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person you don't know... a man you've never met.
넌 나를 모르겠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으니까
But you are someone who occupies my mind... and my heart... in this distant land where I have gone.
하지만 너는 내가 언제나 떠올리는 사람이란다. 멀리 떠나온 이곳에서 말야
If you can imagine a hidden place tucked safely away from the world...
concealed by walls of high, snowcapped mountains...
a place rich with all the strange beauty of your nighttime dreams...
then you know where I am.
이곳을 상상할 수 있겠니?
세상으로부터 멀어져 숨어 있는 곳
만년설이 쌓인 산으로 막혀 있는 곳
꿈에서나 볼 것 같은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곳
바로 그런 곳이란다
In the country where I am traveling, Tibet... people believe if they walk long distances to holy places... it purifies the bad deeds they've committed.
They believe the more difficult the journey... the greater the depth of purification.
내가 여행하고 있는 이곳 티벳은 사람들이 성지까지 걸어서 도착하면 죄가 사라진다고 믿는단다
그 과정이 고될수록 죄 사함도 더 크다고 믿지
I've been walking from one faraway place to the next for many years... as long as you have lived.
I have seen seasons change across the high plateaus.
I have seen wild kiangs migrate south in winter... and sweep back across the fields when spring appears.
In this place, where time stands still... it seems that everything is moving... including me.
난 오지에서 또 다른 오지로 돌아다닌 지 오래됐지. 네 나이만큼 오래됐지.
고원을 지나며 계절이 바뀌는 것도 보고,
겨울이면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봄이면 돌아오는 티벳 당나귀 떼도 봤어
시간이 멈춘 이곳에서 모든 것은 계속 변해. 나 역시 그렇고
I can't say I know where I'm going... nor whether my bad deeds can be purified.
There are so many things I have done which I regret.
But when I come to a full stop,
I hope you will understand... that the distance between us is not as great as it seems.
내가 어디로 가는지, 내 죄가 정화될지는 알 수가 없구나
후회스런 일도 많이 했지만
이 여행을 마쳤을 때, 우리 사이의 거리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알아다오
With deep affection... your father, Heinrich Harrer.
사랑한다. 네 아버지 하인리히 하러로부터
Pema Lhaki : Still, walking up mountains is a fool's pleasure, Heinrich.
페마 : 그래도 산을 오르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에요
Heinrich Harrer : Not so foolish, really. Look at this.
That's after I climbed the Eiger North Face.
That's Olympics. Gold medal. Not important.
하인리히 : 바보가 하는 짓이 아니에요. 이거 봐요
아이거 북벽에 올랐을 때 사진이죠
그건 별거 아니에요, 올림픽 금메달 땄을 때죠
Pema Lhaki : Then this is another great difference between our civilization and yours.
You admire the man who pushes his way to the top in any walk of life while we admire the man who abandons his ego.
The average Tibetan wouldn't think to thrust himself forward this way.
페마 : 이게 바로 당신네 나라와 우리의 큰 차이점을 보여주는 거에요
당신들은 자신의 분야를 극한까지 밀어붙인 사람을 존경하죠
우리는 자존심을 버린 사람을 존경하고요
티벳인은 극한까지 자신을 몰아붙이지 않아요
Dalai Lama : Tell me a story about climbing mountains.
달라이 라마 : 이야기를 해주시오. 당신이 산을 타던 이야기
Heinrich : That's one way to fall asleep. Those stories bore even me.
하인리히 : 듣자마자 잠이 올걸요? 재미없는 얘기에요
Dalai Lama : Then tell me what you love about it.
달라이 라마 : 그럼 산이 왜 좋은지 말해주시오
Heinrich : What… The absolute simplicity. That's what I love.
When you're climbing, your mind is clear… freed of all confusions.
You have focus. And suddenly the light becomes sharper... sounds are richer...
and you are filled with... the deep, powerful presence of life.
I've only felt that way one other time.
하인리히 : 글쎄요. 절대적인 소박함이 마음에 드는 거죠
산을 타면 마음이 맑아져요. 혼란은 사라지고 집중하게 되죠
그러다가 갑자기 빛이 강렬해지고 소리가 풍부해져요
그럼 마음속이 깊고 강력한 생명으로 가득 차게 되죠
다른 곳에서는 딱 한 번 느껴봤어요
Dalai Lama : When?
달라이 라마 : 언제?
Heinrich : In your presence, Ku-Dun.
하인리히 : 성하가 계실 때요
One million Tibetans have died as a result of the Chinese occupation of Tibet.
Six thousand monasteries were destroyed.
