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직장에서 함께 사내 기자로 활동하던 후배가 있었다. 유독 예의가 바르고, 누구에게나 배려심이 넘치던 그의 글 역시 예의가 바른 글이었다. 늘 정갈하고 맛깔스러운 글을 쓰던 후배는 틈틈이 페이스북에 본인의 생각을 담은 글들을 남겼다. 다른 회사로 이직한 이후에는 페이스북이 그의 글을 읽던 유일한 창구였다. 짧은 글과 사진이 대세인 시대의 SNS에 걸맞지 않게 긴 글들이었지만 대부분은 놓치지 않고 읽었다. 그런 그 후배가 그간의 글들을 엮어 책을 냈다. 


후배의 글에는 깊은 생각이 묻어있었다. 5년여의 짧은 사회생활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훨씬 성숙했다. 나 또한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진 않았지만 직업과 취미의 경계에서 줄타기를 하며 항상 무언가를 쓴다. 대부분은 여행의 기록을 사진과 함께 남기는 글들인데, 보통은 길 위에서의 감정들을 최대한 솔직하게 담아내려 노력했다. 사실을 기반으로 한 글쓰기보다 감정을 전달하는 글쓰기가 늘 어려웠다. 그런데 후배는 그 어려운 이야기들을 엮어 산문집을 출간했다. 글을 읽고 책장을 덮으며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제는 후배라는 호칭보다는 작가라 불려야 마땅하다.


<명함을 정리하며>의 출간은 서 작가의 글과 책 여정의 첫걸음일 것이다. 

첫 책을 출간한 설렘을 늘 간직하길. 앞으로도 서인석 작가의 여정을 늘 응원합니다 :)




# 명함을 정리하며 - 17~18p.


명함에 이름을 넣기 위한 노력들이 모여서 지금의 사회를 굴린다. 명함은 쉽게 찍어지지만 그 명함에 이름을 넣는 과정은 어렵고 어둡고 막막하다. 뭘 잘해야, 혹은 뭘 잘못해야 명함에 이름을 올릴 조건이 되는지 세상은 아직 청년들에게 답을 주지 않는다. (중략)

불합리와 불공평이 만연한 것을 잘 앎에도 청년들은 다시 책상 앞에 앉는다. 또 밖으로 달린다. 세상의 틈바구니에 끼어서 어떤 고생을 할지 몰라서가 아니다. 그저 세상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그들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들의 노력을 행사할 뿐이다. 평범한 이들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명함에 이름을 넣는 일은, 평범한 일이지만 평범하게라도 그들의 삶을 꾸려갈 수 있는 방법이다.



# 글 냄새 - 37~38p.


정리되지 않은 구석 책꽂이에서 이 냄새는 더 짙었는데, 오래된 책들의 냄새였다. 잉크와 종이가 만나면 그 특유의 냄새가 난다. 글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향기라고 부르지만, 굳이 이 냄새를 향수로 만들어 뿌리지 않는 것을 보면 향기라는 범주에 넣기에는 민망하다. 이 냄새는 책이 낡으면 낡을수록 짙어진다. (중략)

책의 오래됨과 양이 누적되면 냄새는 더욱 강해진다. 문자가 쌓이면 쌓일수록 짙은 냄새를 내는 것이다.



# 꼰대 1 - 93~94p.


머리를 노랗게, 주황색으로, 회색으로, 금색으로, 보라색으로, 분홍색으로 물들인 이후, 개인적으로는 꼰대 구분법이 상당히 쉬워졌다.

틀과 규칙이 없어도 되는 곳에 틀과 규칙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꼰대가 되기 위한 제1원칙이지만 이것만으로는 꼰대를 완벽히 정의할 수 없다. 물론 꼰대 정의의 가장 중요한 마지막 결정적 정체성은 바로 "하지만 나는 꼰대일리가 없지"라는 굳건한 믿음이다.



# 혁명가 - 157p.


내가 쌓는 가치와 당신이 쌓는 가치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내가 하는 생각과 당신이 하는 생각이 똑같을 수 없다는 걸 알았으면 한다. 당신들의 혁명은 그 이해에서 출발해야 더 많은 사람들을 혁명으로 품을 수 있다고 감히 단정지어 말한다. 혁명은 징징거림이 아니라 이해에서 출발한다. 위대한 혁명가들은 그랬다. 여러분들이 '프로불편러'로 남을지 위대한 혁명가로 남을지는 그 작은 차이에서 갈릴 것이라고 감히 단정지어 말한다.



# 담배 - 186p.


흡연자들조차도 어린 제 자식 앞에서는 담배를 피우려하지 않는다. 대학시절 자취하던 흡연자 친구도 담배는 꼭 집 밖에서 피우곤 했다. "왜 굳이?" 라고 물어보면 그 친구의 답은 "담배냄새 나잖아" 였다. 안 피우면 안 난다.



# Epilogue - 202p.


직업으로 삼지는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늘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단지 글 쓰는 게 재밌어서, 그리고 가진 생각을 글로 정리하여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게 좋아서 그랬습니다. 쓰다 보니 더 잘 쓰고 싶어졌습니다. 한두 번 글로 칭찬을 받아보니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명함을 정리하며>

서인석 산문

BOOKK, 2018




김훈 작가의 신작 소설 '공터에서'. 김훈 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도 읽어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소설의 배경은 192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작가가 살아온 근현대사를 아우르는 시간이다. 


작가의 어머니는 실제로 1.4후퇴 때 삼 남매를 데리고 부산까지 내려갔는데, 다행히 세 남매 모두 죽지 않고 살았다. 연소득 80달러의 가난한 나라를 살았던 작가가 말한다. 필리핀의 원조를 받아 살던 시대였다고. 폭력과 야만, 억압, 박해, 그리고 차별이 일상이던 그 시대. 비리와 모순의 세계. 가난과 억압의 울분. 그 모든 기억들이 몸속에 딱지처럼 붙어 있다고. 그것이 평생 작가를 괴롭혀 왔고, 그런 것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게 미성숙한 것일 수 있겠다는 느낌. 이것을 빨리 극복하고 없애버리고 싶다는 생각에 소설을 써서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졌고, 덕분에 우리는 김훈 작가의 문장으로 근현대사를 다시 읽는다.


다음 세대인 마장세와 마차세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어머니의 아버지의 시간들. 사소한 것들까지 손에 잡힐 듯 상세한 묘사를 따라가다 보면 복선처럼 의심되는 장면이 수차례 등장한다. 마차세가 오토바이 배달 일을 하는 장면의 묘사에서는 눈길에 사고가 날 것만 같은데 다행히 사고는 일어나지 않는다. 큰 사건이 날 것 같은 전개의 말미에 큰 사건은 없었다. 우리의 삶이 있을 뿐이었다. 결국 마장세는 고물 처리하는 과정의 비리로 구속되었지만 그저 잔잔한 사건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아들의 시선으로 사망에 이르는 아버지 마동수를 바라보던 떨쳐버리고 싶은 꼬부라진 기억들. 치매에 걸린 어머니 이도순이 죽기 전 꺼내든 초라한 기억들. 그 기억들을 타고 넘는 과거의 상흔들이 아프게 다가온다. 흥남부두에서 젖먹이와 남편을 잃은 어머니 이도순 삶. 일제시대 상해에서 해방 이후 부산에서 전쟁통에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던 아버지 마동수의 삶. 


삶의 터전을 떠나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던 우리네 아버지와 어머니 세대의 애달픔을 이도순과 마동수의 삶에서 읽었다. 그리고 아직도 남루한 인간의 비애는 우리 삶을 떠돈다.



■ 본문 중에서


# 아버지 - 9p.


외출에서 돌아와서 안방 문을 열었을 때, 마차세는 아버지의 꼬부라진 육신을 보고 죽음을 직감했다. 아버지의 사체는 태아처럼 보였다. 죽은 육신의 적막은 완강했다. 돌이킬 수 없고, 말을 걸 수 없었다.

아, 끝났구나, 끝났어...... 마차세 상병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의 생애는 그 사람과 관련이 없이, 생애 자체의 모든 과정이 스스로 탈진되어야만 끝나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사람이 죽어도 그의 한 생애가 끌고 온 사슬이 여전히 길게 이어지면서 살아 있는 사람들을 옥죄이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마차세는 예감했다. 끝이 아닐 수도 있다는 예감은 끝났다는 사실보다 더 절박했다.



# 세느주점 - 33p,


시화호에서 새들을 보면서 너를 생각했어. 너의 생명을 흐르는 시간과 나의 생명을 흐르는 시간이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만나는 것인지, 섞이는 것인지를 생각했고, 그런 생각을 화폭에 그려보려는 생각을 했어. 새들 때문에 그런 생각을 했을 거야.

거기도 새들이 많겠구나. 새를 보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생각해 줘. 그만 쓸게. 니가 있는 고지에 어서 봄이 왔으면 좋겠다. 그때는 호수의 새들이 다들 돌아가고 다른 새들이 와 있겠지. 



# 하관(下棺) - 46~47p.


이도순이 아들을 쳐다보았다. 눈동자에 시선의 방향이 없었다. 마차세는 어머니의 눈이 지나간 시간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차세는 어머니의 시선을 피했다.

이도순은 벽 쪽으로 돌아누워서 울었다. 터져 나오는 울음과 울음을 누르려는 울음이 부딪치면서 울음이 뒤틀렸다. 입 밖으로 새어 나온 울음이 몸속에 쟁여진 울음을 끌어냈다. 몸 밖의 울음과 몸 안의 울음이 이어져서 울음은 굽이쳤고, 이음이 끊어질 때 울음은 막혀서 끽끽거렸다. 그 울음은 남편과 사별하는 울음이 아니라, 울음으로써 전 생애를 지워버리려는 울음이었으나 울음에 실려서 생애는 오히려 드러나고 있었다. 몸속에 저렇게 맹렬한 폭발성 에너지가 쌓여서 조용한 일상이 되어왔던 어머니의 생애를 마차세는 짐작할 수 없었다. 돌아누운 이도순의 등뼈가 흔들렸다. 말리거나 달랠 수 있는 울음이 아니었다. 



# 서울 - 104~105p.


아편은 마동수의 목숨에서 시간을 제거시켰다. 약 기운이 돌 때 마동수는 시간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무시간(無時間)의 벌판에 누워 있었고, 약 기운이 풀리면 무릎뼈가 톱으로 썰어내듯 저렸다. 일본이 패전했다는 소식에 중국인들이 거리에서 아우성칠 때도 마동수는 그 무시간의 벌판에 침을 흘리며 누워 있었다. 일본 패전의 결과로 조선이 독립된다는 것을 마동수는 며칠 후에 알았다.



# 부산 - 114~115p.


서울이 다시 위태로워지자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전선의 일진일퇴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경거망동하지 말고 은인자중하라고 대통령은 말했다. 기자들이 서울 시민은 다시 피난을 가야 하는지를 대통령에게 물었다. 그것은 각자 임의로 결정할 일이고 정부가 간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대통령은 말했다. 피난은 명령도 아니고 권유도 아니며, 잔류 또한 명령도 아니고 권유도 아니다, 갈 곳이 있고 갈 힘이 있는 사람은 피난을 가는 것도 무방할 것이며, 서울에 남아 있는 것도 무방하겠지만, 옥쇄주의가 반드시 현명하다고 할 수도 없다고 대통령은 말했다. 다만, 피난을 가기로 했다면 날씨가 추우므로 이부자리와 식량을 지참하는 것이 좋겠고, 피난 가는 사람들은 질서를 지켜서 문명한 국민의 성숙도를 우방 여러 나라에 보여달라, 또 피난을 가거나 서울에 잔류하거나 근신자제하고 태연자약하라고 대통령은 당부했다.

계엄사령부 민사부도 대통령 담화에 따른 지침을 발표했다. 피난 가는 사람들은 간선 도로를 군에 양보하고 이면 도로나 논밭 길을 이용해 달라, 피난민들은 부산, 대구 등 대도시로 집중하지 말고 지방 소읍으로 산개하라, 피난 갈 때 두고 가는 김치, 간장, 된장, 메주는 군부대에서 이용할 수 있도록 포장을 해놓고 떠나라, 피난을 가지 않는 가정들은 마당에 방공호를 깊이 파라, 일선과 후방이 한 덩어리가 되어 모든 물자와 언동을 전력(戰力)으로 귀일(歸一)시키라고 계엄사는 말했다.



# 베트남 - 156~157p.


마장세는 구두를 닦아주고 받은 돈으로 거리에서 풀빵이나 꽁치구이를 사 먹었다. 점심때까지 번 돈이 없어서 오후 네댓 시쯤에야 허기를 면하는 날이 많았다. 배가 고프면 창자에서 찬바람이 일었고 몸속이 비어 투명했다. 배가 고프면 눈을 가늘게 뜨게 되는데, 눈꺼풀이 떨려서 세상이 흔들렸고 가까운 것들이 멀어 보였다. 배가 고프면 후각이 민감해져서 거리의 사람 냄새나 물이 오르는 가로수의 풋내가 코끝에 어른거렸다. 배가 고프면 배고픔이 몸속에 가득 차면서도 몸이 비어 있는 느낌이었는데, 음식 냄새가 코를 스치면 배고픔은 창끝처럼 뾰족해져서 창자를 찔렀다. 배가 고프면 마음이 비어서 휑했고, 그 빈 마음속에 배고픔이 스며 있었다. 배고픈 저녁에 마장세는 저녁노을을 보면서 배고픔은 노을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배가 고프면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맛의 헛것이 빈 마음에 번져 있었다. 풀빵은 너무 멀게서 깨물면 속이 흘러내렸다. 마장세는 풀빵을 먹을 때 입을 위로 치켜들고 흘러나오는 내용물을 빨아 먹었다. 풀빵은 멀겠지만 온기가 배 속으로 퍼졌다. 온도도 먹이가 될 수 있다는 걸 마장세는 풀빵을 먹으면서 알았다. 온도는 배가 부르지는 않았고 온도가 배 속으로 퍼지면 메마른 창자가 꿈틀거리면서 창자는 더욱 맹렬히 건더기를 요구했다.



# 당신의 손 - 207~208p.


바강희는 아이들이 손바닥으로 느끼는 소나무 껍질의 느낌이 아이들의 마음에 깊이 저장되어 있다가 종이 위에서 선이나 색으로 드러나기를 바랐다. 느낌의 내용을 말로 타인에게 전해 줄 수는 없었고 느낌을 느끼게 해주는 것만이 교사의 일이라고 박상희는 생각했다. 박상희는 아이들을 데리고 토끼, 다람쥐 사육장 앞에 가서 동물들의 손짓, 발짓, 표정과 움직임을 들여다보도록 했다. 박상희는 아이들이 다람쥐와 토끼의 몸놀림에서 생명의 느낌을 얻기를 바랐다. 박상희는 또 유자 껍질, 조개 껍데기, 달걀 껍데기를 교실에 가져가서 아이들에게 만져보도록 했고, 눈을 감고 서로 얼굴을 더듬어보도록 했다.

ㅡ 선생님은 손으로 만져본 느낌을 그릴 수가 있나요?

라고 중학교 3학년 여학생이 물었다.

ㅡ 그릴 수 없어도, 그 느낌을 가지고 있어야 그림을 그릴 수가 있다.

라고 박상희는 대답해 주었지만, 전달되거나 이해될 수 없는 말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박상희는 아이들이 종이나 캔버스에 선을 긋고 물감을 칠할 때 그 종이나 캠버스를 빈 공간이 아니라, 이 세상으로 받아들여주기를 바랐으나 그 바람 또한 이해받기는 어려웠다. 어머니들이 박상희의 수업 방식에 항의했다.



# 어머니 - 243p.


이도순이 비척거리면서 서랍을 열어보고 화장실 안을 기웃거렸다. 이도순은 흥남부두에서 잃어버린 젖먹이 딸을 찾고 있었다. 길녀야 어딨니...... 이도순은 커튼 뒤쪽을 들여다보았다. 마차세는 어머니를 말리지 못했다. 그 아이의 이름이 길녀였구나...... 어머니는 어째서 한평생 입 밖에 낸 적이 없는 그 이름을 말년의 암흑 속에서 기억해 내는 것일까. 어머니의 치매는 망각된 고통의 기억을 극사실적으로 재생시키고 있었다. 길녀는 여자 이름이니까, 길녀가 살았으면 내 누나였겠구나...... 마차세는 길녀가 어머니의 치매속으로 살아 돌아오지 않기를 빌었다. 이도순은 침대 밑을 들여다보았다. 마차세는 고개를 돌렸다.



# 기별 - 270~271p.


임신의 기별은 몸속 깊은 곳에서 움트는 이물감이나 어지럼증 같았다. 기별은 멀고 희미했는데, 점차 다가와서 몸 안에 자리 잡았다. 낯선 것이 다가오고 또 자라서 몸 안에 가득 퍼져가는 과정을 박상희는 조용히 들여다보았다. 몸속의 어두운 바다에 새벽의 첫 빛이 번지는 것처럼 단전 아래에서 먼동이 텄다. 고등학교 여름방학 때 놀러 갔던 동해의 아침 바다는 어둠이 물러서는 시간과 공간 안으로 수평선 쪽에서 솟아오르는 빛의 입자들이 퍼졌고, 새로운 시간은 살아 있는 살끼리 서로 부비듯이 다가왔다. 박상희는 스며서 가득 차는 빛들을 떠올렸다. 임신은 몸의 새벽을 열었다. 가끔씩 안개 같은 것이 목구멍을 넘어왔다.

몸속을 덮은 안개 속에서 해독할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수런거리면서 이따금씩 가까이 다가왔다. 아직 발생하지 못한 세포들이 숨 쉬는 소리 같기도 했고, 우주공간을 날아가는 별들의 소리 같기도 했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무어라고 말하고 있었고, 말하고 있었지만 아직 말이 되어지지 않은 소리였다.



# 작가 후기


이 작은 소설은 내 마음의 깊은 바닥에 들러붙어 있는 기억과 인상의 파편들을 엮은 글이다.

그 기억과 인상들은 오랫동안 내 속에 서식하면서 저희들끼리 서로 부딪치고 싸웠다. 사소한 것들의 싸움을 말리기가 더욱 힘들었다.

별것 아니라고 스스로 달래면서 모두 버리고 싶었지만 마침내 버려지지 않아서 연필을 쥐고 쓸 수밖에 없었다.

당대의 현실에서 발붙일 수 없었던 내 선대 인물들에게서 들은 이야기와 그들의 기록, 언행, 체취, 몸짓, 그들이 남긴 사진을 떠올리면서 겨우 글을 이어나갔다. 이 글을 세상에 내놓으면서, 나는 그 기억과 인상들이 이제는 내 속에서 소멸하기를 바란다.

더 길게 쓰고 싶었지만, 기력이 미치지 못했다. 수다를 떨지 말아야 한다고 늘 다짐하고 있다. 쉬운 일은 아니다.


나의 등장인물들은 늘 영웅적이지 못하다. 그들은 머뭇거리고, 두리번거리고, 죄 없이 쫓겨 다닌다. 나는 이 남루한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늙기가 힘들어서 허덕지덕하였다. 의료비 지출이 늘어났다. 지금은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온 느낌이다. 여생의 시간을 아껴 써야 할 것이다. 



<공터에서>

김훈

해냄출판사, 2017


공터에서
국내도서
저자 : 김훈
출판 : 해냄출판사 2017.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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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화되어서 유명해진 '살인자의 기억법' 알츠하이머에 걸린 늙은 살인자의 이야기인데, 영화를 본 주변 지인들은 너도나도 추천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영화관에 갈 시간이 마땅히 나지 않았고, 책으로라도 먼저 만나보리라 마음을 먹고 있었다. 


저자 김영하 작가가 직접 책을 읽어주는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를 찾아 이 소설의 도입부를 들었다. 작가는 약 5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담담히 읽었다. "죽음이라는 건 삶이라는 시시한 술자리를 잊어버리기 위해 들이켜는 한 잔의 독주일지도." 이 독백을 끝으로 저자의 목소리로 듣는 소설은 끝이 났다. 소설을 내 눈으로 읽는 것과 저자의 목소리로 듣는 것에 차이가 있었다. 문장은 간결했다. 김병수와 호흡을 따라 박주태를 의심했고, 은희를 염려했다. 소설의 도입부를 읽고 난 후, 작가는 치매와 살인자에 대해 약간의 해설을 곁들였다. 인간이 자기라는 존재에 대해 확신하려면 일관성이 필요하다고 했다. 나 스스로는 일관적인가. 존재에 대한 확신을 할 수 있는가. 그것을 작가다운 표현으로 '어제 잠들었던 곳에서 깨어날 수 없다면 일상이 꿈과 같을 것이다.' 라며 무심히 뱉어낸 그 한마디에 사고는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리고 나는 책을 찾아 내 눈으로 다시 살인자 김병수와 함께 그의 기억을 더듬었다. 분량은 길지 않았다. 책장을 넘기면서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해 댄다. 살인자의 독백을 담은 문장에는 감정이 없지만 그의 감정이 느껴진다. 살인자의 사고(思考)를 담아낸 이성적인 표현은 세세하였고 너절하지 않았다. 객관적이면서도 주관적이었다. 


글을 잘 쓰고 싶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나에게 이런 말끔한 문장을 써내는 작가가 더없이 위대해 보였다. 시종일관 독자를 몰입해서 빠져나올 수 없게 만드는 이야기를 창의적으로 전개해내는 작가의 재능이 부러웠다. 김훈 작가의 문장을 읽던 어느 날, 존경과 함께 느꼈던 무언의 패배감처럼, 작가의 재능이란 날 때부터 점지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어찌 되었건 소설을 다 읽고 나니, 영화로 소개된 이야기가 궁금해서 영화를 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졌다. 개봉한지 몇 달이 지난 탓에 상영관을 찾을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늦은 밤 소파에 반쯤 누워 캔맥주를 손에 들고는, IPTV의 리모컨에서 결제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다시 김병수와 함께 그의 기억을 더듬는다. 




■ 본문 중에서


- 17p.

카그라스증후군이라는 게 있다. 뇌의 친밀감을 관장하는 부위에 이상이 생길 때 발생하는 질병이다. 이 병에 걸리면 가까운 사람을 알아보기는 하지만 더이상 친밀감을 느낄 수가 없게 된다. 예컨대 남편은 갑자기 아내를 의심한다. "내 마누라 얼굴을 하고 꼭 내 마누라처럼 구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야? 누가 시킨 거지?" 얼굴도 똑같고 하는 일도 똑같은데 아무래도 남처럼 느껴진다. 낯선 사람으로만 보인다. 결국 이 환자는 낯선 세계에 유배된 것과 같은 기분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비슷한 얼굴의 타인들이 모두 함께 자기를 속이고 있다고 믿는다.

그날 이후로 은희는 자신을 둘러싼 이 작은 세계, 나와 자신만으로 이루어진 가정을 낯설게 여기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래도 우리는 같이 살았다.



- 51p.

나는 살아오면서 남에게 험한 욕을 한 일이 없다.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고 욕도 안 하니 자꾸 예수 믿느냐고 묻는다. 인간을 틀 몇 개로 재단하면서 평생을 사는 바보들이 있다. 편리하기는 하겠지만 좀 위험하다. 자신들의 그 앙상한 틀에 들어가지 않는 나 같은 인간은 가늠조차 못 할 테니까.



- 57p.

살인자로 오래 살아서 나빴던 것 한 가지: 마음을 터놓을 진정한 친구가 없다. 그런데 이런 친구, 다른 사람들에게는 정말 있는 건가?



- 92p.

은희는 모른다. 내가 추구하던 즐거움에 타인의 자리가 없다는 것을. 나는 타인과 어울려 함께하는 일에서 기쁨을 얻어본 기억이 없다. 나는 언제나 내 안으로 깊이깊이 파고들어갔고, 그 안에서 오래 지속되는 쾌락을 찾았다. 뱀을 애완용으로 키우는 이들이 햄스터를 사들이듯이, 내 안의 괴물도 늘 먹이를 필요로 했다. 타인은 그럴 때만 내게 의미가 있었다. 노인들이 손뼉을 치며 좋아하는 것을 보자마자 나는 즉각적으로 그들을 혐오하게 되었다. 웃는다는 것은 약하다는 것이다. 타인에게 자기를 무방비로 내준다는 뜻이다. 자신을 먹이로 내주겠다는 신호다. 그들은 힘이 없고 저속하고 유치해 보였다.



- 94p.

나는 조용한 세상이 좋다. 도시에서는 살 수가 없다. 너무 많은 소리가 나를 향해 달려든다. 너무 많은 표지판, 간판,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표정들. 나는 그것들을 해석할 수가 없다. 무섭다.



- 105p.

수치심과 죄책감: 수치는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것이다. 죄책감은 기준이 타인에게, 자기 바깥에 있다. 남부끄럽다는 것. 죄책감은 있으나 수치는 없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타인의 처벌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나는 수치는 느끼지만 죄책감은 없다. 타인의 시선이나 단죄는 원래부터 두렵지 않았다. 그런데 부끄러움은 심했다. 단지 그것 때문에 죽이게 된 사람도 있다. - 나 같은 인간이 더 위험하지.


- 147~148p.

눈을 뜨기가 어렵다. 지금이 몇 시인지, 아침인지 저녁인지도 도통 가늠할 수가 없다.

사람들이 하는 말을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다.

