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머리에 - 8~9p.

자전거 바퀴에 공기를 가득 넣고 다시 길로 나선다. 팽팽한 바퀴는 길을 깊이 밀어낸다. 바퀴가 길을 밀면 길이 바퀴를 밀고, 바퀴를 미는 길의 힘이 허벅지에 감긴다. 몸속의 길과 세상의 길이 이어지면서 자전거는 앞으로 나아간다. 길은 멀거나 가깝지 않았고 다만 뻗어 있었는데, 기진한 몸 속의 오지에서 새 힘은 돋았다.


2004년의 여름은 뜨거웠다. 내리쏟는 햇볕 아래서 여름의 산하는 푸르고 강성하였다. 비가 많이 내려서 강들이 가득찼고 하구는 날마다 밀물에 부풀었다.


내가 사는 마을의 곡릉천(曲陵川)은 파주 평야를 파행서 진해서 한강 하구에 닿는다. 조강(祖江)을 거스르는 서해의 밀물이 날마다 이 하천을 깊이 품어서 내륙의 유역으로 바다의 갯벌이 펼쳐진다. 밀물을 따라서 숭어 떼가 올라와 물 위로 솟구치고 자라도 오고, 복어도 온다. 바다의 기별이 물고랑을 따라 들의 안쪽으로 실려와 이 들에서 부는 바람 속에는 벼가 익는 냄새에 갯내음이 스며 있다. 늙은 하천은 선연한 감수성으로 아득히 멀어서 보이지 않는 바다와 교접하고 있다.


살아 있는 것은 이러하나, 살아서 작동되는 것들은 마침내 저러하구나...... 내 이 작은 물고랑을 기어이 사랑해서 온 여름을 물가에 나와 놀았다. 놀다 보니 여름은 다 갔고, 몇 줄의 글이 겨우 남아 여기에 묶는다. 

가을에는 그만 놀고 일 좀 해야겠다.



# 여름에 이동하는 사람들을 위하여_경기만 등대를 찾아 - 132~133p.

배는 엔진의 힘으로 나아가지 않고, 저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아는 힘으로 간다. 엔진은 동력을 생산해내지만 이 동력이 방향성의 인도를 받지 못하면 동력은 눈먼 동력일 뿐, 추진력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엔진이 생산하는 동력은 이동의 잠재적 가능성일 뿐이다. 여기에 방향이 부여되었을 때 이 잠재적 힘은 물 위에서 배를 작동시키는 현실적 추진력으로 작동한다.

선박은 자신의 위치를 아는 그 앎의 힘으로 나아갈 방향을 가늠한다. 내가 어디에 처해 있는지를 알아야만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알 수 있다. 철새들이 태양의 기울기나 지구의 자장을 몸으로 감지해가며 원양을 건너갈 때 철새는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알지 못해도 천체가 보내주는 신호에 따라 방향을 가늠할 것인데, 인간의 몸에는 그 같은 축복이 없다. 그래서 선박을 움직여 대양을 건너가는 항해사는 "나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대답할 수 있어야만 목적지 항구에 닿을 수가 있다. 그리고 그 '나'의 위치는 물 위에서 항상 떠돌며 변하는 것이어서 항해사의 질문은 늘 새롭게 태어난다. 지나간 모든 위치는 무효인 것이다. 바다 위에서 "나는 어디에 있는가?" 라는 질문은 미래의 시간과 함께 인간의 앞으로 다가온다.



# 숲은 숨이고, 숨은 숲이다_광릉 숲에서 - 151~152p.

나는 모국어의 여러 글자들 중에서 '숲'을 편애한다. '수풀'도 좋지만 '숲'만은 못하다. '숲'의 어감은 깊고 서늘한데, 이 서늘함 속에는 향기와 습기가 번져 있다. '숲'의 어감 속에는 말라서 바스락거리는 건조감이 들어 있고, 젖어서 편안한 습기도 느껴진다. '숲'은 마른 글자인가 젖은 글자인가. 이 글자 속에서는 나무를 흔드는 바람 소리가 들리고, 골짜기를 휩쓸며 치솟는 눈보라 소리가 들리고 떡갈나무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들린다.

깊은 숲 속에서는 숨 또한 깊어져서 들숨은 몸속의 먼 오지에까지 스며드는데, 숲이 숨 속으로 빨려들어올 때 나는 숲과 숨은 같은 어원을 가진 글자라는 행복한 몽상을 방치 해둔다. 내 몽상 속에서 숲은 대지 위로 펼쳐 놓은 숨의 바다이고 숨이 닿은 자리마다 숲은 일어선다. '숲'의 피읖받침은 외향성이고, '숨'의 미음받침은 내향성이다. 그래서 숲은 우거져서 펼쳐지고 숨은 몸 안으로 스미는데 숨이 숲을 빨아 당길 때 나무의 숨과 사람의 숨은 포개진다. 몸속이 숲이고 숲이 숨인 것이서서 '숲'과 '숨'은 동일한 발생 근거를 갖는다는 나의 몽상은 어학적으로는 어떨는지 몰라도 인체 생리학적으로는 과히 틀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몸이 입증하는 것들을 논리의 이름으로 부정할 수 있을 만큼 명석하지 못하다.

밥벌이에 지친 날에는 숲 속의 나무들이 더 아름다워 보인다. 먹이를 몸 밖에서 구하지 않고, 몸 밖의 먹이를 입으로 씹어서 몸 안으로 밀어넣지 않고, 제 몸속에서 햇빛과 물과 공기를 비벼서 스스로를 부양하는 저 푸르고 우뚝한 것들은 얼마나 복 받은 존재들인가. 중생의 맨 밑바닥에서 나무는 중생의 탈을 벗고 있다.



# 나이테와 자전거_광릉수목원 산림박물관 - 163~164p.

나무의 늙음은 낡음이나 쇠퇴가 아니라 완성이다. 이 완성은 적막한 무위이며 단단한 응축인 것인데 하늘을 향해 곧게 서는 나무의 향일성은 이 중심의 무위에 기대고 있다. 무위의 중심이 곧게 서지 못하면 나무는 쓰러지고 거죽의 젊음은 살 자리를 잃는다. 중심부는 존재의 고요한 기둥이고 바깥쪽은 생성의 바쁜 현장인데, 새로운 세대의 표층이 태어나면 생성과 존재가 사명을 교대하면서 나이테는 하나씩 늘어간다. 동심원 속에서 늙음과 젊음이, 전위와 후방이 순탄한 질서를 이루어 나무는 곧게 서서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또 잎을 떨군다. 



# 권력화되지 않은 유통의 풍경_모란시장 - 252~258p.

여름에 모란시장으로 몰려드는 식용견들과 그 거래의 모습은 한국사회에서 개와 인간이 빚어내는 풍경의 장관이다. 모란시장은 날짜의 끝자리수가 4와 9로 끝나는 날 열리는 5일장인데, 식용견은 도매물량이 많아서 정규 장날에 판을 벌이지 못하고 하루 전날에 따로 열린다. 개만을 도매하는 이 판을 상인들은 '개판'이라고 부른다. '개판'날이 되면 전국의 개 목장에서 사육된 식용견들은 모란시장으로 끌려온다. 식용견들은 모두 '누렁이'라고 불리는 잡종견인데 살찌고 동작은 굼떠 보인다. 개들은 개별적 표정으로 식별되지 않고 '식용견'이라는 종자 전체의 일반적 특징으로 다가온다. 눈이 크고 귀가 늘어졌고 수놈들도 엉덩이가 발달해 있다. 식용견의 눈에서는 외계를 경계하는 긴장이 느껴지지 않는다. 식용견의 눈빛은 순하고 초점이 분명치 않아서 개가 어느 방향을 주시하고 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이 식용견들은 20여 마리씩 철망에 갇혀서 5톤 트럭에 실려서 온다. 5톤 트럭 적재함에는 20마리씩 가둔 개 철망이 4단 높이로 실려 있다. 여름 성수기에 5톤 트럭에 4단으로 실려온 식용견의 도매가격은 5억여 원에 달한다고 바쁜 개 상인들은 말했다. 개 5억 원어치를 실은 트럭들은 아침부터 줄지어 모란시장으로 들어온다. 여름에는 '개판' 날마다 개 트럭 100~120대가 모여든다. 개를 사가려는 중간상, 보신탕집 주인들도 이 시장으로 몰려든다. 파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들이 모두 다 전문가들이어서, 거래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고 시비도 벌어지지 않는다.

이 개들은 외지상인들이 사가거나 시장 안에 고정 점포를 차린 중간상인들이 산다. 삶은 개다리를 한 쪽씩 사가는 소매도 이루어진다. 시장 안 중간상인들에게 넘겨진 개들은 최종 수요자에게 다시 팔려가기 전까지 철망 안에 갇혀서 마지막 며칠을 견딘다.

철망 안에서 개들은 몸을 포개고 뒤엉켜 있다. 개들은 혀를 빼물고 헐떡거리면서 그 며칠을 견디어낸다. 견디지 않으면 무슨 도리 있겠는가. 철망 안에서 개들은 서로 물어뜯고 싸우기도 하고 수놈이 암놈의 사타구니에 코를 들이대고 킁킁거린다. 맨 밑에 깔려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잠이 든 개들도 있다. 잠들었떤 개가 갑자기 몸을 솟구치며 일어나 목덜미 털을 곤두세우며 옆의 개를 물어뜯고 물린 개는 또 딴개를 물어뜯는다. 한바탕 엎치락뒤치락 물고 물리는 북새통이 끝나면 다시 밑에 깔리는 개는 혀를 빼물고 잠을 청한다. 물어도, 물려도, 짖어도, 뒹굴어도, 흘레를 붙어도, 잠을 청해도, 철망 밖을 하염없이 내다보아도...... 마지막 날은 정확히 다가온다. 이따금씩 상점주인은 고무호수로 개들에게 수돗물을 끼얹어 개들의 더위를 위로해준다.

철망 안은 개들의 지옥인 듯싶은데, 모란시장에서 이 지옥은 본래 그러해서 어쩔 수 없고 손댈 수 없는 지옥처럼 보인다. 인간의 현실이 천국도 아니고 지옥도 아니듯이 개들의 현실도 천국이나 지옥은 아니다. 개들에게는 개들의 생로병사가 있을 것이고 개들의 생로병사가 인간의 생로병사와 합쳐져서 개의 몸은 인간의 똥이 되는 것이리라. 여름 모란시장에서 개들의 대규모 생로병사는 인간의 유통질서에 실려서 숨 막히게 뜨겁다. 이따금씩 동물애호가협회 사람들이 "동물을 학대 말라"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장 입구에 몰려와 확성기로 구호를 외쳐대기도 하지만 철망 안에서 짖어대는 개의 비명과 확성기의 구호 소리가 뒤섞이면서 모란시장의 풍경은 절정을 이룬다.

애완견 시장은 식용견 시장 맞은편 좌판이다. 말티즈, 치와와, 요크셔테리어 같은 덩치가 작은 애완견들과 시베리안 허스키, 말라뮤트, 그레이트데인처럼 덩치가 큰 개들이 서로 다른 우리에 분리되어 있다. 애완견에도 유행이 있다. 한 종류의 애완견이 널리 퍼지면 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특이한 종자를 찾는다. 요즘에는 시추, 코카스파니엘, 비글 같은 종자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모란시장의 애완견 상가는 이처럼 유동적인 개들의 인기 흐름에 민감하게 연동되어 있다.

애완견은 식용견에 비하면 훨씬 더 팔자가 좋다. 우선 철망 안의 개 밀도가 낮다. 애완견은 비교적 넉넉한 공간 속에서 여유 있게 몸을 놀린다. 주인들은 개들의 맵시를 내느라고 한 마리씩 끌어안고 털을 빗질해주고 가위로 깎아 준다. 털을 헤집고 벌레를 잡아주고, 작은 개는 대가리에 리본을 달아주기도 한다. 애완견 철망 안에는 물그릇과 밥그릇이 놓여 있다. 밥그릇에는 콩알 같은 사료들이 담겨 있고, 물그릇은 대체로 뒤집혀 있다. 식용은 다 자란 성견이 시장에 나와 있지만 애완은 젖을 막 뗀 새끼들이 나와 있다. 더위를 못 이겼는지, 코카스파니엘 새끼 한 마리가 밥그릇에 주둥이를 박고 죽어서 늘어졌는데, 말티즈 새끼 한 마리가 죽은 개의 시체를 밟고 올라서서 밥그릇에 주둥이를 박고 있다.

어린 시절에, 개들은 종자에 관계없이 모두 동작이 가볍고 장난을 좋아한다. 어린 개들은 잠시도 가만히 좌정하지 못한다. 애완견 철망 속에서 어린 개들은 쉴 새 없이 철망 밖을 향해 앞발을 내밀고 지나가는 사라들을 향해 혀를 날름거리며 교태를 보낸다. 식용견 철망 속에 갇힌 오래 산 개들은 싸울 때 싸우더라도 싸우지 않을 때는 늘 조용히 늘어져 있다. 오래 산 것들과 아직 덜 산 것들의 몸놀림은 이처럼 확연히 다르다. 애완견 상가와 식용견 상가가 마주보면서 모란시장 개의 풍경을 이루고, 식용견의 생로병사와, 애완견의 생로병사와 인간의 생로병사가 공존하면서 한국사회의 개 팔자의 풍경을 완성해낸다.




<자전거 여행2>

글 김훈, 사진 이강빈

생각의 나무



자전거 여행 2 (한정특별판)
국내도서
저자 : 김훈
출판 : 생각의나무 2007.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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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흙의 노래를 들어라_남해안 경작지 - 38~39p.

봄 미나리를 고추장에 찍어서 날로 먹으면서, 우리는 지나간 시간들과 전혀 다른, 날마다 우리를 새롭게 해주는 새로운 날들이 우리 앞에 예비되어 있음을 안다. 새들이 떠난 강가에서 우리는 산다. 아내를 따라서 시장에 가보니, 바다를 남에게 내준 뒤로 생선 값은 무섭게 올랐고, 지천으로 널린 봄나물은 싸다.



# 망월동의 봄_광주

- 51p.

유복난 할머니는 광주 대인시장에서 반찬 장사를 하고 있어다. 왼쪽 유방 밑으로 총알이 박혔다. 할머니는 그 후로 장사를 할 수 없게 되었고, 지금까지 병석에 누워 있다. 할머니의 왼쪽 유방 밑에는 아직도 총알이 그대로 박혀 있다. 그 합병증으로 다른 여러 증세들이 도졌다. 총알을 빼려고 서울의 대학병원까지 갔었으나 빼지 못했다. 워낙 민감한 부위에 총알이 박혀 있어서 외과뿐 아니라 여러 분야의 전문의 7~8명이 함께 수술에 참가해야 하는데, 병원에서는 이걸 못하겠다고 하더란다. 여러 병원을 돌아다녔으나 모두 다 허사였다. 그래서 할머니는 네 아들을 젖 먹여 키운 유방 속에 총알을 지니고 산다. 그러니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다. 할머니는 총알을 품고 죽어야 할 모양이다. 의사는 어디에 있고, 정부는 어디에 있는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면 그때는 총알을 빼내기가 수월할 것이다.


- 52p.

5월 18일에는 권투선수 박찬희의 타이틀 매치가 5회 KO로 끝나는 걸 보고 친구들을 만나러 거리에 나왔다가 행진하는 군인들을 보면서 "공수부대는 과연 멋지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군인들한테 붙잡혀서 무조건 두들겨 맞았다. 맞고나니까 도대체 왜 맞았는지를 알 수가 없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 대한 그의 의문은 시작되었다. 군인들이 사람들을 마구 쏘아죽이는 걸 보고 나서야, 저자들을 저대로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다. 그는 도청으로 향하는 시위 대열에 끼어들었다. 복부에 총알 두발을 맞았다. 척추가 관통되어 다리를 쓸 수가 없게 되었다. 몸을 쓸 수 없게 되자 구둣가게 꿈은 끝났다. 그는 불구가 된 몸으로 1990년에 결혼했다. 


- 53p.

5.18 민중항쟁 20주년을 맞는 광주에서는 비엔날레가 열리고 있다. 소설가 임철우의 장편소설 『봄날』이 연극으로 꾸며져 광주 공연을 앞두고 있고, 시인 황지우는 <5월의 신부>라는 시극(詩劇)을 무대에 올린다. 임철우는 이 시대의 용서와 화해가 가능한지를 고통스럽게 묻고 있고, 황지우는 치욕 속에서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산 자의 슬픔을 절규하고 있다. 삶은 소설이나 연극과는 많이 다르다. 삶 속에서는 언제나 밥과 사랑이 원한과 치욕보다 먼저다.



# 가까운 숲이 신성하다_안면도

- 83p.

숲은 가까워야 한다. 숲은 가까운 숲을 으뜸으로 친다. 노르웨이의 숲이나 로키 산맥의 숲보다도 사람들의 마을 한복판에 들어선 정발산(경기도 고양시 일산동)의 숲이 더 값지다. 숲은 가깝고 만만하지만, 숲이 사람을 위로할 수 있게 되는 까닭은 그곳이 여전히 문화의 영역이 아니라 자연이기 때문이다.

숲의 시간은 헐겁고 느슨하다. 숲의 시간은 퇴적의 앙금을 남기지 않는다. 숲의 시간은 흐르고 쌓여서 역사를 이루지 않는다. 숲의 시간은 흘러가고 또 흘러오는 소멸과 신생의 순환으로서 새롭고 싱싱하다. 숲의 시간은 언제나 갓 태어난 풋것의 시간이다.


- 85p.

봄의 숲은 비리다.

이 비린내는 먼 냄새인지 가까운 냄새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이 비린내는 나무의 관능이다.

아, 관능은 먼 것인가 가까운 것인가.


- 87p.

산을 오르는 사람들.

지금, 5월의 산들은 새로운 시간의 관능으로 빛난다. 봄산의 연두색 바다에서 피어오르는 수목의 비린내는 신생의 복받침으로 인산의 넋을 흔들어 깨운다. 봄의 산은 새롭고 또 날마다 더욱 새로워서, 지나간 시간의 산이 아니다. 봄날, 모든 산은 사람들이 처음 보는 산이고 경험되지 않은 산이다. 그리고 이 말은 수사가 아니라 과학이다.



# 땅에 묻히는 일에 대하여_여수의 무덤들 - 121p.

영동 민주지산 아래 동네에는 한 집안의 다섯 어른 무덤을 대문 앞에 모신 집도 있다. 성묘가 따로 없고 후손들이 들고 나며 무덤에 절한다. 그 무덤들은 죽어서 떠났지만 결국 떠나지 않은 사람들의 무덤이었다. 그 무덤들은 삶의 지속성 속에서 평화로워 보였다. 그래서 모든 무덤들은 강물이 흐르고 달이 뜨는 것처럼 편안하다. 비가 개면 바람이 불듯이, 그 편안함이 순리로 다가올 때까지, 이승에 남아서 밥벌이나 하자. 벗들아, 그대들을 경멸했떤 내 꿈속의 적막을 용서해다오. 봄볕 쪼이는 흙 속의 유혹은 아마도 이 순리의 유혹이었을 것이다.

지상의 무덤들이 자꾸만 늘어난다.



# 충무공, 그 한없는 단순성과 순결한 칼에 대하여_진도대교 - 219p.

그는 늘 병고에 신음했고, 슬픔과 기쁨에 몸을 적시는 정한의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의 슬픔은 "나는 오늘 슬펐다"라고까지만 기록하는, 통제된 슬픔이었다. 그의 슬픔과 기쁨에는 수사적 장치가 없다. 이 통제된 슬픔의 힘이 "저녁 무렵에 동풍이 잠들고 날이 흐렸다. 부하 아무개가 거듭 군율을 범하기로 베었다" 같은 식의 놀라운 문장들을 쓰게 한다. 바람이 잠든 것과 부하를 죽인 일이 동등한 자격의 사실일 뿐이다.



# 문경새재는 몇 굽이냐_하늘재, 지름재, 조소령, 문경새재 - 235p.

한국인의 마음속에서 고개를 넘는다는 일은 삶의 전환과 확장을 의미한다. 그래서 모든 고갯마루는 그 전환의 통과 의례로서 괴기스런 전설과 민담을 빚어낸다. 문경새재를 넘어가는 영남대로는 서울-충주-상주-부산을 연결하는 조선 500년의 간선도로였다. 행정과 교역의 대부분이 문경새재를 넘나들며 이루어졌다. 영남대로 380킬로미터 중에서 옛 문경새재 구간은 30킬로미터에 달하고, 이 구간의 해발고도는 600미터이다.

문경새재는 여러 변방 오지에 흩어진 인간의 삶이 당대 현실과 관련을 맺으려 할 때 반드시 넘어야 할 고난의 고개로서 영남대로의 중허리를 철벽처럼 가로막고 있다. 그 마루턱은 늘 구름에 가려 있는데, 그 너머 아득한 북쪽이 서울이며, 거기가 당대의 핵심부이고, 현실을 만지고 주무르고 죽이고 살리는 일들은 모두 문경새재 너머에서 이루어졌다.




<자전거 여행 1>

김훈 지음

생각의 나무, 2000




자전거 여행. 1(한정특별판)

저자
김훈 지음
출판사
생각의나무 | 2007-12-12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자전거로 우리 땅의 풍경을 누비다! 소설 칼의 노래의 저자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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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볼만한 이유있는 글 : [문화]김훈 유감: "라면을 끓이며"에 대한, 이유 있는 험담

http://www.ddanzi.com/ddanziNews/69327522




# 라면을 끓이며

- 13~14p.

맛은 화학적 실체라기보다는 정서적 현상이다. 맛은 우리가 그것을 입안에서 누리고 있을 때만 유효한 현실이다. 그외 모든 시간 속에서 맛은 그리움으로 변해서 사람들의 뼈와 살과 정서의 깊은 곳에서 태아처럼 잠들어 있다. 맛은 추억이나 결핍으로 존재한다. 시장기는 얼마나 많은 추억을 환기시키는가. 그 영육(靈肉) 복합체는 유년의 천막학교에서 미군들한테 얻어먹은 레이션 ration(전투식량)의 맛까지도 흔들어 깨운다. 이 궁상맞음을 비웃어서는 안 된다. 당신들도 다 마찬가지다. 한 달 벌어 한 달 살아가는 사람이 거리에서 돈을 주고 사먹을 수 있는 음식은 뻔하다.

라면이나 짜장면은 장복을 하게 되면 인이 박인다. 그 안쓰러운 것들을 한동안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지 않아도 공연히 먹고 싶어진다. 인은 혓바닥이 아니라 정서 위에 찍힌 문양과도 같다. 세상은 짜장면처럼 어둡고 퀴퀴하거나, 라면처럼 부박(浮薄)하리라는 체념의 편안한 마음의 깊은 곳을 쓰다듬는다.


- 28~31p.

사실, 이 글은 오랜 세월 동안 라면을 끓이고 또 먹어온 나의 라면 조리법을 소개하려고 시작했는데, 도입부가 좀 길어졌다. 이제부터가 본론이다. 라면 포장지에는 끓는 물에 면과 분말수프를 넣고 나서 4분 30초 정도 더 끓이라고 적혀 있지만, 나는 센 불로 3분 이내로 끓여낸다. 가정에서 쓰는 도시가스로는 어렵고, 야외용 휘발유 버너의 불꽃을 최대한으로 크게 해서 끓이면 면발이 붇지 않고 탱탱한 탄력을 유지한다. 면이 불으면, 국물이 투박하고 걸쭉해져서 면뿐 아니라 국물까지 망친다. 그러나 실내에서 휘발유 버너를 쓰는 일은 위험해서, 나를 따라 하면 안 된다(어린아이 조심!).

또 물은 550ml(3컵) 정도를 끓이라고 포장지에 적혀 있지만, 나는 700ml(4컵) 정도를 끓인다. 물이 넉넉해야 라면이 편안하게 끓는다. 수영장이 넓어야 헤엄치기 편한 것과 같다. 라면이 끓을 때, 면발이 서로 엉키지 않아야 하는데, 물이 넉넉하고 화산 터지듯 펄펄 끓어야 면발이 깊이, 또 삽시간에 익는다. 익으면서 망가지지 않는다.

라면을 끓일 때, 가장 중요한 점은 국물과 면의 조화를 이루는 일이다. 이것은 쉽지 않다. 라면 국물은 반 이상은 남기게 돼 있다. 그러나 그 국물이 면에 스며들어 맛을 결정한다. 국물의 맛은 면에 스며들어야 하고, 면의 밀가루 맛은 국물 속으로 배어나오지 않아야 한다. 이것은 고난도 기술이다. 센 불을 쓰면, 대체로 실패하지 않는다. 식성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나는 분말수프를 3분의 2만 넣는다.

