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화되어서 유명해진 '살인자의 기억법' 알츠하이머에 걸린 늙은 살인자의 이야기인데, 영화를 본 주변 지인들은 너도나도 추천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영화관에 갈 시간이 마땅히 나지 않았고, 책으로라도 먼저 만나보리라 마음을 먹고 있었다. 


저자 김영하 작가가 직접 책을 읽어주는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를 찾아 이 소설의 도입부를 들었다. 작가는 약 5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담담히 읽었다. "죽음이라는 건 삶이라는 시시한 술자리를 잊어버리기 위해 들이켜는 한 잔의 독주일지도." 이 독백을 끝으로 저자의 목소리로 듣는 소설은 끝이 났다. 소설을 내 눈으로 읽는 것과 저자의 목소리로 듣는 것에 차이가 있었다. 문장은 간결했다. 김병수와 호흡을 따라 박주태를 의심했고, 은희를 염려했다. 소설의 도입부를 읽고 난 후, 작가는 치매와 살인자에 대해 약간의 해설을 곁들였다. 인간이 자기라는 존재에 대해 확신하려면 일관성이 필요하다고 했다. 나 스스로는 일관적인가. 존재에 대한 확신을 할 수 있는가. 그것을 작가다운 표현으로 '어제 잠들었던 곳에서 깨어날 수 없다면 일상이 꿈과 같을 것이다.' 라며 무심히 뱉어낸 그 한마디에 사고는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리고 나는 책을 찾아 내 눈으로 다시 살인자 김병수와 함께 그의 기억을 더듬었다. 분량은 길지 않았다. 책장을 넘기면서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해 댄다. 살인자의 독백을 담은 문장에는 감정이 없지만 그의 감정이 느껴진다. 살인자의 사고(思考)를 담아낸 이성적인 표현은 세세하였고 너절하지 않았다. 객관적이면서도 주관적이었다. 


글을 잘 쓰고 싶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나에게 이런 말끔한 문장을 써내는 작가가 더없이 위대해 보였다. 시종일관 독자를 몰입해서 빠져나올 수 없게 만드는 이야기를 창의적으로 전개해내는 작가의 재능이 부러웠다. 김훈 작가의 문장을 읽던 어느 날, 존경과 함께 느꼈던 무언의 패배감처럼, 작가의 재능이란 날 때부터 점지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어찌 되었건 소설을 다 읽고 나니, 영화로 소개된 이야기가 궁금해서 영화를 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졌다. 개봉한지 몇 달이 지난 탓에 상영관을 찾을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늦은 밤 소파에 반쯤 누워 캔맥주를 손에 들고는, IPTV의 리모컨에서 결제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다시 김병수와 함께 그의 기억을 더듬는다. 




■ 본문 중에서


- 17p.

카그라스증후군이라는 게 있다. 뇌의 친밀감을 관장하는 부위에 이상이 생길 때 발생하는 질병이다. 이 병에 걸리면 가까운 사람을 알아보기는 하지만 더이상 친밀감을 느낄 수가 없게 된다. 예컨대 남편은 갑자기 아내를 의심한다. "내 마누라 얼굴을 하고 꼭 내 마누라처럼 구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야? 누가 시킨 거지?" 얼굴도 똑같고 하는 일도 똑같은데 아무래도 남처럼 느껴진다. 낯선 사람으로만 보인다. 결국 이 환자는 낯선 세계에 유배된 것과 같은 기분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비슷한 얼굴의 타인들이 모두 함께 자기를 속이고 있다고 믿는다.

그날 이후로 은희는 자신을 둘러싼 이 작은 세계, 나와 자신만으로 이루어진 가정을 낯설게 여기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래도 우리는 같이 살았다.



- 51p.

나는 살아오면서 남에게 험한 욕을 한 일이 없다.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고 욕도 안 하니 자꾸 예수 믿느냐고 묻는다. 인간을 틀 몇 개로 재단하면서 평생을 사는 바보들이 있다. 편리하기는 하겠지만 좀 위험하다. 자신들의 그 앙상한 틀에 들어가지 않는 나 같은 인간은 가늠조차 못 할 테니까.



- 57p.

살인자로 오래 살아서 나빴던 것 한 가지: 마음을 터놓을 진정한 친구가 없다. 그런데 이런 친구, 다른 사람들에게는 정말 있는 건가?



- 92p.

은희는 모른다. 내가 추구하던 즐거움에 타인의 자리가 없다는 것을. 나는 타인과 어울려 함께하는 일에서 기쁨을 얻어본 기억이 없다. 나는 언제나 내 안으로 깊이깊이 파고들어갔고, 그 안에서 오래 지속되는 쾌락을 찾았다. 뱀을 애완용으로 키우는 이들이 햄스터를 사들이듯이, 내 안의 괴물도 늘 먹이를 필요로 했다. 타인은 그럴 때만 내게 의미가 있었다. 노인들이 손뼉을 치며 좋아하는 것을 보자마자 나는 즉각적으로 그들을 혐오하게 되었다. 웃는다는 것은 약하다는 것이다. 타인에게 자기를 무방비로 내준다는 뜻이다. 자신을 먹이로 내주겠다는 신호다. 그들은 힘이 없고 저속하고 유치해 보였다.



- 94p.

나는 조용한 세상이 좋다. 도시에서는 살 수가 없다. 너무 많은 소리가 나를 향해 달려든다. 너무 많은 표지판, 간판,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표정들. 나는 그것들을 해석할 수가 없다. 무섭다.



- 105p.

수치심과 죄책감: 수치는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것이다. 죄책감은 기준이 타인에게, 자기 바깥에 있다. 남부끄럽다는 것. 죄책감은 있으나 수치는 없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타인의 처벌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나는 수치는 느끼지만 죄책감은 없다. 타인의 시선이나 단죄는 원래부터 두렵지 않았다. 그런데 부끄러움은 심했다. 단지 그것 때문에 죽이게 된 사람도 있다. - 나 같은 인간이 더 위험하지.


- 147~148p.

눈을 뜨기가 어렵다. 지금이 몇 시인지, 아침인지 저녁인지도 도통 가늠할 수가 없다.

사람들이 하는 말을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다.

(중략)

미지근한 물속을 둥둥 부유하고 있다. 고요하고 안온하다. 내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공(空) 속으로 미풍이 불어온다. 나는 거기에서 한없이 헤엄을 친다. 아무리 헤엄을 쳐도 이곳을 벗어날 수가 없다. 소리도 진동도 없는 이 세계가 점점 작아진다. 한없이 작아진다. 그리하여 하나의 점이 된다. 우주의 먼지가 된다. 아니, 그것조차 사라진다.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문학동네, 2013


살인자의 기억법
국내도서
저자 : 김영하(Young Ha Kim)
출판 : 문학동네 2013.07.24
상세보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