(중략)

미지근한 물속을 둥둥 부유하고 있다. 고요하고 안온하다. 내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공(空) 속으로 미풍이 불어온다. 나는 거기에서 한없이 헤엄을 친다. 아무리 헤엄을 쳐도 이곳을 벗어날 수가 없다. 소리도 진동도 없는 이 세계가 점점 작아진다. 한없이 작아진다. 그리하여 하나의 점이 된다. 우주의 먼지가 된다. 아니, 그것조차 사라진다.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문학동네, 2013


살인자의 기억법
국내도서
저자 : 김영하(Young Ha Kim)
출판 : 문학동네 2013.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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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 얼마 전부터 출퇴근 시간에 차 안에서 '책 읽는 시간'을 듣고 있다. 출근길 운전 중에 무료함을 없애보겠다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김영하 작가의 팬이 되고 말았다. 몇 에피소드에서는 작가 본인의 소설을 직접 읽어주기도 하는데, 작가의 호흡으로 읽어주는 이야기는 몇 배 더 매력이 가미되기에 해당 에피소드는 나도 모르게 여러 번 반복해서 듣곤 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본인의 소설을 단 한 권 밖에 읽을 시간이 없다면, 어떤 책을 추천하겠냐고 물어온다면 그는 주저 없이 "검은 꽃"이라는 소설을 고를 것이라고 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작가로서 잘 살아갈 수 있을지 이런 문제들에 대해 고민을 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이 소설을 쓰면서 작가로서 평생을 살아갈 수 있겠구나라고 확고하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모험이었으나 과테말라와 멕시코에 머물며 취재를 하며 소설의 첫부분을 썼고, 한국에 돌아와서 나머지 부분을 완성했다. 서울에서 뒷부분을 쓸 무렵에는 격렬한 깊은 감정의 격동을 작가로서 처음 경험해보았다는 고백을 담담히 털어놓는다. 작가가 읽어주는 이 소설의 첫 부분을 듣고 나니, 이야기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1905년 일포드호를 타고 멕시코로 떠난 이들의 이야기. 인물들이 모자이크를 이루며 이야기가 전개되어가는 소설의 형식도 형식이거니와, 개성 강한 각 인물들의 행동과 사건이 손에 잡히는 것처럼 흥미롭게 묘사되어 지루할 틈이 없었다. 열녀문을 가문의 자랑으로 여기던 한 세기 전, 여성의 권리라고는 발설할 수조차 없던 그 시절에 나를 위한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던 여인, 왕족의 딸 이연수. 여러 인물들 가운데서도 연수와 소년 이정의 이야기는 세대를 뛰어넘는 절절한 로맨스로 읽는 내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작가는 소설을 써나갈 무렵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책상으로 달려가 다음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했는데, 십수 년이 지난 지금 독자인 나는 책의 다음 페이지를 빨리 읽고 싶어 안달을 하고 있으니, 분명 '먼 곳으로 떠나 종적 없이 사라져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무언가를 홀리는 매력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 본문 중에서


 # 14  - 55p.


사간동의 집에서 이연수는 자기 몸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몸은 그저 거기 있었고 그녀는 그것을 사용할 뿐이었다. 그녀의 관심은 오히려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것에 가 있었다. 나는 어디에서 왔고 무엇을 위해 살며 어떻게 죽을 것인가. 그녀의 부모는 그녀가 조상에게서 왔으면 아비와 남편을 위해 살다 그 명이 다하는 순간 혼백이 된다고 가르쳤다. 모든 사대부가 여자들이 배우고 납득하는 것을 그녀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부모의 뼈와 살로부터 자신이 비롯되었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생각이 달랐다. 너무 위험한 생각이었으므로 차마 발설하지 못한 그녀의 내심은,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산다, 는 것이었다. 남편이 죽으면 자살을 강요받고 그 죽음의 대가로 와에게서 열녀문을 하사받던 시절은 이제 지나갔지만 그렇다고 누구도 여자가 저 자신을 위해 살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안 될 것은 무어냐. 배우고 익히는 즐거움에 남녀가 따로 있으랴. 비록 얌전히 앉아 십장생을 수놓고 있었지만 열여섯 소녀의 머릿속엔 시대가 용납하기 어려운 위험한 사고가 자라나고 있었다. 구체적인 실현 방도가 없었기에 그녀의 의지는 더욱 강렬해졌고, 그러느라 이연수는 상대적으로 제 몸의 변화에는 애써 눈을 감았다. 달거리가 시작되고 수유가 가능할 정도로 가슴이 나오고 얼굴의 젖살이 빠져나가는데도 그럴수록 그녀는 관념적인 문제에 매달렸다.



 # 42  - 167-68p.


이종도는 말했다. 폐하께 편지를 쓰는 중이다. 여러분이 이 땅에서 흘린 피눈물을 두 눈으로 보아 잘 알고 있다. 이 멕시코에도 분명 우편제도가 있을 터이다. 누가 메리다까지만 나가 이것을 부치기만 한다면 폐하께서 곧 방도를 마련하실 것이다. 개 돼지도 이보다는 나은 대접을 받으리라. 이종도의 말에, 지난 석 달, 아니 배를 탔을 때부터 계산하면 거의 반년간의 고통이 떠올라 몇몇은 벌써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한 명이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쭈볏거리며 이종도 곁에 서 있는 진우에게 건네주었다. 우리를 위한 일이니 사양치 말고 보태 쓰시게. 그러자 사람들이 너도나도 돈을 내놓았다. 집으로 돌아가 쌀을 퍼온 사람도 있었다. 진우는 그것을 정중히 사양했다. 이종도는 안으로 들어가 다시 궤짝 앞에 앉았다. 처음으로 글을 배운 보람을 느꼈다. 어려서부터 단 한 번도 글을 읽고 쓰는 일의 소박한 즐거움을 느낀 바 없는 이종도였다. 그것은 언제나 의무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이종도의 머릿속으로 까맣게 잊고 있었던 수많은 글귀들이 개미떼처럼 몰려들었다.


아버지, 다시 돌아가면 우리 모두 일본으로 끌려가 비참하게 죽게 되리라 하셨잖습니까? 이종도는 담담하게 말했다. 여기보다야 못하겠느냐. 설마 네 손바닥이 톱날처럼 갈라지도록 일을 시키기야 하겠느냐. 애비가 잘못 생각했다.



 # 59  - 239p.


이보시오. 농장에서 얻은 자식은 그 농장주의 것이오. 그 여자가 누구의 것이오? 농장주인 내 것이오. 그런데 그 여자가 애를 낳았소. 그럼 그건 누구의 것이오? 방화중이 말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이는 아버지의 것으로 간주됩니다. 메넴이 시가에 불을 붙였다. 여기는 당신네 나라가 아니오. 그리고 그가 정말 그 아이의 아버지라는 것을 과연 당신들이 증명할 수 있겠소? 왜 세상의 모든 나라에서 아이에게 아버지의 성을 붙여주는 줄 아시오? 그래야 아버지들이 제 자식이라고 믿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키워주기 때문이오. 다시 말해 성은 아버지들의 불신에 대한 사회적 대가라는 거요.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오? 남자들은 열 달 전에 저지른 어떤 일의 결과로 아이가 나온다는 것을 아직까지도, 20세기가 밝아왔는데도 여전히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단 말이오. 오직 확실한 것은 어미가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뿐이오. 멕시코의 아시엔다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불확실하고 불분명하고 심지어 불필요하오. 메리다로 돌아가 물어보시오. 법률도 나의 편이오. 법은 애매한 것을 좋아하지 않소.


메넴은 제 나름의 고급한 유머로 불청객들을 격퇴한 것에 대해 기분이 좋아졌다. 반면 메리다로 돌아온 한인들과 변호사는 그 문제에 관한 한 농장주들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멕시코와 유카탄의 법률은 메넴의 주장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모든 법률가가 농장주인 곳에선 송사를 벌여봐야 희망이 없었다.



 # 72  - 272p.


시간이 흘렀다. 아주 오래 전에 잊어버린, 그 격심한 고통과 환각이 그를 찾아왔다. 형체 없는 어둠이 말했다. 나는 너를 대신하여 죽은 자다. 최선길은 손을 저었다. 아니야, 누가 누구를 대신하여 죽는단 말이야. 도대체 당신은 누구야? 누구냔 말이야?  형체는 최선길의 목을 졸랐다. 나는 네가 죽인 자들의 예수다. 최선길은 발버둥을 쳤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소? 그들은 죽일 만하니까 죽였소. 그리고 내가 그들을 죽이기 전부터, 저 일포드 호에서부터 당신은 내 목을 졸랐소. 아, 제발 그 손 좀 치우시오. 숨막혀 죽겠소. 형체는 말했다. 나의 시간은 너의 시간과 다르다. 죄는 먼저와 나중이 없다. 죄를 모르는 것이 바로 너의 죄다.


그는 눈을 떴다. 어느새 광장이었다. 어깻죽지가 뽑힐 듯이 아파왔다. 발등은 누군가 인두로 지지는 것 같았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놀라워라. 그는 공중에 떠 있었다. 벌써 죽은 것일까? 그러나 아니었다. 아래쪽에서 사람들이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옆을 보니 이그나시오 벨라스케스가 십자가에 묶인 채 광장 바닥에 누워 있었다. 대머리 사내가 히죽거리며 망치로 벨라스케스의 손바닥에 못을 박고 있었다. 그제서야 최선길은 왜 어깻죽지가 이토록 아픈지를 알았다. 그는 양팔을 벌린 채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다. 중력 때문에 몸은 자꾸 아래로 처져내렸다. 손바닥에서 흘러내린 피가 겨드랑이를 적셨다. 대못에 관통당한 발등은 그악스런 다족류가 파고들어 먹어치우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팠다. 최선길은 다급히 외쳤다. 이것들 보시오. 나는 예수도 믿지 않고 멕시코 사람도 아닙니다. 나는 조선인입니다. 나는 구경꾼이오. 살려주시오. 제발! 한 사람이 다가와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분명히 말했다. 너는 우리를 때리고 강간하고 죽였다. 너는 죽어야 한다. 땀이 눈으로 흘러들었다. 최선길은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부에나비스타 농장의 마야인 노동자였다.



 # 77  - 306p.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쩌면 우리 모두 당장 내일 죽을 수도 있어. 왜놈이나 되놈으로 죽고 싶은 사람 있어?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아. 이정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차라리 무국적은 어때? 돌석이 말했다. 이정은 고개를 저었다. 죽은 자는 무국적을 선택할 수 없어. 우리는 모두 어떤 국가의 국민으로 죽는 거야. 그러니 우리만의 나라가 필요해. 우리가 만든 나라의 국민으로 죽을 수는 없다 해도 적어도 일본인이나 중국인으로 죽지 않을 수는 있어. 무국적이 되려고 해도 나라가 필요한 거라구.

이정의 논리는 어려웠다. 그들을 설득한 건 논리가 아니라 열정이었다. 그리고 그 열정은 기묘한 것이었다. 그것은 무엇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되지 않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 달 후, 이들은 신전 광장에 띠깔 역사상 가장 작은 나라를 세웠다. 국호는 신대한이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국호는 대한과 조선뿐이었으므로 별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 작가의 말  - 354-355p.


나는 내 소설 속의 인물들이 거쳐갔음직한 곳을 일일이 훑고 바로 그곳에서 먹고 자며 천천히 전진했다. 멕시코시티에서 유카탄 반도로, 유카탄 반도에서 띠깔로 이동했다. 마지막으로 과테말라 남부의 안티구아란 도시에 머물며 소설의 상당 부분을 썼다. 과테말라의 관광 캐치프레이즈는 “영원한 봄의 나라(The Land of Eternal Spring)”다. 북부의 밀림과는 달리 남부의 고원지대엔 정말 일 년 내내 봄날씨가 계속된다. 그래서 시간이 전혀 흐르지 않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땐 못 견디게 지루했는데 어쩌면 이런 소설을 쓰기엔 적합한 도시였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곳에서 매일 일정량의 소설을, 마치 전국대회를 준비하는 고등학교 육상 선수처럼 꾸준히 썼다.

서울에 돌아와 스타벅스에 들렀더니 안티구아 커피원두를 팔고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안티구아엔 스타벅스가 없는데 스타벅스엔 안티구아가 있었다. 스타벅스는 과테말라의 플랜테이션에서 마야인들을 고용해 커피를 길러 그것을 서울 광화문에서 팔고 있었다. 이 세상은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아주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 글을 쓰기 바로 직전에 소설의 제목을 정했다. 그러고 나니 갑자기 우울했다. 어떤 것도 돌이킬 수 없게 되었고 이 모든 과정이 비로소 끝난 것이다. 이제 다음 소설을 생각해야한다.



<검은 꽃>
김영하
문학동네, 2003

검은 꽃 - 2004년 제35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국내도서
저자 : 김영하(Young Ha Kim)
출판 : 문학동네 2003.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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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평범한 이름 '김지영'. 작가는 평범한 여성의 삶을 대변하려고 가장 평범한 이름을 골랐는지도 모르겠다. 김지영씨의 딸 지원이보다 다섯 살 많은 딸이 있다는 작가의 글을 읽고 팬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 사회에서 여자로 살아간다는 일은 녹록지 않다는 것을 과격하지 않고 세련되게 표현한 조남주 작가. 태어날 때부터 30대 중반이 된 지금 이 순간까지 수도 없는 불합리와 편견에 감정을 소모하게 되는 주인공 김지영. 그녀는 출구가 없는 거대한 미로 속에서도 징징거리지도 않고, 매번 내뱉고 싶은 말을 삼키며 담담하게 상황을 모면한다.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는 여사우의 복지를 위해 어린이집도 운영하고, 모성보호 제도를 운용하고, 대부분의 여직원들이 육아휴직을 꽉 채우고 돌아온다. 비교적 남녀가 평등한 회사에서 나는 차별받지 않는 터울 안에서 지낸다고 생각하다가도, 더듬어 생각해보면 여자는 사회의 여러 가지 제도, 회사의 복지제도 등 법적인 테두리, 보호의 테두리를 만들지 않으면 남자와 동등한 사회생활은 꿈도 못 꾸는 사회에 살고 있으니... 역시 평등을 논하기에는 아직 아쉬운 점이 많다.


결혼을 포기하고, 육아를 포기하고 점점 많은 것들을 포기하는 여성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는 요즘. 아직도 가정 내에서 잃는 것은 오롯이 여자의 몫이어야 하는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이 서글프기만 하다.




# 1995년~2000년


- 61p.

"따뜻한 거 많이 먹어야 한다. 옷도 따뜻하게 입고."

아버지께 꽃다발을 받았다는 친구도 있었고, 가족들과 케이크를 자르며 파티를 열었다는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에게는 엄마, 언니, 여동생과만 공유하는 비밀일 뿐이다. 귀찮고 아프고 왠지 부끄러운 비밀. 김지영 씨네 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머니는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직접 언급을 피하며 라면 국물만 떠주었다.

그날 밤 불편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언니의 옆에 누워 김지영 씨는 자신에게 벌어진 일들을 차분히 되짚어 봤다. 월경과 라면에 대해 생각했다. 라면과 아들에 대해, 아들과 딸에 대해, 아들과 딸과 집안일에 대해 생각했다.



- 109p.

몇 번의 시도 끝에 얼핏 육각형 모양이 살아 있는 커다란 눈송이가 남자 친구의 검지 끝에 살며시 앉았고, 김지영 씨는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물었다.

"너 회사 잘 다니게 해 달라고. 덜 힘들고, 덜 속상하고, 덜 지치면서, 사회생활 잘하고, 무사히 월급 받아서 나 맛있는 거 많이 사 달라고."

김지영 씨는 가슴속에 눈송이들이 성기게 가득 들어차는 느낌이었다. 충만한데 헛헛하고 포근한데 서늘하다. 남자 친구의 말처럼 덜 힘들고, 덜 속상하고, 덜 지치면서, 어머니의 말처럼 막 나대면서 잘 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 123p.

대표는 업무 강도와 특성상 일과 결혼 생활, 특히 육아를 병행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여직원들을 오래갈 동료로 여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원 복지에 힘쓸 계획은 없다. 못 버틸 직원이 버틸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보다, 버틸 직원을 더 키우는 거시 효율적이라는 게 대표의 판단이다. 그동안 김지영 씨와 강혜수 씨에게 까다로운 클라이언트를 맡긴 것도 같은 이유였다. 두 사람을 더 신뢰해서가 아니라, 오래 남아 할 일이 많은 남자들에게 굳이 힘들고 진 빠지는 일을 시키지 않은 것이다.

김지영 씨는 미로 한가운데 선 기분이었다. 성실하고 차분하게 출구를 찾고 있는데 애초부터 출구가 없었다고 한다. 망연히 주저앉으니 더 노력해야 한다고, 안 되면 벽이라도 뚫어야 한다고 한다.




# 우리 모두의 김지영, 김고연주 - 183~184p.


김지영의 삶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눈에 밟히는 장면들이 반복된다. 목소리를 삼키는 모습이다.


선배는 평소와 똑같이 다정하고 차분히 물었다. 껌이 무슨 잠을 자겠어요, 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김지영 씨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 94p.


영업 중인 빈 택시 잡아 돈 내고 타면서 고마워하기라도 하라는 건가. 배려라고 생각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무례를 저지르는 사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항의를 해야 할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고, 괜한 말싸움을 하기도 싫어 김지영 씨는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 100~101p.


주량을 넘어섰다고, 귀갓길이 위험하다고, 이제 그만 마시겠다고 해도 여기 이렇게 남자가 많은데 뭐가 걱정이냐고 반문했다. 니들이 제일 걱정이거든. 김지영 씨는 대답을 속으로 삼키며 눈치껏 빈 컵과 냉면 그릇에 술을 쏟아 버렸다. - 116p.


조금도 서운하지 않았다. 견딜 수 없는 것은 오히려 그 순간들이었다. 김지영 씨는 충분히 건강하다고, 약 같은 것은 필요 없다고, 가족 계획은 처음 보는 친척들이 아니라 남편과 둘이 하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니에요, 괜찮아요, 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 133~134p.


그럼 너두 계속 구역질하고, 제대로 먹지도 싸지도 못하면서, 피곤하고, 졸립고, 여기저기 아픈 상태로 지내든지, 겉으로 말하지는 못했다. - 138p.


김지영 씨는 나도 당당하고, 먹고 싶은 음식 다 잘 먹고 있다고, 그런 건 아이의 성별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왠지 열등감으로 보일 분위기라 그만두었다. - 142p.




<82년생 김지영>

조남주 장편소설

민음사, 2016


82년생 김지영
국내도서
저자 : 조남주
출판 : 민음사 2016.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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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다닌다 하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한 번쯤은 도전해보고자 꿈꾸는 백두대간 종주. 『하얀 능선에 서면』은 종주 1세대라 불리는 여성 산악인 남난희 씨의 종주 등반기를 담은 이야기다. 책의 말미에는 등반 보고서의 형태로 식량, 운행, 대원 등에 대한 기록들이 남겨져 있으며, 본문의 내용은 70여 일이 넘는 기간 동안 홀로 종주를 이어가던 저자의 일기 형태로 채워져있다.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던 1984년. 여자 혼자의 몸으로 동계 종주를 이어가던 그녀가 산에서 홀로 느끼는 감정의 기복은 실존적이고, 감정이입하지 않을 수 없이 생동감이 전해진다.


이제 산에 다닌 지 일이년 남짓 된 병아리 주제에 '나는 산에 왜 가는가?'라는 겸연쩍은 질문도 스스로에게 던져보고, 힘든 산행을 할 때면 어김없이 '오늘, 산에 왜 왔지?'라는 답없는 질문도 던져보곤 했다. 누가 부추기지도 않았고 부득불 혼자 결정해서 다니는 산행인데 누구 탓이라도 하고픈 알 수 없는 심리. 설산에서 홀로 잠들며 외로움과 사투를 벌이는 저자의 산행기에서 내 '알 수 없는 심리'와 비슷한 동질감마저 느껴졌다. 


그녀가 종주를 했던 당시에는 태백산맥이라는 개념으로 부산의 금정산에서 진부령까지의 코스를 등반했으며, 이는 현재의 백두대간 종주 코스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태백산맥이라는 용어는 1903년 일본인 지질학자 고토분지로가 발표한 '조선산악론(朝鮮山嶽論)'에서 처음 생겨났으며 우리나라 전통적인 산줄기는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가장 크고 긴 산줄기를 백두대간이라 칭한다. (아래 개념도 참조)


(출처: 데일리안)


지리산권 (7개코스,142,2km)

천왕봉→장터목산장→촛대봉→세석산장(8,1km)→선비샘→벽소령→연하천산장→총각샘→토끼샘(1,2km)→뱀사골산장→

임걸령→노고단→고리봉→헬기장(23,6km)→만복대→정령치→수정봉→임망치(24,9km)→여원재→고남산→상사바위→

매요마을(21,2km)→이실재→새맥이재→시리봉→복성이뒤재→꼬부랑재(21,4km)→봉화산→월경산→중고개재(21,8km)

 

덕유산권(8개코스 219,4km)

중고개재→백운산→육십령(28,4km)육십령→바위지대→서봉→남덕유산→삿갓봉→삿갓골재(20,5km)→두룡산→동엽령→

중봉→헬기장→빼재(35,5km)→삼봉산→초점산→대덕산→쑥병이(30,6km)→삼도봉(13,7km)→질매재→바람재(29,2km)→

비로봉→ 여시골산→궤방령→모리골→가성산→눌의산→당마루(29,2km)→사기점→갈현고개→국수봉→큰재(32,3km)

 

속리산권(8개코스 185,1km)

큰재→백학산→선유골→지기재(33,3km)→신의터고개→화령산→봉황산(33,3km)→비재→828고지(3,1km)→형제봉→

속리산 천황봉→문장재→눌재(27,3km)→청화산→조항산→고모치(13,8km)→대야산→분란치재→장성보→헬기장(24,9km)→

은치재→구왕봉→희양산→시루봉→이만봉→981고지(21,8km)→백화산→황악산→조봉→이화령(18,1km)

 

소백산권(7개코스 196,7km)

이화령→조령산→마패봉→조령3관문→부봉→하늘재(30,1km)→포함산→대미산(24,9km)→황장봉→벌재→저수재(28,8km)→

배재→싸리재→뱀재→묘적령→도솔봉→죽령(37,1km)→연화봉→소백산(비로봉)→국망봉→상월산→1272고지(27,7km)→

마당치→고치령→미내리→ 마구령(27,1km)→마구령→늦은목이→석달산→박달령(21,0km)

 

태백산권(8개코스 181,6km)

박달령→옥돌봉→도래기재(11,3km)→구룡산→고부령→장바위(26,5km)→태백산→화방재→함백→1233,1고지(26,8km)→

매봉산→피재→한의령→ 새맥이(32,7km)→덕향산→큰재→댓재(20,5km)→두타산→청옥산→고적대(24,0km)→이기령→

상월산→987.2고지(21,2km)

 

오대산권(6개코스 133,0km)

987.2고지→백봉령→지병산→생계령(22,3km)→석병산→두리봉→삽당령(22,5km)→석두봉→화란→닭목재(23,8km)→

고루포기산→능경목→대관령(22,3km)→대관령→선자령→곤신봉→매봉(20,9km)→소황벽산→노인봉→진고개(21,2km)

 

설악산권(8개코스 181,1km)

진고개→동대산→두로봉(14,9km)→신배령→만월봉→음복산→약수산→구룡령(25,8km)→갈전곡→쇠나드리(32,3km)→

조침령→북암령→단목령→4거리(24,2km)→점봉산→망대암산→한계령→샘터(25km)→끝청→대청봉→희운각→산장→

마등령(21,6km) →저항령→미시령(14,4km)→삼봉→신선봉→마산→진부령(23,4km)→향로봉(거리포함안됨)

 

計: 도상거리 672km, 실제거리 1,240km, 총구간 52개코스 (코스 출처: 산림청)





# 글쓴이의 말 - 9~10p.


6년이 지난 지금, 나의 심정은 다시는 그 같은 등반을 하지 않을 생각이다. 단지 태백산맥의 나머지 구간을 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그것은 제외된다. 그때는 이번 산행을 경험했으니까 좀더 여유있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좀더 유연하게, 어쩌면 즐기는 산행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장기 종주등반을 어떻게 해야 된다는 것을 직접 체험으로 겪었으니까...... 마음의 여유만 잃지 않는다면, 즐거움도 없지 않으리라.

만약 그때도 단독 등반을 해야 된다면 철저히 혼자이고자 한다. 지원대는 내게 모든 희망이기도 했지만 부담이기도 했다. 직접하는 행위와 서포트하는 행위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리고 지원대는 아무 보상없이 계속 베풀어야만 하니까 그것도 많은 부담이 되었으리라.

하지만 나는 다시는 혼자 길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우리는 더불어 살아야 한다. 서로 미워하고 증오까지 하더라도 혼자보다는 둘이 낫다.



# 궁하면 통한다 


- 42p.

나는 벅차기만 했다. 가슴은 자꾸 주체할 수 없이 울렁대고, 설레이고, 자랑하고 싶고, 응석 부리고 싶고, 웃고 싶고, 눈이 마주치고 싶고, 모든 것을 사랑하고 싶어졌다. 진심으로 누구에겐가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어린애가 따로 없다는 표정으로 나의 투정을 다 받아주니 고마울 뿐이었다. 오랜만에 텐트는 두 동이 쳐졌고 밥 냄새가 났고 모닥불도 피웠다.


- 44p.

난 무엇을 힘들어 하는 걸까? 행위 그 자체일까? 아니면 혼자 지내야 하는 시간 때문일까? 어쩌면 두 가지 다 해당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 총각은 군에 갔다 왔는가 - 49p.

 

난 항상 그래왔듯이 헤어지는 걸 못하는 편이다. 하고 싶은 말도 많고, 고맙고, 수고했다는 둥 그리고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등등의 말을 해야 되는데, 난 가슴에만 그 말을 남긴 채 그냥 돌아서고 말았다.