나는 라면을 조리할 때 대파를 기본으로 삼고, 분말수프를 보조로 삼는다. 대파는 검지손가락만한 것 10개 정도를 하얀 밑동만을 잘라서 세로로 길게 쪼개놓았다가 라면이 2분쯤 끓었을 때 넣는다. 처음부터 대파를 넣고 끓이면 파가 곯고 풀어져서 먹을 수가 없이 된다. 파를 넣은 다음에는 긴 나무젓가락으로 라면을 한 번 휘젓고 빨리 뚜껑을 덮어서 1분~1분 30초쯤 더 끓인다. 파는 라면 국물에 천연의 단맛과 청량감을 불어넣어주고, 그 맛을 면에 스미게 한다. 파가 우러난 국물은 달고도 쌉쌀하다. 파는 라면 맛의 공업적 질감을 순화시킨다.

그다음에는 달걀을 넣는다. 달걀을 미리 깨서 흰자와 노른자를 섞어놓아야 한다. 불을 끄고, 끓기가 잦아들고 난 뒤에 달걀을 넣어야 한다. 끓을 때 달걀을 넣으면 달걀이 굳어져서 국물과 섞이지 않고 겉돈다. 달걀을 넣은 다음에 젓가락으로 저으면 달걀이 반쯤 익은 상태에서 국물 속으로 스민다. 이 동작을 신속히 끝내고 빨리 뚜껑을 닫아서 30초쯤 기다렸다가 먹는다. 파가 우러난 국물에 달걀이 스며들면 파의 서늘한 청량감이 달걀의 부드러움과 섞여서, 라면은 인간 가까이 다가와 덜 쓸쓸하게 먹을 만하고 견딜 만한 음식이 된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스승 없이 혼자서, 수많은 실험과 실패를 거듭하며 배웠다. 레시피를 읽고 따라 한 것이 아니다. 앞으로도 새롭게 열어나가야 할, 전인미답의 경지가 보이기는 하지만 라면 조리법 개발은 이제 그만하려 한다. 

나는 라면을 먹을 때 내가 가진 그릇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비싼 도자기 그릇에 담아서, 깨끗하고 날씬한 일회용 나무 젓가락으로 먹는다.

라면을 끓일 때, 나는 미군에게 얻어먹던 내 유년의 레이션 맛과 초콜릿의 맛을 생각한다. 라면을 끓일 때 나는 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양계장의 닭들과 사지를 결박당한 과수원의 포도나무 사과나무 배나무 들과 양식장에서 들끓는 물고기들을 생각한다. 라면을 끓일 때 나는 사람들의 목구멍을 찌르며 넘어가는 36억 개 라면의 그 분말수프의 맛을 생각한다. 파와 계란의 힘으로, 조금은 순해진 내 라면 국물의 맛을 36억 개의 라면에게 전하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눈을 팔다가 라면이 끓어 넘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라면의 길은 아직도 멀다.




# 광야를 달리는 말

 - 34p.

우리 남매들이 더 이상 울지 세월에도, 새로 들어온 무덤에서는 사람들이 울었다. 이제는 울지 않는 자들과 새로 울기 시작한 자들 사이에서 봄마다 풀들은 푸르게 빛났다.


나는 내 아버지와 그의 시대를 긴 글로 써보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나의 시도는 여러 번 실패하였고 지금은 파지만 쌓여 있지만, 새가 알을 품듯이 나는 그 생각을 품고 있다.

내가 실패를 거듭하는 까닭을 나는 안다. 내 아버지의 삶의 파탄과 광기, 그의 꿈과 울분과 절망의 하중을 내가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신산한 기억들을 나는 겨우 몇 자 쓰려 한다. 아버지는 63년을 살고 기세(棄世)하였다. 나는 이제 아버지보다 더 오래 살고 있다. 나는 젊은 날의 내 아버지가 때때로 내 가엾은 아들처럼 느껴진다.


- 37p.

내 아버지는 공회전과 원점회귀를 거듭하는 한국 현대사의 황무지에 맨몸을 갈았다. 그는 비명을 지르고 좌충우돌하면서 그 황무지를 건너갔다. 건너가지 못하고, 그 돌밭에 몸을 갈면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생업은 신문기자이거나 소설가였는데, 밥을 온전히 먹을 수 있는 노동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당대 현시 속에서 자신의 좌표를 설정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하해와 같은 억겁의 술을 마셨다. 아버지는 식민지의 종로 뒷골목에서 술을 배웠다. 아버지는 망명지 길림에서 마셨고 상해에서 마셨고 천진(天津)에서 마셨고 북경에서 마셨고 양자강 남쪽의 포구마을들을 떠돌아다니면서 마셨다. 아버지는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서 그 막막한 잡초밭에서 마셨고 좌우의 피 튀김 속에서 마셨고 전선(戰線)이 낙동강까지 밀려내려온 피난지 부산에서 마셨고 환도 후에 잿더미가 된 명동의 폐허에서 마셨고 이승만 치하에서 자유당의 무능과 부패를 저주하며 마셨고 박정희 소장이 대통령이 되는 과정을 보면서 마셨다.

그는 이승만 정권, 장면 정권, 박정희 정권을 향해 활화산과도 같은 저주를 뿜어냈다. 폐지 수집하듯이 매절원고를 몰아가서 원고료를 잘라먹는 출판업자들과, 외상값을 독촉하는 술집 주인들, 호적초본을 떼어주면서 턱으로 사물을 가리키는 구청 직원들과, 껌을 씹으며 병실에 들어오는 간호원들을 그는 이를 갈며 증오했다.





# 바다 – 58p.

물곰은 진화를 거부한 물고기처럼 보였다. 물곰의 표정과 몸짓은 그 종족의 최초 개체가 바다 속에 생겨난 고생대의 질감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 종족은 역사나 시간에 속해 있지 않았다. 저것을 내가 먹었구나, 저 아득한 수억만년의 표정과 질감을 끓여서 국물로 마셨구나……

어느 날, 식당 수족관에 어린 물곰이 잡혀와 있었다. 물곰은 어린 시절부터 늙음의 표정을 지니고 있었다. 물곰은 태어날 때부터 수억만 년의 늙음을 이미 생명의 바탕에 깔고 있었다. 아마도 물곰은 공격본능이나 방어본능으로부터 얼마쯤은 벗어나 있는 물고기인 듯싶었다. 저러한 늙음, 흐느적거림, 시간으로부터의 자유가 물곰의 살과 뼈에 녹아들어서 그것을 끓인 국물이 인간을 위로하는 것이려니 싶었다. 어린 물곰은 이미 수억만 년 늙어 있었고, 늙었다기보다는, 그 늙음 위에서 새로 태어나고 있었다.



# 밥 1

– 70~71p.

모든 ‘먹는’ 동작에는 비애가 있다. 모든 포유류는 어금니로 음식물을 으깨서 먹게 되어 있다. 지하철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서 짜장면을 먹는 걸인의 동작과 고급 레스토랑에서 냅킨을 두르고 거위간을 먹는 귀부인의 동작은 같다. 그래서 밥의 질감은 운명과도 같은 정서를 형성한다.

전기밥솥 속에서 밥이 익어가는 그 평화롭고 비린 향기에 나는 한평생 목이 메었다. 이 비애가 가족들을 한울타리 안으로 불러모으고 사람들을 거리로 내몰아 밥을 벌게 한다. 밥에는 대책이 없다. 한두 끼를 먹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때가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 이것이 밥이다. 이것이 진저리나는 밥이라는 것이다.

밥벌이도 힘들지만, 벌어놓은 밥을 넘기기도 그에 못지 않게 힘들다. 술이 덜 깬 아침에, 골은 깨어지고 속은 뒤집히는데, 다시 거리로 나아가기 위해 김 나는 밥을 마주하고 있으면 밥의 슬픔은 절정을 이룬다. 이것을 넘겨야 다시 이것을 벌 수가 있는데, 속이 쓰려서 이것을 넘길 수가 없다. 이것을 벌기 위하여 이것을 넘길 수가 없도록 몸을 부려야 한다면 대체 나는 왜 이것을 이토록 필사적으로 벌어야 하는가. 그러니 이것을 어찌하면 좋은가. 대책은 없는 것이다.


- 73p.

이 세상의 근로감독관들아, 제발 인간을 향해서 열심히 일하라고 조져대지 말아달라. 제발 이제는 좀 쉬라고 말해달라. 이미 곤죽이 되도록 열심히 했다. 나는 밥벌이를 지겨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 싶다. 친구들아, 밥벌이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이걸 잊지 말고 또다시 각자 핸드폰을 차고 거리로 나가서 꾸역꾸역 밥을 벌자. 무슨 도리 있겠는가. 아무 도리 없다.



# 목수

– 127~128p.

나는 놀기를 좋아하고 일하기를 싫어한다. 나는 일이라면 딱 질색이다. 내가 일을 싫어하는 까닭은 분명하고도 정당하다. 일은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키기 때문이다. 부지런을 떨수록 나는 점점 더 나로부터 멀어져서, 낯선 사물이 되어간다. 일은 내 몸을 나로부터 분리시킨다. 일이 몸에서 겉돌아서 일 따로 몸 따로가 될 때, 나는 불안하다. 나는 오랜세월 동안 소외된 노동으로 밥을 먹었다.

나는 이제 아무데도 붙여주는 곳이 없고 기웃거릴 곳도 없어서 혼자 들어앉아 있다. 또 막 무는 개들이 너무 많이 돌아다녀서 대문 밖에 나가지 못한다. 요즘 나의 일이란 하루에 그저 두어 줄씩 작문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때때로 그나마도 하고 싶지가 않다.

글이란 아무리 세상 없이 잘나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몇줄이라 하더라도 그 물적 바탕은 훈민정음 스물네 글자를 이리저리 꿰어맞추고 붙였다 떼었다 하는 것이다. 그러니 글을 쓸 때 오른손엔 연필, 왼손엔 지우개를 쥔 내 몸은 부지할 곳이 없고 숨쉴 공기가 모자란다. 다 큰 사내가 어찌 연필과 지우개만으로 그 몸의 일을 넉넉히 할 수가 있겠는가. 나는 이렇게는 도저히 못한다.


- 130p.

공사중인 집의 처마 끝에 매달려 못질을 하는 젊은 목수는 그 아름다움으로 나를 주눅들게 한다. 그러나 누구의 삶인들 고달프고 스산하지 않겠는가. 나무통이 좁아서 뿌리가 비어져나온 옥수수를 들여다보면서 나는 새로운 슬픔으로 지나간 슬픔을 위로한다. 옥수수잎에서, 먼 바람 소리가 들린다. 놀다보니 봄은 다 갔고, 내 사랑하는 젊은 목수들은 집을 다 짓고 어디론지 가고 없다.



# 목숨 1 – 137~138p.

행복에 대한 추억은 별 것 없다. 다만 나날들이 무사하기를 빈다. 무사한 날들이 쌓여서 행복이 되든지 불행이 되든지, 그저 하루하루가 별 탈 없기를 바란다. 순하게 세월이 흘러서 또 그렇게 순하게 세월이 끝나기를 바란다.

죽을 생각 하면 아직은 두렵다. 죽으면 우리들의 사랑이나 열정도 모두 소멸하는 것일까. 아마 그럴 것이다.

삶은 살아 있는 동안만의 삶일 뿐이다. 죽어서 소멸하는 사랑과 열정이 어째서 살아 있는 동안의 삶을 들볶아대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 사랑과 열정으로 더불어 하루하루가 무사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복은 아니지만, 그래도 복 받은 일이다.

사람의 죽음을 가까이서 지켜본 일이 있었다.연기가 빠져 나가듯이, 생명은 가뭇없이 빠져나갔다. 생명은 본시 연기나 바람 같은 기체가 아니었을까. 생명이 빠져나간 육신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고, 죽어가는 육신의 눈을 떠서 마지막 이승을 한동안 바라보더니 눈을 감았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이승의 마지막 풍경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아직 살아 있는 나는 죽어가는 그를 바라보았고, 그는 마지막 망막의 기능으로 아직 살아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마지막 망막에 비친 살아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마지막 망망에 비친 살아 있는 나의 모습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죽어가는 그와 마찬가지로, 한줌의 공기나 바람은 아니었을까.



# 세월호

 – 158p.

내가 얼마 전에 진도 팽목항에 가서 눈물도 말라버린 유가족들과 함께 바다를 바라보니 부르는 소리는 수평선 너머로 퍼져가는데 배 빠진 자리는 흔적이 없고, 바다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 164~166p.

2014년 4월 16일의 참사 이후로 사태를 바라보는 이 사회의 시각은 발작적인 분열을 일으키며 파탄되었다. 슬픔과 분노를 온전히 간직해서 미래를 지향하는 동력으로 가동시켜야 한다는 시각과 그 슬픔과 분노를 매우 퇴행적이고 소모적인 것으로 여겨 혐오하는 시각이 교차했다. 거칠게 말하자면 4월, 5월까지는 전자의 시각이 우세했으나 6월 4일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적지 않은 재미를 보고, 이어 7월 30일 재보선에서 여당이 압승하자, 후자의 시각이 주류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슬픔과 분노에 오랫동안 매달려 있는 것은 경제 살리기에 해롭다는 것이 그 혐오감의 주된 논리였다. 세월호에서 놓친 골든타임이 경제회복의 골든타임으로 살아났고 거기에 이념의 날라리들이 들러붙기 시작했다. 사실 4.16 참사 이후에 경기는 장기침체에 빠졌고, 정부의 부양책은 힘을 쓰지 못했다. 모두들 슬프고 분하면 경기는 침체되는 것이니까. 슬픔과 분노가 경기침체의 원인이라는 말도 결국은 동어반복이다. 어찌 헌옷을 벗듯이, 헌신짝을 벗어버리듯이 마음의 일을 벗어던질 수 있을 것인가. 돈 많고 권세 높은 자들이 큰 죄를 저질러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형량을 줄여서 선고하고, 형기중에도 특별사면, 일반사면, 집행정지, 가석방, 병보석으로 풀어주는 무법천지를 나는 자유당 때부터 보아왔고 이 무법천지는 모두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 죄형법정주의는 무너졌고 경제는 합리적이고 규범적인 토대를 상실했다. 재벌의 불법을 용인해야 경제가 살아나고, 정당한 슬픔과 부노를 벗어던져야만 먹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는 말은 시장의 논리도 아니고 분배의 정의도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인 속임수일 뿐이다. 법치주의가 살아 있어도 법이 밥을 먹여줄 리는 없고, 밥은 각자 알아서 벌어먹어야 하는 것인데, 법치주의를 포기해야만 밥을 벌어먹기가 수월해진다면 이 가엾은 중생들의 밥은 얼마나 굴욕적인 것인가.


- 167~168p.

4.16의 슬픔과 분노는 전혀 정치적인 것이 아니었지만 결국은 정치의 악다구니 속으로 편입되었고, 내 편과 내 편이 아닌 편으로 갈라져서 치고받게 되었는데, 세종로에서 단식을 이어가던 유가족들 옆에서 먹성 좋아 보이는 청년들이 통닭과 짜장면을 먹어대고, 또 국회의원 명함을 내미는 웬 여성이 대리운전기사를 폭행하는 짓에 연루됨으로써 이 악다구니와 악다구니에 편승하는 또다른 악다구니들이 온 나라에 넘쳤다. 슬픔과 분노의 온전한 모습은 파괴되었고 유민이의 젖은 6만 원의 의미는 실종되었다. 그 슬픔과 분노는 특별히 재수가 없어서 끔찍한 재앙을 당한 소수자의 불운으로 자리매겨졌다. 그 소수의 고통을 사회적으로 표출하는 것은 다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고 다수가 먹고 사는 일에 해로운 결과가 된다고 힘센 목청을 가진 언설의 기관들이 힘을 합쳐서 소리질렀다. 소리질러서 낙인찍었고, 구석으로 몰아붙였다. 그렇게 해서 4.16의 슬픔과 분노는 특별히 재수없어서 재난을 당한 소수자의 것, 우는 자들만의 것, 루저들만의 것으로 밀려났다.


- 170p.

나는 단지, 겨우 쓴다.

늙은이의 춘수(春瘦)는 어수선하다.

새벽의 꿈에, 배 빠진 맹골수로에도 4월이 와서 봄빛이 내리는 하얀 손목들이 새순처럼 올라와서 대통령의 한복 치맛자락을 붙잡고, 친박 비박 친노 비노 장관 차관 이사관 들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우는데, 바짓가랑이들은 그 매달리는 손목들을 뿌리치고 있었다. 그 바다는 국가가 없고 정부가 없고 인기척이 없는 무인지경이었다. 손목들은 사람 사는 육지를 손짓하다가 손목들끼리 끌어안고 울었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기진하였다.



# 돈 2 – 185p.

나는 천 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퇴계의 초상을 들여다볼 때마다 기호와 실물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이러니 돈 벌 생각은 아예 못한다. 얼마 전에 마누라가 신용카드라는 것을 만들어주었다. 이것은 경이로운 물건이었다. 기계에 넣기만 하면 돈이 촤르르촤르르 쏟아져나왔다. 돈과 관련된 삶의 고통이 모두 해결되었구나 싶었다. 은행마다 우체국마다 편의점마다 돈 쏟아지는 기계가 설치되어 있었다. 돈은 촤르르촤르르 겁도 없이 쏟아져나왔다. 다시 귀기울이니, 이 촤르르 소리는 실물과 기호 사이의 나락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신용카드를 너무 많이 써서 패가망신하고 있다. 기호와 실물 사이에는 지옥이 있고, 이 지옥에 떨어지면 헤어날 길이 없다. 촤르르촤르르 돈은 쏟아지고, 지옥문은 자꾸 넒어진다. 퇴계 선생께 거듭 죄송하다.



# 바다의 기별

– 223p.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


- 230~231.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과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과 모든, 참혹한 결핍들을 모조리 사랑이라고 부른다.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 여자 1 – 235p.

여자들은 저 익명의 여성성을 자신의 실존에만 고유한 개별적 상황으로 바꾸어놓기 위하여 수만 년의 세월을 거울 속에 집중했다. 그것은 무덤 속에서조차 단념할 수 없는 여자들의 싸움이다. 지금 이 싸움은 그다지 성공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나의 존재가 언제나 보여져야 하고 언제나 휘발되어서 밖으로 번져나가야 한다면, 그런 삶의 하중을 견뎌내기란 어려울 것 같다. 언제나 휘발되어야 한다면, 그 휘발의 결과가 개별성의 자유일 수가 있을까. 그러나 그런 의문은 화장을 향한 여자들의 집중된 열정 앞에서 완전히 무력하다.



# 여자 2 – 242p.

남자가 남성성만으로 온전할 수 없듯이 여자들도 여성성 만으로 온전할 수는 없다. 남자는 남성성을 완성해야 하고 여자는 여성성을 완성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고 말할 순 없다. 그래가지고는 피곤해서 살 수 없다. 남자에게도 여성성이 있고 여자에게도 남성성이 있게 마련이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그것을 긍정해주는 삶이 아름다운 삶이다. ‘잘빠졌다’는 말은 공업적인 말이고, 더러운 말이다. 그 더러움은 사물성에서 온다. ‘잘빠졌다’는 말 속에서 잘빠진 여자는 소외된 여자다. 인간과 언어가 서로를 소외시키고 있다. 인간이, 인간이 아닌 것으로 바뀔 때 더러움이 발생한다. 아름다움의 내용을 억압과 사물성이 아니라, 자유로 가득 채우는 여자가 아름답다. 그런 여자가 살아 있는 여자고, 살아가는 여자고, 삶을 영위하는 여자다. 아들들아, 연애를 하려거든 그런 여자하고 해라.



# 여자 6 – 257p.

그림이 삶보다 더 아름다울 수는 있겠지만, 삶보다 더 무거울 수는 없을 터이다. 그러니 세월과 더불어, 세월의 풍화작용 속을 통과하며 살아가는 여자들의 젖가슴이 어찌 저 베레모 쓴 화백들의 절묘한 손놀림이 빚어내는 그림 속의 젖가슴과 같기를 바랄 수가 있겠는가. 하물며 여자의 여성성과 모성이 치러내야 하는 한평생의 생물학적 산전수전과 백병전 속에서 어찌 그림 속의 젖가슴이 온전하기를 바랄 수가 있겠는가. 삶은 풍화이며 견딤이며 또 늙음이다. 살아서 무엇을 이룬다는 일도 그 늙음과 견딤 속에서만 가능하다. 삶은 그림보다 무겁고, 그림보다 절박하고, 그림보다 힘들다. 그리고 삶은 그림보다 초라하다. 그림보다 꾀죄죄하고 그림과는 비교할 수 없이 훼손되어 있는 것이 삶의 올바른 풍경이다.



# 여자 7 – 262p.

사람의 목소리는 경험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추억을 끌어 당겨준다. 사람의 목소리에는 생명의 지문이 찍혀 있다. 이 지문은 떨림의 방식으로 몸에서 몸으로 직접 건너오는데, 이 건너옴을 관능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그러므로 내가 너의 목소리를 들을 때, 나는 너를 경험하는 것이다.



# 길 – 299p.

길은 생로병사의 모습을 닮아 있다. 진행중인 한 시점이 모든 과정에 닿아 있고, 태어남 안에 이미 죽음과 병듦이 포함되어 있다. 길은 이곳과 저곳을 잇는 통로일 뿐 아니라 여기서부터 저기까지의 모든 구부러짐과 풍경을 거느린다. 길은 명사라기보다는 동사에 가깝다. 소백산맥을 넘어가는 문경새재는 산맥의 모습을 닮아 있고, 섬진강 하류를 따라 내려가는 19번 국도는 물을 닮아 있으며, 구부러진 논두렁길이나 밭두렁길은 그 흙에 코를 박고 일하는 인간의 노동을 닮아 있다.



# 고향 2 – 317p.

나는 고향이라는 어휘가 거느리는 정한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진화할 수 없는 비논리성이 그 정한의 바탕을 이루는 듯싶다. 나는 고향도 없고 타향도 없는 세상이 좋다. 고향이라든지 타향이라든지 하는 그런 어휘가 아예 없는 세상에서 나는 살고 싶다.



# 잎 – 361p.

다시 맞는 봄에 새잎이 돋는다. 봄에는, 몇 번의 봄이 더 남아 있을는지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 봄에는 찰나의 덧없음에 미혹되는 한 미물로서 살아간다. 봄에는, 봄을 바라보는 일 이외에는 다른 짓을 할 시간이 없다. 지나가는 것들의 찬란함 앞에서 두 손은 늘 비어 있다. 나는 봄마다 속수무책으로 멍하니 바빴고, 올봄에도 역시 그러하다. 혼자서 늙어가는 내 초로의 봄날에 자전거를 타고 섬진강 물가를 달릴 적에, 새잎 돋는 산들이 물에 비치어 자전거는 하늘의 길을 달렸다. 아, 이 견디기 어려운 세상 속에는 또 다른 세상이 있었구나! 이 별 볼 일 없는 생애는 어찌 그리도 고단했던가. 땅 위의 길과 하늘의 길이 결국은 닿아 있었구나. 봄의 섬진강은 그런 미혹들이 바람에 실려서 불어왔다. 이쪽 길로 가자니 저쪽 길이 아까웠고, 저쪽 길로 가자니 또 그 너머의 길이 궁금해서 자전거는 갈 길을 정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굴러갔다.



# 작가의 말 - 410~411p.

보낼 스스로 그러한 것들을 향하여 나는 오랫동안 중언부언하였다. 나는 쓸 수 없는 것들을 쓸 수 있는 것으로 잘못 알고 헛된 것들을 지껄였다. 간절해서 쓴 것들도 모두 시간에 쓸려서 바래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늘 말 밖에 있었다. 지극한 말은, 말의 굴레를 벗어난 곳에서 태어나는 것이리라.


이제, 함부로 내보낸 말과 글을 뉘우치는 일을 여생의 과업으로 삼되, 뉘우쳐도 돌이킬 수 없으니 슬프고 누추하다. 나는 사물과 직접 마주 대하려 한다.


2015년 여름은 화탕지옥 속의 아비규환이었다. 덥고 또 더워서 나는 나무그늘에서 겨우 견디었다. 그 여름이 가고, 가을이 또 와서 숙살(肅殺)의 서늘함이 칼처럼 무섭다.