중국의 점령 이후 백만의 티벳인이 죽었고 6천 여곳의 사원(Monasterles)이 파괴됐다.
In 199, the Dalai Lama was forced to flee to India.
He still lives there today, trying to promote a peaceful resolution with the Chinese.
1959년 인도로 피신한 달라이 라마는 아직도 중국과의 평화적인 해결책을 찾고 있다.
In 1989, he was awarded the Nobel Peace Prize.
Heinrich Harrer and the Dalai Lama remain friends to this day.
달라이 라마는 1989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고 지금도 하러와는 절친한 친구다.
<티베트에서의 7년: Seven Years in Tibet>
감독: 장 자크 아노
출연: 브래드 피트(하인리히 하러), 데이빗 듈리스 등
1997년
티베트에서의 7년(Seven Years In Tibet)은 하인리히 하러(Heinrich Harrer)가 1944년부터 1951년까지 7년 동안 티베트에서 있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이다.
오스트리아의 등산가였던 하인리히 하러는 1939년 히말라야 최고봉의 하나인 낭가파르바트 원정 도중 등정에 실패, 하산을 하였으나 마침 발생한 세계2차대전으로 영국군에 붙잡혀 포로가 된다. 이후 포로수용소를 탈출하여 티베트의 수도 라싸로 도망을 가는데,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책을 쓰게 된다. 라싸에서 하인리히 하러는 제14대 달라이 라마와 서방 문물을 나누며 친분을 쌓게 된다.
이 이야기는 1997년 장자크 아노 감독, 브래드 피트 주연의 동명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출처: 위키백과)
Dr. Karl : Perhaps one brother already weakened from the climb feel behind close to the summit.
탈진한 동생은 정상을 눈앞에 두고 뒤쳐졌고
The other stronger brother direct to himself down ...
힘이 남아있던 형은 가까스로 피신했다고 합니다.
Reinhold : That's not true!
사실이 아닙니다.
Dr. Karl : And thus saved his own life?
자기 목숨만 보존한 걸까요?
We will never find out.
우린 진실을 알 수 없겠죠.
It is not opt to meet to prove.
진상을 밝히는 것은 제 임무가 아닙니다.
How much guilty
얼마나 깊은 죄책감이..
How much guilty ways on Reinhold Messner's soul.
라인홀트 매스너의 영혼을 괴롭힐지 모르겠지만
It is burden he will have to carry until the end of his days.
그가 죽을 때까지 짊어져야 할 업보입니다.
Sponsor : What motivated you want to climb up to the highest mountain?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에 오르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You don't even know will get down again.
다시 못 내려올 수도 있는데?
Love of country?
애국심 때문인가?
Glory? Honor?
영광, 아니면 명예 때문에?
Reinhold : Why does painters are painting?
화가가 왜 그림을 그리죠?
Sponsor : You are saying a mountaineer is an artist?
등반가도 예술가와 같다는 건가?
And is behaves self-centered as an artist?
아니면 예술가처럼 자기중심적이라는 건가?
Reinhold : Self-centered as a sponsor.
후원자들만큼이나 자기밖에 모르죠.
Because if it sells everybody benefits.
팔리면 누이 좋고 매부 좋죠!
Reinhold : Neither Karl nor Felix attended a memorial service.
칼과 펠릭스는 건터의 장례식에 안왔습니다.
Karl's mountain destiny was always 'Nanga Parbat'.
칼에게 운명의 산은 항상 '낭가파르밧' 이었죠.
But it is superfluous mountain. Geological formation.
하지만 낭가는 산이란 지형일 뿐입니다.
We were that want to take emotions to mountains.
우리가 산에 감정을 불어넣은 거죠.
Reinhold Messner couldn't let go of Nanga Parbat.
라인홀트 매스너는 낭가파르밧을 떨쳐내지 못했다.
In the following years he set off dozen of times to look for his brother.
수년간 동생을 찾으려고 12번도 넘게 낭가를 향했다.
In 1978 he conquered Nanga Parbat a second time.
1978년 그는 낭가파르밧 정상을 두 번째로 정복했고
Without the expedition. Without equipment. Alone.
원정대와 장비 없이 홀로 이뤄낸 성취였다.
Karl Herrligkoffer continued to lead expeditions in the Himalayas.
칼은 계속 히말라야 원정대를 이끌었고
Upon his death in 1991 there still was no reconciliation between him and Reinhold Messner.
1991년 사망할 때까지 라인홀트와 화해하지 않았다.
Shortly thereafter, Peter Sholtz, one of the finest German mountaineers, fell to his death on the Mont Blanc.
얼마 안 가 피터 숄츠는 몽블랑에서 등반 도중 사망했다.