# 점아 점아 콩점아 - 90~91p.


뽀얀 안개 위로 두둥실 떠있는 산은 꼭 구름 같았다. 난 저 구름을 타고 하늘로라도 올라갈까, 산은 움직인다. 조용히, 굽이굽이 이어진 이 산들 나 혼자 눈으로 나 혼자 마음으로 간직하기에는 너무 벅차다. 누구 나눠줄 사람 없을까? 누구 함께 할 사람은 없을까? 누구라도 좋다. 다만 벅찬 가슴을 나눠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살아서 숨쉬는 산, 아침 저녁으로 표정이 변해 있는 산.

두고개라는 곳에 표지판이 있었다. 그래도 주왕산 국립공원이라고 표지판이 만들어져 있었다. '내원동 2킬로미터, 기사동 2킬로미터' 나와는 전혀 무관한 이정표, 그래도 이정표가 있으니 등산하는 기분이 들었다.

길은 비교적 잘 나있고 잡목과의 싸움이 없으니 생각이 많아졌다. 옛날 생각, 지원조와 만날 생각, 갑자기 외로움 하나가 예리한 칼날이 되어와 온몸 안을 오르내렸다. 머리에서 발가락까지, 손가락과 머리카락 한올 한올에도 이 고독 속에 자신이 꺼져버리는 것은 아닌가 불안했다.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꼼짝할 수도 없었다.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며 나는 스르르 무너져버림을 느꼈다. 울어볼까? 소리쳐 볼까? 하지만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고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내 국토를 알겠다고? 맥을 찾겠다고? 아무것도 아니다. 난 내 육신을 학대해서 무엇을 얻고자 하나? 무얼 버리려 하나?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 사람사는 세상을 홀로 그리며 - 113~114p.


산짐승 소리 하나 없는 밤은 너무나 고요해서 오히려 불안했다. 혼자라는 것이 때로는 좋기도 했지만 별로 좋지 않기도 했다. 항상 긴장해야만 하고, 그 대상이 무엇이든 항상 불안하고, 무엇이든 혼자 결정해야만 하고, 혼자 걷고, 혼자 생활하고, 나름대로 익숙해지는 일도 있고, 나름대로 잊혀져가는 일도 있었다.

편한 대로 간단히 해결하는 자질구레한 일도 있었고, 세수나 양치질 같은 것은 생략해도 탓할 사람없는 산생활은 편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 혼자의 담은 높아만 갔다. 나름대로 꼭 해야 할 일, 지켜야 될 것들은 철저히 지키고자 했다.

혼자의 담은 세상의 어떤 남보다 더 견고할지도 모른다.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견고한 담, 그 담이 무너지지 않게 난 또 아집을 부릴 수밖에 없다. 나는 내 자신에게 너무 인색했다. 자신에게 항상 긴장해 있을 것을 요구하며 완벽하고자 하며 남에게 뒤지기 싫어하며 무엇보다도 자신을 너무 학대하는 버릇이 있다.

산행도 은밀히 따지고 보면 자신을 학대하는 것이다. 어쩌다가 즐기는 산이 아닌, 이미 목적이 있고 그 목적에 따르자면 무리가 있기 마련인데 그 무리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산을 다닐 것인가? 어쩌면 나의 이번 등반이 끝나면 산을 그만 다니게 될지도 모르겠다.





# 태백을 먹고 사는 사람들 - 148p.


바라보며 시를 읊고, 술을 마시고, 경치를 즐기는 산.

하지만 세월은 흘러 오르는 산으로 탈바꿈했다. 인간은 항상 어딘가에 올라가고 싶어했고 정상에 자신이 존재하기를 원했다. 산은 인간의 위로 올라가고자 하는 욕망을 다 알기라도 하듯 자신의 정상을 공개하려 들었다.

산사람이 산을 올라가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미 그 산에 들면 그 산은 보이지 않았다. 아주 일부 이외에는 자신을 내보이지 않는다. 인간이 너무 작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라보는 산, 정말로 술이라도 한 잔 마셔가며 저 멋진 산을 보며 시라도 쓰고, 바라보는 산으로 만족하고 싶다. 나는 언제나 이 산에서 벗어날 수 있으려나.



# 태백산맥 2천리 - 176p.


산은 나를 마음껏 농락하고 있었다. 내 의지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철저히 자기방식대로 나를 부리고 있었다. 내가 벗어나고자 하면 할수록 산은 올가미를 죄어왔다.

내가 하는 행동은 하나의 몸부림일 뿐이었다. 처절한 몸부림. 산은 인간의 뜻과 의식은 아랑곳없이 나를 시험하려 들었다. 산의 질서를 교란시키려는 인간은 용서하려 들지 않았다. 산은 초연했다. 산은 완고했으며 웅장했다. 산은 모든 것을 지배하고자 했다. 산은 또 ---



# 이제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 200p.


누구에게라도 시비를 걸고 싶어졌다. 누구라도 좋았다. 싸우고 싶었다. 흠씬 두들겨 맞았으면 차라리 좋겠다. 무엇이라도 원망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좋아 시작한 일이니 누구를 두고 원망한단 말인가? 다시는 이런 무모한 짓을 하지 않겠다며 다시 일어 섰다.

하루 종일 눈에서 허우적대기만 했더니 지친 것은 고사하고 까진 발이 몹시 쓰려왔다. 눈은 많이도 오지 않았고 사각사각 내 옷깃만 스칠 뿐이었다. 경쾌한 리듬이었다. 눈이 무슨 얘긴가를 열심히 하는 듯했다. 이런 날은 따뜻한 아랫목에서 낮잠을 자면 얼마나 달콤할까? 온 산에 핀 설화가 아름답게 보이는 여유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감탄사를 모르는 사람처럼, 감격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모든 감정은 얼어붙고 메말라가고, 영혼이 달아난 사람처럼 무감각 상태인 자신이 불쌍했다.

오직 걷는 노예가 되어, 짐의 노예가 되어, 산의 노예가 되어 걷기만 할 뿐이었다. 전에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했는지 까마득했고 그 흔한 유행가 한 구절 못 주절대며 오늘도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 하얀 능선에 서면 


- 237p.

바람이 불었다. 첩첩산중에서 혼자 기진한 채 배낭도 내리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산은 무엇인가? 산은 내게 무엇인가? 등산이 건강에 좋다고 했는가. 마음이 넓어진다고, 순수한 스포츠라고, 누가 그렇게 호화로운 수식어를 썼는가?

정신, 육체, 고통, 비교? 어림없는 소리, 너무 편해서 하는 소리, 이것은 그 자체가 고통이다. 고문이다. 지옥이다. 죽음이다. 나는 차라리 전쟁터에 나가겠다. 지옥에 가겠다. "아아, 하느님, 부처님, 산신령님, 나 좀 도와주십시오. 내게 힘을...... 차라리 울 수 잇는 용기를 주십시오."

나는 왜 헤어나지 못하는가? 왜 이런 고통을 혼자서 고스란히 감당해야만 하는가? 난 힘이 없다. 꼼짝할 수 없었다. 산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꼼짝없이 산의 노예가 되었다. 내 의지대로는 한 발걸음도 용납하려 들지 않았다. '나를 용서해 주세요. 겸손할께요.'

날이 저물었다. 또 집을 지었다. 나는 쓰러지듯이 텐트 안으로 넘어졌다. 비로소 운다. 뜨겁게 뜨겁게 --- 또 눈이 온다. 걱정할 기력도 없다.


- 242p.

점봉산에서 바라본 설악은 정말 좋았다. 생각만 해도 가슴 두근거리는 산, 설악은 많은 것을 안고 있다. 공룡능선을, 가야동계곡을, 용아장성을, 옥녀봉을, 천화대를, 범봉을, 잦은바윗골을, 칠형제능선을, 석주길을, 설악골을, 울산암을, 나한봉을, 12선녀탕을, 귀때기청봉을, 에델바이스를, 오세암 전설을, 백담사를, 백운동계곡을, 선녀봉을, 화채릉을, 대청봉을, 토왕폭을, 눈을, 바람을, 구름을, 아아, 젊은 산쟁이의 한을...... 눈을 감으면 손에 잡힐 듯한 설악의 모든 것이다.





<하얀 능선에 서면>

남난희

수문출판사, 1990


하얀 능선에 서면
국내도서
저자 : 남난희
출판 : 수문출판사 2001.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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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랭클링라에 자리 잡은 12,000.15m의 럼두들 세계 초등에 도전하는 등반기를 다룬 코믹 소설이다. 요기스탄이란 나라에 자리 잡은 M자를 거꾸로 놓은 듯한 산맥의 두 봉우리 럼두들(12,000.15m)과 노스 두들(10,500m). 이 두 봉우리를 혼동한 나머지 다른 봉우리에 잘못 오르고, 크레바스에 빠지기를 수차례, 늘 포터들 덕분에 위기를 모면한다. 결국 럼두들 등정에 성공하지만 포터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등반이다. 


등장인물의 이름은 인물들의 코믹한 성격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친절하지만 눈치 없는 등반대장 바인더. 늘 길을 헤매는 길잡이 정글. 필름을 햇빛에 모두 노출시켜 사진은 모두 잃고, 렌즈는 모두 깨뜨려 촬영을 멈춘 촬영 담당 셧. 153과 워튼즈워플에 집착하는 소망(wish)인지 진실(truth)인지 매사 구분이 모호한 과학자 위시. 물개 트래버스와의 웃지 못할 애정 스토리를 가진 포터 담당 콘스턴트. 그리고 갖은 병치레를 다하는 팀닥터 프로운.


히말라야를 찾는 이들, 특히 에베레스트를 등반한 원정대들이 등반 성공 후 한 잔 걸치는 곳으로 유명하다는 카트만두, 타멜 거리의 럼두들 바(Rum doodle Bar). 다음에 네팔을 찾으면 꼭 들러야겠다.




#1. 팀 - 19p.


럼두들 등반대원들은 다음과 같다.


영국 육군 병참단 소령인 벌리. 보급담당. 수많은 산에서 보여준 엄청난 인내심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힘이 장사라서 선발된 인물. 꽤 높은 산에 오른 경험 있음. 휴가를 맞아 알프스에 올랐다가 우리와 합류하기 위해 하산했다.

우리 등반대의 과학자인 크리스토퍼 위시. 암벽등반 능력이 뛰어남. 좀 높은 산에 오른 경험 있음. 안데스 산맥에 첫 등정해서 성공한 뒤 막 돌아왔다.

사진촬영 담당인 도널드 . 빙벽 타기 솜씨가 뛰어남. 보통 정도의 높은 산들을 오른 경험이 있음. 최근에 로키 산맥에서 돌아왔다.

무선 전문가이자 등반길 안내자인 험프리 정글. 그럭저럭 높다고 할만한 산들을 오른 경험 있음. 코카서스 산맥을 등반하다 연락을 받고 돌아왔다.

외교관이자 언어학자인 랜슬럿 콘스턴트. 포터 관리 담당. 특히 사교 수완과 인간관계가 좋은 점 때문에 선발되었음. 앞으로 높은 산들을 오를 것으로 기대됨. 아틀라스 산맥을 등정한 뒤 막 돌아왔다.

등반대 주치의이자 산소 전문가인 리들리 프로운. 아주 높은 산들을 오른 경험 있음. 히말라야에 올랐다가 우리 등반대의 출발 시한에 맞춰 가까스로 돌아왔다.



#3. 랭클링라로 출발 - 43p.


20일째 되던 날, 한 심부름꾼이 달려와 다음과 같은 소식을 전했다.

" 산적들에게 붙잡혔음. 몸값으로 5천만 보히를 보내주기 바람, 정글. "

30일째 되던 날, 또 다른 심부름꾼이 달려오더니 다시 소식을 전했다.

" 반복함. 산적들에게 붙잡혔음. 5천만 보히를 보내주기 바람, 정글. "


우리는 첫 번째 심부름꾼이 돈을 갖고 튀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한참 심사숙고한 끝에 이 지역 사람들의 정직성을 전혀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나는 수두를 앓다가 완전히 회복된 프로운에게 돈을 갖고 심부름꾼을 따라가 달라고 부탁했다.
40일째 되던 날, 정글 혼자 우리한테 와서 산적들이 프로운의 몸값으로 5천만 보히를 요구한다는 뜻을 전했다.
그건 너무 과다한 요구였다. 나는 우리 등반대의 재정능력으로는 더 이상의 그런 요구를 감당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래서 나는 믿을 만한 심부름꾼에게 다음과 같은 소식을 전하게 했다.

" 유감스럽지만 우리는 파산했음. 대사관가 접촉하기 바람. "


#4. 빙하 - 54p.

"저 멍청이가 글쎄 나침반의 걸쇠 푸는 걸 까먹었어요. 그러니 어느 방향으로 가든 나침반은 늘 북쪽을 가리켰죠."
나는 말했다.
"그런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어"
사람은 믿어줄 때 최고의 성과를 보여준다는 사실을 나는 오랜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불신하는 것만큼 사람을 기죽이는 것은 다시없다. 정글로 하여금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드는 것은 훗날 본인에게 미치는 악영향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등반대에게도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내가 남달리 너그러운 사람이기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니다. 너그러움은 리더가 갖추고 있어야 할 필수적인 자질 중 하나다. 세상의 리더들 중에는 그런 자질들을 가진 사람들도 있고 갖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정글이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하지 않으리라 믿고 그 휴식 시간이 끝난 뒤 그를 다시 맨 먼저 내보냈다.
그는 실제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우리가 네 시간 가량 앞으로 나아간 뒤 나는 정글을 제외한 일행 모두가 드넓은 크레바스 가장자리에 모여 있는 광경을 봤다. 정글은 그 안에 들어가 이었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정글의 나침반이 그를 그쪽 방향으로 이끌었으며, 그렇게 해서 그 크레바스를 만나자 그는 의심스러운 방향으로 길게 돌아가느니 차라리 그 밑으로 내려가는 게 더 낫다고 주장했단다. 


#12. 아직 충분히 높지 않다 - 185p.

아무런 장애물도 눈에 띄지 않아 나는 몹시 놀랐다.
우리는 정상에 서 있었다!
이번 등반의 여정에서 나는 두 번째로 내 정신을 의심했다. 럼두들의 높이는 12,000.15미터다. 그런데 내 고도계나 나 자신이 미치지 않은 이상 우리는 현재 10,500미터 지점에 와 있엇다. 이게 어찌 된 영문이지?
그러다 나는 깨달았다. 동쪽 저편으로 거대한 산이, 그 산의 번쩍이는 정상이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내 머리 위로 1,500미터나 우뚝 솟아 있었다.
우리는 다른 산을 오른 것이다.


#15. 럼두들이여, 안녕 - 213~214p.

저물녘의 태양은 지평선 아래로 침몰했다. 우리 주위를 병풍처럼 둘러싼, 수많은 고봉으로 이루어진 황막한 산지는 수많은 음영의 조화로 이루어진 거대한 심포니였다. 그 밑에는 칠흑같이 새까만 강 골짜기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청록빛 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거대한 피라미드처럼 우뚝 선 럼두들 봉만이 마지막 햇살을 받고 있었다. 얼음과 눈밭으로 덮인, 그 깎아지른 듯한 벼랑들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일몰의 빛깔로 붉게 타올랐다.
장엄한 산과 작별하는 수순으로는 아주 제격이었다.





<럼두들 등반기>

W.E. 보우먼 (Wiliam Emest Bowman) 지음, 김훈 옮김

은행나무, 2014


럼두들 등반기
국내도서
저자 : W.E.보우먼 (William Ernest Bowman) / 김훈역
출판 : 은행나무 2014.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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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학교 4주차 "산악 문학"수업. 2시간 반 남짓한 시간이 눈 깜짝할 새 지나갔다. 심산 선생님 소개해주는 산악인과 산서를 따라가다 보니 이내 빠져들었고, 짧은 수업시간이 아쉽기만 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려, 심산 선생님이 추천해주신 산서를 따라 읽기 시작했고, 그 첫 번째는 산서들의 리뷰를 엮어 직접 쓰셨다는 『마운틴 오딧세이』를 찾아 읽었다. 유쾌한 입담만큼이나 과연 달필이었다.


이 책에서 소개한 산서들을 몇 차례나 읽으셨는지 저자의 심리와 소설에서는 주인공의 심리까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눈으로 스무 권이 넘는 산서들과 함께 그 배경 지식들, 그리고 책에 소개된 산악인에 얽힌 이야기들이 종합선물세트처럼 포장된 책이었다. 그야말로 산이 만든 책이었고, 책 마디 마디에서 산을 느낄 수 있었다. 소개된 모든 산서들이 좋은 느낌으로 나에게도 아로새겨졌다. 따라 읽을 산서들이 또 한바닥 늘어났다.




# 이 책에서 소개한 책들


『난다 데비』, John Roskelly(존 로스켈리), 1987

『파미르, 폭풍과 슬픔』 로버트 크레이그/성혜숙, 수문출판사, 1989

『레카피툴라티오』 김성규 장편소설, 미세기, 1995

『꿈속의 알프스』 임덕용, 평화출판사, 1982

『타오르는 산』 오마르 카베싸/황진우, 청년사, 1986

『신들의 트래버스』 봅 랭글리/김일모, 신어림, 1995

『죽음의 지대』 라인홀트 메스너/김영도, 평화출판사, 1985

『내 청춘 산에 걸고』 우에무라 나오미/곽귀훈·김성진, 평화출판사, 1994

『빙벽』 이노우에 야스시 장편소설/김석희, 현대소설사, 1991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 앨버트 머메리/오정환, 수문출판사, 1994

『너에게 이르기 위하여』 장호 산시집, 평화출판사, 1981

『북한산 벼랑』 장호 산시집, 평화출판사, 1987

『별빛과 폭풍설』 가스토 레뷔파/김성진, 평화출판사, 1990

『최초의 8000미터 안나푸르나』 모리스 에르족, 수문출판사, 1997

『자일 파티』 닛타 지로 장편소설/주은경, 일빛, 1993

『하얀 능선에 서면』 남난희, 수문출판사, 1990

『71일 간의 백두대간』 길춘일, 수문출판사, 1996

『영광의 북벽』 정광식, 수문출판사, 1989

『역동의 히말라야』 남선우, 1999

『엄마의 마지막 산 K2』 제임스 발라드/조광희, 눌와, 2000

『8000미터 위와 아래』 헤르만 불/김영도, 수문출판사, 1996

『친구의 자일을 끊어라』 조 심슨/정광식, 산악문화, 1991

『남부군』 이태, 두레, 1988

『K2-죽음을 부르는 산』 김병준, 평화출판사, 1987

『히말라야의 아들』 자크 란츠만/김정란, 세계사, 2000

『오르고, 오르고, 또 오른다』 카이 페르지히·슈테판 글로바츠/유영미, 중앙M&B, 2001

『14번째 하늘에서』 예지 쿠쿠츠카/김영도·김성진, 수문춢ㄴ사, 1993



# 서문 - 6p.


책을 내다 버릴 때 나의 기준은 극히 단순하다. 이 책을 다시 볼 것이냐 말 것이냐다. 제 아무리 세계적 평판을 얻은 저서들일지라도 다시 들춰볼 일이 없다면 한낱 진열품이요 지적 허영심의 표출에 지나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서 두 번 이상 읽을 가치가 없는 책은 내다 버려도 그만이다. 좀 더 잔혹하게 말하자면, 두 번 이상 읽을 가치가 없는 책은 한 번 읽을 가치도 없다. 나의 이 자의적이되 지극히 잔혹한 선별기준을 언제나 만족시켜주는 책은 오직 산서뿐이다.



# 죽음의 지대, 라인홀트 메스너 - 75p.


메스너는 티롤지방에 위치해 있는 커다란 고성(古城)에 산다. 어느 날 잠깐 앞마을에 외출을 갔다가 돌아온 메스너는 자기가 열쇠를 안 갖고 나온 채 문을 걸어 잠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보통사람이라면 당연히 열쇠수리공을 불렀겠지만 그는 세계 최강의 클라이머 메스너다. 그는 이까짓 성벽쯤이야 하는 생각에 맨손으로 클라이밍을 시작했다. 결과는? 성벽 중간쯤에서 얼토당토 않게 슬립을 먹어 떨어지는 바람에 발목에 금이 갔다! 농담이 아니다. 몇 년 전 국내신문의 해외토픽란에 가십처럼 실렸던 실화이다. 인류 최초로 8000m급 14봉을 모두 오르고 살아 돌아온 세계 최강의 클라이머가 자기 집 담을 넘다가 추락했다?



# 빙벽(氷壁), 이노우에 야스시 


- 91~92p.

그 서정성은 도시인의 내면세계 및 정서와 엄격하게 대(對)를 이루며, 그래서 이해받지 못한 자의 고독 혹은 천상천하유아독존을 연상케 하는 절대적 기개를 느끼게 한다. 산과 도시는 너무 다르다. 산악인과 도시인은 서로 다른 인종이다. 이 두 세계 사이에는 결코 화해할 수도 넘어설 수도 없는 벽이 존재한다. 그것이 『빙벽』이다.


- 96p.

고사카는 등산가다. 등산가인 그가 친구와 암벽을 오르면서 자살할 리가 없다. 그것은 산의 신성을 모독하는 행동인 것이다. 등산가는 산을 위해서는 생명을 내던지지만, 속세의 인간관계를 청산하려고 산에서 생명을 끊는 그런 짓은 결코 하지 않는다.



# 알프스에서 파크파스로, 앨버트 머메리 - 101p.


알피니스트들은 다만 '산에 오르기 위해서' 산에 오른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한다면 알피니즘이란 곧 '고도의 위험이 농축되어 있는 유희'이자 '무상의 행위' 인 것이다.



# 자일 파티, 닛타 지로 - 150p.


자일 파티란 무서운 것이다. 두 존재를 맺어주고 있는 자일이란 우정을 넘어서 사랑이고 운명이며 불가사의한 교감이다. 도시코는 그 환청을 듣고 미사코의 죽음을 확신한다. 어렸을 때부터 '울지 않는 아이'로 불리웠던 도시코는 그 순간 넋을 잃고 울음을 터뜨린다. 그녀의 신랑은 도시코를 오해한다. 너무 행복에 겨워 우는 것이겠거니 넘겨짚고는 그녀를 달래려든다. 그러나 남편이 아니라 그 누구라해도 필생의 자일 파티를 떠나보내는 절망과 슬픔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심산의 마운틴 오딧세이>

심산

풀빛, 2002


심산의 마운틴 오딧세이 (산이 만든 책, 책 속에 펼쳐진 산)
국내도서
저자 : 심산
출판 : 풀빛 2002.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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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 산에 가지 못하던 아쉬움을 산악 영화를 보거나 등반기들을 읽으며 대리 만족을 하며 지냈다. 제법 시간이 흘러 다시 등산학교에 왔다. 첫 주차 교육을 마치고, 각기 다른 이유로 등산학교를 찾았지만 같은 조의 인연으로 만난 동기 교육생들과 술 한 잔 기울이며 산 이야기를 나누었다. '왜 등산학교를 찾으셨어요?' 처음이라는 어색함도 잠시, 서로 궁금한 질문들을 쏟아놓고 저마다의 사연을 이야기했다. 지난해 등산학교 히말라야 과정을 다녀온 나의 이야기와 고산 등반 이야기도 안줏거리로 올랐다. 


이야기는 흘러 히말라야에서 찰나의 순간에 고(Go), 백(Back)을 판단해야 하는 상황. 그 판단으로 목숨을 잃을 수도, 천금같이 귀하게 얻은 원정 등반의 기회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음을. 그런 어려운 결정들을 하는 산악인들의 담대함과 죄책감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고갔다. 

'친구의 자일을 끊어라 보셨어요?' 

'우리나라 산악인들, 멀지 않은 곳에도 그런 이야기들이 있어요.' 

그렇게 전해들은 이야기. 


다음 스토리 펀딩을 찾아 궁금했던 이야기를 찾아 읽었다. 그러다 더 깊은 이야기가 궁금해졌고, 저자와 인연이 있는 강사를 담임으로 둔 덕에, 저자 친필 사인본이라는 행운을 덤으로 얻을 수 있었다. 2006년 한국 여성으로는 다섯 번째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곽정혜님. 어린 나이에 겪었을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을지 그저 문장으로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2006년 5월 18일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온 저자. 앞으로 살아가면서 인생에서 만날 수많은 에베레스트를 잘 넘을 수 있기를... 나 또한 응원한다.




# 사선 - 31p.


텐트 안에 눕혀지던 순간 나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밤새 정신을 차렸다 혼절하기를 반복했기에 그날 밤 있었던 일들은 뚝뚝 끊어진 필름처럼 몇 장면만 내 기억에 남아있다. 눈을 뜰 때마다 목구멍으로 따뜻한 물이 조금씩 흘러들어 왔고, 또 어떤 때는 따뜻한 물에 손을 담그고 있기도 했다. 새벽녘이 되자 더 이상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슴푸레 밝아 오는 여명 속에서 눈을 떴다. 작은 물방울들이 맺혀 있는 텐트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고, 산소마스크 안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신선했다. 가만히 누워 있으니 콩닥콩닥 뛰는 심장이 등에서 느껴졌다.

2006년 5월 19일 아침, 나는 그렇게 다시 살아났다. 