낮고 순한 말로 이 세상에 말을 걸고 싶은 소망으로 몇 편의 글을 겨우 추려서 이 책을 엮는데, 또하나의 장애물을 만드는 것이 아닌지를 나는 걱정한다.



<라면을 끓이며>

김훈 지음

문학동네, 2015


라면을 끓이며
국내도서
저자 : 김훈
출판 : 문학동네 2015.09.30
상세보기




# 옹이 – 12p.


흉터라고 부르지 말라

한때는 이것도 꽃이었으니

비록 빨리 피었다 졌을지라도

상처라고 부르지 말라

한때는 눈부시게 꽃물을 밀어 올렸으니

비록 눈물로 졌을지라도


죽지 않을 것이면 살지도 않았다

떠나지 않을 것이면 붙잡지도 않았다

침묵할 것이 아니면 말하지도 않았다

부서지지 않을 것이면, 미워하지 않을 것이면

사랑하지도 않았다


옹이라고 부르지 말라

가장 단단한 부분이라고

한때는 이것도 여리디여렸으니

다만 열정이 지나쳐 단 한 번 상처로

다시는 피어나지 못했으니




# 사하촌에서 겨울을 나다 – 17p.

(중략)

며칠째 눈 오고

마음이 오래 변방에서 젖었다

누가 어디 먼 데서 걸어온다

아무 슬플 일 없는데 이 무명의 슬픔은 어디서 오는가

아무 울 일 없는데 이 무음의 울음은 어디서 오는가

눈송이처럼 세상 속으로 내리더라도

세상과 무연한 곳에 내리고 싶다

결린 옆구리께 꽃들이 기침하는 폐사지로




# 내가 아는 그는 – 31p.

(중략)

누고도 소유할 수 없는 지평선 같은 사람이어서

그 지평선에 뜬 저녁 별 같은 사람이어서

때로 풀처럼 낮게 우는 사람이어서

고독이 저 높은 벼랑 위 눈개쑥부쟁이 닮은 사람이어서

어제로 내리는 성긴 눈발 같은 사람이어서

만 개의 기쁨과 만 개의 슬픔

다 내려놓아서 가벼워진 사람이어서

가벼워져서 환해진 사람이어서

시들기 전에 떨어진 동백이어서

떨어져서 더 붉게 아름다운 사람이어서

죽어도 죽지 않는 노래 같은 사람이어서




# 시골에서의 한 달 – 41p.

(중략)

굳이 상실의 이유를 묻지 않아도

삶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당신이, 혹은 내가, 지나가는 배추흰나비로 말했지 그 뜰에서 

(중략)




# 첫사랑의 강 – 49p.

(중략)

우리를 만지는 손이 불에 데지 않는다면

우리가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가

기억을 꺼내다가 그 불에 데지 않는다면

사랑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때 나는 알았지

어떤 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우리가 한때 있던 그곳에

그대로 살고 있다고

떠나온 것은 우리 자신이라고




# 바르도에서 걸려 온 수신자 부담 전화 – 76~77p.

(중략)

봄 그리고 끝없이 얼굴을 바꾸며

너와 함께 이동해 준 여러 번의 계절들

해마다 날짜가 변하는 기억들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그만큼 살지 않았을 뿐

어느 날 갑자기 너는 그곳에 도착할 것이다

죽는 법을 배우지도 못한 채

사랑하는 법도 배우지 못한 채

질문과 회피로 일관하던 삶을 떠나

이미 떨어진 산목련 꽃잎들 위에

또 한 장의 꽃잎이 떨어지듯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모든 생들에

또 하나의 생을 보태며




# 이런 시를 쓴 걸 보니 누구를 그 무렵 사랑했었나 보다 – 110~111p.

(중략)

너는 나에게 상처를 주지만 나는 너에게 꽃을 준다, 삶이여

나의 상처는 돌이지만 너의 상처는 꽃이기를, 사랑이여

삶이라는 것이 언제 정말 우리의 것이었던 적이 있는가

우리에게 얼굴을 만들어 주고

그 얼굴을 마모시키는 삶

잘 가라, 곁방살이하던 애인아

종이 가면을 쓰고 울던 사랑아

그리움이 다할 때까지 살지는 말자

그리움이 끝날 때까지 만나지는 말자

사람은 살아서 작별해야 한다

우리 나머지 생을 일단 접자

나중에 다시 펴는 한이 있더라도

이제는 벼랑에서 혼자 피었다

혼자 지는 꽃이다




# 비켜선 것들에 대한 예의 – 118~119p.

(중략)

조금은 세상으로부터 물러나야 저녁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아, 나는 알지 못했다

나의 증명을 위해

수많은 비켜선 존재들이 필요했다는 것을

언젠가 그들과 자리바꿈할 날이 오리라는 것을

한쪽으로 비켜서기 위해서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비켜선 세월만큼이나

많은 것들이 내 생을 비켜 갔다

나에게 부족한 것은

비켜선 것들에 대한 예의였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잠깐 빛났다

모습을 감추는 것들에 대한 예의였다




# 독자가 계속 이어서 써야 하는 시 – 122p.

(중략)

어둡게 들어가야 어둠을 이해할 수 있다고

꽃나무의 눈을 털어 주는 것을 좋아한다 꽃의 잠을 깨우는 것을

가는 실에라도 묶여 있는 새는 날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 준 어느 성인을 좋아한다

지금까지의 모든 시들보다 아직 써지지 않은 시를 좋아한다




++ 그리고 요즘 류시화 샘께서 아침에 보내주시는 아침의 시. 잔잔하게 아침을 깨워주는 시.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류시화 지음,

열림원, 2015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국내도서
저자 : 류시화
출판 : 열림원 2015.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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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 1 - 아프리카 | 중동 | 중앙아시아


# 개정판 서문, 나의 가장 좋은 것만 주고 싶은 여러분께 - 9p.

책 만드는 사람들은 책도 운명과 수명이 있는 유기체라고 한다. 이 책은 좋은 운을 타고나서 10년 이상 여러분과 사랑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이 책도 제 역할을 다하고 나면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때가 언제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 나는 그날까지 지금처럼 여러분과 마음껏 내 여행 얘기를 나누고 싶다. 더불어 내가 앞으로 겪게 될 새로운 경험과 깨달음, 어려움과 고통까지 나누며 함께 성장하는 기쁨도 한껏 누리고 싶다.

이제 드디어 나와 함께 좌충우돌, 흥미진진한 세계 일주 여행을 떠날 시간이다. 이번엔 좀 긴 여행이 될 테니,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배낭끈을 꽉 조이고 신발 끈도 바싹 붙들어 매길 바란다.

자, 이제 문밖으로 나가자. 나가서 온 세상을 가슴 가득 품어보자.



# 제2의 부모 위튼 씨 부부 도움으로 미국 유학 – 21p.

난 자신이 있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일반 지식은 고등학교만 나오면 충분하다고, 그 후의 알차고 풍요로운 삶은 학벌에 의해 결정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삶을 위해 스스로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달린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 일이 있은 후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이후에도 고졸자로서 당당하게 사회적인 편견과 부당한 대우를 감당할 자신이 있는가. 아니, 그 벽을 뛰어넘을 자신이 있는가.



# ‘나 홀로 여행’은 나 자신과의 여행 – 32p.

홀로 떠나는 여행, 그것은 나 자신과의 여행이다. 여행이란 결국 무엇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서 수많은 나를 만나는 일이다.

여행 중에는 참 많은 일이 벌어진다. 그 사건들마다 얻은 경험이 내 안에 들어와 나를 만들어 간다.



# 여행 1년은 평범한 인생 10년 – 37p.

세상의 바다를 헤쳐 나가는 내 인생이라는 배의 선장은 바로 나라는 것, 누구도 대신할 수 없고 대신하게 해서도 안 된다는 것, 바다가 고요할 때나 폭풍우가 몰아칠 때나 나는 내 배의 키를 굳게 잡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지금과 같은 깊은 행복감을 맛보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마침내 깨닫게 되었다.



# 아! 이 일을 하고 싶다 – 82~83p.

난민들을 돕는 방법은 많다. 종교를 가진 사람은 영적으로, 돈을 가진 사람은 물질적으로, 국제 관계에 영향력을 가진 사람은 정치적으로, 누구든지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어 가지려고만 한다면 난민들을 돕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 내 목소리도 잠재운 수다 퀸의 내공 – 142p.

그러니까 섭섭하다는 감정은 생각대로 해주지 않는 상대방 때문이 아니라 기쁘게 줄 수 있는 이상의 것을 준 나 때문에 생기는 거다.

‘마음에서 우러나서 하고 싶은 만큼만 하자. 그러면서 그 우러나는 마음의 폭과 깊이를 키우자.’



# 아싼테 싸나, 고마운 내 몸 – 180~181p.

우선 사람은 세상을 살면서 빨리빨리 해야 할 것과 천천히 해야 할 것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 거다. 나도 지금까지 살면서 누구 못지않게 ‘빨리빨리’를 외쳐온 사람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무엇이든 조금씩 늦게 시작했다. 대학도 늦게 다니고, 첫 직장에도 늦게 들어가고, 결혼도 이미 늦었고. 이런 늦었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더욱 조급해져 무엇이든 속전속결, 빨리빨리 해치우려고 해왔다.

그런데 내가 킬리만자로 등반을 하면서 평소처럼 ‘남보다 빨리, 남보다 먼저’를 외쳤다면 나는 아마 정상은 쳐다보지도 못하고 주저앉았을 것이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남과 비교해서 내가 얼만큼 왔는가가 아니라 내가 지금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힘을 제대로 축적하면서 알맞은 속도로 가고 있는가라는 소중하고도 고마운 자각을 하게 되었다.

자기 목표가 뚜렷하다면 남이 얼마나 빨리 가는지, 가면서 무엇을 하는지 비교하지 않고 자기 페이스를 지키는 게 어렵지는 않겠지. 불경에서도 모든 번뇌의 근본은 남과 비교하는 데에서 비롯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 그 사람 조나단 – 190p.

혼자 여행을 하다 보면 여행객이든 현지인이든 늘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런 사람들과 짧게는 하루, 길게는 몇 주씩 함께 여행을 하게 되는데, 어떤 인간관계나 그러하듯 첫눈에 마음에 드는 사람, 한참을 지내야 좋아지는 사람, 아무리 좋아하려고 해도 끝내 좋아지지 않는 사람, 처음에는 좋았다가 나중에는 빨리 헤어지고 싶은 사람 그리고 무리하게 여정을 바꾸어서라도 될수록 길게 함께 있고 싶은 사람 등 갖가지다.

어떤 경우든 여행 중에 만나는 사람들은 내 경험을 풍요롭고 값지게 해주지만, 특히 외로운 여행길에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는 건 마치 한여름 땡볕에서 일을 하다가 잠시 바람 부는 시원한 그늘에 앉아 마시는 찬 맥주의 첫 모금과 같다고 할까. 



# 빗속의 귀곡 산장 – 214p.

혼자 여행을 하면 자신이 스스로를 돌보아야 한다. 혼자 결정하고, 그 모든 결정에 따르는 결과에 대해 혼자 책임을 져야 하는 과정에서 나는 나와의 대화 시간을 갖게 되고, 그러면서 나를 잘 알아가게 된다.

뿐만 아니라 여행 기간이 길어질수록, 그래서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될수록, 어떤 일이 닥쳐도 감당할 수 있다는 자기 능력에 대한 신뢰가 조금씩 더해지는 것 같다. 자기에 대한 믿음, 이거야말로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소득이 아닐까. 결국 이것이 인생을 사는 데 가장 큰 힘이 될 테니까 말이다.




■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 2 – 중남아메리카 | 알래스카


# 흰 눈, 검은 산, 붉은 해 – 77p.

동물 가운데 어떤 종류는 대하기가 공손해질 만큼 점잖고 품위 있는 것들이 있다. 사슴이 그렇고, 숫사자가 그렇고, 아까 본 과니코가 그렇다. 반면 하이에나처럼 표정도 비굴하고 행동도 남의 눈치를 보는 등 채신머리가 없어 볼품없는 것들도 있다.

사람이라고 왜 안 그렇겠는가. 지위의 고하나 귀천에 상관없이 어떤 사람은 가만히 있어도 고개가 절로 숙여지고, 어떤 사람은 발버둥을 쳐대도 우스워 보이는 것을. 나는 어떤 동물에 비할 수 있을까. 나는 사자처럼 당당하게 살고 싶은데, 실제 내 모습은 하이에나같이 초라한 것은 아닐까? 생각만 해도 무섭다. 그러니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매일매일 부단한 노력만이 살 길이다.



# 마추픽추에 꽃을 바치다 – 132p.

잉카인들이 걷던 길을 그대로 따라 걸어 그들이 살던 곳에 와서 그들이 남기고 간 숨결을 느껴보면 잉카에 대한 궁금증이 조금은 풀릴 줄 알았다. 그런데 아서와 함께 한나절 동안 이곳을 샅샅이 돌면서 수많은 설명을 듣고 수없는 질문을 해보아도 수수께끼는 더욱 풀기 어려운 실타래가 되기만 한다.

‘잉카의 길’ 끝에 놓여 있는 공중 도시 마추픽추는 결국 내게 아무것도 확실히 말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이 도시를 내려올 무렵에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그렇게 멀기만 하던 잉카문명이 내게 아주 가까이 다가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흔적 없이 사라져버린 문명이 아니라 현재형의 문명으로.



# 원숭이 바비큐는 못 먹었지만 – 179p.

제놈은 원숭이를 유인하기 위해 울음소리를 흉내 낸다. 멀리서 원숭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마치 먹이를 발견한 맹수처럼 눈을 반짝이며 쫓아가는 그의 행동은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멋진 프로의 태도 그대로다.

저녁거리 원숭이를 잡지 못한 채 질퍽한 정글을 돌고 돌아 다시 캠핑장으로 돌아올 때는 다른 가이드 같으면 변명을 하거나 사탕발림으로 이말 저말 늘어놓을 텐데, 그는 최선을 다한 사람의 당당한 모습으로 “노 수에르떼 오이(오늘은 일진이 안 좋았어요).” 하고 딱 한마디만 한다.



# 갈비찜에 김치에 뭇국까지 – 186p.

사람은 사는 곳에 따라 달라지는 모양이다. 도시에서 아옹다옹 경쟁하고, 그러는 중에 알게 모르게 상처를 주고받으며 사느니 이렇게 자연과 더불어 편안하게 사는 게 얼마나 일생을 잘 사는 것이냐? 비록 삶의 풍운에 따라 고국을 떠나왔지만 시골 고향 사람들처럼 순박한 사람들과 함께 구순하게 살 수 있다는 것도 또 다른 행복이 아닐까?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연 – 224p.

인간은 아주 오래전부터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만 생각해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산 정상에 올라가거나 또는 자연의 작은 법칙을 발견해 내고는 ‘자연을 정복했다’고 말한다. 마치 거대한 호수에서 한 컵의 물을 뜨고는 그 조그만 잔에 호수를 다 담은 듯 호들갑을 떠는 것과 같다. 아무리 많은 컵에 물을 떠간대도 호수는 호수로 남아 있는데 말이다.

인간은 자연을 절대로 정복할 수 없다. 아니, 정복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자연과 융화되어 자연스럽게 살아야 한다. 이게 바로 동양의 정신이다. (중략)

자연은 자연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연(自然)이다.



# 삼각형 산만 산이냐? 사각형 산도 산이다 – 290p.

내가 장난으로 평평한 꼭대기 위로 삼각모를 씌웠더니 그 아이는 안색까지 변하며 “이건 산이 아니야.” 하는 거다. 만약 우리나라 어린이에게 물었다면 그 아이가 그린 산처럼 꼭대기가 평평한 것은 산이 아니라고 했을 것이다.

경험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새삼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사람들은 이런 경험과 교육으로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갖게 되고 그 테두리 안에서 가치관과 인생관을 만들어간다.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가치관은 절대로 바뀔 수 없는 것으로 고착되기 때문에 자신과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나 사회와 문화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풍부한 간접 경험이 중요하고, 그래서 책 읽기와 여행이 중요하다고 하는 거다.



# 힘내라, 힘! – 360~361p.

지금 엘케를 만난 것처럼 여행 중에는 늘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 현지인도 만나고, 같은 여행객들도 만나고. 현지인을 만나면 민박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여행객들하고는 여정이 비슷해 며칠씩 같이 다니기도 하고, 한곳에 오래 머물면서 오가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을 만나 새로운 경험을 하고, 인생의 각각 다른 가치를 듣는 것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나는 원래 사람 사귀기를 좋아해서 여행의 이런 면을 대단히 즐긴다. 

그러나 텔라에서 엘케랑 헤어지고 나서는 정말로 혼자 있고 싶었다. 혼자 여행을 다니고 있지만 생각해보면 지난 2년 동안 이렇게 저렇게 만난 사람들과 늘 함께 다녔다.

특히 이번 중미 여행은 멕시코시티부터 이곳까지 아주 많은 사람을 릴레이 하듯 만났다. 대부분의 경우는 참 좋았다. 그렇지만 지금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 자기소개를 하고 똑 같은 얘기를 반복하는 것에 진력이 난다.

사람은 가끔씩 자기만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이렇게 논스톱으로 사람을 만나게 되면 생각을 정리할 새도 없이 여러 가지가 한꺼번에 겹쳐 더 이상 처리할 수 없는 한계상황이 온다. 그런 때가 오면 내 안에 있는 내가 혼자 있고 싶다고 신호를 보내온다.

일단 생각이 둔해진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게 되고 무얼 해도 재미가 없다. 변덕이 심해지고 자꾸만 글이 쓰고 싶어진다. 그때가 며칠간 혼자 있어야 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때다.



# 여행을 하면서 무엇을 얻었나요 -364~365p.

그는 여행을 통해 우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가치와 판단 기준이 절대적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여행이 거의 끝나가는 지금은 자기와는 전혀 다른 사회와 문화를 보는 눈이 유연해 졌다는 거다. 그건 나도 그렇다.

똑 같은 행동이라도 어느 문화권에서는 지극히 정상인 게 다른 문화권에서는 비정상으로 보이는 경우가 있다. (중략) 문화 충돌의 체험을 통해 자연스럽게도 서로 다른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게 되는 것, 그것이 여행의 가장 큰 소득이다.

로버트가 얻은 여행의 두 번째 소득은 자신을 발견한 것이라고 한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인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 자기에 대해 충분히 정리하고 계획할 시간을 가졌다는 것에 나도 고개를 끄덕인다. 이 점은 내가 세계여행을 시작한 가장 근본적이고도 중요한 목적이다. (중략)

특히 어떤 삶이 멋진 삶인가, 앞으로 우리는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를 주고받았다. 야자수 그늘 아래서 악명 높은 샌드플라이의 집중 공격을 받으면서도 자리를 옮기지 않고, 우리가 오후 내내 나눈 대화의 결론은 이거다.

첫째,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자. 둘째, 심플하게 살자. 셋째,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살자. (중략)

‘직장까지 그만두고 여행을 시작한 건 정말 잘 한 일이야. 여행은 인생을 배우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니까.’




■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 3 – 인도차이나 반도 | 남부아시아


# 아름다운 사람들의 따뜻한 눈길 그리고 미소 – 21p.

여행은 ‘떠나는 것’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여행은 ‘만나는 것’이다.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 풍습, 생김새와 생각들과의 만남이다. 그리고 사람들. 여행이 줄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은 바로 사람들과의 만남이다.



# 배낭족의 오아시스 방콕 카오산 로드 – 26~28p.

돈이 많든 적든, 어느 나라 어느 문화권에서 왔든, 인생의 한 부분을 배낭 메고 여행을 한다는 공통점에서 이들은 같은 민족이다. 이 민족의 이름은 바로 배낭족이다.

비록 말이 잘 안 통하고 문화적·정서적 배경이 전혀 다른 사람들일지라도 배낭족이라는 한 가지 공통점 때문에 언제 어디서 만나도 반갑고, 나눌 얘기가 많다. 때로는 ‘비(非)배낭족’인 같은 나라 사람보다도 훨씬 할 말이 많고, 말이 잘 통하기도 한다.

배낭족은 그들만의 신체적 특징과 나름대로 독특한 문화와 정서를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하나의 민족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들끼리 서로를 알아볼 수 있게 하는 가장 큰 외형적 특징은 민족의 대명사 ‘배낭’이다.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담긴 한 덩어리 배낭은 사람들이 얼마나 불필요한 것을 욕심 내며 살고 있는지 명백히 보여주는 인생의 교훈이다. 배낭 하나를 채울 정도의 물건이면 한 사람이 살기에 충분하다는 지혜를 배낭족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전대(纏帶). 몽골족에게는 누구든 몽고반점이 있듯이 배낭족에게는 배낭족에 합류하는 그날부터 ‘전대 착용’이라는 민족적 특징을 지니게 된다. 전대는 그것을 차는 순간부터 벗어버릴 수 없는 제2의 피부가 된다.

자신의 전 재산과 여권 등 여행에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 들어 있는 전대가 얼마나 귀중하면서도 귀찮은 애물단지인지를 이들은 잘 안다. 이것을 잃어버리면 당분간 배낭족의 신분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도.

이들에게는 민족 필독서도 있다. <론리 플래닛(Lonely Planet)>이라는 가이드북을 비롯한 여행 책자다. 배낭족은 그 책에 나온 숙소에 모이고, 그 책에 나온 식당에서 먹고, 그 책에서 가보라는 데를 가본다. 그래서 그 책에 소개된 곳에서는 언제나 동족을 만날 수 있다.

이들은 막막한 사막에서 만난 사람들이 서로 지나온 오아시스와 행로에 대한 정보를 나누듯 배낭족의 생활 정보를 주고받는다. 싸고 좋은 숙소와 식당에 대해, 바가지 쓰지 않거나 위험한 일을 피하기 위해, 어떻게 하면 더 잘 보고 많이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서로가 알고 경험한 것을 나눈다. 이런 정보 교환을 통해 배낭족은 더욱 끈끈한 동족애를 느끼게 된다.



# 감기로 죽을 뻔하고 사기도 당하고 – 82~83p.

여행을 시작한 지 벌써 5년째. 누가 돈 주고 시키는 일이었으면 그만두어도 벌써 그만두었을 거다. 내가 좋아서 내 돈, 내 시간 들여가며 하는 일이니 이렇게 힘든 때도 참을 수 있는 거다. 이럴 때마다 내가 나에게 묻는 말이 있다.

“그러면 넌 지금 한국에서 편안히 생활하면서 세계 일주 여행 한번 해봐야지 하고 생각만 하고 있는 편이 좋겠니?”

내 안에 있는 다른 내가 얼른 대답한다.

“아니, 아니야. 조금 몸 고생이 되더라도 지금이 행복해.”



# “그런 남편은 우리에게 죽은 거나 다름없습니다” 

<라이따이한의 향기> 中… SBS – 91p.

“한국과 베트남이 국교가 정상화되고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된 지가 벌써 2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남편이 우리를 찾지 않은 걸 보면 나는 그가 죽었다고 생각됩니다. 아니,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자 합니다. 몸은 살아 있을지 몰라도 마음은 이미 떠난 것이니 우리에게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중략)

“우리 아이들은 한국인 2세라는 이유로 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없었음은 물론 온갖 기회를 박탈당하고 살아왔습니다. 단지 한국인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 베트남 여자들이 이만큼 키워놓았으니 이제는 한국의 자식인 이들에게 한국이 무엇인가 삶의 발판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96p.

“미군이 베트남전쟁에 직접 개입하게 된 통킹 만 사건부터가 조작극이라는 거 알지?”

이렇게 시작한 그의 얘기는 나를 베트남전쟁의 실상에 대해 지금까지 나만 모르고 있었다는 부끄러움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했다.

우리가 젊은이들을 바쳐가면서 베트남전쟁에서 얻은 것은 무엇인가. 미국과 혈맹의 약속을 지켰다는 신의와 그 대가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했다는 전쟁 특수 몇 억 달러가 전부 아니던가. 그리고 피는 물보다 진하다면서도 너무나 야비하고 치사하게 버리고 온, 3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 한국인 2세 라이따이한.

정말로 한국 아버지가 다시 돌아오리라고 기대하며 질곡의 삶을 살아온 불행한 인생들을 남겨놓았으니 우리는 이제 그 역사의 그늘에서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을 어찌해야 할 것인가.

나는 무거운 마음을 남겨두고 다시 떠난다.



