 서늘하다. 남자 친구의 말처럼 덜 힘들고, 덜 속상하고, 덜 지치면서, 어머니의 말처럼 막 나대면서 잘 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 123p.

대표는 업무 강도와 특성상 일과 결혼 생활, 특히 육아를 병행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여직원들을 오래갈 동료로 여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원 복지에 힘쓸 계획은 없다. 못 버틸 직원이 버틸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보다, 버틸 직원을 더 키우는 거시 효율적이라는 게 대표의 판단이다. 그동안 김지영 씨와 강혜수 씨에게 까다로운 클라이언트를 맡긴 것도 같은 이유였다. 두 사람을 더 신뢰해서가 아니라, 오래 남아 할 일이 많은 남자들에게 굳이 힘들고 진 빠지는 일을 시키지 않은 것이다.

김지영 씨는 미로 한가운데 선 기분이었다. 성실하고 차분하게 출구를 찾고 있는데 애초부터 출구가 없었다고 한다. 망연히 주저앉으니 더 노력해야 한다고, 안 되면 벽이라도 뚫어야 한다고 한다.




# 우리 모두의 김지영, 김고연주 - 183~184p.


김지영의 삶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눈에 밟히는 장면들이 반복된다. 목소리를 삼키는 모습이다.


선배는 평소와 똑같이 다정하고 차분히 물었다. 껌이 무슨 잠을 자겠어요, 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김지영 씨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 94p.


영업 중인 빈 택시 잡아 돈 내고 타면서 고마워하기라도 하라는 건가. 배려라고 생각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무례를 저지르는 사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항의를 해야 할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고, 괜한 말싸움을 하기도 싫어 김지영 씨는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 100~101p.


주량을 넘어섰다고, 귀갓길이 위험하다고, 이제 그만 마시겠다고 해도 여기 이렇게 남자가 많은데 뭐가 걱정이냐고 반문했다. 니들이 제일 걱정이거든. 김지영 씨는 대답을 속으로 삼키며 눈치껏 빈 컵과 냉면 그릇에 술을 쏟아 버렸다. - 116p.


조금도 서운하지 않았다. 견딜 수 없는 것은 오히려 그 순간들이었다. 김지영 씨는 충분히 건강하다고, 약 같은 것은 필요 없다고, 가족 계획은 처음 보는 친척들이 아니라 남편과 둘이 하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니에요, 괜찮아요, 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 133~134p.


그럼 너두 계속 구역질하고, 제대로 먹지도 싸지도 못하면서, 피곤하고, 졸립고, 여기저기 아픈 상태로 지내든지, 겉으로 말하지는 못했다. - 138p.


김지영 씨는 나도 당당하고, 먹고 싶은 음식 다 잘 먹고 있다고, 그런 건 아이의 성별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왠지 열등감으로 보일 분위기라 그만두었다. - 142p.




<82년생 김지영>

조남주 장편소설

민음사, 2016


82년생 김지영
국내도서
저자 : 조남주
출판 : 민음사 2016.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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