# 왼손- 153p.


내 인생에도 앞으로 무수한 에베레스트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지금 잠시 넘어졌다고 해서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실패일 터. 실수는 할지언정 실패하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다시 이를 악물고 살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더 이상 기묘했던 3캠프에서의 꿈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니, 친구들이 나를 데리러 온 것이 아니라 '위험이 닥쳐오고 있으니 조심하라'고 알려주기 위해 온 것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 DAUM 스토리펀딩https://storyfunding.daum.net/project/2172/episodes 



<선택>

곽정혜 지음

종이와 붓,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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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도서
저자 : 곽정혜
출판 : 종이와붓 2016.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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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가 이미 봤을수도 있겠지만, 그냥 이거 보니까 언니 생각나서..."

이전날 저녁 늦은 시간까지 메신저로 추석 일정 이야기, 휴가 이야기, 그밖의 이야기를 주고받던 우리.
그리고 다음날 아침 늦잠을 자는데 메신저 알람 소리에 일어났더니 
<애쓰지 말고 시간을 쓰세요!> 라는 세바시 강연 영상 링크가 도착해있었다.

'나의 서연이는 어디 있을까...?'


그래!

요즘 생각이 뒤죽박죽 정신이 없다.

정리를 좀 해야겠다.

애쓰지 말고...


애쓰지 않겠다면서

또 책은 읽겠답시고

회사 도서관에서 책장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눈에 들어온 책.


"애쓰지 말고 즐겨!"

아... 

맞아...

나 애쓰지 않기로 했지.



세상은 자극적인 것으로 틈을 메우려 안간힘을 쓰지만

최악은

안에서 짓누른 에너지를 얻으려고 서로 이용하는 것. – 37-39p.





느긋해지는 세 가지 습관 – 113p.


  1. 멈추기_ 멈추면 스트레스로 생기는 행동이 멈춥니다.

  2. 감각에 충실하기_ 느낌으로, 더 풍부한 데이터를 향해 지각을 엽니다.

  3. 놓아버리기_ 놓아버림으로써 정보에서 새로운 방법을 끌어냅니다.


 

#1 멈추기 – 129p.


  - 훈련: 멈춰야 하는 것을 기억하기

  - 걸림돌: 보이지 않는 스트레스

  - 도움이 안 되는 믿음: ‘밀고 나가야 해.’ ‘인생은 고역’ ‘강한 자만 살아남는다.’ ‘일은 원래 재미없는 거야.’

  - : 즐겁지 않은 때를 알아채기. 흐름을 타지 못한다는 뜻이니까.

 


#2 감각에 충실하기 – 139p.


  - 훈련: 마음에서 벗어나기

  - 걸림돌: 조바심

  - 도움이 되지 않는 믿음: ‘할 일이 너무 많아.’ ‘일해야 되는데.’ ‘감각에 충실하는 건 이기적이고 쓸모없는 짓이야.’

  - : 근육을 키우듯 집중하고 감정에 충실해지는 연습을 하세요. 안팎으로 감지되는 감각들을 순수한 언어로 설명하세요. 정확히 표현해봐요. 알게 되는 것에 좋고 나쁨을 평가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세요.

 


#3 놓아버리기 – 149p.


  - 훈련: 포기

  - 걸림돌: 무력감

  - 도움이 되지 않는 믿음: ‘계획이 있었는데.’ ‘이게 필요해.’ ‘이걸 안 하면 난 끝장이라고.’

  - : 얼마나 자주 속으로 해야 된다고 중얼대는지 보세요. ‘해야 해’ ‘그이는 해야 해대신 나는 해도 돼’ ‘그이는 해도 돼라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요. ‘이 일을 해도 돼다른 일을 해도 돼라고 말하면 폭이 더 넓어지겠지요?

 





게으른 구루가 알려주는 일곱 가지 게으름 비법 – 155p.


  1. 친절 베풀기

  2. 침대 명상

  3. ‘해야 되는데버리기

  4. 지저분한 것 청소하기

  5. 긴장 내려놓기

  6. 몰입하기

  7. 소통하기

 



애쓰지 말고, 즐겨! – 246-249p.


자신에게 공간을 주는 데 익숙해지면,

모든 상황과 관계는 잘될까라는 걱정이나 스트레스 없이 나름대로 풀린다는 걸 알게 됩니다.


프로젝트든, 과제든, 공동 작업이든, 아이디어 내기든,

세상 모든 것은 저절로 자라서 완벽하게 전개되는 데 필요한 정보를 갖고 있지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보려고 하지 않을수록

더 술술 풀립니다.


때로 마법같이 느껴질 거예요.

때로 더 공을 들여야겠지만, 어디서나 그 증거가 나타나기 시작할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이해되기 시작할 거고요.



<저 게으름뱅이는 무엇이든 잘한다>

로런스 쇼터 지음, 공경희 옮김

예담, 2017


저 게으름뱅이는 무엇이든 잘한다
국내도서
저자 : 로런스 쇼터 / 공경희역
출판 : 예담 2017.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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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후배 기자가 김영하 작가의 '살인자의 기억법'에 관한 책을 소개하는 글을 사내 매체에 기고했다. 그의 책 소개글은 언제나 유쾌하고 유 회사에서 다독왕으로 소문이 난 그였기에 나는 "너무 질질 끌지 않으면서도 생각할 뭔가를 던져주는 그런 책 5권"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 기술도서는 제외할 것

- 자기개발/계발서는 제외할 것

- 현 시기의 베스트셀러나 잘 알려진 책은 최대한 배제하고, 너무 Deep 하지도 않을 것

- '질질 끌지 않으면서도 생각할 뭔가를 던져줄' 것


후배는 본인 스스로 추천 조건을 만들었다 한다. 기술도서는 인문계열 출신인 본인보다 훨씬 더 좋은 책, 잘 쓰여진 책을 추천해 줄 분들이 회사내에 많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또 자기개발서/계발서는 '생각할 뭔가'를 던져주기 보다는 '생각 자체'를 준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또 이 분야의 책들은 대부분 '저자의 영향력'과 '시기성'에 기인한다고 했다. 지금 시기의 베스트셀러이거나 너무 잘 알려진 책은 굳이 본인이 추천하지 않아도 이미 추천받고 있기에 배제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너무 Deep 한 책을 추천한다면 괜히 잘난 척 하는 것처럼 느껴질 것 같아서 보편적으로 읽힐 수 있는 책을 정했다고....


이 조건들에 따라 '질질 끌지 않으면서도 생각할 무언가를 던져주'길 바라며 책 5권을 추천해주었다.


1) 죽음에 관하여 1,2 - 시니 글, 혀노 그림

2) 신의 달력 1,2 - 장용민 

3)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윤동주

4) 라면을 끓이며 - 김훈

5) 마이너리그 - 은희경


그리고 가장 먼저 '죽음에 관하여'는 OST CD와 함께 직접 읽어보라 내자리로 가져다 주었다. 아래 메시지와 함께,


"반드시 천천히 읽으셔야 합니다. 만화라서, 그림을 다 봤다고 페이지를 서둘러 넘기지 마시고, 한 컷, 한 컷 음미하듯이 천천히 읽으세요. 책을 구매하실 때 동봉된 OST와 함께 들으신다면 금상첨화입니다. (음원 사이트에서도 제공되고 있음)"




과연 쉽게 읽히면서도 생각할 무언가를 던져주는 책이었다. 

삶에 대해, 죽음에 대해 나는 얼마나 감사하며 순간을 살고 있는지 반성하게 되는...


죽음에 관하여 (웹툰) : http://comic.naver.com/webtoon/list.nhn?titleId=500942



# 제 5화 - 민혁, 148~149p.


...그리곤 언제 잠들었었는지 모르겠지만...

잠에서 깨어보니 난 혼자였다.

원망은 하지 않는다.

내 실수였고 이런곳에서 죽는것도 내겐 영광이다.

그치만... 

죽기 싫은건 어쩔 수 없다.

나도..

정상이 보고싶다.

... 살고싶다...



# 제 6화 - 리버독, 173~176p.


저와 같이 온 녀석들은 15년지기 친구들이예요.

20살 어느땐가 TV를 보다가

우연히 이걸 알게 되었고

우리끼리 죽기전엔 꼭 한번 해보자고 했거든요.

10년동안 간간히 그 얘기를 하다보니까

어느새 꼭 해야되는 일이 되어있더라구요.

평생의 꿈이나 삶의 목표같이 거창한건 아니었어도,

그냥 내 친구들끼리 오르고 싶었어요.


... (중략)

저기 저 멀리 시체 보여? 무더기로 있는.

저들이 있다는건 정상이 코앞이란 얘기지.

정말 특이한 케이스야..

다선명이 한 장소에 죽어있다니.

부상자가 한명 있는걸 봐선 

저들이 그를 버리지 못하다가 결국 

다 같이.. 간거 같다고 하지?

-- 멋진 사람들이군요. 저 시체들을 뭐라고 부르죠?

뭐, 뻔한 이름이야.

베스트 프렌즈.

-- 셰르파 리버독(reverse + dog)




# 제 9화 - 청년, 238~240p.


난 가끔 답답해.

사람은 말이야.

하루에 30만명 정도가 죽고 그만큼 태어나.

누구든 언제나 죽을 수 있다는 거지.

죽음은 그리 멀지 않아.

어렵지도 쉽지도 않고

그냥 있는거지, 곁에.

두려울수 있어.

생각조차 하기 싫을수도 있지.

그치만 '죽음'에 대해서 알아야 할건, 현실이란 거야.

부정적, 긍정적을 떠나 그냥 있다는 사실말야.

생각하지 않으려 하면 분명히 후회해.

지금의 너처럼.

죽음은 나와 상관 없다고.

먼 미래니까 지금은 괜찮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냥 알고만 있으면 돼.

그것만으로 변할꺼야.

후회하지 않으려면 알고 있어야해.




<죽음에 관하여 1-2>

시니 글, 혀노 그림

영컴, 2013


죽음에 관하여 1~2권 세트
국내도서
저자 : 시니
출판 : YOUNG COM(영컴) 2016.01.20
상세보기



소설 <촐라체>는 2005년 1월 산악인 박정헌, 최강식이 에베레스트 서남쪽에 있는 촐라체(6440m)를 북벽 루트로 등정한 후 하산 중 사고로 7일 만에 극적으로 생환한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다. 최강식이 크레바스로 약 25m 추락하면서 양 발목이 골절되었고, 안자일렌을 하고 있던 박정헌은 갈비뼈가 골절되는 부상을 입었다. 최강식은 등강기로 크레바스를 탈출하고 둘은 서로 의지하며 구르고 기어서 하산 하던 중 야크 몰이꾼을 만나 구조되었다. 추위에 탈진 상태였던 박정헌은 손가락 8개와 발가락 2개를, 최강식은 10개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모두 잃었다. 이들의 이야기는 2014년 SBS스페셜 "하얀블랙홀"이라는 드라마 다큐멘터리로 소개되기도 했다.




# 작가의 말 – 여기, 존재의 나팔소리를 들어보라 -10-11p.

감히 고백하거니와, 나는 ‘존재의 나팔소리’에 대해 썼고 ‘시간’에 대해 썼으며, 무엇보다 불가능해 보이는 ‘꿈’에 대해, 불멸에 대해 썼다.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현대인에게, 또는 자본주의적 안락에 기대어 너무 쉽게 ‘꿈’을 포기하는 젊은 내 아이들에게 들려주고자 이 이야기를 시작했다는 것은 숨기고 싶지 않다. (중략)

히말라야에서 사는 사람들은 5천 미터가 넘는 산도 일반적으로 ‘마운틴’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 정도의 산은 ‘힐’이라고 부른다. 인생에서 만나는 고통스런 굽잇길도 그저 언덕이라고 부르면서 환하게 넘고자 하는 본원적인 낙관주의야말로 살아 있는 것들이 가진 존재의 빛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이야말로 절대로 훼손되지 않는, 존재가 품고 있는 영원성이다.



# 첫째 날 

졸라 조용하네요.

나의 대답이 그랬었지. 그때까지 나는 한 번도 그처럼 고요한 세계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 여러 번 암벽 등반을 다녀봤지만 우리나라에선 어디에 있든 소리가 쫓아온다. 사람소리 찻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바람소리 새소리 물소리라도 들린다. 완전한 정적이란 없다. 그러나 촐라체 베이스캠프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내가 맞닥뜨린 것은 숨 막힐 듯한 정적. 정적이 무섭진 않냐. 형이 또 묻고, 뭐 별로요…… 내가 대답했다. 형은 그러자 으흐흐흐, 하고 기분 나쁘게 웃고, 혼자말하듯 덧붙였다. 이 정적이…… 말하자면 고독의 맨얼굴이야. 이제부터 베이스캠프에서 너도 이놈 맨얼굴을 질릴 정도로 보게 될걸. – 48p.


히말라야에서 일출 때의 햇빛은 철저히 높이의 순서를 따라 떨어진다. 더 높은 봉우리로부터 더 낮은 봉우리로 햇빛이 내려앉는 것이다. 에베레스트 다음엔 로체가 조명을 받는다. 마칼루(Makalu, 8463m)는 그 세 번째다. 마칼루와 로체의 기생봉인 로체샤르(Lhotse Shar, 8400m)의 높이 차이는 불과 63미터에 불과 하지만, 높이 서열에 따른 일광의 낙하 순서는 영원히 흐트러지지 않는다. (중략)

세계의 모든 길이 시작되고 모든 길이 끝나는, 그래서 가장 먼저 햇빛을 받은 에베레스트는 지금 막 화관을 정수리에 얹고 있다.

로체, 마칼루, 초오유, 로체샤르가 차례로 그것을 이어받는다.

마치 음계를 짚고 내려가는 그랜드피아노의 속살을 보는 듯하다. 8천 미터의 봉우리들에 화관이 다 얹혀지고 나면 6천 미터급 봉우리들로 불길이 옮겨 붙는다. 탁, 탁, 탁, 탁…… 하고 도미노로 수많은 설봉들이 불을 켜 드는 것 같다. 아다지오로부터 단계를 짚어 알레그로의 빠르기로 휘몰아쳐 내려오는 놀라운 대자연의 연주이다. 가슴이 막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아 나는 그만 흡 하고 숨을 막는다.

햇빛이 이윽고 내 이마에 꽂힌다. – 54p.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은 나날이 그 사랑을 상실해가는 ‘삭막한 과정일 뿐’ 이라는 신혜의 말에 나는 간신히 동의한다. 사랑을 간직하려면 그걸 버리는 수밖에…… 라고 말하려는데, 검은 휘장이 눈앞을 완전히 덮는다. 이제 촐라체도, 벽도 없다. 어둡다. – 71-72p.



# 셋째 날

가만히 있으면 말을 모조리 잊어버릴 것 같았다. 진공 지대의 적막이 아마 그럴 터였다. 망원경을 들여다보다가, 혹은 책을 읽다가, 어느 순간 나는 와락 정적이 무서워 짐짓 서성거리면서, 소리 내어, 대답 없는 그 무엇엔가 말을 걸곤 했다. 내 말을 듣는 것이 들쥐든, 새든, 아니면 히말라야 죽음의 지대에 산다는 비행거미든, 상관없었다. 평생 동안 이런 정적을, 그것도 하루 종일 만나본 일은 처음이었다. 밤이 되면 그 정적의 공포감은 배가 되었다. 뼛골 사이로 흐르는 바람 소리까지 들릴 것 같은 정적이었다. – 101p.



# 넷째 날

환호는 조금도 없다. 정상에 오르면, 누가 말했던 것처럼 ‘정상은 모든 길이 시작되는 곳이고 모든 선이 모여드는 곳’이므로 엔돌핀이 분출하는 듯 기쁠 줄 알았는데, 기쁘기는 커녕 오히려 허망하고 슬픈 느낌이다. 정상엔 허공뿐이다. 겨우 이것을 보러, 목숨을 걸고 올라왔단 말인가. 더구나 눈바람 때문에 세계는 화이트아웃, 사라지고 없다. 눈 내린 평범한 민둥산 꼭대기 한 켠에 있는 것 같다.

“씨, 씨팔……”

울지 않으려고 미간에 잔뜩 힘을 주고 나는 씹어뱉는다.

날씨까지 어저면 이렇게 ;싸가지’가 없단 말인가. 형에게 하는 욕인지, 아버지에게 하는 욕인지, 촐라체에게 하는 욕인지 모르겠다. 목숨을 걸고 촐라체에 왔는데, 촐라체가 없다. – 117-118p.



거칠고 악마적인 힘이다. 하늘과, 가깝고도 먼 첨봉들과, 설사면이 한 덩어리가 되어 바람개비처럼 돌아가고 있다. 어머니가 보였던가. 차가운 신혜의 눈빛을 본 것도 같다. 형태는 이지러지고 이미지는 교합된 요지경 속 그림이다. 몸이 무덤으로 끌려가는 느낌도 난다.

그리고 이내 모든 게 하얐다. – 129p.



# 여섯째 날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합리성을 떠나서, 크레바스의 그 남자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하나의 소명처럼 느껴진다. 그를 확인하는 것은 김선배의 시신을 찾아 모셔가는 것과 똑같은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 그것이 아니라도, 내 속의 어떤 나는 강렬하게 ,산 밑으로 어서 내려가라는 내 육체의 자연스러운 요구를, 거역하고 싶다, 라고 말하고 있다. 촐라체에게 반역하고 싶다. 순리에 따르고 싶지 않다. 어차피 죽음과 정면으로 맞닥뜨렸으니, 까짓거, 어떤 합리성에도 굴복하고 싶지 않다. 비겁한 건 질색이다. 그러면서, 나도 또 내게 들이대고 묻는다. 죽는게 혹시 두려운가. 나는 대답한다. 아니야. 두렵지 않아. 이미, 지금 내가 과연 살아 있는지,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이승의 풍경인지, 그것조차 불분명하다. 이 순간이 죽은 다음의 세상인지도 모른다.

정말 내가 마침내 미친 모양이다. – 214p.



나는 씨근덕 거리면서 영교 곁에 쓰러져 누워 그의 어깨를 흔든다. 잠들면 죽음이라 할지라도, 죽음이 오는 것조차 모르는 척하고, 눈 감고 잠들고 싶은 건 나도 마찬가지다. 손끝까지 움직일 힘이 없다. 살아 있는 영교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래서 혼자라면, 호수를 건너다가 나도 쓰러져 눈 감고 말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 있다.

나 혼자 살아 있는 게 아니다. 우리…… 가 살아 있다. 내가 포기하면 영교도 죽는다. 그러니, 함께 가야 한다. 나도, 영교도, 혼자만의 힘으로 갈 수는 없다. 내가 앞에서 끄는 힘과 그가 뒤에서 의지를 갖고 기는 힘이 보태져야 겨우 움직일 수 있다. – 262p.


촐라패스는 북쪽의 병풍처럼 둘러쳐진 히말라야의 중심 벽 마할랑구 히말과 남쪽의 스카이라인을 이룬 힌쿠 히말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그곳은 세상의 중심이었다. 나는 미간을 모으고 어둠 속의 히말라야를 오래 바라보았다. 어느새 구름이 모두 사라진 하늘은 가없는 별들의 왕국을 이루고 있었다. 멀고 가까운 수천의 백색 능선들이 별빛에 시시각각 제 자태를 드러내 이윽고 원만한 원형을 이루면서, 나를 둘러싼 채, 우주로 떠오르고 있는 느낌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것은 이승의 풍경이 아니었다.

불안한 잠의 불연속면에 기대어 꿈속을 흐르다가 소스라쳐 깨고 또 깰 때마다, 나는 죽은 다음에 보는 것처럼, 그 초월적인 풍경들을 보았다. 히말라야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은 죽음과 탄생 사이의 과도기적 시간을 ‘다르마타(Dharmata)’라고 불렀다. 그것은 이승도 저승도 아닌, 잠과 꿈 사이의 밝은 틈새라고 했다. 목숨 값에 억눌려 온갖 욕망으로 이지러져 있던 이른바 불멸의 본성이, 하나가 통째로 끝나고 다른 하나가 통째로 시작되는 그 틈새에서, 금강석보다 견고한 제 본체를 보이고, 보여주는, 은혜와 축복의 시간이 바로 다르마타였다. 나는 자고 깨고 자고 깨고 하면서, 이를테면 그때 다르마타의 빛 사이를 날렵하게 통과하고 있었다. 나에게 그것은 사랑에의 목 타는 갈망이었고, 또한 정수(精粹)의 기다림이었다. – 291-292p.



# 베이스캠프

일고 보면 촐라체까지 포함해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히말라야는 산스크리트어로 눈을 가리키는 ‘히미아(Himia)’와 보금자리를 가리키는 ‘알라야(Alaya)’의 합성어로 ‘눈의 보금자리’라는 뜻이었다. 서쪽 끝의 낭가파르바트에서 동쪽 끝까지 장장 2500킬로미터나 뻗어 있는 히말라야는, 8천 미터 이상 되는 고봉 14개를 비롯해, 수많은 설봉들을 품고 있는 지구의 등뼈로서, 아직도 대부분 사람의 발걸음을 허용하지 않는 죽음의 지대, 혹은 불멸의 초월적 상징으로 드높이 솟아 있었다. 수천의 봉우리 하나하나가 그대로 다 하나하나의 별과도 같았다.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는 말은 히말라야에선 사람이 죽으면 눈 덮인 봉우리가 된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그곳은 죽음의 지대이면서 죽음을 넘어선, 살아 있는 존재의 또 다른 얼굴이었따. – 299-300p.





<촐라체 CHOLATSE - 박범신 장편소설>

박범신

푸른숲, 2008


촐라체
국내도서
저자 : 박범신
출판 : 푸른숲 2008.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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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어김없이 '좋은 이웃 콘서트'에서 지난해 특별한 여행을 함께했던 타지키스탄 팀을 만났다. 강정화 선생님께서는 올해도 산타가 되어 따뜻한 선물을 주셨다. 다윗이라는 친구가 쓴 시집을 저자 친필 사인을 받아 전해주셨다. 올해도 12월의 첫 번째 주말은 강 샘의 따뜻한 마음을 다윗의 시와 함께 읽는다.


어린 친구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이 시에 묻어나 있었다. 한 구절 한 구절 읽어 내려갈 때마다 순진무구한 동심이 보이다가도 때로는 어른보다 더 어른스러움이 배어있었다. '지혜로움을 걷는 아이'라는 제목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시집이었다. 다윗의 풍부한 감성이 놀랄 만큼 섬세했고, 그 배경에는 홈스쿨링으로 다채로움을 채워주는 엄마와 아빠의 사랑이 있었으리라. 아이들과 마음껏 즐기며 보내는 시간을 행복함으로 여기는 엄마 아빠에게 존경을 표한다.





■ 본문 중에서


# 인생2 - 33p.


인생은 먼지와 같다

오늘 있다가

내일 하늘나라 가는데...


세상 사람들은 왜 세상에서

잘 살려고 할까?


인생은 하루살이와 같다

날아다니다

다음날 사라지는데


왜 사람들은 안 죽으려고 

버틸까?



# 봄 - 68~69.


봄이 찾아오면

겨울은 시간의 가방 속에

바람과 눈을 차곡차곡 넣고


그곳에서의 추억도 담은 채

황금 같은 추억을 캐며

떠나네


겨울이 떠나고 봄이 오면

나무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연두빛 색연필로

편지를 써서

겨울이 떠났다는

소식을 알리네


모든 동물이 잠에서 깨어나고

태양은 자신의 금빛가루를 

모든 식물과 꽃들에게 

뿌려주네


봄에는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하고

그 시작이 어느덧 끝이 되어

세월의 계단 꼭대기에서

여름을 부르네



# 갤럭시 탭 - 91p.


갤럭시 탭은 

나의 친구


그렇지만 가끔은 

헤어져야 한다


배터리가

떨어졌기 때문에...



이다윗


만 12세, 안성에서 아빠 엄마, 동생 에스더, 한나와 함께 홈스쿨링하며 살아요. 다윗은 2003년 8월 25일 1.8킬로그램 미숙아로 태어나 지금 뇌병변(뇌성마비) 2급에서 4급을 받았어요. 보행은 조금 걸을 수 있지만 계단이나 큰 길은 아빠, 엄마의 도움을 받아 걸어요. 다윗의 취미는 책읽기에요. 기억력이 좋고 스토리텔링을 잘해요. 성격은 매우 밝고 언변이 탁월하구요, 그리고 기억력이 좋아서 뭐든지 외워버려요~~ ^^

2011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요,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나눈 시와 자연을 깊이 보고 관찰해서 지은 시, 기발한 생각으로 시상이 떠올라 쓴 시, 가족을 생각하면서 지은 시 등 약 100여 편 정도가 됩니다.





<지혜로움을 걷는 아이>

이다윗 시집, 표지·본문 그림 이에스더(다윗 동생0

2015, 문학나무



지혜로움을 걷는 아이
국내도서
저자 : 이다윗
출판 : 문학나무 2015.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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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민 언니,


여름 햇살 내리쬐던 날 청주 내려가던 길에 선물로 주신 책. 

게으름을 피우다가 찬바람 부는 늦가을이 되어서야 읽었어요. 

고마와요! 역시 언니는 내 취향을 너무 잘 아는 것 같아요. ; )




■ 본문 중에서


우리는 시간 속에 산다. 시간은 우리를 붙들어, 우리에게 형태를 부여한다. 그러나 시간을 정말로 잘 안다고 느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지금 나는 시간이 구부러지고 접힌다거나, 평행우주 같은 다른 형태로 어딘가에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이론적인 얘길 하는 게 아니다. 그럴 리가, 나는 일상적인, 매일매일의, 우리가 탁상시계와 손목시계를 보며 째깍째깍 찰칵찰칵 규칙적으로 흘러감을 확인하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초침만큼 이치를 벗어나지 않는 게 또 있을까. - 12p.