# 부처님 오신 날 파간은 조용했다 – 212p.

긴 여행을 하면서 이렇게 읽고 싶었던 책을 얻게 되는 것은 큰 행운이다. 여행자들은 항상 다 읽은 책을 돌려보는데, 다음에 어떤 책이 걸릴지 모르는 일이다. 하기야 여행 자체가 언제나 불확실성의 연속이 아닌가.

거의 매일 새로운 곳에서 자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는 떠돌이 생활. 항상 새로운 환경에 부딪치면서 이번에는 또 어떤 것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전혀 예측도 하지 못한 채 새로운 곳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 여행자의 삶이다.



# 강간범은 고추를 따버려야 해 – 266~267p.

나는 세계 어느 나라든 강간범에 대한 처벌이 너무 미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한 인간에게 끼친 그 어마어마한 피해에 비하면 몇 년 징역살이는 얼마나 가벼운 벌인가. 이런 불공평한 법을 만든 사람들이 대부분 남자이기 때문에 강간범에게 관대할 거라는 의혹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초범이고 충동적이었다면, 그래서 개전(改悛)의 여지가 있다면 모를까(이 경우에도 10년 이상 형은 되어야 한다) 재범 이상이라면 분명히 구제 불능의 정신병자들이다. 자신을 제어할 능력이 없는 이들은 범죄예방과 사회 안녕의 차원에서 아예 거세를 해야 마땅하다는 게 내 의견이다. 이런 말을 하면 강간범에게도 인권이 있다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 ‘인간의 의무’를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 왜 ‘인간의 권리’를 주어야 하느냔 말인가.



# 이슬라마바드의 꼬리털 클럽- 304p.

혼자 여행을 다니면 빠지기 쉬운 아주 나쁜 버릇이 바로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식의 인간관계다.

마음에 맞는 사람들하고야 얼마든지 즐겁게 지내지만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거나 의견 충돌이 생기면 양보하거나 참으려 하기보다 저 사람과 더 이상 안 다니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더 쉽게 든다. 여행 중에는 사실 아쉬울 게 없으니까.

참으로 유지한 생각이고 무서운 생각이다. 세상을 살면서 어떻게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들하고만 지낼 것이며, 좋아하는 사람들 틈 속에서만 살 수 있겠는가. 어떻게 자기 스타일이 아니거나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인간관계 밖으로 생각하며 살겠는가.

그것이 혈연이든 지연이든 학연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인연으로 만난 관계든 참을성 없고 이해와 양보와 절충이 없는 관계는 이미 시작부터 죽은 관계다.

사람의 인연과 관계란 가꾸기 까다로운 꽃과 같아서 인연이라는 꽃시가 있다고 저절로 크는 것이 아니라 정성을 다해 키워야 한다는 말이 그 밤, 내 가슴 안으로 아프게 파고들었다.




■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 4 – 몽골 | 중국 | 티베트


# 여행을 통해 얻은 소중한 것들 – 19p.

그래서 나는 늦은 시간을 벌충하기 위해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면서 그저 바삐 움직였다. 산으로 가든 바다로 가든 일단 움직여야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이제는 알 것 같다. 객관적인 시기가 중요한 만큼 주관적인 때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나에게는 세계 일주 여행을 시작한 35살이 바로 그런 때였으며, 여행이 끝난 지금 다시 한 번 전혀 새로운 인생의 장을 펼 때라고 생각한다.

킬리만자로의 우후르 봉에 오를 때 깨달은 대로 나는 남과 비교하지 않고 묵묵히 나의 길을 갈 것이다. 또한 남미의 어디에선가 작정한 것처럼 가슴은 따뜻하고 생활은 심플하게 살면서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할 것이다.

여행을 하면서 바로 그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는 것도 커다란 수확이다. 국제 난민 관련 프로그램에서 일하는 것이다. 여행을 하지 않고 한국에서만 있었다면 관심조차도 없었을 분야다. 아프리카, 중동, 인도차이나, 남부아시아 등을 여행하면서 수많은 난민들을 보고, 애써 난민촌에서 같이 지낼 기회를 만들면서 찾아낸 평생의 일이다.



# 꿈꾸는 사람은 아름답다 – 23p.

꿈은 아름답다. 무언가를 꿈꾸는 삶은 아름답다. 자기의 꿈을 향해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힘과 용기는 더 없이 멋지다.

여러분이 가슴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꿈, 꼭 이루시길 바란다.



# 무늬만 슈바이처 – 123p.

저 아이는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펼쳐질지 알고 있는 걸까.

물론 할아버지도 할아버지의 방식으로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행복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걸 안다. 그래서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안다. 그러나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적어도 자기 생각을 글로 쓸 줄 알고, 다른 사람의 생각과 경험을 읽을 줄은 알아야 하지 않는가.

중국 인민이면 누구나 받아야 하는 의무교육이 왜 이곳에서는 실시되지 않는 건지. 어느 곳에서나 소수민족 편이었던 나는 지금은 중국 편에 서고 싶다. 강제적인 의무교육을 통해서라도 아이가 교육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염려도 소위 문명인으로서의 오만과 편견일지 모른다. 어떻게 내가 가진 잣대로 아이의 행불행을 가늠할 수 있겠는가. 이 아이는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문맹으로서 큰 불편과 불만 없이 살 수도 있을 것이다.



# 국경 마을의 가난한 부자 아줌마 – 214p.

‘여행하시면서 버릴 것은 버리고 그 빈자리에 더 많은 것을 채워가시기 바랍니다.’



# 공동묘지에서 인생 상담 - 223~224p.

릴리가 내 친동생이라면 이럴 때 뭐라고 말해주었을까?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여자의 편안한 삶, 결혼해서 아이들 낳고 남편 울타리 속에서 안정된 삶을 살아갈 길이 열려 있는 친동생에게도 모두 버리고 홀로서기의 험한 길을 택하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을까?

그래, 적어도 내 동생이 하고 싶은 일이 뭔지 분명히 알고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해내겠다는 의지가 굳건하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홀로 거친 바다로 나가보라고 말할 거다.

모든 결혼이 다 그렇지는 않지만 동생이 하려는 결혼이 자기의 성장을 막을 게 뻔하다면, 함께 커나갈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는 세상이라는 거친 바다에서 자기 배의 노를 스스로 저어가 보라고 말할 거다.



# 시작이 늦은 것보다 하다 중단할 것을 두려워하라 – 340p.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 중 하나가 ‘이 나이에……’. 라는 말이다. 앞으로 더 나이 들 일밖에 남지 않았으니 ‘이 나이’가 그 사람의 인생으로서는 제일 젊은 나이인데도 말이다. 바로 ‘이 나이’가 자기보다 나이 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며 돌아가고 싶어 하는 ‘참 좋은 때’ 인데도 말이다.

스스로 자신을 ‘이 나이에’라는 올가미로 얽어매지 않는다면 나이로부터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다. 언제 어느 때든 용기를 내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분들에게 들려드리고 싶은 중국 격언이 있다.

‘늦게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 말고, 하다 중단할 것을 두려워하라.’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 1~4>

한비야

푸른숲, 2007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 세트
국내도서
저자 : 한비야
출판 : 푸른숲 2007.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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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중에서



# 도봉사 코스 - 60p.

이 코스는 마지막에 다 보여준다. 우이암에 오르면 정말이지 잘 왔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에서 보는 경치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웅장하고 예쁘다. 발 아래 펼쳐진 세상을 보고 있으면 인생에 대한 답답하고도 우매한 질문들이 말없이 해결되는 느낌이다.



# 관악산 - 74p.

나는 산에 둘러싸여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

산속에 오도카니 자리 잡은 벤치에 앉아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노라면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피로가 싹 가시는 느낌이다. 인왕산 밑에 위치한 와룡공원과 관악산은 내가 자주 찾는 장소 중 하나다. 일단 산속에 들어가면 내가 종일 앉아 있을 자리부터 살핀다. 준비해온 주먹밥도 먹고 커피도 홀짝홀짝 마신다. 무심히 나무를 쳐다보거나 흘러가는 계곡물을 유심히 바라보기도 한다. 무엇보다 가장 좋아하는 건 라디오를 듣거나 책을 읽는 것이다. 기분 내키는 날에는 정상까지 올라갔다 내려온다. 산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정말이지 무궁무진하다. 산 속에서의 하루는 짧게만 느껴진다.



# 북한산 둘레길 - 42p.

북한산 국립공원은 '단위 면적당 가장 많은 탐방객이 찾는 국립공원'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다. 지금도 한 해 평균 1,0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북한산 국립공원을 찾고 있다. 북한산 둘레길은 좀 더 쉽고 편안하게 북한산 국립공원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70km의 길은 물길, 흙길, 숲길, 마을길로 아기자기하게 조성되어 있어 걷기에 전혀 지루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좀 걸어본 사람이라며 걷기가 왜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아름다운 선물로 불리는지를 알 것이다. (중략) 길은 총 21개 구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같은 길이 하나도 없다. 숲이 주는 피톤치드를 마음껏 마시면서 편안하게 걷기에는 순례길과 소나무숲길, 우이령길이 좋다. 약간의 산행 기분을 느끼고 싶다면 명상길과 옛성길, 산너미길을, 짧게 산책을 즐기고 싶다면 왕실묘역길과 마실길을 추천한다.


# 북악산 - 131p.

북악산은 이유 없이 우울한 날이나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날 찾으면 더 좋다. 숲은 내가 어떤 모습이든 언제나 두 팔 벌려 품안에 쏙 안아준다. 가족이나 친구에게 말하지 못하는 고민을 북악산 언저리에 살짝 얹어놓고 오면 된다. 한 달 후, 몇 달 후 내가 놓고 온 고민이 잘 있나 싶어 찾아가보면 바람에 실려 벌써 날아가고 없다.

예쁘고 조용한 북악산 길을 걸으면 늘 같은 생각이 든다. 도대체 서울 사람들은 이 좋은 곳을 놔두고, 어디에 가서 위로를 받고 힘을 얻는 걸까?



# 소요산 - 221p.

이날, 소중한 사실 하나를 새삼 깨달았다. 힘든 과정도 함께 하면 덜 힘들고 외롭다는 것을. 소요산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 그들이 건넨 인사는 소요산을 더욱 아름답게 기억하게 만들었다. 나는 지금도 소요산을 그리워한다. 내가 살고 싶은 곳이, 살면서 만났으면 하는 사람들이 다 거기에 있다.



# 수락산 - 258p.

보면 마음 편해지는 사람이 있다. 보면 기분 좋아지는 사람이 있다. 보면 웃게 되는 사람이 있다.

문제는 세상 살면서 이런 사람 만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산은 다르다. 편하게 웃고 싶고 기분 좋아지려면 가까이에 있는 산을 찾으면 된다. 수락산도 그 중 하나다. 이유 없이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든다. 깨알 같은 재미는 없지만 은근하면서도 아기자기한 재미가 곳곳에 숨어 있다. 명성왕후가 숨어 지냈던 사찰과 1,3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사찰에서는 아름다운 여유가 무엇인지를 실감할 수 있다. 수락골 입구에서 시작하는 코스는 계곡이 함께해 시원함이 느껴진다.


<여자를 위한 친절한 등산책>

구지선 지음

시공사, 2012



여자를 위한 친절한 등산책
국내도서
저자 : 구지선
출판 : 시공사(단행본) 2012.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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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라파고스 제도, 야무지게 여행하기


Q 갈라파고스에서는 무엇을 보고, 느끼고, 맛볼까?

크고 작은 19개의 섬과 여러 개의 암초로 이루어진 갈라파고스 제도의 주도는 산크리스토발 섬이다. 그중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3개의 섬에서 보고 즐길 수 있는 것들을 소개한다.


① 산타크루즈 섬

  • 파우스토 레나 번식센터 (Centro de Crianz 'Fausto Llerena') : 여러 섬으로부터 온 다양한 종의 거북들을 2~3살이 될 때까지 돌봐주는 곳
  • 라스 그리에타스 : 그리에타스 (Grietas)는 '균열', '틈' 이라는 의미이며, 이곳에 가면 거대한 절벽이 양쪽에 있어서 마치 지구가 열어놓은 '틈'에서 수영하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다이빙이나 스노클링하기에 적합하다.
  • 엘 가라파테로 (El Garrapatero) : 플라밍고(홍학)나 철새를 볼 수 있는 백사장. 차로 1시간을 가야 하는 곳이라 장기 여행자들에게 추천한다.
  • 토르투가 베이 : 갈라파고스에서 가장 큰 백사장. 수영, 스노클링, 카야킹, 서핑 등 활동적인 레포츠를 즐기기에 좋고 간단히 걷기에도 좋은 코스. 도보로 30분~1시간 정도 걸린다.
  • 로스 헤멜로스 : 갈라파고스 제도가 형성될 때 화산 폭발로 지반이 가라앉은 곳에 만들어진 거대한 숲.
  • 엘 차토 : 야생과 비슷한 조건에서 자이언트거북을 키우는 곳으로, 야생 자이언트거북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 용암동굴 : 용암으로 인해 형성된 동굴을 체험할 수 있다.

② 산크리스토발 섬
  • 라 로베리아 (La Loberia) : 바다사자를 보기에 조은 곳. 파도가 높은 곳에서는 서핑도 즐길 수 있다.
  • 푸에르토 치노 (Puerto Chino) : SBS <정글의 법칙>이 갈라파고스에서 유일하게 촬영 허락을 받았던 곳. 휴식을 취하거나 바닷새를 볼 수 있는 이상적인 장소다.
  • 푸에르토 그란데 : 산크리스토발 섬 투어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곳. 조용하고 수영하기에 적합하다. 소라게, 용암 갈매기, 펠리컨, 파랑발새(푸른발부비새)를 볼 수 있다.
  • 갈라파구에라 데 세로 콜로라도 (Galapaguera de Cerro Colorado) : 산크리스토발에 있는 거북들을 보호하고 번식시키기 위해 만든 곳.
  • 엘 훈코 (El Junco) : 이 호수는 휴면 상태인 분화구 내면에 있다. 엘 훈코에서 발원하 지하수는 산크리스토발 섬 전체를 감싸 흐른다.
  • 세로 라스 티헤레타스 (Cerro Las Tijeretas) :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으며, 스노클링도 할 수 있따. 고래를 보고 싶다면 6~10월에 갈 것.
  • 푼타 카롤라 (Playa Punta Carola) : 바다 이구아나와 바다사자를 볼 수 있으며 일몰이 장관이다.
  • 레온 도르미도 : 산크리스토발에 가면 꼭 가봐야 하는 곳. 사자 입에 해당하는 통로 부분을 통과하면서 스노클링을 할 수 있고, 스쿠버 다이빙도 해볼 수 있다. 운이 좋으면 망치상어도 볼 수 있다.

③ 이자벨라 섬
  • 라스 틴토레라스 : '틴토레라'로 알려진 하얀 지느러미 상어가 유년기를 보내는 따뜻한 수로를 볼 수 있다. 스노클링 포인트가 있어서 스노클링도 가능하다.
  • 치코 화산 (Volcan Chico), 시에라 네그라 화산 (Volcan Sierra Negra) : 이사벨라 섬에서 가장 큰 화산인 시에라 네그라 화산과 거기에 붙어 있는 기생화산. 말을 타고 트레킹을 할 수 있으며, 가이드를 동반해야 한다.
  • 아르날도 투피자 번식센터 (Centro de Crianza 'Arnaldo Tupiza') : 모든 연령에 해당하는 거북이를 관찰할 수 있고 번식 과정도 볼 수 있다.

갈라파고스 음식 Tip
랍스타, 참치회 등 해산물 천국! 수산시장으로 Go~
갈라파고스에서는 풍부한 해산물이 별미, 놓치면 정말 후회한다. 특히 '참치회'는 일품, 입 안에서 살살 녹는다 (개인적으로 부모님이 생각났다. 함께 먹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갈라파고스에서는 각종 생선회와 랍스타 등 싱싱한 해산물을 저렴한 가격에 즐길 수 있다.

① '사시미'가 통한다고?
갈라파고스에 대해 조금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펠리컨들이 모이는 수산시장을 사진으로 봤을 것이다. 그곳에 가면 생선을 손질해서 파는 사람들이 있는데, 신기하게도 이분들이 '사시미'를 아신다. 먹고 싶은 생선을 사서 이분들에게 주면서 '사시미'라고 말하면 알아서 회감으로 손질해준다. 그걸 들고 숙소나 바닷가로 가서 먹기만 하면 된다.

② '랑고스티노'는 큰 걸로!
랑고스티노는 아침 일찍 수산시장에 가면 살 수 있는데, 돈을 더 주더라도 큰 걸 사서 먹는 게 낫다. 근처 식당에서 돈을 받고 구워주기도 하며, 숙소에 가져와 쪄 먹어도 된다(호스텔에 비치된 조리기구 사용). 머리부분에 있는 내장을 밥과 함께 비벼 먹으면 밥도둑이 따로 없다.

③ 초장, 간장을 챙겨가면 대박!
난 사실 해산물을 간장에 찍어 먹지 않는다. 하지만 흰살 생선은 초고추장에 찍어 먹더라도 참치는 꼭 간장에 찍어 먹을 것을 추천한다. 갈라파고스에 들어가기 전에 친구가 간장을 챙기기에 말렸다가 나중에 후회막급. 결국 갈라파고스에서 비싼 가격에 한 병 구입했다. 평소 회를 안 좋아하는 사람도 갈라파고스에 가면 분명 마음이 달라진다. 초장과 간장을 꼭 챙겨가자. 고추냉이? 입맛대로 알아서 챙기길!


<일생에 한 번은 남미로 떠나라>

최희주 글, 사진

끌리는책, 2013



일생에 한 번은 남미로 떠나라
국내도서
저자 : 최희주
출판 : 끌리는책 2013.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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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다는 것 -13p.


잔잔해진 눈으로 뒤돌아보는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에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



# 밤 - 44p.


놀고먹는 족속들

생각하라

육신이 녹슬고 마음이 녹슬고

폐물이 되어 간다는 것을

생명은 오로지 능동성의 활동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일은 보배다

밤은 깊어 가고

밤소리가 귀에 쟁쟁 울린다



# 어머니의 사는 법 - 70p.


말소드레기란

말을 옮겨서 분란을 일으킨다는 뜻인데

어머니는 남의 일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고

호기심도 없었다

밥 먹고 할 일 없는 것들,

내 살기도 바쁜데

남의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그럴 새가 어디 있느냐



# 현실 같은 화면, 화면 같은 현실 - 127p.


하기는 그래, 다 먹고살기 위한 곡예사들

눈물이 난다

현실 같은 화면, 화면 같은 현실

종이장 같은 현실


(중략)


아아

굶주림 같은 풍요로움이여

쓰레기 더미 같은 풍요로움이여

죽음에 이르는 풍요로움이여

눈물이 배어들 땅 한 치가 없네



# 넋 - 131p.


죽음의 예감, 못다한 한 때문에 울고

다 넋이 있어서 우는 것일 게다

울고 있기에 넋이 있는 것일 게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박경리 유고시집

마로니에북스, 2010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국내도서
저자 : 박경리
출판 : 마로니에북스 2008.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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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중에서


# 달에울다 


사과나무가 자는 밤에는 나도 잔다. 사과나무와 함께 언제까지나 이 땅에서 움직이지 않으리라. 비록 야에코가 마을을 떠난다 해도 나는 기필코 남겠다. 아니다. 그때가 되어 보지 않고서는 모른다. 야에코 역시 어머니와 함께 사과를 재배하고 있다. - 38p.


야에코 위로 폭염이 소용돌이쳤다.

그 위에는 타서 눌은 하늘이 있고, 조금 더 위에는 타다 문드러진 태양이 눌어붙어 있다. 이 산 저 산에서 요란한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리고, 폭풍우 같은 매미 소리는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했다. 괴성을 지르던 야에코가 벌채된 나무처럼 무너지며 내 위를 덮쳤다. - 54~55p.


분명 나는 비정상이다.

나 스스로도 인정한다. 남들은 줄곧 독신으로 살아가는 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지만 그런 말을 들어도 아무렇지도 않다. 사실은 나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 모두가 이상한 게 아닐까? 10년 사이에 마을 사람들은 한층 더 나쁘게 변했다. 이제 그들은 농사꾼도 월급쟁이도 아니다. 그저 애매한 상태로 질질 후퇴하고 있다. 동정이나 변론의 여지가 없을 만큼 인상이 나빠졌고 눈동자는 빛을 잃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들까지도 그런 얼굴을 하고 있다. - 96p.



# 조롱(鳥籠)을 높이 매달고


"개도 정신병에 걸리나요?"

"그럼." 수의사는 나를 외면하며 말했다. "살아 있는 것은 모조리 미치게 마련이지.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모두 조금씩은 이상하니까." 그는 구부러진 주삿바늘을 펴면서 덧붙였다. "이상해지지 않고서 어떻게 이런 세상을 살아가겠어." - 124p.


나는 파도가 닿지 않는 모래밭 바위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검둥이가 옆에 와서 엎드렸다. 따스한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오후의 따스한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 따스한 허무가 나를 감쌌다. 지금까지 살아온 41년하고도 몇 개월 동안 쌓였던 피곤이 어느새 불쾌하지 않게 느껴졌다.

나는 급속히 느긋해져갔다. 전신의 힘이 엄지발가락 끝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드러누워야 하는 쪽은 검둥이가 아니라 나인지도 몰랐다.

"이제 아등바등 사는 건 그만두자." 내가 말했다. "당분간 이곳에 정착하지 않을래?"

"거 좋은 생각이군." 또 하나의 내가 말했다. "비교할 대상이 없다면 누구나 정상이지."

지금 내게는 밑바닥 없는 깊은 휴식이 필요하다. 천천히 몸을 쉬어야 하고, 나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려면 내 나름대로 힘을 길러야 한다. 그나마 나는 운이 좋은 편인지도 모른다. - 149~150p.


모든 사람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다. 가능하면 내 자신에게서도 멀어지고 싶었다. 그렇다고 술에 취해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차를 몰아 바다로 뛰어들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하고 싶었다면 벌써 오래전에 실천했을 것이다. 이제 나 자신을 비하할 필요가 없다. 나는 틀림없이 행복의 문턱에 서 있다.

"거짓말 마!" 또 하나의 내가 말했다.

"거짓말 아냐." 내가 말했다. - 172p.


나는 방해받지 않고 조용하고 순수하게 살고 있었다. 아주 조잡하고, 아주 무책임하고, 아주 자유롭게, 꿈꾸는 듯한 생활을 만끽하고 있었다. 살아 있는 동안 이렇게까지 편안한 기분을 느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간신히 식욕만 남았으며 욕망의 대부분은 흐릿해져갔다. 다른 일들은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 222p.


나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 순간이 행복한 듯도 했다. 누구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면 된다. 나는 나대로 내 멋대로 살아가겠다. 단순한 이치였다.

"처음부터 그렇게 살았다면 좋았을걸." 또 하나의 내가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내가 말했다. "이제부턴 그래야겠어." - 261p.



<달에 울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한성례 옮김

자음과 모음, 2015



달에 울다
국내도서
저자 : 마루야마 겐지 / 한성례역
출판 : 자음과모음(구.이룸) 2015.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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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중에서


- 61p.

실제로 많은 글쟁이들이 자전거를 타다가, 요가를 하다가,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요리를 하다가, 샤워를 하다가 메모를 한다. 책상 앞에서 끙끙 고민할 때보다, 몸을 움직일 때 훨씬 신선한 아이디어가 떠오르니 어쩔 수 없다. 피트니스 클럽에서 러닝머신을 달리다가 오늘 쓸 칼럼에 넣으면 좋을 에피소드가 떠올라 우뚝 서 버린다면 주위에서 당신을 좀 이상한 양반으로 볼지 모른다. 하지만 그게 대수랴, 글만 잘 쓰면 그만이다.


지금 칼럼쓰기를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고쳐쓰기 방법들 - 81~82p.

1. 돌려 읽어라

2. 초고-10%=수정본

3. 형용사를 멀리하고 동사를 가까이

4. 관념적인 한자어를 줄여라.

5. 어미를 다양하게 쓰자.

6. 제목은 한 줄의 카피처럼 날렵하게

7. 자기 언어로 쓴다.

8. 불필요한 문장 부호는 지워라.

9. -의, -을, -가 등을 줄여라

10. 글이 길면 중간제목을 넣어라.


대한민국 프리랜서 상위 1%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만 일을 받는다. 열가지 일을 맡아 놓고 그저 그런 결과물을 내기보다는 다섯 가지 일을 청탁받아 확실하게 처리한다. 

칼럼니스트는 각자의 전문분야가 확실하다. 때문에 발주처가 원하는 수준의 칼럼을 생산하지 못하면 다음 기회에서 자연히 제외된다. 이 사실을 체득한 현역 칼럼니스트들은 자신의 능력이 허용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하지 않는다. 당신이 쓸 수 있는 시간, 쓸 수 있는 주제 이상의 과욕을 부리지 마라. 손에 쥐고 있던 것마저 잃을 수 있으니.



<칼럼니스트로 먹고살기>

텍스트 라디오

왓북, 2014



칼럼니스트로 먹고살기
국내도서
저자 : 텍스트 라디오
출판 : 왓북 201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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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중에서


#쟁점3. 사람이 먼저 - 55~56p.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하는 비영리 기관에서는 부적합한 사람을 버스에서 내리게 하는 일이 영리 기업에 비해 훨씬 더 어렵다. 그래서 초기에 평가 시스템을 잘 세우는 것이 채용 시스템을 잘 세우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완벽한 면접 기술이나 이상적인 채용 기법 같은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보다 유능한 경영자라도 인력을 채용할 때 실수를 범하기 마련이다. 그 사람에 대해 확실히 아는 방법은 그 사람과 함께 일을 해보는 수밖에 없다.

... (중략)

좋은 기업에서 위대한 기업으로 도약한 회사들은 무엇보다도 적합한 사람을 버스에 태우고 그들을 계속 붙들어두는 데 집중했다. 다시 말해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는 사람, 스스로 동기를 찾을 줄 알고 자기 훈련이 되어 있는 사람,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원래 그렇게 타고난 탓에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강박에 가까운 투지를 가지고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사람을 버스에 태우고 그들을 붙잡아두는 데 초점을 맞췄다.



# 구조적 한게에 대한 강박을 버려라 - 102p.


시스템 전체를 바꾸는 데는 수십 년이 걸린다. 구조 개혁이 결실을 맺을 즈음이면, 당신은 이미 은퇴하거나 이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 시스템을 바꿔나가고 있는 바로 '지금', 당신이라면 무엇을 하겠는가?

여기에도 스톡데일 패러독스(Stockdale Paradox)가 적용된다. 구조적 한계라는 현실을 냉혹하게 직시하는 동시에 결국에는 우리 조직이 위대한 조직으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냉혹한 주변 상황에도 불구하고 위대함의 원리를 적용할 틈새를 만들기 위해 당신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 스톡데일 패러독스는 역경에 처했을 때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정면 대응하면 살아남을 수 있는 반면, 조만간 일이 잘 풀릴 거라고 낙관하면 무너지고 만다는 '희망의 역설'을 담고 있다.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 4장을 참고하라.



<비영리 분야를 위한 좋은 조직을 넘어 위대한 조직으로>

짐 콜린스 지음, 강주헌 옮김

김영사, 2015


비영리 분야를 위한 좋은 조직을 넘어 위대한 조직으로
국내도서
저자 : 짐 콜린스(Jim Collins) / 강주헌역
출판 : 김영사 2015.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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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중에서


# 4. 후추에 감춰진 슬픈 진실 - 65p.

당시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팔려간 노예의 수는 1,200만 명에서 2,000만 명 사이라고 한다. 이 중 5% 정도만 미국으로 갔고 나머지는 브라질, 카리브 섬 등으로 팔려갔다. 아프리카에서 대서양을 통해 항해하는 동안 약 20%의 노예들이 배 안에서의 열악한 위생과 영양결핍으로 사망했다.

흥미로운 점은 노예 거래를 통해 가장 이득을 많이 본 영국이 가장 먼저 노예제도를 폐지했다는 것이다. 1772년 솜머셋 사건(Sommersett Case)에서 영국 법원은 영국 내의 노예제도를 불법이라고 판결한다. 비록 영국의 식민지에서는 노예제도를 여전히 인정하였지만...

이후 윌리엄 윌버포스(Willian Wilberforce)와 토마스 클락스(Thomas Clarkson) 등의 활약으로 영국에서는 1807년에 노예 폐지법이 통과했으며, 영국으로 들어오는 배에서 노예가 발견되면 노예 1인당 100파운드의 벌금을 부과했다. 이후 영국은 1833년에 자국의 식민지에서도 노예제도를 불법으로 규정했으며, 1838년에 이 법이 최종 실행됐다.

당시 전 세계 노예 거래의 41%를 차지하고 있던 영국으로서는 큰 결심(?)을 한 셈이다. 그렇다면 영국은 과연 노예제도가 잔인하거나 비 인간적이어서 폐지한 것일까? 아니면 영국이 다른 국가들에 비해 더 신사 나라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폐지했을까?

절대 아니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의 영국에서는 유럽의 다른 나라에 앞서 산업혁명이 심화되면서 노예의 노동력에 의존하던 산업이 기계화되어 갔다. 따라서 노예제도의 필요성은 점점 사라져 갔고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것이 오히려 영국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6. 착취의 시대, 아프리카를 쟁탈하라 - 88~90p.

베를린 조약의 주요 내용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아프리카 영토 합병 시 다른 유럽 제국에게 통고

2. 합병의 유효화를 위한 효과적인 점령

3. 콩고 분지에서의 교역의 자유

4. 니제르 및 콩고 강의 항해의 자유

5. 노예 거래의 금지


매우 슬픈 사실이지만 이 베를린 컨퍼런스(1884.11 ~ 1885.02)는 아프리카라는 대륙이 유럽인들의 땅따먹기 대상이 됐다는 사실을 공식화한 자리였다. (중략)

베를린 컨퍼런스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벨기에, 덴마크,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네덜란드, 포르투갈, 러시아, 스페인, 스웨덴-노르웨이, 오스만투르크, 미국이 초청됐다.

그리고 너무도 지당(!)하게도 이 회의에는 단 한 명의 아프리카 사람도 초청받지 않았고 참석하지도 않았다. 아프리카의 주인인 아프리카 사람들의 참석 없이 아프리카의 영토 분할은 이렇게 합의가 됐다.


# 유럽 제국주의 국가별 식민지 표 -117p.


 제국주의 국가

 식민지 

 벨기에

 콩고자유국 및 벨기에 콩고(오늘날의 콩고민주공화국), 루안다-우룬다(르완다 및 부룬디) 

 프랑스

 프렌치 서부 아프리카 

 모리타니아, 세네갈, 알브레다(감비아의 일부), 프렌치 수단(말리), 프렌치 기니(기니), 아이보리코스트(코트디부아르), 니제르, 프렌치 상볼타(볼타 강 상류 지역으로 부르키나파소), 프렌치 다호메이(베닌), 프렌치 토고랜드(토고)

 프렌치 적도 아프리카

 가봉, 프렌치 카메룬, 프렌치 콩고(콩고공화국), 우방기차리(중앙아프리카공화국), 차드

 프렌치 북부 아프리카

 프렌치 알제리, 프렌치 튀니지아보호령, 프렌치 모로코

 프렌치 동부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코모로, 프렌치 소말리랜드(지부티), 레위니옹 등 인도양 섬들(아직도 프랑스 식민지)

 독일

 게르만 카메룬(카메룬과 나이지리아 일부), 게르만 동부 아프리카(르완다, 부룬디, 탄자니아), 게르만 남서부 아프리카(나미비아), 게르만 토고랜드(토고와 가나의 동쪽 일부)

 이탈리아 이탈리아 리비아, 이탈리안 에리트리아, 이탈리안 소말리랜드, 이탈리안 에티오피아

 포르투갈

 앙골라, 포르투갈 통고(앙골라 카빈다지방), 모잠비크, 포르투갈 기니(기니비사우), 까보 베르데, 사오토미 프린시페, 우이다(베닌의 일부)

 스페인

 스페니시 사하라(서사하라), 스페니시 모로코, 스페니시 기니(적도기니)

 영국

 이집트, 앵글로-이집트 수단, 브리티쉬 소말리랜드(소말리아 일부), 케냐, 우간다, 탄자니아(탕가니카 지역), 잔지바르, 베슈아나랜드(보츠와나), 남부 로데지아(짐바브웨), 북부 로데지아(잠비아),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역(트란스발, 케이프, 나탈, 오렌지공화국), 나미비아, 감비아, 시에라리온, 나이지리아, 브리티쉬 토고랜드(가나 일부), 카메룬(카메룬과 나이지리아 일부), 브리티쉬 골드코스트(가나), 니야사랜드(말라위), 바수토랜드(레소토), 스와질랜드

 독립 국가들

 - 라이베리아 (미국에서 이주한 노예들에 의해 1821년 성립, 1847년 독립 선포)

 - 에티ㅗ피아 제국 또는 압비시니아(1936~1941년 이탈리아에 의해 잠시 점령 당한 것을 제외하고는 독립국가 체제 유지)


# 12. 자유를 향한 눈물의 땅 ,라이베리아 - 161p.

한국 진출을 꿈꾸는 베트남 노동자들이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사용하는 <생활 한국어> 책에는 '때리지 마세요', '욕하지 마세요', '도와주세요'가 주요 예문으로 사용된다. 이것이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 아니라고 강변할 수 있는가.

약자로서 설움을 겪었으면 그 설움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약자가 강자의 위치에 올랐다고 해서 약자의 설움을 까맣게 잊고 강자의 횡포를 휘두른다면 그것은 역사의 진보가 아니라 역사적 비극이다.


# 아프리카의 국가별 식민지배자 및 독립 연도 - 173~175p.


 국가 명

식민지 이름 

 제국주의 명

 독립일

 초대 수반

 라이베리아

 라이베리아 연방

 없음

 1847. 07. 26

 조셉 로버츠

 이집트

 이집트 영국 1922. 02. 28 사르와 파샤
 남아공 남아공 연합 영국

 1931. 12. 11

 
 에티오피아 이태리동부 아프리카 이태리

 1941. 05. 05

 하일레 셀라시에
 리비아 이태리 리비아 이태리, 영국, 프랑스 1951. 12. 24 이드리스 국왕
 수단 영국이집트수단 영국, 이집트 1955. 12. 19 이스마일 알 아즈하리
 튀니지

 튀니지프랑스보호령

 프랑스 1956. 03. 20 무하마드 알아민
 모로코 모로코프랑스보호령 프랑스, 스페인

 1956. 04. 07

 모함마드 5세
 가나 황금해안 영국, 독일 1957. 03. 06 크왐 은크루마 
 기니 프렌치기니 프랑스 1958. 10. 02 세코 뚜레
 카메룬 카메룬

 독일, 프랑스, 영국

 1960. 01. 01

 아마두 아히조
 토고 프렌츠 토고랜드 독일, 프랑스

 1960. 04. 27

 실바누스 올림피오

 말리

 프렌치수단

 프랑스 1960. 06. 20 모디보 케이타
 마다가스카르 말라가시보호령 프랑스 1960. 06. 26 필리베르 치라나나
 DR 콩고 벨기에콩고 벨기에

 1960. 06. 30

 패트리스 루뭄바
 소말리아 영국 소말리랜드,
 이태리 소말리랜드
 영국, 이태리 1960. 06. 26
 1960. 07. 01
 무하마드 하지,
 아덴 압둘라
 베닌

 프렌치 다호메이

 프랑스 1960. 08. 01 휴버트 마가
 니제르 니제르식미닞 프랑스 1960. 08. 03 하마니 디오리
 부르키나 파소 프렌치상류볼타 프랑스 1960. 08. 05 모리스 야메오고
 코트디부아르 아이보리코스트 프랑스 1960. 08. 07 펠릭스 후페브와니
 차드 프렌치챠드 프랑스 1960. 08. 11 프랑스와 톰발바예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우방귀샤리 프랑스 1960. 08. 13 데이비드 다코
 콩고공화국

 프렌치콩고

 프랑스

 1960. 08. 15 풀베르 율로우
 가봉 프렌치적도기니 일부 프랑스 1960. 08. 17 레옹 음바
 세네갈 수단공화국 일부 프랑스 1960. 08. 20 레오폴드 셍고르
 나이지리아 영국령 나이지리아 영국 1960. 10. 01 엔남디 아지키웨
 모리타니아

 프렌치 서부아프리카 일부

 프랑스 1960. 11. 28 목타 다다
 시에라리온

 세에라리온

 영국

 1961. 04. 27

 밀턴 마르가이
 탄자니아 탕가니카,
 잔지바르
 영국 1961. 12. 09
 1963. 12. 10

 줄리어스 니에레레,
 잠시드 압둘라 

 르완다

 루안다우룬디 일부

 벨기에

 1962. 07. 01

 그레고리 카이반다
 부룬디 루안다우룬디 일부 벨기에 1962. 07. 01 앙드레 무히르와
 알제리 프렌치알제리 프랑스 1962. 07. 03

 아흐메드 벤 벨라

 우간다 우간다 보호령 영국 1962. 10. 09

 밀턴 오보테

 케냐 케냐 식민지 영국

 1963. 12. 12

 조모 케냐타
 말라위 니아살랜드 보호령 영국 1964. 07. 06 헤이스팅스 반다
 잠비아 북부로데지아 영국 1964. 10. 24 케네쓰 카운다
 감비아 감비아 영국

 1965. 02. 18

 도다 자와라

 짐바브웨 남부로데지아 영국 1965. 11. 11 이안 스미스
 보츠와나 베쿠아나랜드 보호령 영국 1966. 09. 30 세레체 카마
 레소토 바수토랜드

 영국

 1966. 10. 04 리부아 조나단
 모리셔스  영국

 1968. 03. 12

 
 스와질랜드 스와질랜드 영국 1968. 09. 06 소브하자 2세

 적도기니

 스페니시기니

 스페인

 1968. 10. 12

 프란시스코 엔구에마

 기니비사우

 포르투갈기니

 포르투갈

 1973. 09. 24

 루이스 카브랄

 모잠비크

 포르투갈동아프리카

 포르투갈

 1975. 06. 25

 사모라 마셀

 카보 베르데 (Cape Verde)

 

 포르투갈

 1975. 07. 05

 

 코모로

 

 프랑스

 1975. 07. 06

 

 사오토메 프린시페  포르투갈 1975. 07. 12 
 앙골라

 포르투갈서부아프리카

 포르투갈 1975. 11. 11 아고스티뇨 네토

 세이셀

 

 영국

 1976. 06. 29

 제임스 리차드

 지부티 프렌치 소말리랜드 프랑스 1977. 06. 27 하산 압티돈
 나미비아 넘서아프리카 남아공 1990. 03. 21 샘 누조마

 에리트리아

 에리트리아

 에티오피아

 1993. 05. 24

 아사이아스 아페웨르키

 남수단

 남부수단

 수단

 2011. 07. 09

 살바 마야르딧


# 14. 아프리카를 검은 대륙으로 만든 독재자들 - 180p.

연속되는 독재와 쿠테타 속에서 경제는 더욱 피폐해졌다. 또 제국주의 국가들은 이들 독재자들을 뒤에서 지원해 주면서 경제적 실리를 챙겨왔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냉전체제에서 아프리카의 독재자들은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면서 독재체제를 유지해 왔다. 미국과 소련은 독재정부이건 민주정부이건 상관없이 자기편에 서기만 하면 그들을 지지했다. 이런 정치상황 속에서 유례없는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 발생해 극심한 기근이 대륙을 휩쓴 가운데 설상가상으로 에이즈라는 신형 병균이 아프리카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 가장 악랄했던 독재자, 보카사 (재임 1966 ~ 1979), 중앙아프리카공화국 

- 아프리카의 히틀러, 이디 아민 (재임 1971 ~ 1979), 우간다

- 중동의 미친 개, 카다피 (재임 1969 ~ 2011), 리비아

- 라이베리아의 조폭, 찰스 테일러 (재임 1997 ~ 2003), 라이베리아

- 아프리카의 착복왕, 모부투 세세 세코 (재임 1965 ~ 1997), 자이르→콩고민주공화국

- 사창가 사장 출신으로 최고 권력을 잡은 카빌라 (재임 1997 ~ 2001), 콩고민주공화국

- 에티오피아의 마르크스주의자, 멩기스투 (재임 1974 ~ 1991), 에티오피아

- 늙을수록 강해지는 권력욕의 소유자, 무가베 (재임 1980~), 짐바브웨

- 아프리카의 무법자, 오마르 알 바시르 (재임 1989~), 수단

- 프랑스에게 덤벼든 겁 없는 독재자, 세코 뚜레 (재임 1958~1984), 기니


"수단은 한 나라로 존재하기에는 너무 크지만, 한국은 두 나라로 갈라지기에 너무 작다! (Sudan may be too big to be one, but Korea is too small to be two)" - 211p.


# 17. 핏빛 다이아몬드 - 237p.

'블러드 다이아몬드(Blood Diamond)'는 주로 아프리카 분쟁지역에서 생산되는 다이아몬드를 말한다. 다이아몬드 판매수익이 반란군에 의해 전쟁자금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다이아몬드가 없었다면 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또 설혹 분쟁이 일어났더라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분쟁 지역에서 생산된 다이아몬드는 선진국으로 수출됐고 (불법거래든, 합법거래든 구분 없이) 수익은 다시 선진국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는데 이용되었다.

블러드 다이아몬드가 생산된 아프리카의 대표적인 국가들은 앙골라, 라이베리아, 시에라리온, 코트디부아르, 콩고민주공화국, 콩고공화국, 짐바브웨 등이다. 1990년 콩고민주공화국에서 발견된 '1000년의 별(Millennium Star)' 이라는 다이아몬드는 크기가 무려 203캐럿이나 됐는데, 이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크다. 이 천년의 별은 다이아몬드 시장의 80%를 좌지우지하는 '드 비어스(De Beers)'사가 소유하고 있다.

다이아아몬드 판매대금이 분쟁 자금으로 사용되어 다툼이 지속되자 2000년 세계다이아몬드협회는 블러드 다이아몬드 거래를 막기 위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2002년에는 유엔에 의해 원산지 증명이 없는 다이아몬드는 거래를 금지하는 프로세스가 승인됐다. 국제사회에서 다이아몬드가 분쟁에 악용되는 것을 막기 위한 노력이 시작된 것이다.


# 18. 위도 10도, 신들이 충돌하다  - 248p.

아프리카 대륙을 가로로 반을 절단하면 그 절단선은 적도에서 위도 10도 사이에 자리를 잡는다. 이 지역을 '미들 벨트(middle belt)' 또는 '사헬 지역' 이라고 부른다. 아프리카 대륙 북쪽의 이슬람과 남쪽의 기독교가 만나는 아주 넓은 전선이기도 하다. (중략) 그리고 적도에서 위도 10도 사이에 전 세계 무슬림 인구의 절반과 기독교 인구의 60%가 살고 있다.

<위도 10도>라는 책을 쓴 미국의 엘리자 그리즈월드에 따르면 이 지역은 종교가 곧 전쟁이 되는 곳이다. 그리고 그러한 문명의 충돌은 이미 시작되었다. 종교라는 이름 아래 무차별적인 학살, 강간, 납치, 폭력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10~20명 정도의 사람이 죽어서는 뉴스에 보도도 되지 않는다.


언어를 바꾸는 것은 종교를 바꾸는 것 못지않게 어려운 일이다. 언어 속에는 그 민족의 역사와 문화가 스며들어 있다. 따라서 언어는 그 민족의 정신과도 같은 것이다. 자기 고유 언어를 포기한다는 것은 곧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제국들은 아프리카에 언어를 심는 데는 성공한다.

종교를 바꾸는 것과 언어를 바꾸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종교는 신념이지만, 언어는 의사전달 수단이다. 종교를 바꾼다고 해서 돈을 벌 수는 없지만, 언어를 바꾸면 이 언어를 사용하는 부유한 국가와의 거래를 통해서 돈을 벌 수 있다. 따라서 아프리카 대륙이 종교는 포기하지 않았으나 언어를 쉽게 포기한 것은 경제적 이익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 254p.


# 19. 르완다 그리고 콩고 - 269p.

'아프리카 세계대전(Africa's World War)'이라고 불리는 이 콩고 전쟁(1998~2003)은 8개 국가와 25개의 무장 세력이 직접적으로 개입했다. 2008년까지 전쟁과 그 후유증으로 사망한 사람 숫자만 540만 명이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질병과 기아로 목숨을 잃었다.

사망자 수를 기준으로 이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참고로 제1차 세계대전의 사망자 수는 약 1,500만 명이며, 제2차 세계대전의 사망자 수는 약 6,000만 명(전 세계 인구의 2.5%)이었다. 한국전쟁의 경우 45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과 콩고 전쟁 다음으로 많은 숫자이다. 콩고 전쟁은 이외에도 4만 건이 넘는 강간 및 이로 인한 에이즈 전염과 340만 명의 피난민을 낳았다.


# 20. 디스트릭트 나인과 아파르트헤이트 - 283p.

"잊지는 않겠지만, 용서하겠다"고 말했다. 만약 그가 "너희들이 한 일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다면 세계의 역사는 또 한 번 바뀌었을 것이고 지금 같은 남아공의 평화는 결코 오지 않았을 것이다. 만델라에 대한 정치적 업적을 논하기에 앞서 그 무거운 가슴 속의 한과 복수심을 화해와 용서로 승화한 그의 뜨거운 심장에 경의를 표한다.


# 25. 아직도 아프리카에는 식민지가 남아 있다

- 세계적인 절도 전문국가 프랑스 - 312p.

프랑스가 자랑하는 노트르담 대성당, 에펠탑, 엘리제궁, 사크레퀘르 대성당, 심지어 샹젤리제 거리까지 아프리카 노예들의 피로 건설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중략)

1994년 우리나라의 고속철 기종 선정 때 프랑스가 독일 및 일본과의 경쟁에서 이기면서 테제베(TGV)가 최종 기종으로 선정됐다.이 때 프랑스는 병인양요 때 훔쳐간 외규장각 도서 반환에 구두로 합의한 바 있다. 우리 정부는 테제베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가 가장 낮았는데도 불구하고 프랑스를 믿고 테제베를 선정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외규장각 도서는 돌려주지 않고(결국 대여 형식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같은 수준의 문화재를 교환하자고 고집했다. 프랑스의 그 야비하고 비열함이란.

소위 석학으로 불리는 프랑스의 기 소르망은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개관식에 와서 "서구가 아시아의 문화재를 약탈했다기 보다는 보호하고 있다"라는 희대의 헛소리를 지껄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개인이 도둑질을 한 물건을 전시해서 돈벌이를 하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법에 따라 처벌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도적질도 프랑스가 하면, 그것도 아주 대규모로 도적질을 하면 처벌이 뒤따르지 않는다. 결국 힘없는 국가들만 처량하다.


한 청년의 죽음, 그리고 피어난 재스민의 향기 - 332p.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의 수도 튀니스의 남쪽 300km 지저메 위치한 시디 부지드에서 26세의 젊은 남성이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이 청년의 이름은 모함메드 부아지지.

이슬람 세계에서 자살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이슬람교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율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대의를 위한 폭탄 자살 테러를 제외하면 자살이 숭고한 일로 칭송 받는 일이 거의 없다. 실제 이슬람 국가 국민들의 자살률은 세계적으로도 매우 낮다.

이런 상황에서 1984년생인 20대 중반의 부아지지는 자살을 감행한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결코 종교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는 그런 극단적인 행동을 했을까.

부아지지는 무려 9명의 가족을 먹여 살리는 가장이었다. 하지만 그의 하루 수입은 많아봐야 한화로 8,500원 정도였다. 현실은 척박했지만, 그는 과일 노점상을 하면서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애쓰고 있었다. 많은 아프리카 청년들이 그러하듯이 삶에 대한 투쟁은 그의 어깨에 지워진 숙명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노점상에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경찰은 노점상이 불법이라는 이유로 과일과 저울 등 그의 전 재산을 앗아갔다. 이와 함께 부아지지는 대로(大路) 한 복판에서 경찰들에게 폭행을 당했다. 경찰들은 그를 짓밟으며 끊임없이 인격을 모욕하는 말을 뱉어냈다.

부아지지는 이날 오전 지방정부 청사 앞으로 향했다. 그는 청사 앞에 도착하자마자 들고 온 휘발유를 온 몸에 끼얹고 불을 붙였다.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한 부아지지의 설움을 알리기 위해 가족들이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부아지지의 사촌이 부아지지의 모습을 담은 동영상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어찌 보면 아프리카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이 슬픈 사건 하나가 세계의 역사를 바꿔 놓는다. 사람들은 페이스북에 올라온 동영상 및 그 소식을 퍼 나르며 이 사건을 알리기 시작했다. 청년실업률이 30%에 육박하는 나라 튀니지에서 부아지지의 설움에 동감하는 젊은이들의 숫자는 차고 넘쳤다.