인생에 문학 같은 결말은 없다는 것. 우리는 그것 또한 두려워했다. 우리 부모들을 보라. 그들이 문학의 소재가 된 적이 있었나? 기껏해야 진짜의, 진실된, 중요한 것들의 사회적 배경막의 일부로서 등장하는 구경꾼이나 방관자 정도라면 모르겠다. 그 중요한 것들이 무어냐고? 문학이 아우르는 모든 것이다. 사랑, 섹스, 윤리, 우정, 행복, 고통, 배반, 불륜, 선과 악, 영웅과 악당, 죄악과 순수, 야심, 권력, 정의, 혁명, 전쟁,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사회에 맞서는 개인, 성공과 실패, 실인, 자살, 죽음, 신 같은 것들. 아, 외양간 올빼미도 있군. - 31p.


나는 매일 런던으로 통근했다. 수습직원으로 시작한 일은 장기적인 이력으로 이어졌다. 삶이 물처럼 흘러갔다. 한 영국인이 결혼이란 처음에는 푸딩이 나오지만 그다음부턴 맛없는 음식만 나오는 식사라고 말한 적이 있다. - 97p.


젊을 때는 서른 살 넘은 사람들이 모두 중년으로 보이고, 쉰 살을 넘은 이들은 골동품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시간은, 유유히 흘러가면서 우리의 생각이 그리 크게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해준다. 어릴 때는 그렇게도 결정적이고 그렇게도 역겹던 몇 살 되지도 않는 나이차가 점차 풍화되어간다. 결국 우리는 모두 '젊지 않음'이라는 동일한 카테고리로 일괄 통합된다. - 107p.


나의 삶엔 늘어남이 있었을까, 아니면 단순한 더하기만 있었을까. 그것이 에이드리언의 글이 내 안에서 촉발시킨 의문이었다. 나의 삶에 더해진 것 - 과 뺀 것 - 은 있었지만 곱해진 것은? 그 생각에 이르자 나는 심란하고 불안해졌다. - 153~154p.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다만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타인에게 얘기했다 해도, 결국은 주로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 165p.


사람은 가장 젊고 민감한 시절에 상처도 가장 많이 받는다. 반면 끓어오르던 피가 서서히 잦아들고, 감정이 전보다 무뎌지면서 더 든든히 무장을 하고 상처를 견딜 줄 알게 되면, 예전보다 더 신중하게 운신하게 된다. - 172p.


살아남은 우리의 대부분은 늙는 데 연연한 적이 없다. 내 판단이지만, 요절하는 것보다는 늙는 것이 언제나 나은 법이다. 아니, 내 말뜻은 이렇다. 이십 대에는 자신의 목표와 목적이 혼란스럽고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해도, 인생 자체와, 또 인생에서의 자신의 실존과 장차 가능한 바를 강하게 의식한다. 그 후로... ... 그 후로 기억은 더 불확실해지고, 더 중복되고, 더 되감기 하게 되고, 왜곡이 더 심해진다. 젊을 때는 산 날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온전한 형태로 기억하는 게 가능하다. 노년에 이르면, 기억은 이리저리 찢기고 누덕누덕 기운 것처럼 돼버린다. 충돌사고 현황을 기록하기 위해 비행기에 탑재하는 블랙박스와 비슷한 데가 있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면 테이프는 자체적으로 기록을 지운다. 사고가 생기면 사고가 일어난 원인은 명확히 알 수 있다. 사고가 없으면 인생의 운행 일지는 더욱더 불투명해진다. - 182~183p.


시간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마흔은 아무것도 아니야, 쉰 살은 돼야 인생의 절정을 맛보는 거지, 예순은 새로운 마흔이야... ... 시간에 대해 내가 아는 건 이 정도다. 객관적인 시간이 있다. 그리고 주관적인 시간도 있다. 가령, 손목의 요골동맥 바로 옆에 시계의 앞면이 오도록 차는 경우. 이런 사적인 시간이야말로 진정한 시간이며, 기억과 맺는 관계 속에서 측정될 수 있다. - 210p.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다산책방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국내도서
저자 : 줄리언 반스(Julian Barnes) / 최세희역
출판 : 다산책방 2012.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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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교육 중에 (본의 아니게) 참 많은 책을 읽었다.

2박 3일의 마지막 날 더 이상 읽을 책이 없어서 룸메이트였던 지영이에게 책을 빌렸는데.. 

다 읽지 못해서 그 주말에 마저 읽고 돌려주기로하고 책을 내가 가져왔다.


그리고 다음날 일상으로 복귀하니,

거짓말처럼 책 한 장 넘길 여유 없는 한 달이 훌쩍 지나가고..

"시원한 카페에 앉아 여유롭게 하루 종일 책이나 읽고 싶다"는 허세(?)스러운 소망을 품고 있다가...


드디어! 추석 연휴 여행을 떠나와서야 그때 그 책을 꺼내들었다. 


좋다!


가장 높은 커피숍, 시야 탁 트인 좋은 자리도.

그림처럼 맑은 하늘도.

책 읽다 고개들면 빼곡히 보이는 홍콩 마천루들도. 

적당히 달달한 바나나 머핀도. 

머리까지 쭈삣하게 시원한 아메리카노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긴장감 넘치는 소설의 전개도.

좋다. 그냥 다 좋다!

좋다. 오늘 참 좋다!


지영아~ 연휴 끝나고 책 반납할게, 연체료는 치맥으로! 




■ 본문 중에서


- 170p.

다쓰로를 제거할 계획에 몰두하고부터는 회사 일이 전부 하찮게 여겨졌다. 고객의 클레임이나 납기 문제, 사내의 알력 등으로 고민하는 것도 바보스럽게 느껴졌다. 자신의 생존이 걸려 있으니 일상의 고민 따위는 별것 아니게 된다는 걸 나오미는 새삼 통감했다. 중국인의 강함도 분명 그런 데서 나오는 것이리라. 리아케미를 비롯한 화교들은 매일 생존경쟁을 볼인다. 그래서 거짓말도 하고 다른 사람 물건도 훔친다. 그러고도 태연하다.

나오미는 만약 일이 잘되면 리아케미 밑에서 일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벤처 사업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도 있고,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76~177p.

전날 밤, 사내 친목회가 있어서 부담스럽지 않은 동기들과 오랜만에 알코올을 입에 댔더니, 자연스럽게 그동안의 긴장이 풀려 과하게 마시고 말았다. 입사한 지 칠 년째. 저마다 일하면서 느껴온 울분과 체념을 가지고 있어서 그걸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풀렸다. 이 세상에는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생각하는 사람 쪽이 더 많은 것이다. 나오미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이제 와서는 희망하던 일을 시켜주지 않는 것보다 훨씬 이전의 성장 과정이나 청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마음속으로 투덜거렸다.


눈을 뜨나 오전 10시가 지나고 있었다. 푹 잠자고 난 충족감이 온몸을 감싼다. 꿈도 꾸지 않은 게 대체 얼마 만일까. 여운을 더 느끼고 싶어서 잠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햇볕을 차단하는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온 빛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귀를 기울이니 희미하게 빗소리가 들린다. 일기예보에서는 아침부터 하루 종일 비가 온다고 했다. 맑은 날보다 그쪽이 더 낫다. 태양이 비치면 평일 낮, 혼자 방에 있는 자신을 혼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나오미는 이불 속에서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기지개 켜는 동작을 반복했다. 그렇게 하면 축적된 피로가 전부 몸 밖으로 배출되어 스무 살 무렵의 젊음을 되찾는 듯했다.


내년이면 서른이 된다. 한참 후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확실히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어느덧 '젊은 여자'라는 마법의 카드는 쓸 수 없게 됐다. 아직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했는데.



- 440p.

가나코의 머릿속에서 '게임 오버'라는 말이 떠올랐다. 끝났다. 더 이상 시나리오를 준비할 필요할 필요가 없었다. 마음이 해방됐다. 두려움도 없다. 요코와 대치하기를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정죄(淨罪) 의식이라도 치른 듯한, 그러면서 마침표를 하나 찍은 것도 같은, 스스로도 잘 알 수 없는 감정이 가슴 가득히 번진다. 다만 더욱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나오미와 가나코>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해웅 옮김

예담


나오미와 가나코
국내도서
저자 : 오쿠다 히데오(Hideo Okuda) / 김해용역
출판 : 예담 2015.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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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여름. 방글라데시로 다녀온 특별한 여행. 

'인생의 동반자'가 되었다고 자랑할 수 있는 12명의 특별한 인연과 현지에서 만난 k 사무장님 외 한국에서부터 함께 했던 스태프들. 

이들과 함께 한 일주일간의 행복한 동행은, 내가 너무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봉사'라고 말하기 부끄러운 그저 특별한 여행이 되었다. 


한국 사회에서 치열하게 돌아가는 회사의 시간도 잠시 잊고, 

통념적으로 맞추어진 '시간의 틀' 안에서 온전한 삶을 살고 있는 친구들의 육아 이야기로 가득 찬 카톡방도 잠시 잊고, 

반복되는 일상을 완전히 벗어나, 

방글라데시에서 '인연'으로 만난 좋은 사람들과 함께 많이 받고 채우고, 여러 가지를 되짚어 생각하는 시간을 보냈다. 


'제때'라고 말하는 시간을 넘기고, 

한국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약속된 시간보다 한 박자씩 느리게 살고 있는 깜냥인데, 

초조해야 할 이 나이에 아직도 철이 들지 않았나 보다. 

올여름 채워진 의미들로 또 당분간은 철딱서니 없게 살 것만 같다...




" 취미가 뭐예요? "

" 안 어울리게 책 읽는 걸 좋아하고, 글을 쓰는 걸 좋아해요. "

" 글 잘 쓰실 것 같아요.. "

" 좋아하는데 아직 많이 부족해요. 글을 잘 쓰고 싶어요. "


며칠 후, 도착한 메시지.


" 자고 있겠죠...

  내가 왜 Liah 님이 글을 잘 쓸 거 같다고 생각했냐하면...

  20대 때 마루야마 겐지라는 작가가 쓴 소설가의 각오라는 자전적 수필이 있었는데 

  거기 나오는 작가의 눈빛이 읽혀졌었어요.


  내가 사람 보는 눈이 그렇게 틀리지는 않는데 그 눈빛이 계속 생각납니다.


  멀리까지 찾아와주고 나눠주고 같이 웃다 울다 가줘서 너무 감사했어요.

  '인연'은 운이고 업이라 했죠? 인연에 따라 또 계속 봐요..


  그대들과의 추억이 계속 아른거립니다 ^^ "


그리하여 읽기 시작한 마루야마 겐지의 책. 그중 첫 번째로 손이 간 책이 <그렇지 않다면 석양이 이토록 아름다울 리 없다>였다. 과연 그의 매서운 눈빛에 나도 매료되었는데, 내 눈빛이 이렇게 읽혔는지 그저 영광스럽기만 했다. '마루야마 겐지' 살아 숨 쉬는 것 같은 문장 하나하나에 그의 호흡이 깃들어 있었다. 내가 왜 여태 이런 거장을 몰랐을까... 읽는 것이 취미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다닌 것이 부끄러울 만치 문학 무지자였다. 한국어로 번역된 그의 책이 십수 권에 이르므로 앞으로 몇 달간은 마루야마 겐지의 문장에 푹 빠져 지낼 것 같다. k 사무장님, 감사합니다! : )



■  본문 중에서


# 사적인 소우주 - 10p.

그러나 일 년 내내 이 땅을 떠나지도 않고 여행을 가는 일도 없이, 마치 정원의 노예처럼 살고 있는 나 같은 사람이 남의 땅의 절기 변화나 개화 상황 등을 알 길은 없다. 정원에 만개의 순간이 반짝 찾아올 때마다 '이 세상 봄의 중심은 역시 이곳이 틀림없어.'라는 오만한 생각에 빠져 혼자 흐뭇해 하는 것이다.

전적으로 찰나에 불과한 만개의 순간을 위해, 다른 계절 대부분의 하루하루를 평범하기 그지 없는 편집증적 분투를 하면서 보낸다. 그 덕분에 정원의 식물들이 불꽃놀이 장치에서 솟아오르는 불꽃 혹은 시한폭탄처럼 일제히 꽃을 피워 아름다움을 겨루는 색채와 향기의 제전이 계속되면, 술에 취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기분에 푹 빠져 버린다. 붕 뜨고, 두근두근 안절부절 못한다.



# 버리 수 없다면 정원사는 금물 - 15p.

대개는 여성에게 그런 경향이 있다. 아까워, 추억이 담겨 있잖아 등등의 이유로 계속 모으다 보면, 언젠가는 전부를 잃어버리는 지경에 이르고, 문득 깨달았을 때는 자신조차도 누더기가 되어 있다. 폐인 같은 몰골로, 거친 무덤 같은 땅에 멍하니 서있게 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우유부단해 대담하게 버리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정원 가꾸기가 어울리지 않는다. 가드닝 같은 것이 한때 크게 유행했다가 이제는 완전히 시들해져 버린 것은, 손에 들어온 꽃들을 품은 채 하나도 놓지 않으려는 성격의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 사철 내내 꽃을 피울 순 없다 - 24p.

인생에서 겨울은 좌절의 기간이다. 식물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것도 새로운 비약을 위한 중요한 조건이다. 개화, 개화의 연속인 식물이 존재하지 않듯, 성공, 성공의 연속인 인생 또한 없다. 좌절과 실패는 사람을 고독의 지옥에 던져 넣는다. 그 지옥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사람 중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있지만, 맞서 싸워 자신에 의존하는 힘을 기른 사람은 재생 부활의 기회를 얻는다. 그뿐 아니라 회복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받게 돼, 이전보다 한 단계 더 굳건해진 생명으로 훨씬 더 멋진 성공을 안게 되는 것이다.

(중략)

뛰어나게 대담하지도 못하고, 세상의 상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해 수치스러움에 옥죄여 있는 사람들이 목숨을 존속시킬 수 있는 열쇠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 만한 일이나 취미다. 하지만 그 열쇠를 가진 이라도 겨울에 발이 걸려 넘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우연한 계기로 고독의 마왕에 허를 찔려 살 가치가 없다는 답을 선뜻 내놓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다. 병, 실연, 실직, 불합격 통지서, 배신, 이별, 사별, 날벼락 같은 빚과 같은 명백한 이유는 물론, 별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인해 순식간에 우울해져 어느 날 느닷없이 삶의 모든 것을 팽개치는 사람도 있다. 그런 비극적인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아, 또한 목숨이 겨울에 죽음을 당하고 만 건가.'라고 중얼거린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봄이 찾아왔는데도 전혀 싹을 틔우지 않는 식물을 발견할 때 역시, 겨울에게 살해당한 것이라는, 즉 초목에게도 자살이 있을 수 있다는 비약한 심한 생각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 만만한 생은 없다 - 39p.

동물의 수컷은 크게 두부류로 나눌 수 있다. 가족의 삶을 방해하는 수컷과 가족을 제대로 지키려는 수컷. 인간의 수컷 역시 이 두 가지로 분류된다. 하지만 사람의 암컷은 자칫하면 양자를 구분하기를 게을리 하기 쉽다. 연애, 결혼, 행복한 가정이란 도식을 한 번 가슴에 그려 버리면, 교제하는 수컷의 본성을 헤아리려 하지 않고 무작정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런 착각 속에서 여러 해를 보낸 뒤에야 쓰라림을 맛보게 된다.

가정에 잘 스며드는 남자를 고르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설령 그런 남자가 있더라도 여자 쪽에서 볼 때는 거의 이성으로서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만나도 무시하게 되고, 결국 스쳐 가는 관계로 끝나 버린다. 또 가정에 제대로 머무는 남자라도 아내를 어머니 대신으로 여기는 이들이 늘고 있어, 그런 남자에게 모성애를 자극 받아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가는 임신도 하기 전부터 성가신 아이를 가져 버린 꼴이 돼 아연 실색하는 여자들도 드물지 않다.



# 반짝반짝 빛나는 삶이 두 손을 비비며 다가온다 - 69p.

정원에 나갈 때마다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며 혼자 승리한 심정이 된다. 우주를 지휘하는 실권자라도 된 듯한 착각을 즐기며 하찮은 자신의 목숨만을 벗 삼아 살아가는 다른 이들을 비웃는다. 그렇게 오만한 나의 옆을 거짓 없는 진짜 삶이 스쳐 간다. 와해되기 시작했던 영혼이 다시 조각을 맞추기 시작한다. 자기혐오를 짊어진 마음이 엽록소에 녹아들거나 알찬 양분이 되어 모근에 흡수돼 간다. 반짝반짝 빛나는 삶이 두 손을 비비며 이쪽으로 다가온다.



# 전진만이 예술의 진수에 다가가는 법 - 100p.

우선 말해 두자면, 나는 파괴자가 아니다. 가치가 있을 것 같은 일은 철저히 해야만 하는 타입으로, 사실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밖에 살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나 자신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소설이든 정원 가꾸기든 나는 그것들을 통해 본의 아니게 이 땅에 정착하고 있는 나 자신을 찾고, 존재 이유를 탐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게 아니면 마음의 갈증, 이성의 졸음, 인간 정신에 대한 뿌리 깊은 불만에 시달리고 있는 자아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 단풍에 취한 하루로도 족하다 - 109p.

살림 냄새 나는 생활 속으로 서슴없이 발을 들이는 위급한 문제들. 여러 모습으로 존재하는 자신 사이에서 생겨나는 싸움. 점점 화석화되고 있는 사는 보람. 혼자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비장한 각오. 제압당해 부서져 버린 인생 그 자체. 행복해지고 싶어 애타는 심정. 아직도 갈망해 마지않는 향락. 이미 미래를 기대할 수 없게 된 피할 수 없는 궁지(窮地). 남들보다 강해지려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패배 일로를 걷는 남은 인생.



# 몸으로 깨달은 것은 평생 남는다 - 120p.

무엇이든 겉만 봐서는 본질에 가까워질 수 없다. 직접 손으로 만짐으로써 처음으로 실태를 파악할 수 있다. 엄청나게 많은 책을 읽고, 컴퓨터가 보여 주는 정보의 바다를 헤엄쳐도 실제 체험이 빠진 지식은 결국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한다. 하물며 확고한 진리에 도달하는 것은 몽상 중의 몽상이다. 몸으로 깨달은 것은 평생 남지만 머리로만 얻은 확신은 금방 의문에 흔들리고 부정되어 버린다.

그것은 읽을 수는 있지만 쓸 수 없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읽는 것은 머리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쓰는 것은 정원 일처럼 육체적 노동이 동반된다. 그런데 실제로는 읽는 것과 쓰는 것의 결정적인 차이를 가벼이 여기는 사람이 너무 많다. 양쪽 모두 동일한 지적인 행위로 해석되고, 그러한 오해에서 생긴 낙차에 불필요한 고뇌를 강요당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읽는 것은 감상이고, 쓰는 것은 연주다. 연주를 하려면 당연히 거듭 연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몸에 익히는 노력을 오랫동안 참고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글을 써야 비로소 자신이 보려던 것이 선명해진다. 몸을 쓴 덕에 받을 수 있는 선물인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오체를 통해 현실을 계속 접하는 자세다. 그것 없이 태만한 선택만을 하면 어설픈 정보와 싸구려 지식에 휘둘려 떠밀려 간다. 언젠가는 자신을 잃고 현실의 벽에 부딪혀 나가떨어지는 나약한 인간이 되고 만다. 그리고 곧 도망칠 곳도 잃고, 인생이 교착상태에 빠져 패기를 잃는다. 마음뿐 아니라 영혼까지도 기운을 잃고 축 처지게 된다.

(중략)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투성이, 불쾌한 것투성이, 지긋지긋한 것투성이. 그렇기 때문에 사는 것이 재미있다고 발상을 전환하는 데 성공하지 않으면 진흙으로 만든 인형 같은 일생을 보낼 수밖에 없다.

현실과의 투쟁을 포기하는 생물은 인간 외에 없다. 인간은 문명의 어중간한 발달로 인해 덧없는 행복감에 현혹되고, 불특정 다수의 삶에 자신을 과도하게 맞추려 한다. 그리고 유년기부터 청춘기에 걸친 부모와 사회의 과보호에 의해 자립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물러터진 환상에 젖어 있다. 정원의 초목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치부하면 그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실제 사회라는 정글에서 살아남지 않으면 안 되므로 그야말로 위기다.



# 가장 아름다운 장미는 바람에 단련된 것이다 - 130p.

장미가 상징하는 것은 열정이고 희망이며, 사랑이고 도취다. 반면 정원에 몰아치는 바람이 상징하는 것은 대체로 장미와는 정반대의 것이리라. 장미와 바람, 그 둘은 바로 삶 자체를 상징한다. 이 둘의 싸움이야말로 현세를 넘어선 생명 본연의 자세를 시사하는 것이다. 이 쓰라린 세상이 단순히 우연과 인연의 연속에 불과하다고, 혹은 망각의 도움 없이 살 수 없는 세상이라고, 혹은 자기 자신을 저주할 수밖에 없는 끔찍한 지옥이라고 단정 하기 전에, 좋아하는 장미 한 송이를 생각해 보자. 때와 장소에 엄격히 제약 받는 그 장미가 어떻게 가혹한 바람을 견디며 꽃을 피우는지를.



■ 차례


 1월_  버릴 수 없다면 정원사가 되지 마라

 2월_  사철 내내 꽃을 피울 수는 없다

 3월_  한 마리 새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별별 일을 다 겪는다

 4월_  성장하고 싶다면 가지를 쳐내라

 5월_  봄의 들놀이가 수만 권을 읽는 것보다 낫다

 6월_  존재하는 것들의 유일한 명제는 오로지 살아남는 것이다

 7월_  꽃을 돌아보지 마라

 8월_  당신을 타락시키는 유혹은 언제나 당신으로부터 시작된다

 9월_  예술의 진정한 힘의 원천은 생명체 간의 투쟁 그 자체다

10월_  단풍에 취한 찰나로도 충분하다

11월_  현실과의 투쟁을 피할 수 있는 생명체는 없다

12월_  가장 아름다운 장미는 바람에 단련된 것이다

후기_  무죄 선고를 받은 피고인처럼



<그렇지 않다면 석양이 이토록 아름다울 리 없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이영희 옮김

바다출판사, 2015



그렇지 않다면 석양이 이토록 아름다울 리 없다
국내도서
저자 : 마루야마 겐지 / 이영희역
출판 : 바다출판사 2015.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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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하나 듣고 시작하실까요? 


"Jim Reeves - He'll have to go" 


짧은 멜로디로 시작한 박웅현 CD의 강연은 "그가 왜 떠나야 하는지(He'll have to go)"에 대해 가사를 읽어 주는 것으로 이어졌다.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사랑하는 여자에게 전화를 걸어 가슴 절절하게 그가 떠나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멜로디와 가사를 소개하며, 소름이 돋는다고 했다. 잠시 후 그는 '파문(波紋)'이라는 키워드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지난해 '여덟 단어'라는 책을 선물로 받고 처음 접한 박웅현의 글은 나에게 파문이었다. 그런 그의 강연을 회사에서 들을 수 있다니, 오롯이 내 것에만 집중하느라 주변을 둘러보지 못했었는데, 글로 만난 박웅현보다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으니 감동과 파문은 더 물결쳤다.  


이야기를 이어가며 그가 받았던 감동의 순간들을 시와 클래식 음악으로 우리에게 조금 더 나누어 주었다.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中 몰다우(Smetana, Moldau),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Tchaikovsky - Violin Concerto),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Schubert, Arpeggione Sonata), 베토벤의 월광(Beethoven - Moonlight Sonata), 돈 맥클린의 빈센트 반 고흐에게(Don McLean, Vincent).


손글씨로 간결하게 만들어진 파워포인트 자료를 시작으로, 감동의 순간들을 그와 함께 나누며 마지막까지 몰입할 수 있는 명강의였다.   


세상에 강변에 달빛이 곱다고 전화를 다 주시다니요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픈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


뭐니 뭐니 해도

호수는

누구와 헤어진 뒤

거기 있더라


배추는

속에 있는 아기가 춥다고

이불을 덮어 준다


'무엇을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감동" 받는 것이다.' 라는 그의 이야기처럼 매 순간순간 놓치고 지나가는 많은 기억해야 할 순간들. 달은 어디에나 떠 있지만, 보려는 사람에게 보이는 것처럼, 삶의 아름다운 순간들을 조금 더 담아내도록 노력해야겠다. 오늘부터 작은 바람소리, 후드득 빗방울 소리, 향긋한 풀 내음, 밤 하날의 달빛, 흐드러지게 핀 봄날의 벚꽃. 하나하나 흘려보내지 말아야겠다. 그의 강연으로 받은 벅찬 감동을 짧은 리뷰로 남기기는 쉽지 않지만 '박웅현' 그는 나에게 '파문'을 일으켰고, 나를 '호들갑'스럽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소름 돋는 강연이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던진 파문. 삶은 찬란한 순간의 합이다.  



■ 본문 중에서


# 오늘 아침은 나의 보물입니다 – 4~5p.


5시 40분, 원하는 시간에 정확히 울려준 나의 알람은 나의 보물입니다.

그 알람 소리에 벌떡 일어나준 나의 몸은 나의 보물입니다.

그 몸을 수영장까지 데려다 준 평범한 나의 차와

그 차의 창으로 잠깐 느낀 신선한 아침 공기는 나의 보물입니다.

뛰어들 때마다 저절로 “아, 좋다” 말하게 만드는 수영장의 찬물과

그 물을 헤칠 때 온몸으로 느껴지는 물살은 나의 보물입니다.