부아지지는 18일 동안의 투병 생활 끝에 2011년 1월 4일, 결국 세상을 떠났다. 튀니지 경찰은 그의 명복을 비는 장례 행진을 저지했다. 이에 분노한 민중들이 각 도시에서 봉기를 시작했다. 시위 진압 과정에서 수십 명의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민중들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1월 11일 마침내 성난 군중들의 시위가 수도 튀니스를 덮었다. 경찰의 총격으로 23명이 숨졌지만, 정부는 이미 시위대를 진압할 명분과 힘 모두를 잃고 있었다.



'아프리카의 노벨' 모 이브라힘 - 358p.


수단 출신의 모 이브라힘(Mo Ibrahim)은 가히 '아프리카의 노벨'이라는 칭호를 들을 만하다. 모 이브라힘은 1946년 수단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통신 관련 공부를 했다. 영국통신(British Telecom)에서 잠시 일하기도 했으나 1980년대 후반 수단에 돌아와 소프트웨어 회사를 운영한다. 그리고 그는 1998년 셀텔(Celtel)이라는 이동전화 회사를 세웠다.

당시 아프리카에서 이동 전화는 막 시작단계였는데, 그의 사업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2005년에 셀텔은 아프리카 14개 국에 걸쳐 2,400만 명의 가입자를 보유하게 됐다. 같은 해 모 이브라힘은 셀텔을 34억 달러에 매각하고 자기의 이름을 딴 '모 이브라힘 재단(Mo Ibrahim Foundation)'을 설립한다.

모 이브라힘은 아프리카의 독재와 부정부패의 원인을 정치인들과 공무원들이 느끼는 퇴직 후 불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브라힘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재단을 통해 재임 중 아프리카의 민주화 발전에 공헌을 한 국가 리더들에게 일시금 500만 달러와 매년 20만 달러의 연금을 주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세웠다. 

2007년 모잠비크의 시사노 전 대통령이, 2008년에는 앞 절에서 설명한 보츠와나의 모가에 전 대통령이 각각 모잠비크와 보츠와나의 평화 및 민주화를 이끈 공로로 이 상을 받았다. 2009년과 2010년에는 수상자가 나오지 않았으나 2011년 캬보 베르데(Cape Verde)의 페드로 피레스(Pedro Pires) 전 대통링이 다시 이 상의 영예를 거머쥐었다.

또 모 이브라힘 재단에서는 아프리카의 통치 구조에 대한 평가지수인 '이브라힘 지수(the Ibrahim Index of African Governance)'를 2007년부터 매년 발표하고 있다. 이 지수는 하버드 대학과 함께 개발했으며 모두 57개의 기준을 사용한다. 조사 대상 국가는 북아프리카 5개국(이집트, 리비아,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을 제외한 모든 아프리카 대륙의 국가들이다.

이 지수는 아프리카 시민사회단체, 연구소, 정부 등에 의해 많이 인용되는데, 아프리카개발은행도 이 지표를 중요한 정책 판단 기준으로 사용한다. 

모 이브라힘은 아프리카개발은행이 주최하는 각종 회의에도 자주 참석한다. 개인적으로 느낀 인상으로 이브라힘은 아주 명석하고 의지가 굳어보이는 인물이었다. 그의 총명한 눈에서 아프리카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백인의 눈으로 아프리카를 말하지 말라>

김명주 지음

미래를 소유한 사람들, 2012



백인의 눈으로 아프리카를 말하지 말라
국내도서
저자 : 김명주
출판 : 미래를소유한사람들 2012.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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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중에서


# 태어나 보니 지옥 아닌가 - 14p.

생명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조건만 갖춰지면 가차없이 말살하려는 피도 눈물도 없이 냉혹하고 거대한 공간.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유일무이하고 어디 숨을 곳 하나 없는 세계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항간에 떠도는 지옥이란 바로 이 세계를 뜻하는 말이다.

우리는 태어나 죽을 때까지 지옥에서 살아갈 운명에 처해 있다.


# 국가는 당신을 모른다 - 52p.

국가가 국민의 것이었던 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단 한 번도 없다.

이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대원칙이며, 평생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 분노하지 않는 자는 죽은 것이다 - 64p.

불합리에 대한 분노를 포기한 인간은, 저항의 정신을 내던진 인간은, 인간임을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삶 자체도 스스로 포기한 어리석고 우매한 자에 불과하다.

이치가 그러한데, 아직 청춘의 한창 때를 보내고 있으면서도 이미 죽어 있는 젊은이가 얼마나 많은가.


# 인간이라면 이성적이어야 한다 - 83p.

나약한 인간이 강하게 살려 할 때,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사고력밖에 없다. 즉, 이성이야말로 최고의 무기다.

이성에 부합되지 않는 것은 하나하나 배제하고, 감정과 본능마저 이성으로 억누르는 것이다. 이성에만 의지해서 분투해야 진정한 인간성에 도달할 수 있고, 또 그 길로 매진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임의 증거다. 이외의 길은 모두 짐승으로 추락하는 것일 뿐이다.

나아가 인간으로 사는 기쁨도 거기에 있다.

이성이야말로 자아의 원천이다.

나란 무엇인가? 하는 철학적 질문에는 갖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지만, 본능이나 감정이 자신의 핵심을 이루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오히려 의지를 조절하는 사고력을 우선하는 삶, 즉 이성에 따른 선택에 그 대답이 존재한다.

이성의 길을 걷는 순간 인생은 빛나기 시작한다. 자립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더불어 인간이 무엇인지도 이해하게 된다.

이성을 꺼리고 감정을 우선시하며 본능에 따르는 삶이 편할지도 모른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옛말이 있듯이, 인간관계가 어긋나 남들이 멀리하는 탓에 점점 더 고립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남들 따라 직장인이 되지 마라 - 98p.

직장인이라는 것이 어떤 처지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가.

스스로 선택한 것도 아닌 인간 집단에 섞이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는가.

일의 내용은 둘째 치고, 음습한 인간관계의 성가심에 시달리다 못해 거기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고 있는가.

백 보 양보해서, 다행히 좋은 사람들만 모인 직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치자. 단조로운 일을 늘 반복해야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 직장은 사육장이다 - 102p.

즉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 퇴직하는 날까지 몇십 년을 고스란히 직장에 빼앗기는 것이다. 그래서야 타인을 위한 인생이지, 아무리 열심히 해 봐야 본인을 위한 인생이랄 수 없다.

그 희생에 걸맞는 수입이 있다면야 몰라도, 알뜰살뜰 꾸려야 겨우 살아갈 수 있는 최저임금에 가까운 월급에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를 팔아넘기는, 한쪽만 불리한 거래를 왜 무턱대고 하는 것인가.

자신은 기껏해야 그 정도의 인간이라고 포기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 자유를 방기한 사람은 - 107p.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 안에서만 빛나도록 생겨 먹었다는 철칙을, 그 우선권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어떻게 살든 본인 멋대로라는, 자유와 함께하는 삶만이 존재의 기반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간도 동물의 한 족속이라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야생동물과 마찬가지로 인간 또한 같은 유의 자유 속에서 충만감과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으며, 그것 없이는 견딜 수 없는 구조를 하고 있다.


# 다 도전해 보라고 젊음이 있는 것이다 - 175p.

자신 속에 어떤 보물이 잠들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자신도 모른다. 그 보석이 하나뿐이라고도 할 수 없다. 몇 개가 숨어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하나라도 발견할 수 있다면 대단한 것이다. 평생을 들여 그 보석의 원석을 갈고 닦을 수 있느냐에 삶의 진가가 있다. 그 외는 제대로 살고 있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는 무의미한 인생이다.

그러니 이제 싫고 좋음이나 자기류의 해석은 모두 무시하고, 온갖 일에 도전해 보면서 자기 안에 소리 없이 숨겨져 있는, 곤히 잠들어 있는 재능을 발굴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새로이 발견하는 생의 목적과 직결되는 위대한 행위이며, 젊었을 때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다름 아닌 그것이다.

젊음이란 그 때문에 있는 것이다.


# 삶은 쟁취하고, 죽음은 가능한 한 물리쳐라 - 196p.

삶의 노예가 되는 한이 있어도, 죽음을 좇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랜 시간 이어 온 삶을 무시하고 찰나에 불과한 죽음에 집착하는 것은 너무도 바보스러운 짓이다.

생명의 친구는 어디까지나 삶이지 결코 삶에 부수적인 죽음이 아니다.


# 동물로 태어났지만 인간으로 죽어라 - 202p.

동물로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맨 마지막에는 정신을 스스로 고취할 수 있는 인간으로 떠나야 비로소 고상한 인생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죽을 몸인데, 왜 그렇게까지 겁을 내고 위축되고 주저해야 하는가.

자신의 인생을 사는 데 누구를 거리낄 필요가 있는가.

그렇게 새로운 마음가짐과 태도를 무기로, 애당초 도리에 맞지 않고 모순투성이인 이 세상을 마음껏 사는 참맛을 충분히 만끽해라.

약동감이 넘치는 그 삶을 향해 저돌적으로 나아갈 때 드높이 외칠 말은, 바로 이것이다.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 차례


  1장_  부모를 버려라, 그래야 어른이다

  2장_  가족, 이제 해산하자

  3장_  국가는 당신에게 관심이 없다

  4장_  머리는 폼으로 달고 다니나

  5장_  아직도 모르겠나, 직장인은 노예다

  6장_  신 따위, 개나 줘라

  7장_  언제까지 멍청하게 앉아만 있을 건가

  8장_  애절한 사랑 따위, 같잖다

  9장_  청춘, 인생은 멋대로 살아도 좋은 것이다

10장_  동물로 태어났지만 인간으로 죽어라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바다출판사, 2013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국내도서
저자 : 마루야마 겐지 / 김난주역
출판 : 바다출판사 2013.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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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중에서


# 1 세상에서 가장 멋진 아이러니를 찾아 - 12p.

리마가 무질서한 곳이라는 주장을 반박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이곳의 무질서는 어지럽기보다 꽤나 근사하다. 마흔세 개의 작은 도시들을 모자이크로 덕지덕지 붙여놓은 모양새인 리마는 그 옛날 가득했던 은만큼이나 어딜 가나 떼를 지어 몰려 있는 사람들, 그리고 차들이 끝없이 내뿜는 매연이 고대 유적지와 식민시대의 건물, 현대적 마천루와 한데 뒤섞여 오히려 묘한 질서를 이룬다. 늘 짙은 안개로 뒤덮인, 지구 상에서 가장 메마른 절벽 위의 모래 도시. 이곳의 구석구석은 서민들의 땀으로 뒤범벅되어 있고, 해안 절벽 아래에는 풍요를 상징하는 드넓은 해안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 13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리마의 민낯 - 47p.

누구나 리마를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런 대조적인 모습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도시의 중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갈라진 길이 많고 그 위에는 수많은 부랑자들이 자리하고 있다. 자연이 이들에게 선사한 부는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부의 불균형이 빚어낸 초상. 이러한 부정적인 수식어만으로 리마를 묘사해서는 안 되겠지만 이것이 리마가 보여주지 않으려 애쓰는 아픈 현실임은 분명하다.

부의 불균형은 비단 오늘날만의 문제가 아니라 페루가 늘 안고 있는 문제다. 전체 인구에서 상위 10퍼센트 계층이 차지하는 부는 하위 50퍼센트가 차지하는 부를 훨씬 뛰어넘는다. 나라의 실질적인 구매력을 결정하는 중산층은 늘 얕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21세기 들어서며 극빈층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일시적인 호황에서 비롯된 것인지 지속 가능한 변화인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한다.


# 16 세비체! 세비체! 세비체! - 54~55p.

리마에는 세비체를 파는 음식점을 뜻하는 세비체리아(cevicheria)가 수도 없이 많다. 그 많은 세비체리아들 중 여행자들에게 대강 만든 음식을 내지 않고 정성을 다한 세비체 요리를 내는 곳을 찾기란 쉽지 않다. 추천할 만한 곳은 '세비체리아 라 초사 나우티카(Cevicheria la Choza Nautica)' 다. 다양한 종류의 정갈한 세비체를 말끔한 차림의 웨이터들이 기분 좋게 서빙한다. 유일한 흠이라면 상당히 척박한 느낌을 주는 지역에 자리하고 있어서 들어갈 때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는 점이다. 다만 나갈 때는 세비체가 주는 감흥 덕분에 지역의 우중충함도 용서가 되니 찾아가 볼 만하다.

참고로 페루 사람들은 세비체를 웬만하면 저녁에 먹지 않는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세비체리아는 저녁에 문을 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좋은 세비체리아를 고를 때 이 점을 고려해야 한다. 물론 풋내기 관광객들만을 상대하는 세비체리아는 저녁에도 문을 연다.


# 18 코카콜라를 누른 잉카콜라 - 57p.

잉카콜라는 페루아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그야말로 페루의 '국민 음료'다. 콜라가 주는 청량감은 그대로 유지한 채 독특한 맛과 색깔로 승부하는 페루의 자체 콜라 브랜드다. ... (중략) ...

잉카콜라의 독특한 색깔은 농축액 제조 과정에 들어가는 만사니야(Manzanilla)라는 식물의 원액이 노란 빛깔을 띠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1999년 이후 페루를 제외한 전 세계에서 잉카콜라의 상표권은 코카콜라의 소유가 되었다. 페루에서는 코카콜라와 잉카콜라가 공동으로 상표권을 소유하고 있다. 국가의 자존심이었던 상품의 상표권이 외국 자본에 넘어간 것에 대한 페루 사람들의 아쉬움은 크다.


# 19 리마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 - 59p.

여기서 리마에서의 마지막 밤을 화려하게 장식할 한 가지 팁이 있다. 로모 살타도 맥주로 기분 좋게 배를 채우고 난 이후에는 택시를 타고 분수쇼(El Circuito Magico del Agua)가 열리는 레세르바 공원(Parque de la Reserva)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수요일에서 일요일 저녁마다 벨라지오(Bellagio) 스타일의 분수와 레이저 쇼가 벌어진다. 저렴한 가격으로 수준 높은 분수쇼를 감상할 수 있는 덕에 리마 사람들은 밤이 되면 이곳으로 삼삼오오 산책을 나온다.


# 6 사막에서 바라보는 일몰에 취하다 - 84p.

이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던 버기의 시끄러운 엔진 소리도, 사람들의 요란한 환호성도 없다. 모두들 사막의 한가운데서 엄숙하게 일몰을 기다리는 것이다. 사방이 고요하다. 붉은 해가 황금빛의 모래를 물들이며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면 각지에서 모인 여행자들은 알 수 없는 벅찬 감동에 할 말을 잃는다. 뒤로는 야자수에 둘러싸인 신기루 같은 오아시스가 내려다보인다.


# 2 이곳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 그 옛날처럼 - 108p.

리마처럼 쿠스코에서도 아르마스 광장이 도시를 둘러보는 여정의 출발점이다. 쿠스코의 중심부에 위치한 이 광장은 쿠스코에 머무는 동안 수없이 지나칠 만큼 번화한 곳으로, 잉카제국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광장을 식민지대풍 아케이드가 에워싼 모양을 띠고 있다. ... (중략) ...

이쯤 되면 어느 정도 눈치챘겠지만 페루에 있는 대부분의 도시들은 마치 계획도시처럼 상당히 획일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아르마스 광장을 중심으로 서서히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구조인데, 이는 스페인 정복자들이 통치의 편의를 위해 방사형 구조로 도시를 설계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 14 코카, 치차, 그리고 감자와 옥수수까지 - 147p.

코카 차는 예로부터 고지대 노동자들이 피로를 잊고 노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널리 보급되었다고 한다. 호흡이 가쁘거나 몸이 피곤할 때 코카 차를 한 잔 마시면 안정이 된다. 원주민들은 차를 끓이지 않고 코카나무 잎 한 뭉치를 껌처럼 씹기도 한다. 쿠스코의 코카 차 인심은 늘 넉넉하다. 도시를 대표하는 차로서 어디를 가도 쉽게 맛볼 수 있다. 코카 차를 제대로 즐길 줄 알아야 진짜 쿠스코의 멋쟁이다.

차도 좋지만 여행 하면 술이 빠질 수 없다. 쿠스코에서 치차 이야기를 안 하면 섭섭하다. 치차는 한마디로 안데스의 옥수수 막걸리다. 먼저 옥수수를 물에 불려 싹을 틔운 뒤, 건조시켜 빻아 가루를 만든다. 이 가루를 오랜 시간 끓인 다음 항아리에 넣어 발효시키면 밭일을 하는 원주민들이 즐겨 마시는 치차가 완성된다. 우리 나라의 막걸리같이 농부들뿐만 아니라 전 국민에게 사랑받는 전통술이다. 맛은 막걸리와 달리 다소 시큼하다. 당연히 애주가들에게는 색다른 경험이 될 것이다. 다만 치차의 종류에 따라 알코올 도수가 상당히 높은 경우도 있으니 과음은 금물이다.

인디오들은 치차를 마시기 전 손가락을 술에 넣었다 빼며 술 한두 방울을 땅에 뿌린다. 대지의 신 파차마마(Pachamama)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식이다.


# 1 순례자의 마음으로 - 156p.

사진이나 영상으로 수없이 접해도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은 곳이 있다. 모든 사람이 꿈꾸는 곳. 죽기 전에 꼭 한 번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곳. 페루의 상징이자 모든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의 자랑. 산과 절벽, 강과 수풀 사이에 숨어 발견될 때까지 아무도 그 존재를 몰랐고 공중에서만 도시의 존재를 알 수 있었다 하여 하늘의 작품이라고 불리는 곳. 바로 마추픽추다.

이곳은 마치 성지와도 같다. 우뚝 솟은 산봉우리와 기암절벽에 빙 둘러싸인 이 비밀 도시를 보고 있노라면 알 수 없는 성스러운 기운에 모두들 순례자가 된다. 신이 있다면 이곳은 분명 신이 창조한 도시일 것이다. 수다스러운 페루인들이 이곳에만 오면 사뭇 엄숙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 잉카의 길 - 164p.

사실 마추픽추로 가는 방법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잉카의 길(Camino de los Incas)'을 이용하는 것이다. 카미노 레알(Camino Real)이라고도 불리는 이 길은 이름 그대로 옛날 잉카인들이 마추픽추로 향하던 길을 따라가는 트레킹 코스다. 보통 오얀타이탐보에서 출발한다. 3~4일에 걸쳐 걷고, 쉬고, 야영하기를 반복하며 마추픽추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일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경험이라고 한다. 트레킹으로 만나는 안데스의 장엄함이 어떨지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 초현실에서 다시 현실로 - 183p.

여행 안내서를 참고하는 것도 좋고 지도를 보며 다니는 것도 좋지만 마추픽추를 여행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저 돌과 바람을 따라 걷는 것이 아닐까.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고 눈앞에 있는 건물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데 급급하다 보면 더 중요한 것을 놓칠 수도 있다. 그저 순례자의 마음으로 라틴아메리카의 성지를 하염없이 걸어보자.

걷는 데 자신이 있다면 '태양의 문'이라는 뜻을 가진 인티푼쿠(Intipunku)'에 가볼 만하다. 중앙 광장과는 꽤 거리가 있고 가는 길의 경사가 급한 편이지만, 경치가 아름답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석조 건축물이 있다. 태양의 문 앞에서 체 게바라(Che Guevara)와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가 마추픽추에서 느꼈을 감정이 떠오른다.

 



<언젠가는, 페루>

이승호 지음

리스컴, 2014



언젠가는, 페루
국내도서
저자 : 이승호
출판 : 리스컴 2014.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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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중에서


# 잿빛의 슬픈 언덕 산끄리스또발 - 43 ~ 44p.

전망대로 오르는 길. 언덕마을에 있는 집들은 꽃밭처럼 밝고 아름다운 색들로 가득하다. "집들이 너무 예쁘다"고 하자 후안은 슬쩍 웃고 만다. 어떤 의미의 웃음일까? 차가 산동네 어귀에 들어서자 후안이 보여준 웃음의 의미가 이해된다. 겉으로는 화려하게 채색된 집들이지만, 그 이면에는 차조차 쉽게 오를 수 없는 좁디좁은 골목길 사이로 가난한 이들의 삶이 숨겨져 있다. 겉으로만 보고 판단한 내 자신이 조금은 겸연쩍게 느껴진다.

후안이 "절대로 걸어 다녀서는 안 되는 길"이라고 경고하는 언덕 마을에는 구시가지에서도 가장 가난한 이들이 살아간다. 페루의 수도인 리마 시내 한 복판에 이렇게 가난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에 왠지 모르게 마음이 무거워진다. 가난이야 어느 도시에나 있다고 스스로 위안해 보지만 화려함 속에 감추어진 슬픔이기에 더 마음이 아프다. 철근과 시멘트가 드러난 허름한 집들을 지나 산끄리스또발 언덕의 높은 곳으로 오를수록 가난의 골은 더욱 깊어진다. 전망대로 향하는 도로 아래에는 판자로 만들어진 집들이 얼기설기 모여 있다. 마당이랄 것도 없는 좁은 비탈에 힘없이 축 쳐져 널린 낡은 빨래가 힘겨운 현실을 대변하며,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집에도 누군가 살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들의 가슴 아픈 현실을 뒤로 하고 비 내리는 산끄리스또발 언덕에 선다. 비에 젖은 언덕은 더욱 검게 보이고, 어두운 마음만큼이나 짙은 구름이 덮인 리마는 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리마 시내로 향하고 있는 거대한 십자가는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괜스레 판자 집 앞마당에 널린 비 맞은 빨래만 걱정된다.


# 신비로 우거진 '봄의 정글' - 103p.

무엇이 이들을 이 고단한 삶에서 떠나지 못하게 붙잡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가난' 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미련'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아마존의 축복과 재앙 속에서 한 평생을 살아온 이들은 이미 아마존의 일부가 된 것 같다. 도시의 회색 벽에서는 작은 씨앗조차 싹을 틔우지 못함을 알기에. 검은 아스팔트 위에 꽃이 필 수 없듯이 자연과 동화되어 버린 이들의 삶은 회색의 도시에서 피어날 수 없음을 알기에 문명사회로 나가지 못하고 있으리라.

과연 이들의 삶은 불행한 것일까? 이들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만의 착각은 아닐까? 나만의 동정심이 아닐까? 도시에서 많은 것을 누리는 나는 이들보다 행복한 것일까? 행복의 기준은 무엇일까? 여전히 정답이 없는 어려운 문제다.


# 잉카의 슬픔을 간직한 꾸스꼬 - 183~184p.

 Goombay Dance Band의 El dorado (엘도라도)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죽였어요.

그들은 오직 총으로만 말을 했지요.

용감한 남자들은 쇠사슬에 묶이고

모든 젊은 엄마들은 노예로 팔려갔어요.

아기들은 밤새 울어 댔어요.

그 아기들이 빛을 볼 수 있을까요?

엘도라도의 황금의 꿈들은

고통과 피의 바다에 모조리 잠겨 버렸어요.

엘도라도의 황금의 꿈들은

오직 마음속에서나 가능할 거예요.

(중략)

힘과 권력에만 굶주려 있는 자들에게는

에덴의 문은 늘 닫혀 있을 거예요.

왜냐하면 진정한 엘도라도는

다이아몬드와 금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니까요.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평화와 사랑, 이해를 향한 꺼지지 않는 갈망이에요.

엘도라도의 황금의 꿈...


# 산에서 나는 소금 - 215~216p.

소금 산이 있는 마라스(Maras)에 들어서자 히치하이킹을 하는 아이들이 자주 눈에 띈다. 랄로가 '학교에 가는 아이들'이라고 알려 준다. 안데스에는 작은 마을이 넓게 흩어져 있어서 학교에 가려면 한 시간 이상을 걸어가야 한단다. 랄로도 어렸을 때 걷는 게 너무 힘들어서 학교에 다니기 싫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택시는 가파른 산허리에 놓인 아슬아슬한 비포장도로를 지나 소금 산에 도착한다. 황토빛깔의 계곡 사이를 가득 메운 새 하얀 세상이 펼쳐진다. 산비탈은 한겨울 눈이 쌓인 듯 하얀 소금으로 가득하다. 염전에 대해 기존에 알고 있던 상식의 벽이 깨지는 순간이다. 산에 염전이 있다는 것에 처음에는 의구심을 많이 가졌는데, 지금 내 눈앞에 새 하얀 소금으로 뒤덮인 염전이 있다. 신기할 뿐이다. 이곳에서 나는 소금은 옛날 방식 그대로 생산되며 미네랄이 풍부하다고 한다.