그리고 식탁에서 마주한 따뜻한 두부 한 모는 나의 보물입니다.

출근길 차 안에서 들은 파바로티의 목소리는 나의 보물이고

그 목소리의 선율을 만들었던 베르디라는 사람은 나의 보물입니다.

구름 사이로 내리비치는 햇살, 장마로 약간 불어난 중랑천의 물길, 

삭막한 시멘트 벽면을 부드럽게 덮어가는 담쟁이덩굴의 부지런함,

그 담쟁이덩굴에서 볼 수 있는 총천연색 연두색의 향연,

천변에 아무렇게나 핀 노란 들꽃, 그 들꽃을 살짝살짝 흔드는 바람,

그 바람을 헤치는 자전거의 풍경, 그 위를 나는 이름 모를 새의 날개짓,

물새들이 가끔 보여주는 이륙과 착륙의 경이적인 몸짓,

거기에 간지러운듯 반응하는 개천 물의 흰 포말…

출근길에 만나는 이 모든 풍경은 나의 보물이고, 천천히 달리며

이런 풍경을 즐길 수 있게 만들어준 교통 정체는 나의 보물입니다.

사무실에서 내가 직접 내려 마시는 녹차 한잔은 나의 보물입니다.

그 녹차와 함께 업무 모드로 바뀌는 나의 머리와

오늘 처리해야 할 열한 가지 일들은 모두 나의 보물입니다.

늘 그 자리에서 별문제 없이 내 명령을 기다리는 내 노트북과

바탕화면에 깔아놓은 보물 1448호 백자 사진의 단아함은

나의 보물입니다. 그리고 이 원고를 써야 한다는 스트레스와

이렇게 원고를 쓰고 있는 이 순간은 나의 보물입니다.

오늘 아침은 나의 보물입니다. 나의 일상은 나의 보물입니다.



#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박웅현 – 25p.

감동에서 시작되었다. 사실은. 박웅현이 만든 광고 시리즈 <사람을 향합니다> 가운데 하나를 보고 놀랐다. 이건 시(詩)구나!
카피는 이렇다.
왜 넘어진 아이는 일으켜 세우십니까?
왜 날아가는 풍선은 잡아주십니까?
왜 흩어진 과일은 주워주십니까?
왜 손수레는 밀어주십니까?
왜 가던 길은 되돌아가십니까?
사람 안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을 향합니다.

이 글에 등장하는 장면은 조금도 극적이지 않다. 우리 둘레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감동스럽다.



“아리스토테레스는 틀렸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소통은 ‘발신자 → 메시지 → 수신자’라는 경로를 거친다는 겁니다. 그러나 오히려 ‘수신자 → 메시지 → 발신자’라는 경로가 옳습니다. 제대로 소통하기 위해서는 발신자가 하고 싶은 말을 한다고 되질 않습니다. 수신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소통이 쉬워집니다.”

그렇다. 소통은 내가 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오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내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귀가 열리는 법이다. 그러려면 내가 먼저 수신자에게 다녀와야 한다. – 36p.



# <토지>는 히까닥하지 않았다 – 53~54p.

광고는 팀의 작업이다. 박웅현은 그래서 내가 했다,가 아니라 우리가 했다,고 말하길 좋아한다. 말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말로만 ‘우리’라고 하면 금방 알아챈다. 알아채는 순간 ‘말로만 우리’가 남을 뿐이다. 인터뷰를 하면서 만나본 박웅현의 팀에는 수많은 내가 톡톡 튀며 살아 있으면서도 ‘우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카피 누가 썼어?”
“몰라, 네가 쓴 것 같아.”
“아니야. 네가 이 줄 이야기를 했잖아.”
“그러면 앞줄은?”
이런 식이었다. SK브로드밴드 광고의 밑그림 분위기는 누군가가 ‘앙리 루소’ 그림 이야기를 했고, 디자인팀에서 ‘이런 거?’ 하면서 만들기 시작했고, 생각들을 뒤섞었다고 했다.
사실 이 책도 우리가 쓴 것이다. 진작에 출판사는 박웅현의 ‘소통과 소통을 위한 창의력 기술’에 반해 있었고, 나는 박웅현의 광고에 공감했기 때문에 자주 떠벌리고 다녔다. 그리고 박웅현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공감했다. 우리는 비슷한 데가 많았다. 사실 비슷하다는 말은 다르다는 뜻이다. 그냥 ‘다르다’라는 말과 다른 점은 온도 차이일 뿐이다. 다르다는 낱말을 따뜻하게 만들면 비슷하다가 된다. 다르기 때문에 할 말도 많고, 궁금한 것도 생기는 것이다. 비슷하다는 말은 다르기 때문에 갈라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인터뷰가 거의 끝나갈 때쯤 박웅현이 말했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강 선생님이 가장 많이 한 말이 뭔지 아세요?”
“창의성… 인가요?”
“녹음을 들어보시면 알겠지만, ‘맞아요, 그럼요, 그래요’ 였어요.”


# 촛불이라는 이름의 광고 - 100~101p.


믿지 못할 일이었다.
월드컵 16강
거리는 기쁨에 넘쳤다.
같은 시각
또 하나의 믿지 못할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두 명의 여중생이 죽었다.
미군 장갑차에 깔려서
친구의 생일잔치에 가던 길이었다.
언론은 크게 다루지 않았다.
미군은 책임이 없다는 발표를 했고
정부는 침묵했다.
두 명의 소녀가 죽었는데
세상은 조용하기만 했다.
한 네티즌이 있었다.
죽은 이의 영혼은 반딧불이 된다고 합니다.
촛불을 준비해주십시오.
저 혼자라도 시작하겠습니다.
작은 제안이었다.
한 개의 촛불이었다.
그것으로 무엇을 밝힐 수 있을까?
상대는 미국의 군대였고
모든 이의 시선은 월드컵을 향해 있었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기적이 일어났다.
촛불이 옮겨 붙었다.
그해 한국은 월드컵 4강에 진입했다.
모두들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해 한 개의 촛불이
세상을 환하게 밝혔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 창의성이란 무엇인가? – 110~113p.

“인생은 무엇인가라고 정의하고 사는 사람은 없다. 문학은 무엇인가 정의를 해놓고 시를 쓰고 소설을 쓰는 사람은 없다” (<디지로그>, 생각의 나무, 2006, 154쪽) 그리고 창의성은 인간의 손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창의성의 실체는 생각이 아니라 행동에서 실처럼 풀려나온다는 것이다.
우리가 저문 여름 뜨락에 
엷은 꽃잎으로 만났다가

네가 내 살 속에, 내가 네 꽃잎 속에
서로 붉게 몸을 섞었다는 이유만으로 

열에 열 손가락 핏물이 들어
네가 만지고 간 가슴마다
열에 열 손가락 핏물자국이 박혀

사랑아 너는 이리 오래 지워지지 않는 것이냐
그리움 손끝마다 핏물이 배어
사랑아 너는 아리고 아린 상처로 남아 잇는 것이냐.

- <봉숭아>, 도종환 
세상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2연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은 봉숭아 꽃물을 들이는 이미지이기도 하지만 또한 섹스 장면이기도 하다. “그랬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랑은 열 손가락에 핏물자국으로 박혀서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새로운 시선은 새로운 답을 보여준다. 그 답이 아름다운 시가 되었다. 그러고 보면 창의성은 새로운 시선을 찾아내는 능력이다.


# 창의성은 천재들의 전유물인가? – 147p.

박웅현의 생각에 따르면 사실 천재라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 빛은 어둠 속에서 빛나고, 사랑은 미움 때문에 아름답고, 기쁨은 슬픔 때문에 더 기쁜 것과 마찬가지다. 모두가 천재라면 굳이 천재라고 부를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아이큐로 서열화될 일도 없고, 이유도 되지 않는다.


# 박웅현의 창의성 - 170~171p.


미친 사람들에게 바친다.
부적응자들, 반항아들, 사고뭉치들. 네모진 구멍에 박힌 동그란 못 같은 이들. 세상을 다르게 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규칙을 싫어하고 현실에 적응하려 하지 않는다. 당신은 그들을 칭찬하거나, 반대하거나, 인용할 수 있고 그들을 불신하고, 찬양하거나, 비방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은 그들을 절대로 무시할 수는 없다. 그들이 세상을 바꾸기 때문이다. 그들은 발명하고, 상상하고, 치유하고, 그들은 탐험하고, 창조하고, 영감을 준다. 인류를 진보시키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은 미쳐야만 했는지 모른다. 어떻게 빈 캔버스에서 예술 작품을 볼 수 있는가? 어떻게 고요함 속에서 한 번도 작곡된 적이 없는 노래를 들을 수 있는가? 어떻게 실험실의 회전운동 속에서 붉은 행성을 볼 수 있는가?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위한 도구를 만든다.
사람들은 그들을 미쳤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천재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미쳤고,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Here’s to the crazy ones.
The misfits. The rebels. The troublemakers. The round pegs in the square holes. The ones who see things differently. They’re not fond of rules. And they have no respect for the status quo. You can praise them, disagree with them, quote them, disbelieve them, glorify or vilify them. About the only thing you can’t do is ignore them. Because they change things. They invent. They imagine. They heal. They explore. They create. They inspire. They push the human race forward.
Maybe they have to be crazy. How else can you stare at an empty canvas and see a work of art? Or sit in silence and hear a song that’s never been written? Or gaze at a red planet and see a laboratory on wheels?
We make tools for these kinds of people.
While some see them as the crazy ones, we see genius.
Because the people who are crazy enough to think they can change the world, are the ones who do.


# 뒤집어 보기의 아름다움 - 187~188p.

“대학교 때 읽은 <광장>에서 이런 구절을 보았어요.

보고 만질 수 없는 사랑을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게 하고 싶은 외로움이 사람의 몸을 만들었다.

저는 이 구절을 읽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어요.”
나는 감동하면 잘 운다. 박웅현은 눈물은 잘 나지 않는데 소름이 돋는다고 한다.
“최인훈은 사람의 몸이 먼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사랑이 먼저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그런데 김훈의 글을 읽다가 이 글을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한 구절을 보았어요.

인간은 기본적으로 입과 항문이다. 나머지는 그것들을 위한 부속기관들이다.

정말 충격적인 메시지였어요.”


# 맥락 속의 싱크 디퍼런트 - 219~220p.

사실 Think는 IBM 사의 창업주나 다름없는 토머스 왓슨(Thomas J. Watson)에게서 시작된 것으로 IBM 사의 오래된 슬로건이고 미국 사람들은 Think를 보면 IBM 사를 떠올렸다. IBM Think는 많은 상품을 거느리고 있다. 노트북은 Thinkpad고, 데스크탑은 ThinkCentre, 모니터는 ThinkVision, 액세서리는 ThinkAccessories였고, 서비스는 ThinkServices였다! Think different 광고가 시작될 때만 해도 아직 PC는 IBM PC 호환기종이었고, IBM은 Think였다. 그것과 다른 매킨토시를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읽으면 Think different는 또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 가치지향적인 광고 - 265~266p.

이 광고는 마지막 장면에 작게 들어간 e-편한세상이라는 회사 로고를 빼면 아파트 건설회사 광고가 아니라 환경보호를 위한 공익광고처럼 보인다. 광고는 제작자의 인식 수준이기도 하지만 광고주의 인식 수준이기도 하다. 제작자가 아무리 좋은 메시지를 담았다고 해도 광고주의 승인이 없다면 나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불리한 전쟁을 시작합시다.
적이 우리보다 수만 배쯤
강하다고 생각합시다.
우리에겐 식량도
무기도 부족하고 여론도 시간도
우리 편이 아니라고 생각합시다.
가장 용맹한 백곰마저 
얼음 조각 위에서 죽어갔으며
돌고래의 함대는
해변에서
전멸을 당했다는
불리한 전황들을 직면합시다.
어처구니없는 전쟁을 시작합시다.
거실에도 자동차에도
버젓이 들어와 번지고 있고
서서히 지구의 온도를 높여가는
적들과 싸워나갑시다.
그들의 야유와 멸시에도
굴하지 않고
새까만 씨앗들이
겨울을 견디어내듯
조금씩 이겨나갑시다.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전쟁을 시작합시다.


<인문학으로 광고하다>

박웅현, 강창래

알마, 2009


인문학으로 광고하다
국내도서
저자 : 박웅현,강창래
출판 : 알마 2009.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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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뷰


얼마전 회사에서 좋은 기회로 KAIST 김대식 교수님은 Deep Learning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강연을 들어볼 기회를 가졌다. 교수님은 Deep Learning을 소개하기에 앞서 먼저 뇌의 착각에 대한 이야기로 강연을 시작하셨다. 


“세상은 분명 존재하지만 세상은 결코 우리가 보는 것처럼 생기지 않았다.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은 뇌가 계산해 낸 결과물일 뿐이다.”

인간의 뇌는 1.5KG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 내재된 능력은 무한하다. 뇌는 우리 몸의 감각기관인 센서(눈, 코, 귀 등)를 통해 받아들인 정보들을 통계학적으로 추론하고 해석함으로써 지능을 만들어 낸다. 이 과정에서 뇌의 착각으로 인해 동일한 사물의 색상도 각자 다르게 이해하는 상황도 종종 나타나게 된다.


Deep Learning은 인간의 뇌가 경험을 통해 정보를 인지하고 학습을 하는 과정에 착안하여 탄생한 기계학습 방법이다. 인간의 뇌는 Layer 구조로 되어 있는데 각 계층별로 물체를 인식하고 분석한다. 첫 번째 Layer에서는, 이 물체가 내포하고 있는 시공간적으로 가장 작은 단위의 인과 관계를 압축해서 표현하게 된다. 다음 단계의 Layer를 거치면서 압축의 압축을 하게 되고, 10~20층 정도의 Layer를 거치게 되면 드디어 물체를 robust하게 인식하게 된다. 김대식 교수님은 Deep Learning을 한마디로 Neural Network(인공신경망) 이라고 소개한다. Deep Learning에서는 현실을 symbolic하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Big Data를 input으로 주면, 10층 정도되는 구조를 가지고 이 정보를 압축해서 표현한다고 한다. 


Deep Learning이 각광을 받게 된 이유는 1) Algorithm의 발달로 over-fitting 등의 고난도 문제를 해결했고, 2) GPU 기반의 Parallel Computing이 발달로 고속의 연산이 가능해졌고, 3) 데이터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는 점 등 3가지이다. 


최근 구글, 페이스북, 바이두와 같은 세계적인 IT 기업들이 Deep Learning의 권위자들을 스카우트하며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불과 5년 전만 하더라도 인공지능은 영화에서나 나오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기계는 일단 알고리즘만 만들어지게 되면 이후 scale-up을 빨리 하기 때문에, 어떤 영역에서는 인간은 기계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게 된다. 향후 20~30년 후면 인간은 기계와 일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날이 도래할 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현재 직업의 47%가 사라진다는 연구 결과와 앞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직업을 소개를 해주셨다. 


과연 자녀들에게 어떤 직업을 추천해야 할까?

   1) 무언가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는 일(100% 인지 자동화가 불가능한 일)

   2) 인간의 감성과 관련된 일

   3) 아주 중요한 선택을 하는 일 (결국 선택은 인간이 하게 될 것). 


김대식 교수님의 강의는 Deep Learning 기술 뿐만 아니라 삶과 일, 행복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는 멋진 강의였다. 강의로 인사이트를 얻게된 후 교수님이 쓰신 책들을 읽어보니 강의에 소개되지 않은 다양한 사례들과 뇌과학에 대한 이야기들이 소개되어 있었다. 뭇 지식인이라면 본인의 생각과 지식으로 다른이들에게 영감(인사이트)을 주고, 그것을 글로 잘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강연과 책을 통해 만난 김대식 교수님은 과연 우리시대 대표 지식인이었다. 다른이들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울림'이 있는 그를 책을 통해 만나보자.




■ 본문 중에서


# Brain Story 01. 사실 그건 '기억'이 아니라 '뇌가 쓴 소설'이다 - 24p.

우리의 뇌는 컴퓨터 하드디스크가 아니다. 하드디스크에는 정보가 입력된 그대로 저장된다. 하지만 망막을 통해서만도 매시간 100기가바이트 정도 들어오는 정보를 평생 지속적으로 보관하기엔 뇌의 저장량이 부족하다. 결국 우리의 경험은 보고 듣고 지각한 그 자체가 아니라 극도로 압축된 상태로 뇌에 저장된다. 기억과 정보 압축은 해마에서 이루어진다.

이 때 특별히 집중하며 경험하지 않은 정보는 ‘제목’ 위주로 압축된다고 볼 수 있다. 시간이 지나서 입력된 정보를 다시 불러오면 뇌는 예전에 경험했던 본래의 정보가 아니라 이미 제목으로 압축된 정보를 가져온다. 압축된 정보 사이의 구체적인 내용은 과거 경험이나 편견에 바탕을 두고 재생된다.


# Brain Story 02. 뇌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절대로 – 37p.

대화를 거부하며 ‘2+2=4’라고 주장하는 사람보다 세련된 행동과 말로 ‘2+2=5’라고 적절히 거짓말하는 사람을 더 선호하는 것이 오늘날 세상이다. 당연히 공정하지 않다. 하지만 세상이 공정하다고 믿는 그 자체가 어쩌면 어리석음의 첫 단계일지도 모른다. 물론 먼훗날 역사는 결국 진실에 한 표를 던질 수 있겠다. 하지만 경제학자 존 케인스(John Keynes)의 말을 인용하자면, 먼 훗날엔 우리 모두 어차피 다 죽는다. 미래의 역사와 철학에 대해서 우리가 지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지금 중요한 건 현실이고, 현실은 아무리 불편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자가 결국 주도하는 법이다.


# Brain Story 03. 팔은 안으로 굽고, 생각도 안으로 굽는다? – 49~50p,

어린아이는 어른과 비슷한 숫자의 신경세포들을 가지고 있지만, 서로 간의 연결성은 완성되지 않은 상태다. 마치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큰길은 유전적으로 타고났지만, 막상 부산에 도착해보면 신경세포와 주변 세포가 무질서하게 연결돼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중 적절한 시냅스도 있고, 연결돼서는 안 되는 시냅스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결정적 시기’라는 것을 가진다. 오리는 태어나서 몇 시간, 고양이는 4주에서 8주, 원숭이는 1년, 그리고 인간은 10년까지 유지되는 이 결정적 시기 동안 자주 사용되는 시냅스는 살아남고, 사용되지 않는 시냅스는 사라진다.

결정적 시기의 뇌는 젖은 찰흙처럼 주변 환경을 통해 주물러지고 모양이 바뀔 수 있다. 그 시기가 끝나면 찰흙은 굳어지고 유연성을 잃어버린다. 그래서 아이는 외국에서 자라면 그 나라의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지만, 더 이상 유연하지 않은 시냅스로 가득찬 어른의 뇌로 외국어를 배우기는 정말 괴롭다. 

결국 뇌는 미완성 상태로 태어나, 자신이 경험한 주변 상황에 최적화되도록 완성된다. 고향이 편한 이유는 어릴 적 경험한 음식, 소리, 사람, 풍경, 이 모든 것이 우리의 뇌를 완성시킨 바로 그 원인이기 때문이다. 무언가에 최적화돼 있으면 당연히 편안함을 느낀다. 선택이 필요 없고 막연히 좋다. 거꾸로 다른 환경에 최적화된 뇌를 가진 사람들은 나에게 당연한 것을 전혀 당연해하지 않거나 편해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내 것이 좋기 때문에 남의 것이 나쁘다가 아니라, 내 것이 나에게 좋은 만큼 다른 것은 다른 사람에게 좋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 Brain Story 06. 책을 보듯 상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 86~89p.

사실 뇌 보안을 걱정하기에 앞서, 우리에겐 사생활 보호란 과제가 코앞에 놓여 있다. 독일과 브라질이 제안한 ‘디지털 시대의 사생활 보호권(the right to privacy in the digital age)’ 결의가 2013년 UN 총회에서 받아들여졌다. 왜 하필 독일과 브라질이 이런 결의안을 냈을까? 미 중앙정보국(CIA)과 미 국가안전보장국(NSA)에서 일했던 미국의 컴퓨터 기술자 에드워드 스노든(Edward Snowden)이 폭로한 브라질 대통령과 독일 총리 도청 사건과 연관될 것이다. 스노든은 NSA의 무차별적 개인정보 수집 사실을 폭로했고, 이로써 디지털 시대의 개인 프라이버시에 대한 논쟁에 불을 붙였다. 이번 UN 결의에 따르면 각 국가들은 개인의 사생활 정보를 존중해야 함은 물론이고, 구체적인 규정을 통해 개인의 디지털 정보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사생활 정보, 프라이버시란 도대체 무엇일까?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겠다. 우선 나의 생각 그 자체가 나의 최우선 프라이버시라고 할 수 있겠다. 수백억 개의 신경세포 간의 정보 전달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생각’은 지금까지 인류 역사상 오로지 나만이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은 선호도를 만들어내고, 선호도는 선택으로 실천된다. 고로 선택은 나의 두 번째 핵심 프라이버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의 프라이버시는 공공장소에서 나라는 존재를 숨길 수 있는 권리를 말하겠다.


페이스북은 사진을 공유할 수 있는 서비스를 만든 인스타그램(Instagram)을 1조 원에 사들였고, 또 휴대전화로 서로 간단히 연락할 수 있게 하는 왓츠앱(WhatsApp)을 20조 원에 사들였다. 구글 역시 스마트한 실내온도 측정기를 개발한 네스트(Nest)를 3조 5000억 원에 사들였다. 조 단위로 평가받을 만한 특별한 기술도, 지적재산도, 인력도 없는 회사들이다.

디지털 시대를 가장 잘 이해하고 이끈다는 구글과 페이스북이 모두 제정신이 아닌 걸까? 물론 그럴 수 있다. 17세기 전 세계에서 가장 금융 시스템이 발달했다는 네덜란드에서 한동안 튤립 한 뿌리가 1억 원 넘게 거래되는 ‘튤립 버블’이 생겼듯 말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들은 천문학적인 액수를 투자할 만한 무언가를 얻어가는지도 모른다 바로 ‘데이터’다. 땅과 공장과 주식이 19세기, 20세기 가치의 상징이라면 21세기엔 데이터 그 자체가 부와 가치의 핵심이라는 말이다.

화폐 사용이 불가능한 감옥에서는 담배가 돈 역할을 한다. 비슷하게 디지털 세상은 가치적으로는 감옥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디지털 생태계 내부 회사들은 돈을 벌 필요도, 흑자를 낼 필요도 없다. 최대한 많은 사용자만 확보하면 된다. 사용자는 데이터고, 디지털 세상의 슈퍼 갑인 구글과 페이스북은 이렇게 모은 데이터를 실물경제에서 다시 수십, 수백 조의 현찰과 교환할 특권을 갖는 것이다. 이 세상에 공짜란 없다. 다양한 무료 인터넷 서비스를 사용하는 동시에 우리는 이미 나 자신에 대한 모든 데이터를 무료로 넘겨주고 있는 셈이다.




# Brain Story 16. 왜 ‘우리’는 ‘그들’을 싫어하는가 – 188p.

튜링의 삶과 업적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하나 던진다. 이성이 아닌 동성을 사랑하는 남녀, 소고기가 아닌 돼지고기를 좋아하는 유대인, 모든 사람이 다 대학에 진학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고등학생…… 왜 우리는 모든 사람은 꼭 나처럼 살아야 하며, 그렇게 살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차별과 원망의 대상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왜 인간의 뇌는 독립적인 개인으로 구성된 성숙한 사회가 아닌 외모나 사상적으로 동일한 클론(clone)과 함께 살고 싶어하는 것일까?


# Brain Story 21. 생각의 길이 많을수록 남들과 다른 길을 갈 수 있다 – 235p.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그렇고 독자 대부분은 천재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창의력을 키우려는 사회와 기업이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 이미 천재적 뇌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을 위해 단 하나만 해주면 된다. 바로 ‘간섭하지 않기’다.

모차르트나 스티브 잡스로 태어난 사람을 대기업 ‘김대리’로 만들지만 않으면 된다. 그리고 우리처럼 나머지 평범한 99.999퍼센트를 위해서는 역시 단 하나만 지켜주면 된다. 우리에게 모차르트가 되라고 억지스러운 요구를 하지 않고,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생각의 길이나마 제대로 써볼 수 있도록 생각의 다양성과 변화를 허락하는 것이다.

2013년은 뇌과학 역사에 충분히 기억될만한 해다. 1월엔 유럽연합이 ‘인간 뇌 프로젝트(human Brain Project, HBP)’를 10년간 10억 유로(약 1조 5000억 원)를 지원하는 두 가지 과학 연구 프로젝트의 하나로 선택했다. 유럽은 과학 초 강국이었던 예전 명성을 되찾으려는 야심과 자존심을 걸고 이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오바마 대통령은 2월 국회 연설에서 미국이 앞으로 10년간 30억 달러(약 3조 3000억 원)를 투자해 ‘뇌 지도(Brain Activity Map, BAM)’를 완성시킬 계획이라고 선언했다.


# Brain Story 23. 아프니까 사람이다? 만약 아픔이 없다면…… - 259p.

만약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HSAN4(Hereditary Sensory and Autonomic Neuropathy type Ⅳ)라는 유전병을 가진 환자들은 통증과 온도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자신의 팔이 부러지거나 발이 동상에 걸려도 느끼지 못한다. 심지어 음식을 씹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다. 혀가 물려 피가 나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정상적인 삶과 행복을 위해 아픔은 필수라는 말이다.

아픔과 통증을 통해 문제의 심각함을 알려주는 것은 신체뿐만이 아닐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의 자살률, OECD 최상의 우울증 환자 비율, OECD 최하위 수준의 행복지수…… 수천만 명으로 구성된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 역시 어쩌면 이런 통증을 통해 우리 사회의 치명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지 모른다. HSAN4 환자처럼 이런 신호들을 계속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어쩌면 우리는 우리들 공동체의 팔과 다리가 잘려나가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게 될 것이다.


# Brain Story 25. 기계가 인간을 대신하는 세상이 온다면…… - 277~278p.

구글은 무인자동차를 개발하고 아마존은 배달로봇을 사용한 택배 서비스를 계획 중이다. 인터넷 세상엔 검증되지 않은 무료 뉴스가 대세고, 교수들이 직접 하던 수업을 소수 전무낙가 ‘온라인 공개 수업(Massive Open Online Course, MOOC)’을 통해 전파하기 시작했다. 결론은 명백하다. 우리는 이미 새로운 기계혁명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 새로운 기계들은 더 이상 인간의 힘만을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다. 데이터 마이닝, 기계학습, 뇌 모방 기술로 무장한 기계들이 인간의 뇌만이 할 수 있었던 일들을 시작한 것이다. 다시 한번 수많은 직업이 사라질 것이고, 수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잃을 것이다. 이미 ‘신(新)러디즘’ 역시 등장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선 성난 시민들이 구글 통근버스의 운행을 방해하고, 무인자동차 책임 연구원의 집 앞에서 반대 시위를 하기도 했다.

기술과 사회의 발전은 시위로 막을 수도, 막을 필요도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촛불 시외도, 기계 파괴도 아니다. 19세기 인류가 전 국민 의무교육을 통해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고 더 높은 삶의 질을 가능하게 했듯, 우리 역시 새로운 교육을 통해 앞으로 사라질 일자리보다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해야 한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19세기 교육은 ‘몸’을 대체하는 기계에 적합한 ‘팩트’ 위주 교육이었다. 하지만 ‘뇌’를 대체할 21세기 기계를 다스리려면 우리는 기계가 할 수 없는, 인간의 창의성과 개성을 중심으로 한 근본적으로 새로운 스타일의 교육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 본문에 소개된 뇌과학 

해마의 이중 작용 – 29p.

해마는 새로운 정보를 형성하는 곳이지만, 기억해야 할 지식 자체를 저장하는 곳(long-term storage)은 아니다. 기억은 뇌의 각 영역에 걸쳐서 시냅스(synapse)의 연결로 저장된다. 여기서 해마는 조합을 통해서 새로운 정보 조각들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므로, 일단 해마가 파괴되면 새로운 조합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더 이상 새로운 정보를 습득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전에 형성됐던 조합은 계속해서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과거에 배웠던 것들을 기억할 수 있다.

새로운 조합과 기억을 만드는 데 대표적인 역할을 하는 해마가 공간적 위치를 나타내는 데도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예를 들어, 잘 알고 있는 거리를 돌아다니는 장면을 떠올릴 때 해마는 매우 활동적으로 바뀐다. 동물 연구에서도 동물이 자꾸 움직일수록 해마의 신경세포들은 공간적 위치를 나타내고 있었다.

해마의 이중 작용이 우연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기억과 공간 탐험의 중복이 학습과 기억의 조합으로 사용되는 공간적 위치를 훨씬 효과적으로 만든다는 것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뇌의 기본 단위, 뉴런 – 43p.

뇌는 뉴런이라고 하는 수천억 개의 세포로 구성돼 있다. 뉴런은 뇌의 기본 단위로서, 감각기관과 뇌 운동기관 사이에서 신호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뉴런은 세포체(cell body), 수상돌기(dendrite), 축삭돌기(axon)로 구성돼있다. 세포체에서는 뉴런이 일을 잘할 수 있도록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실제로 뇌의 무게는 몸무게의 2퍼센트 밖에 안 되는 1.5킬로그램 정도이지만, 심장에서 나가는 피의 15퍼센트를 소비한다.

작은 나무처럼 생긴 수상돌기를 통해서는 다른 뉴런들로부터 정보를 받아들인다. 예를 들어 눈으로 보는 것은 망막을 통해 시각피질(visual cortex)로 전달되는데, 이때 이 시각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수상돌기다. 일단 수상돌기가 받아들인 정보는 세포체를 거쳐서 뉴런의 긴 ’꼬리’로 내려간다. 이 꼬리가 바로 축삭돌기다. 축삭돌기는 전선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뇌의 한쪽에서 받아들인 정보(신호)를 멀리까지 전송한다.



뉴런 사이의 연결고리, 시냅스 – 53p.

시냅스는 한 뉴런의 축삭돌기 끝 부분과 다른 뉴런의 수상돌기 사이의 연결 부분이다. 각각의 뉴련은 수천 개의 다른 뉴런과 연결되는데, 이는 수상돌기의 나무들이 수천 개의 시냅스를 덮고 있다는 뜻이다.

뉴런의 작동원리는 다음과 같다. 수천 개의 뉴런을 통해 들어오는 신호의 합이 어느 한 계를 넘으면, 신호를 받은 뉴런에서 반응이 일어나 전기 스위치가 켜진다. 그러나 신호의 합이 정해진 한계치를 넘지 못하면 뉴런은 반응하지 않는다. 즉 스위치가 꺼져 있는 셈이다. 이렇듯 뇌는 수억 개나 되는 뉴런들의 고리인 시냅스로 복잡하게 연결돼있다. 눈의 망막 같은 곳에서 일단 초기 반응이 시작되면 시냅스와 뉴런이 신경반응의 전류를 일으켜 뇌 전체로 반을을 전하게 된다.



양쪽 뇌와 뇌량 – 64~65p.

인간의 뇌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 중 하나는, 뇌가 거의 유사한 두 부분, 즉 오른쪽과 왼쪽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크기와 모양이 거의 같아서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인다. 보통 왼쪽 뇌는 신체의 오른쪽으로부터 입력신호를 받는데, 예를 들면 오른손이나 시각 영역의 오른쪽으로부터 나온 정보는 왼쪽 뇌에 도착한다. 반면에 오른쪽 뇌는 모든 정보를 신체의 왼쪽으로부터 받는다.

그냥 겉으로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양쪽 뇌는 서로 다른 일을 할 것이라는 가설도 있다. 왼쪽 뇌는 수학적이고 논리적인 생각을 담당하고, 오른쪽 뇌는 언어나 감정 처리를 맡는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것은 논쟁의 여지가 많다. 확실한 것은, 양쪽 뇌가 하는 일이 각각 다르더라도 그 차이가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미미하지만, 언어만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의 언어는 주로 왼쪽 뇌에서만 처리된다고 알려져왔다. 그리고 오른쪽 뇌는 음악을 담당하면서 독특한 소리정보를 처리한다.

이처럼 양쪽 뇌의 가장 큰 차이점은, 왼쪽 뇌에서만 인간의 언어가 처리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왼쪽 뇌는 어떻게 신체의 오른쪽으로부터 도착한 정보를 아는 것일까? 이것은 뇌량이라고 불리는 2억 개 이상의 축삭돌기 다발이 교량 역할을 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뇌량은 오른쪽과 왼쪽을 연결하는 부분인데, 이곳을 통해 정보가 교환된다. 그래서 왼쪽 뇌는 언제나 신체의 오른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뇌의 젊은이, 대뇌피질 – 75p.

일반인들은 ‘뇌’하면 ‘대뇌피질(cerebral cortex)’이라고 불리는 깊은 주름과 굴곡으로 이루어진 이미지를 떠올린다. 대뇌피질은 밖으로 보이는 뇌의 한 부분으로 1센티미터도 안 되는 얇은 세포막으로 만들어졌다. 이 얇은 막이 편도핵이나 시상 같은 뇌의 다른 부분을 감사고 있다.

대뇌피질은 뇌에서 ‘젊은이’라고 할 수 있다. 진화론적으로 더 오래된 것일수록 뇌의 중심에 위치하는데, 뇌의 중심에는 ‘핵’이 있고 젊은 대뇌피질이 그 핵을 둘러싸고 있다. 파충류나 어류 등 원시동물의 뇌는 거의 뇌의 핵 부분만 가지고 있다. 진화가 계속되면서 대뇌피질은 점점 더 커지게 됐고, 결국엔 중심핵을 모두 뒤덮게 됐다. 그와 동시에 보고 듣는 것과 같은 중심핵의 역할도 대뇌피질에서 하게 됐다.

뇌의 각 영역이 하는 일 – 90~91p.

뇌의 여러 부분은 각각 다른 일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뇌의 뒷 부분에 있는 후두엽(occipital lobe)에서는 ‘보는 것’을 담당하는데, 눈의 망막으로부터 들어온 물체가 시상핵을 통해 후두피질로 옮겨간다. ‘듣는 것’은 뇌의 좌우에 있는 측두엽에서 담당하고 ‘생각’과 ‘결정’은 뇌의 앞부분에서 맡고 있다.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은 뇌 앞부분의 대뇌피질 아래에 있는 ‘후각신경구(olfactory bulb)’ 덕분이다. 인간의 후각신경구는 대뇌피질로 완전히 덮여 있기도 하지만, 살아가는 데 있어서 ‘냄새 맡기’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파충류의 후각신경구 보다는 덜 효율적이다. 마지막으로 ‘학습’은 해마에서 일어난다.

뇌의 각 영역은 세상에 대한 정보 처리만 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세상에 대한 ‘지도’를 갖기도 한다. 예를 들면 뇌의 중간 부분에 있는 감각피질(somatosensory cortex)은 신체구조를 나타낸다. 신체의 특정 부위를 만지면 뇌의 관련 부분에서 활발한 반응을 보이므로 뇌를 가지고 몸의 지도를 그릴 수도 있다. 뇌에서 신체를 나타내는 인체모형(homunculus, 호문클루스는 사람 속에 있는 작은 난쟁이라는 뜻이다)은 약간 우습게 보인다. 예를 들어 손가락이나 얼굴 같은 부분은 실제보다 더 크게, 목이나 등은 실제 사이즈가 아니라 정보를 처리하는 중요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낸다. 결국 손이나 혀에서 오는 감각정보가 목이나 등에서 오는 정보보다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절차적 지식서술적 지식 – 109p.

우리는 매일 별다른 의식 없이 엄청난 양의 지식을 활용한다. 예를 들어 양치질하는 법, 자동차를 운전하는 법, 심지어는 두 다리로 걷는 것도 광범위하게 보면 모두 지식의 범주에 속한다. 이런 일상적인 행동들은 아무런 훈련 없이도 그냥 수행할 수 있는 듯 하지만, 사실은 뇌의 시각 담당 신경계와 운동 담당 신경계가 결합돼 일어나는 상당히 복잡한 작업이다. 이렇게 습득하는 지식을 절차적(procedural)지식이라고 부른다. 절차적 지식이란 어떤 일을 수행해나가는 과정이나 흐름에 관한 지식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 신체가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

반면 서술적(declarative) 지식은 세상의 사물이나 개념 등에 관한 지식으로, 신경과학자들은 절차적 지식과 서술적 지식이 서로 다른 신경체계에 의존한다고 믿는다. 서술적 지식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생각해내는 데 시간과 집중을 요하는 지식이다. 예를 들어 독일의 수도가 어디냐는 질문을 받으면 잠깐은 생각해봐야 한다. 둘재는 자기 이름이나 나이처럼 고민하지 않고도 쉽게 알 수 있는 지식이다. 이것은 두 다리를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고도 걸을 수 있는 것처럼 자동화된 지식이다.

뇌는 세 단계를 거쳐 자란다 – 139p.

뇌와 관련해 가장 놀라운 사실은, 성장하는 동안 뇌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몇 가지 기본적인 변화는 거의 모든 뇌에서 유사하게 일어난다. 그리고 뇌가 자라는 동안의 시냅스 연결성은 세 단계로 구성된다.

처음 두 단계는 유전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외부 환경의 영향을 그다지 받지 않는다. 이 단계에서 뇌의 연결 패턴은 대충 골격만 갖춘 기본 구성이므로 연결성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다. 세부적인 시냅스 연결은 그 다음 단계에서 이루어지는데, 주변의 감각적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 결정적 시기라고 불리는 기간 동안에 많이 사용되는 시냅스들은 연결이 점점 더 강해지고, 그렇지 않은 것은 약해지다 사라진다.

일단 결정적 시기가 끝나고 나면 시냅스의 연결성은 더 이상 바뀌지 않는다. 즉 결정적 시기 동안 두뇌의 하드웨어가 결정된다는 뜻이다. 이후에 배우는 모든 것들은 12세 전후에 결정되고 굳어진 시냅스의 통로(pathway)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각피질 – 148~149p.

‘본다’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눈만 뜨면 바로 옆의 사물이 보이기 때문에 별다른 의미가 없는 질문으로 여길 수 있다. 그러나 현대 뇌과학에서는 이런 간단한 문제가 뇌의 신비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3, 4세 아이의 뇌는 아무 문제 없이 엄마의 얼굴을 알아보지만 세계 최고 성능의 슈퍼컴퓨터는 아직까지 사람의 얼굴을 인식하지 못한다.

사람의 뇌 구조와 가장 흡사한 원숭이의 뇌의 절반 이상은 시각 처리를 위해 사용된다. 사람이 물체를 보는 과정을 풀어서 설명해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보면 그 사물에 반사된 빛이 눈의 렌즈와 망막을 통해 대뇌의 후반부에 위치한 ‘주시각 대뇌피질(primary visual cortex)’이라는 시각뇌의 영역에 도착한다. 이 영역에는 그 사물에 관한 모든 정보가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지만, 주시각 대뇌피질을 지나면 사물에 관한 정보는 약 25개의 영역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이 영역들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머리의 위쪽에 있는 부분은 주로 사물의 위치와 움직임에 관한 정보를, 아래쪽에 있는 부분은 사물의 형태나 색깔, 구조에 관한 정보를 받아들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빨간 사과를 볼 때 그 사물을 ‘빨간’ ‘둥근’이라는 두 개의 정보가 아니라 ‘빨간 사과’라는 하나의 정보로 인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대 뇌과학에서는 두 가지 가설을 내놓고 있다. 유력한 이론은 사물에 반응하는 많은 영역들의 활동 자체가 그 사물의 영상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고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에 경험했던 것을 연상하면서 그 모양을 인식하는 것은 의미한다. 또 다른 주장은 뇌 안에서 흩어진 여러 가지 정보가 밝혀지지 않은 뇌의 또 다른 영역에서 합쳐진다는 것인데, 이 주장은 뇌과학자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언어를 담당하는 브로카베르니케 – 179p.

뇌는 보통 좌우 대칭적으로 작용하는데, 그렇지 않은 대표적인 예가 언어 처리기능이다. 소리정보는 좌우 뇌를 오가면서 처리되는 반면, 언어는 좌뇌에서만 처리된다.

좌뇌에는 언어를 담당하는 중요한 부분으로 브로카 영역과 베르니케 영역이 있다.

브로카는 프랑스의 인류학자이며 외과의사인 브로카가 밝힌 뇌의 언어 담당 영역으로, 말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다. 유아기에 외국어를 학습하면 모국어와 같은 브로카 영역에서 처리되지만 성인이 되어 배우는 경우 두 개의 브로카 영역이 생긴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베르니케는 폴란드 태생의 독일 해부학 및 신경병리학자인 베르니케가 언어장애에 대해 연구하다가 밝혀낸 좌반구의 영역으로, 문장 전체를 해석하고 처리하는 역할을 맡는다.


<내 머릿속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김대식

문학동네, 2014



내 머릿속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국내도서
저자 : 김대식
출판 : 문학동네 2014.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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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 뷰


아프리카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봉순이 언니> 다음으로 읽은 두번째 책은 <파피용> 이었다. 자칭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팬이라 말하면서도 그의 책 중에 아직 읽지 못한 것들이 많은 것이 부끄러운 팬. 매번 그의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지만 정말 뛰어난 공상가이자 천재 작가이다. 프랑스 최고의 일러스트레이터 뫼비우스의 그림까지 더해진 이번 책을 읽으면서 나는 또 한 번 그에게 감탄했다.


지난해 화제가 되었던 거장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지구 종말을 앞두고 인류의 마지막 사람들이 타고갔던 초대형 우주선은 파피용호에서 따온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인터스텔라에서는 지구의 사막화, 황사로 인해 식량난이 생기고 더 이상은 인류가 살 수 없는 환경오염에 의해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고자 한다. 반면 파피용에서는 지구에서 지속되는 전쟁과 폭력에 지쳐 언젠가는 멸망해 버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이들의 의해 새로운 프로젝트로 14만 4천명이 탑승하는 거대한 파피용호를 제작한다. 흡사 노아의 방주를 연상시키는 이 범선.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식물 종을 탑승시키고 각 종들을 수정란 상태로 냉동 보관도 해두었다. 또한 각자 전문적인 재주를 가진 폭력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파피용호에 탑승한다. 단 정치인, 군인, 목사는 제외되었다. 


정부도 군대도 종교도 없는 태초의 사회, 유토피아를 꿈꾸며 새로운 삶의 터전을 향해 약 천 년의 항해를 시작한 파피용호. 몇 세대가 지나가면서 파괴자로서의 인간의 본성이 서서히 드러나게 된다. 권력자에 의지하고, 독재와 지배, 전쟁과 싸움이 반복되었다. 세대를 거듭하며 점점 더 폭력적이고, 잔인해지고, 파피용호의 인류들은 피폐해져만 갔다. 그리하여 남게 된 6인, 그 중에서 마지막 행성에 착륙한 최후의 2인 남녀. 최후의 2인 마저도 싸움을 이기지 못해 여자가 죽고 난 후 남자 홀로 남았다. 


여기서 천재 이야기꾼 베르베르의 진가가 발휘된다. 아담과 이브 야훼의 이야기로 매듭지어진 결론. 결말에 이르기 전까지는 책장을 넘기면서 현대 이 시대의 TV 뉴스를 도배하는 폭력과 범죄가 파피용호에서 동일하게 반복되는 장면에 우울해졌고, 아프리카를 여행하며 마주친 흑인들의 슬픈 눈, 혹은 복수심에 가득찬 눈을 마주치며 돋아났던 나의 염세주의가 다시 솟아났었다. 그러나 탁월한 이야기꾼의 결론에 나의 염세주의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마침표를 찍고 말았다. 꿈을 꾸게 만드는 그의 언어와 글. 오늘도 새로운 희망과 꿈을 그리며 그의 다음 책을 기다린다.



■ 본문 중에서


6. 어두워지는 길 - 25p.

이렇게 지내면서 그녀는 뉴스를 통해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계, 그 동안 늘 바다로 달아나면서 회피해 왔던 세계와 마주하게 되었다.

참으로 강렬한 이미지들이었다.

그녀의 세계는 전쟁이었다.

그녀의 세계는 종교적 맹신이었다.

그녀의 세계는 끊임없는 환경오염이었다.

그녀의 세계는 인구 과잉이었다.

그녀의 세계는 가난과 기아와 빈곤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전 세계적으로 새로운 부유층이 출현했다. 이들은 다수의 고통을 외면하며 파렴치하게 살아남았다.


7. 어둠 속의 빛 - 27p.

텔레비전을 보면 쉽게 기분을 바꿀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불행을 지켜보면 자기 자신의 불행을 잊을 수 있었따.

거울 속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나는 두렵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고 있으면 안심이 된다.

바깥 세계의 상황이 심각하면 할수록 자신의 처지는 상대적으로 볼 수 있었다.


11. 첫 번째 솥: 도가니 - 49p.

새로운 시도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세 가지 적과 맞서게 되지. 첫 번째는 그 시도와 정반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야. 두 번째는 똑같이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지. 이들은 자네가 아이디어를 훔쳤다고 생각하고 자네를 때려눕힐 때를 엿보고 있다가 순식간에 자네 아이디어를 베껴 버린다네. 세 번째는 아무것도 하지는 않으면서 일체의 변화와 독창적인 시도에 적대적으로 반응하는 다수의 사람들이지. 세 번째 부류가 수적으로 가장 우세하고, 또 가장 악착같이 달려들어 자네의 프로젝트를 방해할 걸세.


20. 소금의 승화 - 92~93p.

밀폐 공간에 모인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현재 우리 인간의 불행한 모습을 초래한 삶의 도식들을 그대로 재현하고 말았어요. 구성원들과 상관없이 인간 집단은 결국 착취자와 피착취자, 자유 의지가 있는 인간과 학대받는 자를 양산하게 되어 있습니다. 집단의 규모가 클수록 우두머리는 더 혹독해지고, 피학대자들의 고통도 커집니다.


21. 14만 4천 개의 불꽃 - 96~98p.

1) 자율성. 즉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자기 일을 해결하는 능력

2) 사회성. 즉 개인의 이익을 초월하여 집단과 공공의 이익을 생각할 줄 아는 능력

3) 동기 부여. 즉 D.E. 프로젝트의 성공을 바라는 의지.

4) 건강. 흡연자, 알코올 중독자, 마약 중독자, 장기간 약을 복용하는 사람도 안 됩니다. 

5) 젊음. 나이를 20~50세 사이로 제한했다.

6) 가족이라는 구속 요소가 없을 것. 탑승객은 독신이어야 하며 부양할 자녀나 부모가 없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7) 탑승객은 한 가지 전문 분야, 즉 특별한 재주가 있어야 한다. 아드리앵은 우주선 안에서는 먹이 사슬 뿐 아니라 사회적 망도 재구성되어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의사, 생물학자, 화학자처럼 상호 보완적인 전문 지식을 갖춘 사람들도 필요하지만 <농촌 같은> 우주선 내부의 환경을 고려해 농부, 제빵 기술자, 요리사, 대장장이, 직조공, 건축가, 석공, 장인(匠人)도 필요할 것이라고 했다.


제 생각에 꼭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정치인, 군인, 목사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정부도 군대도 종교도 없는 최초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권력과 폭력, 신앙 이 세가지야말로 대표적인 의존형태지요.


22. 침전 - 102p.

화를 잘 내는 사람들.

타인의 문제에 무관심한 사람들.

반사회적인 행동 양식을 가진 사람들.

개인의 자유 의지를 무시하고 지도자를 추종하기만 하는 사람들이 탈락했다.

43만 3천 명이던 사람들이 1주일 만에 31만 명으로 줄었다.


38. 비밀 - 188p.

이것으로 밤이 시작하고    Cela commence la nuit.

이것으로 밤이 끝난다    Cela finit le matin.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달을 쳐다볼 때 보인다.    Et on peut le voir quand on regarde la lune.


42. 설탕이 된 소금 - 215p.

실수를 저질로 놓고도 굳건한 모습을 보이는 게 진실을 확보해 놓고도 흔들리는 것보다 낫지. 회의를 품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누구도 귀 기울여 듣지 않거든.


47. 캐러멜화의 위험 - 244~245p.

우리 모두는 타인에 대한 편집광적인 인식 체계를 지니게 되었어요. 젊은 시절에 우리 부모들, 학교, 일터, 텔레비전이 우리를 눌러서 거푸집에 넣어 버린 결과죠. 거기서 쉽게 벗어나는 건 불가능해요. 여러 해 동안 우주여행을 해도 그렇게 우리 의식 속에 뿌리를 내린 것들을 뽑아 내기는 어려워요. 그러니까 이제는 그것을 잊어버리도록 나비인들의 뇌를 세척해야 해요. 깨끗해질 수 있게, 지금까지 보고, 당한 폭력들을 떨쳐 버릴 수 있게 말이에요. 모두의 기억 속에서 어린 시절에 볼기짝을 맞았던 기억까지도 다 지워질 수 있게. 어둠에 대한 두려움도, 늑대에 대한 두려움도 기억 속에 남아 있지 않게.


55. 휴식의 시간 - 278p.

「자연은 논리적으로 움직여. 자연이 우리가 빠른 속도로 진화해서 아주 강력한 동물이 되게 한 것은 우리 인간에게 <자기 제한적인> 유전자가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기 때문인지도 몰라. 우리 스스로 자연을 완전히 정복했다고 믿지만, 사실은 우리보다 앞서 멸종한 다른 종들과 비교하면 특별히 그렇다고 할 수도 없어. 자연은 질병, 유성, 기후 변화를 동원해서 그들의 멸종을 유도했지. 그러니까 우리 인간에게, 우리들 유전자 속에 입력된 시나리오에도 이미 종말이 예정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거야.」

「그럼 당신 말은, 어떤 종이 탄생할 때 자연은 미리 그 종의 종말을 에견하고 있단 거야?」

「적어도 그 종의 <제한자>가 무엇인지는 알지. 어떤 종들의 경우에는 그 제한자가 포식자일 수도 있어. 인간의 경우는 자기파괴 충동이 바로 그 제한자야.」

「과연 그럴까? 우릴 봐, 우린 그런 충동이 없는걸.」

「우리가 정상이 아닌 거야. 아이들을 봐. 누가 뭐라고 이야기를 해준 것도 아닌데 아이들이 제일 먼저 하는 놀이가 바로 전쟁놀이야.」

「사내아이들이나 그렇지. 여자 아이들은 아니야.」

「여자 아이들도 그래. 여자 아이들은 말로, 서로를 비방하면서 할퀴고 물어뜯지. 결국 인간이란 존재는 서로 잘못되기만을 바라는 거야. 전혀 모르는 사람을 그저 본능 발산의 차원에서 죽여도 된다면, 그것도 어떤 처벌도 받지 않고 말이야, 그럼 누구라도 서슴지 않고 살인을 저지르게 될걸. 경찰과 군대라는 또 다른 형태의 집단적인 폭력만이 개개인이 이런 파괴의 열망을 분출하지 못하도록 제지할 수 있지.」


60. 천 년 동안의 숙성 - 307p.