땅 속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된 작은 개울이 안데스의 뜨거운 태양과 만나 소금으로 변하는데, 이곳의 소금은 잉카인들에게는 '태양의 선물'이라고 불릴 정도로 귀한 국가 자원이었다. 잉카인들이 먼 바다까지 가서 소금을 구해오기 어려워 만들어 놓은 산중 염전, 잉카인들의 지혜와 의지가 정말 대단하다.


Inside PERU & 트래블 노하우


# 돌고래가 강물에 산다고? - 104~105p.

바다에서나 사는 돌고래가 아마존에 살고 있다면 믿어지는가? 배를 타고 아마존 강을 지나가다 운이 좋은 날에는 귀엽고 예쁜 돌고래를 만나 볼 수 있다.

오직 아마존 강에서만 볼 수 있는 이 강물돌고래는 거대한 육식성 새들이 살던 마이오세(2600~2700만 년 전) 때 이빨고래가 진화한 동물로 바다에 사는 여느 돌고래보다 입이 뾰족하고 구슬 같이 맑은 눈과 곱사등, 매끈한 피부를 지니고 있으며, 아름다운 분홍 빛깔을 띠고 있다. 총 길이가 2.8m ~ 4m 나 되며, 무게는 180kg에 달할 정도로 크다.

이 분홍돌고래를 페루 인들은 '부페오 콜로라도'로, 브라질 인들은 '보뚜'로, 과학자들은 '이니아 조프랜시스'로 부르고 있다. 현존하는 고래 중 가장 오래된 종이기도 하다.

그 특이함 만큼이나 분홍돌고래에 관한 이야기도 다양하다. 아마존 사람들은 보뚜가 원래는 사람이었는데 분홍돌고래가 되었다는 전설을 사실로 믿고 있다. 또 다른 전서리 있는데, 소나기처럼 한바탕 쏟아 부으며 나무를 부러뜨리고서 이내 멎는 '남자 비'와 달리 몇 시간을 흐느끼듯 줄기차게 내리는 비를 '여자 비'라고 한다. 그런데, 분홍돌고래는 '여자 비' 속에서 아름답고 매혹적인 여자로 변하여 카누 위에 앉아 남자를 유혹해서 수중세계인 엥깡찌로 데려간다고 한다.

그 밖에도 청년으로 변한 보뚜의 구애를 받은 소녀의 이야기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설화 속 주인공으로 분홍돌고래가 등장한다.

이끼또스의 아르마스 광장에는 부페오라는 이 아름다운 돌고래상 분수가 시원하게 물을 뿜고 있다. 아르마스 광장에서 이 돌고래상을 보며 재미있는 서화를 떠올리는 것도 여행의 재미를 더할 것이다.


# 흥미진진함에 취하는 사막 여행 - 120p.

부기의 거친 떨림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먼지가 폴폴 나는 시골길을 따라 삐스꼬 주조장이 있는 산 후안 바우띠스따(San Juan Bautista)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라쏘(Lazo) 주조장에 들어서니 술 익는 냄새가 진동한다. 냄새만으로도 취기가 오를 지경이다. 주조장 직원은 맛을 보며 까치나(Cachina)라는 술을 따라준다. 까치나는 포도주 이전단계의 술로 이곳 사람들은 '젊은 포도주(Vino Joven)'라고 부르는데 그 이름처럼 잘 익은 포도주보다 거칠고 단맛이 많이 난다.

페루를 대표하는 술인 삐스꼬는 이 까치나를 증류해 숙성시킨 것이다. 삐스꼬는 30~60도 정도의 독주기 때문에 계란 흰자와 레몬즙, 그리고 설탕과 얼음을 원액에 섞어 삐스꼬 샤워(Pisco Sour)라는 칵테일로 만들어 마신다. 맛을 한번 볼까! 매우 달콤해서 맛만 본다는 것이 어느새 연거푸 서너 잔을 마신다. 도수가 높아서 얼굴이 금방 화끈거린다. 바람이라도 쐬려고 주조장을 나서니 사막의 태양이 온몸에 내리쬔다. 그러나 주조장 아저씨의 후한 인심 탓인지, 아니면 취기 때문인지 사막의 뜨거움조차 따스하게 느껴진다.


# 점차 사라져가는 나스까 라인 - 131p.

페루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나스까 라인에 대해서는 한 번씩은 들어 봤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나스까 라인은 안타깝게도 매년 조금씩 사라져 가고 있다고 한다. 지상에서는 그 큰 그림을 쉽게 알아볼 수 없어 개발로 인한 훼손도 많았고, 오랜 세월이 점차 나스까 라인을 깎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 이까의 돌이 무엇이기에 난리일까? - 143p.

1966년, 페루의 한 농부가 가지고 있떤, 특이한 모양의 물고기가 새겨져 있는 안산암(화산암의 일종)으로 된 돌에서 논란은 시작된다.

이 돌을 농부에게 선물받은 의사 카브레라는 돌에 새겨진 특이한 물고기 그림에 흥미를 가지고 자세히 살피던 중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바로 돌에 새겨진 물고기가 수천 년 전에 멸종한 것으로 알려진 표본과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 것이다. 그리하여 카브레라 박사가 농부에게서 수집한 돌은 무려 15,000개 정도!

돌과 농부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영국 BBC와 페루 정부가 관심을 가졌고, 농부에게 출처를 추궁하게 된다. 고대 유물에 대한 관리가 엄격한 페루 정부의 추궁에 감옥에 갈까 두려워진 농부는 돌의 그림은 자신이 관광객에게 팔기 위해 새겨 넣었다고 고백한다. 이 말에 페루 정부는 사건을 종결하고, BBC도 사기로 판명된 사건 방영에 대한 비난을 두려워하며 촬영을 중단한다. 이까의 돌은 이렇게 하여 미처 대중들에게 알려지기도 전에 관심에서 멀어졌지만 농부의 말에 몇 가지 의문을 품은 카브레라 박사는 포기하지 않고 연구를 하게 된다.

이까의 돌에는 고대 지구의 지도, 제왕절개 수술을 하는 그림, 심장이식 수술을 하는 그림 등이 새겨져 있다. 뇌수술을 하는 그림은 칼을 대고 있는 부분에서 구불구불한 뇌의 주름까지 묘사하고 있다. 망원경 같은 것으로 별자리를 살피는 그림, 공룡에 대한 묘사 등 참으로 다양한 그림들이 새겨져 있다.

이까의 돌, 우리에게는 조금 생소하지만 세계적으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나스까 시대의 신비로운 돌이다. 돌의 신비에 빠져들수록 페루의 나스까가 더 오묘하게 느껴질 것이다.


# 도둑시장 바라띠요 장 - 215p.

매주 토요일마다 싼띠아고 광장과 뿌에르또 벨렌 부근에서 도둑시장이라 불리는 바라띠요 장이 열린다. 대략 오후 4시까지 열리며, 갖가지 소품과 옷, 잡화 등 다양한 품목을 거래하는 장이다. 이곳에는 간혹 도둑맞은 물건들도 진열되어 있어 잃어버린 물건을 이곳에서 발견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 마추삐추를 감상하는 최적의 장소 - 253p.

공중도시 마추삐추의 전경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쌩끄리추어리 로지의 입구에서 절벽을 따라난 길을 200m 정도 가면 농지 관리인 주거 유적이 나온다. 여기서 다시 시가지까지 300m 정도의 계단식 밭이 이어지는데 중앙 계단을 따라 '묘지' 위쪽까지 올라가면 그곳이 마추삐추의 전경을 촬영하기에 가장 좋은 명당이다.


# 마추삐추에 갈 때 이것만은 주의하자! - 253p.

- 유적 내에 먹을거리와 20리터 이상의 큰 짐은 반입할 수 없다.

- 음료는 수통에 넣고 다니고 페트병에 든 것은 가지고 나온다.

- 화살표 등으로 지정된 장소 이외에는 들어가지 마라.

- 전 지역이 금연 구역이며 모닥불 등 불을 사용할 수 없다.

- 유적 위에 올라가거나 서 있지 마라.


# 버스보다 빠른 소년이 있다고? - 255p.

원주민 소년들이 마추삐추를 관람하고 내려가는 길과 버스 정류장, 그리고 버스에까지 올라와 관광객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한다. 잉카의 전령인 챠스키를 모방한 아이들로 '굿바이 보이(Good-bye Boy)'라 부른다.

아이들이 내리고 버스가 구불구불한 길을 달려 한 코너를 지난다. 그런데 한 소년이 어느새 달려와 버스 안 관광객들에게 '굿바이!' 하며 인사를 건넨다. 아니 이렇게 빠른 소년이 있다니! 그런데 이런 놀라운 광경은 한 코너를 돌 때마다 일어난다. 참 놀랍고 대단하다. 그리고 결국 버스 정류장까지 먼저 내려와 가쁜 숨을 헐떡이며 손을 흔들고 인사를 한다. 안쓰러워 팁을 건네지 않을 수가 없다. 이들은 이 팁을 생활비에 보탠다.

이 소년들이 버스보다 빠른 비결은 바로 구불구불한 길을 가로지르는 샛길! 버스가 구불구불한 도로를 내려올 때 '굿바이 보이'는 이 샛길을 이요해 버스보다 앞서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마추삐추의 명물이던 '굿바이 보이'는 종적을 감추었다. 어린아이들이 '굿바이 보이'를 하며 돈을 벌기 위해 학업까지 포기하자 정부에서 금지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난과 싸워야 하는 아이들이 좀처럼 이를 포기하지 않자 2005년부터 학교의 장기 휴가 기간에 한해서만 허가하고 있다고 한다.

이 금지령은 분명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정부의 조치일 테지만, 여전히 많은 아이들이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학업을 포기하고 있다. 이들은 관광객의 모델이 되기도 하고, 민예품 장사꾼이 되기도 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추삐추를 오르내려야 하는 '굿바이 보이'의 피곤할 삶도 이들 스스로 자청한 것은 아닐 것이다.


맛보자! 페루 대표음식


페루는 수산대국답게 어패류가 풍부하고 양파, 토마토, 시금치가 원산지라고 불리는 만큼 야채류도 풍부하여 이를 이용한 다양한 요리가 발전하였다. 원주민 전통 방식이 남아 있어서 투박하고 독특한 요리들이 많다.


세비체 Ceviche

어패류를 레몬즙에 살짝 절인 후 야채, 향신료로 버무린 남미식 회 요리다. 페루에서는 아침에 즐겨 먹는다고 한다.


꾸이 차따도 Cuy Chatado

안데스 원주민들이 단백질 섭취를 위해 먹게 된 요리로 기니피그의 일종인 '꾸이'라 불리는 작은 동물을 구워 먹는 요리다. 지방이 거의 없고 담백하다.


따말레스 Tamales

옥수수 가루를 반죽하여 페루산 대형 옥수수알과 고기를 넣고 옥수수 잎에서 찐 것으로 지역마다 들어가는 재료는 다소 차이가 있다.


안띠꾸초 Anticucho

소 심장을 소스에 재웠다가 감자 등과 함께 꼬치에 끼워 구운 것으로 쇠고기의 질감과 달리 약간은 물컹거리는 느낌이다.


산꼬차도 Sancochado

고기와 옥수수, 감자, 양파, 호박 등 야채를 넣고 끓인 야채수프다.


추뻬 데 까마로네스 Chupe de Camarones

커다란 새우와 우유를 넣어 끓인 수프로 아레끼빠 지방에서 유명하며 우유가 들어가 부드럽다.


마사모라 모라다 Mazamorra Morada

보라색이 나는 옥수수를 쪄서 그 즙을 졸여 녹말로 굳혀 만든 젤리 형태의 과자


로모 쌀따도 Lomo Saltado

로모는 쇠고기를 말하는데 이 쇠고기를 잘게 썰어서 야채와 함께 볶은 요리다


삐스꼬 사우어 Pisco Sour

포도로 만든 증류수로 삐스꼬에 계란 흰자와 레몬즙 등을 섞어 만든 일종의 칵테일이다.


까우사 레예나 Causa Rellena

매시 포테이토를 으깨 여러 가지 야채를 섞어 완자 모양으로 만든 요리


빨리우엘라 Palihuela

유리조개나 게, 생선 뼈 등 다양한 해물을 넣고 풍성하게 끓인 수프



<페루 : 세상 끝에서 만난 잉카의 태양>

한동엽 지음

위즈덤, 2009



페루
국내도서
저자 : 한동엽
출판 : WISDOM(위즈덤) 2009.12.14
상세보기




■ 본문 중에서


# 책머리에 

- 6p.

저는 이런 봉지족의 존재와 그에 대한 경배를 바라보며 정설처럼 여겨지는 한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 여행이 거듭될수록 배낭은 간소해진다. "

어쩌면 이 말은 너무나 당연한 말일 것입니다. 아마 배낭여행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말에 공감할 테죠. 길 위에서는 등에 짊어진 모든 것들이 버릴 것이 되니까요. 길을 오래 걷는다면 비움은 미학의 차원을 넘어 생존의 문제가 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간소하게 짐을 꾸리는 노하우가 여행 이력을 가늠하게 하는 지표가 되는 까닭에, 때로는 배낭의 무게가 여행자들의 자존심이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유치해 보이겠지만 정말 그렇습니다. 그리고 도량에서 오랜 시간 수행해도 비우는 것에 익숙해지지 않는 인간의 본성 대문인지 가벼워진 배낭에는 비워낸 무게만큼 필연적으로 허위가 섞이게 됩니다. 예컨대 파키스탄 훈자를 실제로 다녀온 사람들보다 훈자를 더 잘 묘사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예사이며, 제부도의 석양을 묘사하면서 발리의 석양이라고 우격다짐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사람의 가치가 금액으로 환산되는 시대에 스스로 상품이 되지 못해 안달 난 이런 '뚝심 있는 바보'들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지요.

길 위에서 이런 뚝심 있는 바보들을 몇 번 목격하면서 "여행은 비움의 과정"이라는 암묵적인 정의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수학에서 말하는 '극한'의 개념을 생각해봅시다. 길 위를 오래 걸으며 버리다 버리다 봉지족으로 남은 자들의 무용담은 알 수 없어야 하지 않을까요? 비움의 정점에서는 이야기마저 버려져야 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그냥 솔직해지기로 했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훌훌 다 비워낼 깜냥이 되지도 않고 비움이 여행의 본질이라고 믿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여행의 길목에서 비워내는 부분이 있다면 분명히 그 자리에 차곡차곡 채워지는 것이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다만 그 빈자리에 허위와 허풍이 들어차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무엇을 넣을 것인가?"가 길 위에서 저를 사로잡은 고민이었습니다.


-12p.

여행은, 특히 배낭을 짊어지고 홀로 나서는 여행은, 스스로를 자발적인 국외자로, 자발적인 이산자로 만듭니다. 그러니까 여행은 내가 존재하지 않던 사회에 '나'라는 이질적인 존재가 투입되면서 그곳의 사람들과 만나고 충돌하도록 만들어줍니다. 만남을 통해 이해하고 이해를 구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공통적인 속성과 완벽하게 다른 습성을 체득하게 됩니다. 그렇게 그들과 나 사이에 충돌과 화해가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일상으로부터 탈주를 꿈꾸었던 우리는 스스로 쌓아올린 벽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여행에서 목도한 가장 장엄한 풍경을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저는 스스로 둘러싼 이 '벽'을 꼽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벽을 허물기 위해 고민하는 것을 멈추지 않다 보면, 여행을 떠난 사람들이 저마다 품에 안은 공통적인 동경과 염원인 '자유'에 수렴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일상에서 탈주하여 여행에서 얻고자 하는 '자유'란 무엇일까요? 저는 여기에 대한 답으로, 백 년 전 세상을 바꾸기 위해 치열하게 살다 죽은 삶 자체로 '자유'(Freiheit)로 불리었던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 자유, 그것은 항상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다."



# 삽질과 꼴값 - 32p.

마주치고 싶지 않은 과거가 기억날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런 기억은 의도적으로 지우려고 애쓸수록 다시금 생각하게 도고, 생각할수록 기억은 또렷해진다. 사랑에 대한 기억은 이러한 아이러니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모두 한두 번쯤 지옥 같았던 시간이 있었고, 그때 분명 그것을 지옥 같다 생각했음에도 생각할수록 또렷해지는 것은 고통과 함께 했던, 혹은 그 이전을 장식했던 아름다운 기억이다. 그러다 보면 우습게도 지옥이 천국으로 환원되고 허우적거렸던 시간이 아름답기만 한 순간이 온다. 시야의 바깥은 진창이 되었음을 알면서도 그 시간에 대해 하염없는 감상에 젖게 된다. 부질없이 옛 기억을 또렷하게 만드는 것을 두고 우리는 '전문용어'로 삽질이니, 꼴값이니 부르게 되는 것이다.

'뇌가소성'이란, 같은 생각이나 행위를 반복할수록 대뇌피질에 그것을 기억하는 회로가 생기는 것을 뜻한다. 지우고 싶은 기억을 지우기 위해 끊임없이 그 기억을 떠올려야 하는 역설은 왜 사람들이 사랑을 하고 나면 '삽질'을 했다고 고백하면서 '꼴값'을 떠는가에 대해 설명해준다. 그러나 삽질이니 꼴값이니 업신여기면서도 하게 되는것, 그것도 사람의 일이다.



# 마법 - 36p.

"만약 당신에게 마법과 같은 힘이 생긴다면, 내일 당장 무엇이 되고 싶나요?"

"날아다니는 것 같은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지, 당신의 미래 말입니다. 마법과 같은 힘이 주어진다면 내일 당장 어떤 사람이 되어 살고 싶은지 묻는 거예요."

"지금으로서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그런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면 한 번은 그렇게 살아보고 싶어요."

"그럼, 그렇게 될 겁니다."

"네?"

"왜냐하면, 삶이 곧 마법이니까요."



# 얕은 나눔의 깊은 부끄러움 - 83 ~ 84p.

'나눔'이란 무엇인가? 내게 나눔이란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에게 퍼주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지지 못한 자들, 힘없는 자들, 소외된 자들이 더 이상 타의에 의해 가지지 못하게 되거나 힘없게 되거나 소외되지 않도록 세상을 함께 바꾸어나가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이상과 이념이 현실 앞에서 망각되어 스스로가 초라하고 남루해지는 순간, 전날 사막의 밤에 느꼈던 그 딜레마가 다시 뱃속부터 목을 타고 머리까지 기어올라온다. ... (중략) ...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에서 연말이면 예외 없이 모든 미디어를 도배하는 것이 '나눔'이다. 그러나 이 '나눔' 이라는 것은 어쩌면 지독할 정도로 '행동해야 하는 것'이 아닐는지. 얼마간의 헌금에서 위안을 느낀다면 돈으로 심적 평안을 구입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헌금과 헌물은 할수록 아파지고, 어려워지고, 슬퍼져야 하는 것이리라. 수많은 동정심들이 세상에 존재하고 거기서 비롯된 헌금과 헌물들이 한반도 서른 개 정도는 사고도 남겠지만 현실은 여전하다. 바뀌지 않는 현실에 아파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행위가 자기 위안 외에 그 무엇이 될 수 있을까? 



# 그것이 신의 뜻이라면 - 85p.

여행자들은 보통 작별인사로 "잘 가요" 보다는 "다음에 다시 만납시다"를 더 선호한다. 언젠가 어디에선가, 정 안 되며 다음 생에라도 다시 만나게 되리 모르는 연(緣)의 끈을 느끼게 하는 인사말이기에 더욱 긴 여운이 남을 것이다. 나 역시 이브라힘에게 그렇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다음에 다시 만나요. See you again. 이브라힘은 활짝 웃으면서 나를 끌어안더니 그 또한 다음에 다시 만나자며 인사를 하고는 한마디를 덧붙인다.

"인샬라."



# 유리상자 - 108 ~ 109p.

하나의 사랑이 끝나면서 사랑과 함께 뜨거웠던 감정들은 빠른 속도로 소멸되어갔다. 소멸된 감정과 함께 증오의 타래도 서서히 풀려갔다. 함께 했던 시간을 증명할 만한 것들을 차례로 정리해나갔다. 차곡차곡 모아 두었던 편지를 버리는 것부터 시작했다. 오랜시간 장거리 연애를 하는 동안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모아두었던 기차표들도 버린다. 왠지 모르게 후련한 마음. 매몰차게 돌아선 내게 끊임없이 전화를 해오는 그녀의 전화번호를 스팸번호로 등록하고 전원을 끈다. 편리한 세상의 편하지만은 않은 방식이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두 다 지워버리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느끼지 않으려 해도 느껴지는 감촉이 나를 괴롭힌다. 별 것 아닌 일에 눈물이 난다. 많이 사랑했던 만큼 많이 지쳤다. 그만큼 지쳤기에 더 이상 우리는 아니었음을 안다. 우리가 손에 나눠 꼈던 반지 때문에 그을리지 않은 부분이 남아 백악기의 화석처럼 한때 그곳에 무엇인가 있었음을 표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녹이 슬고, 바람이 불고, 사람이 죽고, 고깃덩어리가 부패하는 것처럼 얼마 있지 않아 아무런 흔적도 감각도 남지 않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통조림에서 갓 꺼낸 복숭아처럼 하늘이 샛노랬다. 당장은 어려워 보이겠지만 자연스럽게 잊힐 것이리라. 계절은 돌고 사건은 반복되지만 그 아에 사는 이들은 바뀌는 것처럼. 사랑은 흙먼지처럼 가볍고 아마 이름도, 얼굴도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는 순간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관계의 종결을 선언하기 훨씬 전부터 우리의 따뜻했던 겨울은 끝나가고 있었을 것이다. 꿈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선명했던 기억이 아슬아슬 사라져 종내 희미한 마음만 남아 돌아볼 수 없게 된 그 겨울은 이미 한참 전부터 끝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겨울을 오래전부터 유리상자로 만들어 두었다. 그것은 건드리면 바스락하니 깨질 듯 얇고, 실루엣만 간신히 보이는 불투명한 유리벽으로 만들어진 상자였다. 오랫동안 얇은 유리를 밀어내지 않고 그대로 두고 있었던 나는 여전히 그 겨울에 스스로를 가두어 두었다. 사랑을 구하는 일이 가없이 가엽다고 여겨질지 모르나, 무너진 믿음으로 매몰차게 고개 돌린 그 마지막 순간에 다시 한 번 구해보았다면, 이토록 꼼짝없이 그 자리에 갇혀 겨울을 떠올리고, 그 따스함을 떠올리고, 그 온도에서 그 체온을 떠올리고, 그 체온을 감싸며 속삭였던 끊임없는 이야기를 살갑게 떠올리며, 아주 가끔씩 그리워하거나 후회하거나 기억을 떠올리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 Bon Voyage - 111p.

법륜(法輪)처럼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는 여행의 길 위에서 에로스를 수반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이 제아무리 길 위에서 스쳐 지나가는 연이라 해도 사람과 사람의 만남, 그리고 만남에서 비롯되는 관계는 필연적으로 사랑과 미움의 줄타기를 동반한다. 정도의 차이일 뿐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양가감정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과'와 같은 것이다. 없어도 크게 어색하지는 않지만 이어지기 위해서는 존재해야 하는 접속사 같은.



# 장기적으로 보면 우리는 모두 죽는다 - 265 ~ 266p.

아마도 그것은 '그 시대에 대한 그리움' 그 자체이지 않을까? 그 시절의 기억 중 유리한 것, 고통스럽지 않은 것, 내게 좋은 것들만이 편취되어 남고, 내가 직접 겪지 않은 고통에 대해서는 무감각하거나 망각해버린 결과 '그때 그 시절'과 '그때 그 사람'에 대한 향수에 더욱 젖어들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 평화의 속살 - 319p.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기에 조금이라도 이고 가는 짐의 무게가 가벼워지지 않을까? 비록 함께 걸어가는 것이 고단하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그렇게 고단하고 고통스러울 때 비로소 우리는 더욱 채근당하고 자극을 받기에, 아픔과 상처 속에서도 웃음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우리의 시간을 공유하며 당신과 나 사이에 벽이 허물어질 때, 양파껍질을 벗기듯 하나하나 평화의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여행자의 인문학 노트>

이현석 지음

한티재, 2013



여행자의 인문학 노트
국내도서
저자 : 이현석
출판 : 한티재 2013.12.09
상세보기





○ 어둡고 쓸쓸한 날들의 평화 


#6 - 18p.