평화 다음에는 전쟁.

중앙 집권화 다음에는 분권화.

대도시들 다음에는 작은 마을들.

의회 체제 다음에는 독재 체제.

안정 다음에는 광란.

무정부 상태 다음에는 전체주의.

학살 다음에는 출생.

화려한 패션 다음에는 경직된 패션.

파피용호의 탑승자들은 이렇게 후세 사람들이 <인간 무리의 역사적인 호흡>이라고 정의한 순환을 겪고 있었다.

숨 들이쉬기 다음에는 숨 내쉬기.


그리고 세대가 계속 이어졌다. 부모 세대의 잘못을 반복하고, 해결책을 모색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과 새로운 종교, 새로운 철학, 새로운 법, 새로운 독재자, 새로운 지도자, 새로운 유행을 시험했다. 과거로 회귀할 때마다 고통은 가중되었다. 전염병으로 더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독재자는 더 잔인해졌다. 무정부 상태는 더 파괴적인 결과를 낳았다.


감사의 말 - 391p.

파피용을 집필하는 동안 들었던 음악:

- 베토벤의 「교항곡 6번」과 「교향곡 7번」

- 비발디의 「사계」(조 새트리아니의 하드록 버전)

- 사무엘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

- 영화 「갈매기으 꿈」 사운드 트랙 (닐 다이아몬드)

- 영화 「듄」 사운드 트랙 (그룹 토토)

- 영화 「우리 친구 지구인」 사운드 트랙 (알레스 자프레, 로이크 에티엔)



<파피용>

베르나르 베르베르(Bernard Werber) 지음, 전미연 옮김

열린책들, 2007



파피용
국내도서
저자 : 베르나르 베르베르(Bernard Werber) / 전미연역
출판 : 열린책들 2007.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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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 뷰


당대 최고 문장가 10인의 '우리는 왜 글을 써야 하는가'

글쓰기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로는 "생각이나 사실 따위를 글로 써서 표현하는 일"의 명사를 일컫는다. 글에는 글쓴이의 생각, 즉 글쓴이가 오롯이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을 통해 다양한 정보들을 읽고 유익한 지식을 습득한다. 때로는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읽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할레드 호세이니의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읽고 분노에 일기도 한다. 글의 힘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전달되고, 사람을 동하게 한다. 반면에 한 줄의 글이 악플이 되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사람을 죽이기도, 스스로 자살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글의 힘은 실로 대단하다. 한 줄의 글은 누군가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기도 하고, 인류의 역사를 바꿔놓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글쓰기'란 정말 매력적인 일이 아닌가. 


그렇다면 어떻게 써야 하는가?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글을 쓴다. 직장인은 보고서를, 취업 준비생은 자기소개서를, 상품 광고를 위해 멋진 카피 문구를 써야 한다. 지난해 나도 우연찮은 기회에 책을 한 권 출간한 일이 있었다. 어쭙잖은 공저로 책을 한 권 써내면서도 나는 골머리를 싸쥐어야 했다. 탈고의 과정을 거치면서 내 문장들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수차례였다. 머릿속에만 맴도는 생각을 아름다움과 감동으로, 어떻게 근사한 이야기로 풀어놓을지 몰라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리고 나서 받아든 인쇄본 책을 읽으면서도 아쉬움은 더 크게 남았다. 이 부분은 다르게 표현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이런 건 차라리 구어체를 쓰는 것이 독자들에게 더 친숙하게 다가갈텐데... 물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리듯, 노래하듯 흐르는 고은 시인의 아름다운 문장, 마법의 언어와 같이 힘 있는 안도현 시인의 문장이 그저 부러울 뿐이었다.


지적으로 충만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매일 자신을 위해 한 줄의 글을 쓴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 것인가. 블로그와 SNS 등 발전하는 매체로 인해 글을 쓸 기회는 더 많아졌지만, 많은 사람들이 소질과 재능을 핑계 삼아 글쓰기를 망설인다. 물론 날 때부터 뛰어난 문장가도 있지만, 자전거 타는 방법을 배우듯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다. 처음엔 서툴고 넘어지기를 수 없이 반복할 테지만, 부단히 노력하고 연마하면 글쓰기는 자신만을 표현하는 최고의 방법이 될 것이다. 글 쓰기는 삶의 전략이자 글을 쓰는 시간은 자신의 자아와 만남을 갖는 시간이다. 글의 문체, 문법에는 그 사람이 살아온 세월이 묻어 향을 낼 것이다. 아직도 글쓰기가 망설여지는가? <명사들의 문장강화>를 통해 이 시대 최고의 천재 문장가들 10인의 글쓰기 비법, 노하우를 전수 받아 보자.



■ 본문 중에서


○ 시인 고은의 문장강화 - 시인들의 샤먼으로 우뚝 선 고은, 우주의 노래를 담다 

표현은 따라오게 되어 있다. 수레바퀴가 굴러가면 바퀴 자국이 생긴다. 이것이 표현의 문법이고 장르이고 양식이다. 문법이 먼저 있어서 그 길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길을 가야 문법이, 문체가 생기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아픔과 희망을 노래한 작가. 1958년 등단한 이래 시, 소설, 평론 등의 저서를 150권 이상 세상에 내놓았다. 그 가운데 연작 시집 《만인보》는 '20세기 세계문학사상 최대의 기획'으로 꼽히고 있다. 팔순이 넘은 지금도 뜨거운 가슴으로 세상을 살피며 왕성한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 세계속의 시인 - 15p.

수많은 대중화된 작가들이 사회 도처를 점유하고 있다. 특히 전산 문명 이후의 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등 SNS들 덕분에 그러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임시적이고 즉흥적이며 충동적인 발언을 한다. 순간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사라져버리는 우주 속의 초신성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런 현상 속에서 '진정한 작가는 이런 불가피한 당대의 현실로부터 소외되어서 독백의 무대를 고수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고 시인이 말한다.


# 피할 수 없는 시인의 운명 - 33p.

그에게 '왜 시를 쓰는가'라는 상투적인 질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는 그런 질문 따위와는 상관없이 시를 쓴다. 그의 시를 이해하려면 그의 삶을 알아야 한다. 시가 곧 그의 삶이기 때문이다.

1962년, 그는 승려의 옷을 벗고 세상으로 환속했다. 10년간의 승려 생활로 어느 정도 전쟁의 상처를 치유했지만 다 씻어내지는 못했다. 그때 찾아온 불면증은 그를 10년 동안 따라다녔다. 가혹한 불면증과 함께 죽음에 대한 명제가 다시 들러붙었고 퇴폐와 허무주의가 그를 다시 빨아들였다. 그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무교동 술집을 찾아다니며 술을 마셨다. 프랑스 취향의 다방도 드나들면서 장폴 사르트르의 《구토》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T.S. 엘리엇의 《황무지》를 이야기했다.



○ 자연과학자 최재천의 문장강화 - 세상 모든 일의 끝에는 글쓰기가 있다.

이 세상 모든 일의 끝에는 글쓰기가 존재한다. 학자는 논문을 써야 하고 직장인은 기획안을 써야 한다. 연인을 얻으려면 연애편지를 써야 하고 식당을 광고하려면 전단지를 작성해야 한다. 글쓰기는 작가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것이다.

과학의 대중화에 앞장서는 학자. 서울대학 자연과학대학 생물학과 교수, 환경운동연합 공동 대표, 한국생태학회장 등을 지냈고, 현재 이화여자대학 자연과학대 에코과학부 석좌 교수이며, 국립생태원 초대 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과학자의 서재》《개미제국의 발견》《열대예찬》 등이 있다.


# 글쓰기가 즐거운 이유 '미리 쓰기' - 59p.

《노인과 바다》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무기여 잘 있거라》를 마지막 페이지까지 총 39번 새로 썼다. 천재 작가라도 퇴고의 과정을 비켜 갈 순 없는 모양이다.

'미리 쓰고 100번 고치는 것'. 이것이 최재천이 힘주어 말하는 글쓰기 방법이다. 그래야 글에 대한 스스로의 만족도가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 최재천의 메시지: "재능보다 더 중요한 건 치열함이에요" - 96p.

이젠 생존 독서를 하셔야 합니다. 어느 정도 인생을 살아보니까, 이 세상 모든 일의 끝에는 글쓰기가 있더라고요.

학자는 논문을 써야 하고, 회사에 들어가면 기획안을 써야 하고, 아름다운 여인을 얻으려면 연애편지를 잘 써야 하고, 식당을 새로연다면 식당 이름을 지어야 하고, 가게를 광고하려면 전단지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것도 글쓰기잖아요.

이 세상에 글스기 아닌 일이 무엇이 있을가요? 끝에 가면 모든 일이 글쓰기로 판정이 나거든요. 그런데 글쓰기 훈련을 받지 않는건 모순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쓰기는 단지 '작가'만의 소유물이 아니에요. 우리 모두의 것이죠.



○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의 문장강화 - '글' 쓰는 놈 위에 '재미'있는 놈 있다

글을 써서 폼 잡는 시대는 갔다. 재미가 있어야 한다. 자신이 겪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써라. 재미와 의미가 교차하는 지점이 바로 글쓰기의 핵심이다. 

문화심리학자이자 여가학자. 독일 베를린자유대학 심리학과 전임강사, 명지대학 여가문화연구센터 소장. 한국여가문화학회 부회장, 명지대학 인문교양학부 교수 등을 지냈고 지금은 여러가지문제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지은 책으로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노는 만큼 성공한다》《남자의 물건》 등이 있다.


# 글쓰기는 치유다 - 108p.

사람이 가장 행복할 때는 생산을 할 때예요.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밖으로 쏟아져나올 때 난 희열을 느껴요.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것들이 눈에 보이는 상품으로 만들어졌을 때의 즐거움이란 엄청난 거예요."


○ 소설가 김홍신의 문장강화 - 꾸준히 단련하라

자꾸 자기를 감독하지 말아야 한다. 내 마음 안의 검열관을 지워야 한다. 적어도 책 천 권은 읽어야 쓸 것이 생긴다. 독서로 영혼의 힘을 키우고 자신 내면의 목소리에, 감성에 귀 기울여보라. 자신의 다양한 감정을 글로 표현할 줄 알게 되는 것 만큼 짜릿한 일은 없다.

펜으로 사회의 모순에 맞선 소설가. 제15~16대 국회의원. 경실련상임 집행위워너, 민화협집행위원장, 건국대학 언론홍보대학원 석좌교수를 거쳐 현재 통일의병대표, 민주시민정치아카데미 원장이다. 지은 책으로 《인간시장》《칼날 위의 전쟁》《대발해》《인생사용설명서》 등이 있다.


# 끊임없는 퇴고와 교정의 과정 - 173p.

글도 사람과 같이 나이를 먹는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 많은 뜻을 머금고 풍부해지며 깊어진다. 글쓴이의 관심사에 다라, 또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느냐에 따라 글의 향기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글을 쓰는 사람과 그의 글이 세월과 함께 여물어가는 셈이다.

인생이 마음먹은 대로 안 되듯 처음엔 글도 계획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소설 노트에 열심히 써놓은 시놉시스가 있어도 글을 쓰다보면 시놉시스대로 가지 않고 엉뚱한 방향으로 빠지기도 한다. 마치 우리네 인생처럼 들쑥날쑥하다가 돌아오기도 하고, 서로 이야기가 엉키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일단 써보는 것이다.



○ 종합지식인 남경태의 문장강화 - 글쓰기는 즐거운 지식의 생산이다.

사유와 성찰의 결합이 없는 글은 의미가 없다. 내용과 주제가 무엇이든 작가 자신이 새롭게 각색하고 문체마저도 자신의 것이 아니면 안되는 독특한 향기를 불어넣는 글이 살아남는다.

인문학 대중화에 관심을 두고 번역가, 저술가로 활동 중인 종합지식인. 지은 책으로 《개념어 사전》《누구나 한번쯤 철학을 생각한다》《종횡무진 한국사》《종회무진 동양사》《종횡무진 서양사》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문학과 예술의 문화사 1840~1900》《페다고지》《비잔티움 연대기》《30년 전쟁》 등이 있다.


# 남경태의 메시지: "글쓰기, 이것만은 놓치지 마라" - 214~215p.

- 지식을 채우고 사유하고 재단하라.

글을 쓰려면 지식의 양이 어느 정도 축적되어야 한다. 자기의 방법대로 재단할 줄 아는 눈이 없으면 글 쓰는 의미가 없다. 축적된 지식과 철학적 통찰력을 키우는 것이 우선이다. 그 다음이 문장력과 글 쓰는 훈련이다.

- 역사는 교양이다. 반드시 통사를 읽어라.

어떤 글을 쓰든 역사를 알아두면 힘이 된다. 자신에게 맞는 통사 한두 권만 사서 보면 된다. 적어도 두세 번식 읽어라. 그래야 내 것이 된다.

- 아는 척하지 마라. 자기가 모르는 글은 절대 쓰면 안 된다.

제임스 조이스가 쓴 《피간네의 경야》를 보면 영어 알파벳 마흔다섯 개나 되는 단어가 나온다.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독자의 입장에서 말하면 폼 잡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은 독자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 저자의 지적 허영이다.

- 글은 논지가 정확해야 한다.

독자를 위해 읽을 만하게 써야 한다. 글은 소통을 위한 것이다. 자신만 아는 독백의 글은 일기에 쓰고, 확실하게 아는 글을 써라. 누구나 아는 것에 자신만의 독창적인 생각을 결합시켜야 한다. 철저하게 독자를 배려하라.

- 목차를 상세하게 적은 후 시작해라.

글쓰기가 막막할 땐 큰 목차에서 작은 목차로 세부화하면 많은 도움이 된다.

- 솔직하게 쓰되 창피해하지 마라.

진심보다 더 강력한 힘은 없다. 철저하게 아는 것만 쓰고, 행여 틀리면 고치면 된다. 아는 척하면서 쓰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그것은 독자를 우롱하는 것이다.



○ 문인 장석주의 문장강화 - 온몸으로 읽고 써라

살면서 반드시 책 한 권을 써보라. 단 한 권의 책을 쓴다면 그것은 자서전일 수밖에 없다. 에세이든 소설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그 내용은 자기 자신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게 바로 가장 독창적인 책이 된다.

시인이자 소설가이자 평론가. 출판기획자, 방송진행자, 대학교수, 북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1975년 《월간문학》 신인상을 받았고 1979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문학평론이 각각 당선되었다. 《햇빛사냥》부터 《오랫동안》까지 14권의 시집을 펴냈고, 현재 경기도 안성의 한 호숫가에 살면서 70여 권의 책을 쓴, 이 시대 대표적인 문장가이자 독서광이다.


# 나는 자유다 - 252p.

호랑이는 항상 단독으로 다녀요. 대개 동물들은 무리 지어 다니잖아요. 그런데 호랑이는 무리 짓기보다는 항상 혼자 다니죠. 작가라면 그래야 할 것 같아요. 무리의 힘을 빌려서 무언가 이루려 하지 않고 혼자서 해내는 고독한 존재가 되어야 해요. 혼돈 속에서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는 조건이 고독이 아닐까요?



○ 드라마 작가 김영현의 문장강화 - 세상을 탐색하는 즐거움

작가는 '관심'이 있어야 한다. 그 대상이 누구든, 무엇이든, 관심을 가지면 그것에 대한 자신만의 시각이 생기고, 그 시각이 글로 표현된다. 그 글을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다면 그 이상 좋은 것이 없다.

한류를 이끈 드라마 작가. 제5회 서울드라마어워즈 한류특별상 작가상, 제48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극본상 등 굵직굵직한 상을 거머쥐었으며 지금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대표 작품으로는 〈대장금〉〈선덕여왕〉〈히트〉〈로열 패밀리〉〈뿌리깊은 나무〉 등이 있다.


# 김영현의 메시지: "작가는 가슴이 끓어야 한다" - 286~287p.

- 자신만의 시각을 가져라

책을 많이 읽어라. 책은 지적 수다다. 책을 읽으면서 저자와 대화하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과도 일상에서 하지 못해던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된다. 같은 주제에 관련된 책이라도 여러 저자의 책을 읽어보면 다양한 시각을 가질 수 있다.

나는 글 쓰는 직업을 갖기 전에 그리 많은 글을 쓰지 못했다. 그런 개인적인 경험 때문인지 몰라도 많이 쓰는 것보다 많이 보고,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는 것을 권한다.

- 세상에 관심을 가져라

글을 쓰려거든 사회와 사람에 대한 관심을 끊으면 안 된다. 그것이 곧 작가로서의 역량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관심을 가지면 알게 되고, 그러면 가슴속에서 하고 싶은 말들이 끓게 된다. 언어가 끓게 된다는 말이다. 그것을 뱉어내면 그것이 글이다.

뚝배기처럼 가슴이 끓지 않으면 글을 쓰기 어렵다. 훌륭한 문장을 논하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이 가슴 안에서 끓어야 한다. 그것이 문법, 문체, 문장의 우수성보다 우선이어야 한다.

끓어야 넘치는 법이다. 그러려면 관심을 가지고 세상을 탐색해야 한다. 지금부터 책을, 신문을, 사람을, 사회를, 세상을, 자기 자신의 주변부터 둘러보라. 그럼 보이리라 믿는다.



○ 시인 안도현의 문장강화 - 가슴으로 시를 써라

글쓰기의 '정성'은 몰입이다. 모든 감각을 한 곳에 모아야 한다. 찰나의 순간일지라도 집중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음식을 만들어주는 마음으로 글을 써야 한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 너는 /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라는 시구로 잘 알려진 한국의 대표 시인. 1981년 〈대구 매일신문〉 신춘문예에서 〈낙동강〉으로 등당한 이후 많은 시를 썼으며 《서울로 가는 전봉준》《모닥불》《그대에게 가고 싶다》 등 수많은 시집을 펴냈다.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관계》 등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현재 우석대학 문예창작학과 교수다.


#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 - 319p.

시인이 묻는다. 당신에게 사과를 소재로 시를 쓰라고 한다면 무엇부터 시작할 참인가? 그는 열 가지의 행동을 수행하고 사유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 열가지 방법을 소개한다.

① 사과를 오래 바라보는 일

② 사과의 그림자를 관찰하는 일

③ 사과를 이리저리 만져보고 뒤집어 보는 일

④ 사과를 담은 접시를 함께 바라보는 일

⑤ 사과를 한입 베어 물어보는 일

⑥ 사과에 스민 햇볕을 상상하는 일

⑦ 사과를 기르고 딴 사람과 과수원을 생각하는 일

⑧ 사과가 내 앞에 오기까지의 길을 되짚어보는 일

⑨ 사과를 비롯한 모든 열매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일

⑩ 사과를 완전하게 잊어버리는 일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 안도현의 메시지: "시를 쓸 때,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 327~328p.

해야 할 것

- 많이 쓰기 전에, 많이 생각하기 전에, 많이 읽어라

- 재능을 기대하지 말고, 자신의 열정을 키워라.

- 언제 어디서든 메모할 준비를 해라.

- 상투적이고, 익숙하고, 편한 언어들을 버려라.

- 소재에 집중하기보다 사물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에 집중해라.

- 필사적으로 필사해라.

- 고독을 즐겨라.

- 많이 경험해라.

- 모방을 배워라. 모방을 하면서 모방을 괴로워해라.

- 수십 번, 수백 번의 퇴고를 즐겨라.


하지 말아야 할 것

- 제발 시를 쓸 때만 그리운 척하지 마라.

- 혼자서 외로운 척하지 마라.

- 당신만 아름다운 것을 다 본 척하지 마라.

- 아프지도 않은데 아픈 척하지 마라.

- 눈물 흘릴 일 하나 없는데 질질 짜지 마라.

- 무엇이든 다 아는 척, 유식한 척하지 마라.

- 철학과 종교와 사상을 들먹이지 마라.

- 기이한 시어를 주워 와 자랑하지 마라.

- 시에다 제발 각주 좀 달지 마라.

- 자신에게 감정을 고백하고 싶으면 일기에 쓰면 된다. 시는 감정의 배설물이 아니라 감정의 정화조다.

- 특정한 상대에게 감정을 고백하고 싶으면 편지에 쓰면 그만이다.


○ 자기계발서계의 스타 작가 이지성의 문장강화 - 내가 꿈을 배반하지 않으면 꿈도 나를 배반하지 않는다

작가는 매일 매일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매일 내가 뒤집어지는 순간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쌓여서 글에 녹아나는 것이다.

인문학으로 독자들을 초대하는 작가. 작가가 되기 위해 14년 동안 수천권의 책을 탐독했다. 주로 자기계발서를 써오다 지금은 인문학 도서로 그 분야를 확장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여자라면 힐러리처럼》《꿈꾸는 다락방》《스물일곱 이건희처럼》《리딩으로 리드하라》 등이 있다.


# 이지성의 메시지: "책 읽고 사십니까?" - 358~359p.

아침에 3분, 점심에 3분, 잠자기 전에 7분. 그 정도만 읽어도 내 인생이 여유로워지고 삶이 많이 바뀐다고 확신해요. 책이라는 것은 나를 돌아보게 해주거든요. 또 앞으로 나아갈 길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학교나 회사에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것이죠. 유일하게 책만 나의 미래를 이야기해줘요.

독서는 나 자신의 미래를 만나는 시간입니다. 하루에 단 13분도 힘든가요? 책 읽는 13분이, 한 시간이 되고, 반나절이 되고, 하루가 되는 순간이 오겠지요. 책을 사랑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쓰고 싶어질 겁니다.



○ 생태경제학자 우석훈의 문장강화 - 청춘이여, 당당하게 표현하라

일단 쓰기 시작해야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정확하게 알게 된다. 잘못 아는 것은 썼다가 틀리면 고치면 되지만, 아예 모르는 것은 아무것도 쓸 수가 없다. 일단 써봐야 내가 아는 게 있는지 없는지 알게 된다.

환경 문제와 경제 이슈를 함께 엮어 살피는 생태경제학자. 인생의 4분의 1을 독일, 프랑스, 영국, 스위스에서 보냈고, 유엔 기후변화협약의 정책분과 의장과 기술이전분과 이사를 마지막으로 국제 협상과 공직에서 은퇴했다. 지은 책으로는 《아픈 아이들의 세대》《88만원 세대》(공저)《불활 10년》《1인분 인생》 등 다수가 있다.


# 솔직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글 - 374~375p.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에서 아메리카노에 대해 거침없이 '구정물 커피', '시체 썩은 물'이라고 쓴 에코의 직설적이고 정확한 글처럼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당당하게 쓴 글을 좋아한다. "아메리칸 커피 중에는 위에서 말한 것 말고도 구정물 커피가 있다. 대개 썩은 보리와 시체의 뼈, 매독 환자를 위한 병원의 쓰레기장에서 찾아낸 커피콩 몇 알을 섞어 만든 듯한 이 커피는 개숫물에 담갔다 꺼낸 발 냄새 같은 그 특유의 향으로 금방 식별할 수 있다. 이 구정물 커피는 감옥과 소년원뿐만 아니라, 열차의 침대칸이나 일급 호텔 등에서도 마실 수 있다."



■ 차 례


서문

시인 고은의 문장강화 : 시인들의 샤먼으로 우뚝 선 고은, 우주의 노래를 담다

자연과학자 최재천의 문장강화 : 세상 모든 일의 끝에는 글쓰기가 있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의 문장강화 : ‘글’ 쓰는 놈 위에 ‘재미’있는 놈 있다

소설가 김홍신의 문장강화 : 꾸준히 단련하라

종합지식인 남경태의 문장강화 : 글쓰기는 즐거운 지식의 생산이다

문인 장석주의 문장강화 : 온몸으로 읽고 써라

드라마 작가 김영현의 문장강화 : 세상을 탐색하는 즐거움

시인 안도현의 문장강화 : 가슴으로 시를 써라

자기계발서계의 스타 작가 이지성의 문장강화 : 내가 꿈을 배반하지 않으면 꿈도 나를 배반하지 않는다

생태경제학자 우석훈의 문장강화 : 청춘이여, 당당하게 표현하라




■ 지은이 : 한정원


방송작가로 오랫동안 일하며 각계각층의 다양한 인물들과 폭넓은 교류를 가졌다. 이 시대 지식인들이 사랑한 책과 그 치열한 지성의 영혼을 정갈한 문체로 담아 낸 《지식인의 서재》와 인문 정신을 경영 철학으로 승화한 경영자들은 1년 동안 인터뷰해 펴낸 《CEO의 서재》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매일 치열한 글쓰기 작업에 파묻혀 살어가던 그에게 어느 날 문득 자신이 왜 글을 쓰는지, 어떤 글을 써야 하는지에 대한 웅숭 깊은 질문이 다가왔다. 그날로부터 1년여의 시간 동안 그는 시인, 인문학자, 경제학자, 역사학자, 번역가, 베스트셀러 작가 등등 내로라하는 당대의 문장가들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돌아와 문장과 글과 삶에 관한 지혜와 성찰이 담긴 이 책 《명사들의 문장강화》를 완성했다. 이 책은 글쓰기의 기술이나 작문법을 다루지 않는다. 이 책은 그보다 더 앞선 이야기들을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모두를 치유하는 힘을 가진 글은 어떻게 탄생하는지에 대해 유쾌하고도 진지한 논의를 담고 있다. 따라서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매일 자신을 위해 글을 쓰는 삶, 나아가 지적으로 충만한 삶의 아름다운 입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명사들의 문장강화>

한정원 지음

나무의 철학, 2014



명사들의 문장강화
국내도서
저자 : 한정원
출판 : 나무의철학 2014.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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