솔직히, 그는 애처로울 정도로, 때론 몸에 해로울 만큼이나 심각하고 비관적이다. 마음 깊이 좋아하기엔 누구라도 부담스러운 스타일인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그를 쉽사리 멀리 할 수 없는 건, 현재 그에게 나밖에는 친구가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친구는 하나가 필요할 뿐이지. 둘도 필요 없다고 생각해. 인류 전체와 말싸움을 하며 살아도 괜찮다구. 날 이해해주는 단 한 사람이 있으면 되는 거야."

그렇게 말하는 그는, 내가 그를 잘 이해할 수 없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니라면, 이미 그것까지도 감안하고 하는 말일 수도 있다. 왜냐고? 그는 영리하니까. 그리고 나는 꼭 그 반대편의 거리만큼 멍청하니까. 그는 어쩌면 내 앞에서조차, 순간순간 짜낸 각본에 따라 연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6 - 25p.


"너 할리우드 영화 싫어하지?"

"볼 땐 재미있어도 나중에 남는 게 없잖아. 돈만 잔뜩 쏟아 붓고 말이지."

"난 할리우드 영화가 한 가지 이유만으로 참 좋아."

"어떤?"

"양키들 말이지, 아무리 아슬아슬한 상황에서도 꼭 농담을 하거든. 총알 맞고서도, 집에 따끈한 핫케이크가 있는데, 하고 죽는 게 그네들이지. 아마도 천성인가 봐. 그래서 다른 나라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잔인한 지소 많이 하지만. 언뜻 그런 우스갯소리들이 엉터리인 것 같지만, 사실 전쟁터에서도 사람이 늘 찡그리고만 사는 건 아니거든. 사람들은 우울한 환경 속에서도 해학을 수신할 수 있는 안테나를 제공받게 마련이지. 생존하려고 말이야. 웃음은 폭풍이 몰아치는 인생의 강을 건너게 해주는 배와도 같아. 내가 아는 희극 배우는 이런 말을 하더라. 이 세상에 웃지 않을 수 있는 일은 결단코 하나도 없다고. 그 사람, 굉장히 고생을 많이 했고, 또 지금도 무지 가난하거든. 그런데도 그러더라구. ... ... 어쨌든, 참 맞는 얘긴거 같아."



○ 이제 나무묘지로 간다


#3 - 61p.


그녀는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눈동자엔 물기가 가득했다. 슬픔이 이글거렸다. 맑은 슬픔이.

"청무로 돌아가려고 해. 좀 쉬고 싶거든. 이젠 안개가 파랗지 않을 것 같애. 설혹 그렇다 해도 상관 없구."



○ 그는 추억의 속도로 걸어갔다


- 93p.

책 한 권에 의해 인생이 변화 받았노라고 떠벌리는 인간들과는 상종하지 말아라. 그들은 언제 너를 책 한 권 정도의 값어치로 팔아넘길지 모른단다.


- 95p.

흰색에 관해 우리는 너무 오해가 많아왔어, 음, 그렇구말구, 흰색은 결코 나약하거나 소극적인 세계가 아니다. 전 우주를 통해 가장 강렬하고 황홀한 창조의 빛! 우리를 질식시키고도 남았을 힘! 그것은 황금빛이 아니라 흰색이었을 것이다. 이 어두운 지구상에 처음으로 눈이라는 것이 내려왔을 때를 상상해봐라. 얼마나 멋졌겠니! 


아버지는 완성되지도 않은 그 그림에 홀딱 빠져버렸더랬다. 나는 아버지의 천진한 눈빛에 당황했다. 난 그때의 그림을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작업실에 그대로 놔두고 있다. 아버지와 함께할 적에는 완성된 그림이 오히려 아버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까 봐 그랬고, 헤어진 후에는 왠지 그 그림을 다 채워버리면 아버지를 내 마음속에서 완전히 잃어버리게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 108p.

하얀 고양이의 회색 동공 같은 나날이다. 흘러가는 계절 뒤에 무심히 잊혀지고 있다는 것을 숨길 수가 없었던 우리는 서로에겐 피차 슬픈 악습. 발은 피로의 미역에 감겨 자꾸 미끄러지고 입은 새의 부리처럼 지난 추억을 씹어 삼킬 수 없다고 전한다. 차라리 나를 이 저무는 하늘의 소금 속에 푹 절여다오. 무엇이 시작이고 무엇이 그 시작의 바로 다음인가를 천년 동안만 생각할 수 있도록. 그리고 긴 송곳으로 네가 나의 눈을 찔렀기에 너의 눈가에 녹슨 피가 흐르는 것이라고.


- 108p.

이 세상에서 인간을 구원할 가망이 있는 것은 오직 사랑밖에 없다고, 나와 그녀는 그렇게 저 희미한 사랑의 처음을 무작정 믿어보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그 애처로운 사랑의 빛마저 바래고 허무해지면서도 우리가 서로를 원망하지 않고 헤어질 수 있었던 까닭의 배경에는, 우리의 첫날에 우리 스스로 인정하고 말았던 그 패배감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이미 부정적으로 결정이 난 싸움에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너무 많은 것들을 희생하며 살아간다. 아내와 나는 이별하며, 오히려 인생에 커다란 깨달음을 준 우리의 짧았던 부부로서의 인연에 감사했다. 누가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 내가 그녀를 내 목숨만큼 사랑하고 숭배했었다는 사실을. 헤어져 있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은 거짓이다. 그 말은, 미워한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은 거짓이다, 라는 문장과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난 아내가 아직 날 사랑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단지 우리가 헤어졌던 것은, 함께 살아가기에는 서로의 절망이 각자에게 너무 큰 짐이 되기 때문이었을 뿐이다. 내 어머니에게 내가, 혹은 내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 109p.

추억에도 속도라는 것이 있다. 나는 아주 드물게 그 속도를 감지하곤 한다. 나는 내 그림 속의 인물과 사물 들이 그 추억의 속도로 움직이길 원했고, 그 그림들에서 지나간 내 모습들을 반추할 수 있기를 추구했다. 만약 내가 벌레를 그리거나, 혹은 흩어지는 노을을 그린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것들은 내 빈 가슴을 추억의 속도로 밟고 지나간 스스로의 모습이었다. 이론가들은 진리를 추상적인 개념으로 밝혀낸다. 예를 들어 1+1=2가 그렇다. 하지만 예술가들은 구체적인 형상으로 말한다. 내가 하나에 하나가 더해지면 둘이 된다는 것을 표현하고자 한다면, 해지는 가을 들녘에서 뛰노는 두 아이나, 비바람에 흔들리는 아름드리 너도밤나무 두 그루를 그리는 것이다. 나는 내가 느끼는 추억의 속도를 공식으로 종이에 적어 남에게 가르칠 만한 재주가 없을뿐더러, 내 그림은 공식이 아니기에 타인이 그것을 활용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추억에 속도가 없는 것은 절대 아니다. 덧없는 예술을 보고 울어주는 얼간이들이 있는 한, 세상에는 시적인 것들의 드문 승리가 반드시 존재한다. 저들은 이혼했다, 라고 말하는 것은 개념이지만, 그 개념은 나와 아내의 사이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다. 거기엔 형상이 필요하다. 그림이건, 음악이건, 가슴 아픈 형상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내가 느끼고 있는 추억의 속도 또한 그렇다.


- 117p.

부끄러움은 괴로움으로 쉽사리 바뀌어 나를 아무와도 대화할 수 없는 외딴 곳으로 데리고 갔다.


대신, 대신, 나는 열심히 그림을 그리지 않았는가! 나는 내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모르는데도 비평가들은 내가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들을 마치 내 곰삭은 철학인 양 신문 지상에 떠벌리고 있었다. 세상에서 유명해지기란 너무도 쉬웠다. 단지 더불어 북 치고 장구를 쳐주는 족속들이 필요할 뿐이다. 얼마나 많은 진정한 예술가들이 그런 광대들의 도움이 없어 사장되는가를 생각하면, 세상은 한심 그 자체였다.



○ Lemon Tree


#1 - 121p.


다만 멀리 존재함으로 환상처럼 여겨지는 것들이 있다. 별들의 세계가 그러하다. 초저녁 서쪽 하늘의 고혹스런 비너스는, 너무 아름다운 사람들이 자주 그러하듯 쉽사리 사라지고 만다. 



#6 - 141p.


너는 다시는 날 찾지 않을 거였다. 신호등의 파란불이 벌써 깜빡 깜빡댔다. 너는 내게서 탈출하고 있었다. 예전에 내가 너로부터 그랬듯이.


네가 탄 차가 건너편에서 멀어질 때, 뭔가 붉고 짙은 것이 내 발목으로 떨어졌다. 나는 그것을 주워든다. 낙엽이었다. 아, 서른 번째 가을마저 이렇게 흘러가는구나. 불행도 아무에게나 찾아오는 것은 아닌가 보다. 슬퍼하거나 아파해야 할 자격이 있는 이에게 그것은 온다. 고통은 감당하는 게 아니라 수행하는 것이라던 누군가의 말이, 내게 오늘처럼 두려운 적이 있었던가.



○ 달의 뒤편으로 가는 자전거 여행


#2 - 147p.


마음의 중심이 심하게 지쳤음을 자인하게 되고, 그래서 그것이 급기야 육체적으로도 심각하게 다가오는 때가 한두 번쯤은 있게 마련이다. 거기에 특정한 병명이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사랑의 슬픔으로 상처받은 가슴에 어떤 명약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오랜 세월을 두고 녹슨 노인의 어깨가 지난날의 후회마냥 아련하게 쑤셔대는 일과도 같이, 내가 서울에서 얻은 얼굴 없는 절망의 실체에 의학적인 의미를 부여한다는 건 부질없단 말이다.


#2 - 148p.


나는 당분간 새로운 꿈 따윈 꾸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큰형의 조언대로 아무 목적 없이 여기에 멈춰보기로 말이다. 회복의 열망 자체가 없는 진짜 휴식을 즐겨보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리고 요즘 와서는, 이처럼 맥없이 늙어감도 나쁜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곤한다. 조용하다. 사방이 그렇게 조용할 수가 없다. 이곳에서, 나는 낮잠 속에서조차 낮잠을 잔다.


#4 - 154p.


스무 살 무렵의 한때를 회상하는 일이란 인생 전체를 탐구하는 것만큼이나 힘겹다. 또한 어떤 사람이 있어, 백 번째 해를 살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의 스무 살 시절보다 커다란 의미를 지닐 순 없다. 이미 백 년을 산 사람은 죽음의 초소(哨所)에 기대어진 빈총이지만, 스무 살이란, 삶의 작렬하는 태양을 향해 굳센 팔뚝으로 정조준되어진 푸른 총구와도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무 살 즈음에, 어떤 형태로든 요정(妖精)이 된다. 생활과는 전혀 다른 일들에 미쳐 있기도 하고, 없는 것을 있다고 믿고, 반대로 존재하는 것들을 상상조차 못 하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을 배우고, 거의 예외 없이 실패한다.



○ 내 가슴으로 혜성이 날아들던 날 밤의 이야기


#3 - 197p.


" 생각해 봐.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본래의 특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 과연 몇이나 남았는가를.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선 모든 게 변질되어버렸지. 밤다워야 할 밤은 술집과 유곽의 불빛 아래 사라졌고, 추위도, 바람도, 그리고 하늘의 별들마저도 인간세계에서 추방되고 말았어. 세상 대부분의 사물들이 신이 부여해 준 원형을 잃고, 인간생활 자체의 리듬은 불분명해진 거야. 바삐 움직이지 않는 것들이 없고, 시끄럽지 않은 게 없지. 우리는 늘 스스로를 보채기 때문에 길가에서 자라나는 꽃과 나무들의 색깔과 향기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바람이 불어도 그 바람에 풀잎들이 한들거리는 모습을 그냥 지나쳐버려. 그러나 지구상의 가장 높은 곳과의 만남, 그 무목적의 산행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거든. 그를 둘러싸고 있는 건 다만 망각의 고요함뿐이다. 마을에서 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밤하늘의 별들을 보게 되는 거야. 별들에게도 나름대로의 의미가 이겠으나, 어쩌면 그들도 엄연히 인간의 생활에 속하고 있어. 클라이머들의 운명이 별들에게 달려 있기도 하기 때문이지. 별이 빛나 때 클라이머의 마음은 즐겁다. 그러나 별들이 너무 총총히 반짝거리면 이내 불안에 잠기게 된다구. 폭풍을 예고하는 조짐이기도 해서야. 별들이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으면 이른 아침에 눈이 내릴 징조고. 저 아래서는 인가(人家)의 불빛 때문에 하늘의 별빛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르나, 높은 산에서 떠오른 수정과 같이 빛나는 별들은 산악인의 존재 자체가 되지. 왜 산에 오르냐구? 그건 우주의 별들과 가장 가깝게 지구가 공전하면서 일으키는 바람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한 뼘의 자리가 바로 거기라서 그래. 산을 오르는 사람에겐 별 역시 산이야. "



○ 초식동물의 음악


#1 - 228p.


따뜻한 물에 젖고 싶은 새벽이다.

나는 그러기 위해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다.



○ 길과 구름과 바람의 적 


#1 - 255p.


나는 길과 구름과 바람의 적, 시간에 썩어들지 않는 죽음의 적이다.


아무리 멀리 걸어가도 지치지 않는 길의 적, 안개의 몸으로 공중을 뒤흔드는 구름의 적. 지상의 모든 사랑과 질긴 인연으로도 저지하지 못하는 바람의 적이다. 나는 길보다 외롭고 구름보다 가벼우며 바람보다 쓸쓸하다. 나는 여행과 귀향의 처음이자 끝이고 내 찡그린 얼굴은 폭발하는 태양의 흑점이다. 나는 시체와 사슬의 적. 나는 자유로운 영(靈)이니 나의 차갑게 불타는 말씀이 두렵지 않은가.


#6 - 276p.


팔딱, 팔딱, 목숨이 뛰는 게 손바닥에 전해진다. 슬프다. 기쁘다. 슬프다. 슬프지 않다. 기쁘지 않다. 여자에게 입을 맞춘다. 까끌한 혀를 입술 사이로 밀어 넣어 잠든 여자의 부드러운 복종을 맛본다.



○ 작가의 말


나는 일기를 남기지 않는다. 내 이 부끄러운 오늘을, 그리하여 괴로움인 저 어제를 굳이 기록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대신 내 소설들을 보면 그것들을 빚어내려 애쓰던 무렵의 내가 타인은 해독해내지 못하는 암호가 되어 거기에 있다.


나는 내가 쓴 것들 말고는 모두 잃어버렸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는 추억의 속도로 걸어갔다>

이응준 지음

민음사, 2005



그는 추억의 속도로 걸어갔다
국내도서
저자 : 이응준
출판 : 민음사 2005.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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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 있어 나누는 인사 - 12p.

아직 살아 있어 이렇게 만나 인사를 나눕니다.

이 일이 한없이 큰 걸 모른다면 살아 있어도 산 것이 아닙니다.




# 있는 그대로 - 15p.

상처 없고 흠 없는 존재가 어디 있을까?

겨울 들머리에 남루해진 나무들의 숲에 가서도 나무들의 고된 삶을 만나기 어렵지 않듯,

사람들의 숲인 세상에서도 상처 있으면 있는 대로

열심히 살고 있는 존재들 만날 수 있습니다.




# 어른이 된다는 건 - 18p.

살아 보면, 인생은 외롭게 혼자인 게 제 모습인 듯합니다.

제 그림자건 제 내면이건 제가 저를 길동무 삼아 살아가는 게 인생이지요.

어른이 된다는 건, 그렇게 혼자 걷는 데 익숙해지고 태연해지는 것이기도 하고요.




# 천지간에 혼자 - 50p.

오늘도 어쩔 도리 없이 혼자였습니다.

하늘에 별들이 부릅뜬 눈처럼 또렷하게 보이는 밤입니다.




# 같이 고민해야 할...... 51p.

무엇보다, 능력 있는 사람이 되기 어려워서,

절망하게 된 멀쩡한 젊음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세상이 온통 자학에 빠지고 평균인들이 열등인을 자처하게 만드는

이 세상의 끝은 어디일까요?




# 질주하는 세상에서 - 64p.

세상은, 평균적인 사람들이면 누구나 지치고 고민하고 좌절하고

그래도 다시 한 번 분발하고 다시 한 번 시작하는, 그런 고된 세상입니다.

질주하는 세상에 올라타고 거칠게 흔들립니다.

초만원이지요? 내리고 싶을 때도 있고......




# 뜨거운 구름 위에 올라앉은 듯 - 85p.

분주하게 사느라고, 가끔씩, 못 챙긴 마음들이 들고 일어서는 듯싶기는 합니다.

마음 놓치면 크게 놓치고 잃는 것인 줄 압니다.

허리 곧추세우고 버릴 것 버리고 놓을 것 놓아야지요.




# 목마른 초록 생명들 - 87p.

단비처럼 좋은 소식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많지요?

여유 있어 거기 길들어 버린 사람들은,

가난해서 절박해진 이들의 속을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 살면서 버려야 할 것 - 107p.

관념? 쓸데없는 생각의 무늬 같은 거지요.

얼핏 아름답고 솔깃하지만 핏기는 없는 언어들,

거기서는 땀 냄새, 흙냄새 맡기 어렵습니다.




# 나도 흔해질라 - 117p.

흔한 것이 많아졌습니다.

떨이로 쏟아 내는 처치 곤란인 물건들 속에 

우리들도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 사람이 되는 일 - 136p.

되돌릴 수만 있다면 돌아가고 싶은 순정한 시대에는 '사람'이 있었던 듯싶습니다.

'사람'이 그립고 '사람'이 소중해졌다는 말씀이겠지요.

베트남 신화에 있는 이야기, "사람이 되는 것이 제일 어려운 일이란다!"

그 말이 사실인 듯합니다.




# 산다는 건 - 158p.

산다는 건, 사람으로 산다는 건, 구차하고 잡다한 속에서 견디는 일입니다.

살아 보니 그렇습니다.

그 안에서 애써 고요를 찾고, 마음의 작은 평화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게

또한 삶이었습니다.





<이철수의 나뭇잎 편지 - 있는 그대로가 아름답습니다>

이철수

삼인, 2008


있는 그대로가 아름답습니다
국내도서
저자 : 이철수
출판 : 삼인 2008.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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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걱정 - 31p.

나라 살림 거덜 날 것도 걱정이고,

함부로 살아야 내 한 몸 살아남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까

그것도 걱정입니다.

가치관이 나사 풀려버릴까 걱정된다는 말씀입니다.




# 낮달 - 35p.

해도 달도 늘 하늘에 잇습니다.

숨었다 보였다 하는 거지요.

그런 것 많잖아요! 가끔 착한 생각도 하는 것처럼.




# 폭력 - 43p.

사람이 사람을 때립니다.

폭력에 상처 입은 사람들은 죽음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견딜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우리 사회를 문명하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 날마다 좋은날 - 66p.

꽃이 왔습니다.

고개만 들면 보이는 그 자리에, 꽃이 왔습니다.

나도 지난해 그 사람이 아닌 터라,

낯익은 봄꽃을 지난해 그 꽃이라 하지 못하겠습니다.




# 봄, 그리고 비! - 68p.

비 오시거든 꽃 있는 자리 한 번 보세요.

만개와 낙화가 한 운명이고 한 얼굴입니다.

청춘, 당신들만 호시절일 리 없다구요!




# 마중 - 111p.

멋대로 생각하기를, 밭에서 하루 고생했다고 하늘이 마중을 나오신 거라고

하늘 표정이 그래서 저리 좋다고.

- 무얼 여기까지 이렇게 나오셨어요. 어서 들어가세요.

늦었지만 저녁이나 함께 하시지요.




# 무자화두 - 119p.

불탈 것도 손에 쥘 것도 없는 무(無)가 불길에 휩싸여 타오릅니다.

부지런히도 살 것 없고, 선한 생각도 부질없다는 말이냐고요?

그럴리가요!




# 여행 - 124p.

여행하고 싶다고 아이가 이야기합니다.

구름 타고 거침없이 허공을 달리는 마음 여행이야 불가능할 것 없습니다.

저녁마다 노을이 좋습니다.

노을에 마음을 싣고 마음 가자는 대로 가보는 거지요.


# 독버섯 - 165p.

내 손으로 심지 않은 꽃이라도 예쁘다고 하고,

온갖 꽃들 모두 제 모습 그대로 아름답다 하는 그 마음으로,

살아 있는 모든 생명들도 아름답고 소중하다고 해야 합니다.

밉살맞은 사람이라도 거기서 예외가 되어서는 안 되지요! 서운한가요?




<이철수의 나뭇잎 편지 - 사는 동안 꽃처럼>

이철수

삼인, 2012


사는 동안 꽃처럼
국내도서
저자 : 이철수
출판 : 삼인 2012.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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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밥으로 소주를 - 19p.

어디서나 밥보다 술에 먼저 손이 가는 이들이 마을에 두엇 더 있습니다.

한결같이 여리고 순한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보다 술기운이 더 따뜻하고 살가웠던가 봅니다.




# 지지 말라고 - 33p.

시린 겨울의 짧은 한낮을 밝히는 햇볕이 이야기합니다.

겨울도 간다고. 봄을 이긴 겨울 없다고. 봄볕에 가랑잎 먼저 더워질 거라고.

이 계절은 누구에게나 힘겹다고. 그러니, 외로움에 지지 말라고.




# 답지 못하다 - 62p.

'답지 못하다'는 말 자주 하지요?

아이가 아이답지 못하고, 젊은이가 젊은이답지 못하고,

어른이 어른답지 못한 세상이 되고 있습니다.




# 화택 - 68p.

세상이 무서워집니다.

깊고 짙은 외로움이, 화택 세상을 사는 우리들의 내면입니다.

외롭게 죽어가고, 외롭게 싸우고, 외롭게 견디는 게 인생인가 싶기도 합니다.




# 속없는 것! - 69p.

- 개똥 같은 시대에도 꽃이 핀다. 속도 없는 것!

무고하게 죽기도 하는 세상이지만,

산 것들 꽃처럼 아름답고, 꽃처럼 행복하고, 꽃처럼 속없이 살아가기를.




# 사는 동안 꽃처럼 - 74p.

그저 그만 한 높이에 피어나는 꽃의 화사한 만개는,

갓 낳은 어린 생명을 보듬은 세상 모든 어미들의 눈웃음처럼 넉넉해 보입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세상에 왔습니다.




# 희망 - 93p.

눈물 젖은 '희망'이,

슬픔이 가득해 있는 우리 시대 위로 천천히 떠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사내가 몸을 던진 것은, 부엉이 바위가 아니라, 대중의 마음이었습니다.




# 풀벌레 소리 - 149p.

철거, 정비! 빌어먹을! 그래도, 이 밤에, 풀벌레 소리 자욱합니다.

생명 있는 것이니 이렇지!

- 사랑이 어디, 자리 가리고, 자리 보아가며 뜨거워진다더냐?

그렇게 이야기하는 듯 싶었습니다.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판화가인 이철수는 1981년 첫 개인전 이후 1980년대 내내 탁월한 민중 판화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1990년 무렵부터 자기 성찰과 생명의 본질에 대한 관심으로 판화 영역을 확대해간 그는 그 후 일상과 자연과 선(禪)을 소재로 한 새로운 작품에 몰두해왔다. 단아한 그림과 글에 선(禪)적인 시정과 삶의 긍정을 담아내는 이철수의 판화들은 '그림으로 시를 쓴다'는 평판과 함께 폭넓은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1981년 이후 국내의 주요 도시와 독일, 스위스, 미국 등지에서 여러 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새도 무게가 있습니다』, 『소리 하나』, 『배꽃 하얗게 지던 밤에』등 판화 산문집, 『이철수의 작은 선물』, 『생명의 노래』 등 판화집과 엽서 모음집 『밥 한 그릇의 행복 물 한 그릇의 기쁨』, 『가만가만 사랑해야지 이 작은 것들』, 『자고 깨어나면 늘 아침』, 『있는 그대로가 아름답습니다』를 출간했다.

지금은 충북 제천 외곽의 농촌에서 아내와 함께 농사를 지으면서 판화 작업을 하고 있다.


이철수의 집 www.mokpan.com



<이철수의 나뭇잎 편지 - 당신이 있어 고맙습니다>

이철수 지음

삼인, 2009


당신이 있어 고맙습니다
국내도서
저자 : 이철수
출판 : 삼인 2009.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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