Felix Kuen committed suicide a few years later.
펠리스 큐언은 몇 년 후 자살했다
In 2005, the ice released Gunther's mortal remains.
At an altitude of 4,300 meters, on the Diamir Glacier.
2005년에야 해발 4,300m 지점의 디아미르 빙하 위에서 건터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운명의 산 낭가파르밧>
Nanga Parbat, 2010
조셉 빌스마이어 감독
플로리안 슈테터(라인홀트), 안드레아스
■ 낭가파르밧(Nanga Parbat)
낭가파르바트(Nanga Parbat)는 히말라야 산맥 끝, 파키스탄에 위치하고 있으며, 해발고도가 8,126미터로 세계에서 9번째로 높은 산이다. 이 지방 주민들은 '산 중의 왕'이란 뜻으로 '디아미르(Diamir)'라고 부르며 숭앙한다. 8,000미터 이상급 산 중에서는 가장 위험한 곳 중 하나로 손 꼽히는 곳.
'낭가파르바트'는 우르두어로 '벌거벗은 산'이란 뜻이다. 셰르파들 사이에서는 악마의 산으로 불리고 외국에서도 공공연히 'Killer Mountain'이란 명칭을 쓸 만큼, 난이도가 높고 사망자가 많이 나온 산으로 더더욱 유명하다. 산의 남동쪽 벽인 루팔 벽은 높이 4,500미터의 수직 암벽으로, 히말라야의 3대 난벽으로 꼽히는 곳이다. K2처럼 겨울 시즌에 등정된 바가 없는 산이었지만, 2016년 시모네 모로의 팀이 동계초등정에 성공하여 K2만이 동계등정이 안 된 유일한 산이 되었다. (출처: 나무위키)
■ 낭가파르밧(Nanga Parbat) 등정 역사 (출처: 나무위키)
1895년 영국의 알버트 프레데릭 머메리가 구르카 2명과 함께 처음으로 등반을 시도했다가 실종되었다. 그저 눈사태에 휘말려 죽었으리란 추정만 나올 뿐이다.
1932년 독일인 빌리 메르클, 빌로 벨첸바흐가 이끄는 독일 등산대가 도전했으나 1차는 실패했다.
1934년에 2차 도전에 나섰으나 악천후로 하나둘 쓰러져 죽도 메르클과 빌란트ㆍ벨첸바흐 등 독일인 4명과 가이라이ㆍ다그시ㆍ니마노르부 등 현지인 포터 6명이 목숨을 잃었다. 포터인 앙체링이 극적으로 내려와서 마지막에 남은 메르클과 포터 가이라이를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눈보라 속에서 후발 등산대는 구경만 해야했고, 남은 이들은 끝내 스스로 내려오지 못했다.
1937년, 칼 비엔(Karl Wien) 대장이 이끄는 독일등산대가 재도전에 나선다. 그들은 6,180 m 지점에 제4캠프를 구축했다. 그리고 6월 14일 저녁 정상 공격을 위해 독일인 대원 7명과 셰르파 9명이 제4캠프에 모였고 그 자리에서 잠을 잤다. 그러나... 바로 그날 밤 거대한 눈사태가 제4캠프를 덮쳐 자고 있던 16명 모두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다.
1938년 파울 파우어 대장이 이끄는 독일 등산대가 다시 도전했으나 악천후에 시달려 결국 라키오트 루트(북동쪽) 무어즈 헤드 부근에 있던 얼음굴에서 4년 전 조난당한 빌리 메르클 대장과 포터 가이라이의 시신을 발견하고 물러나야만 했다.이 과정에서 포터인 히야이룸과 독일인 등산대원 리하르트 발뢴코프가 목숨을 잃으면서 사망자는 31명으로 늘어났다.
1939년 페터 아우프취나이터가 이끄는 독일 등반대 4인이 낭가파르바트 디아미르(서쪽 벽) 머메리 립(rib) 좌측에 위치한 거대한 바위 스퍼의 6,100 m 지점까지 올라갔으나 역시 악천후로 물러났다. 히틀러도 연이은 실패에 노발대발했지만 곧 터진 2차 세계대전 여파로 등산은 흐지부지 밀려났다.
1953년 독일인 의사 카를 마리아 헤를리히코퍼(1916~1991)가 등반대를 조직했다. 바로 그는 1934년 조난당한 빌리 메르클의 이복아우로, 등반에 문외한이었지만 형이 못한 걸 이루겠다는 집념으로 도전에 성공했다. 하지만, 문제는 헤를리히코퍼가 등반에 문외한이고 독선적이며 고집이 세서 다른 등반대와 충돌했다는 것. 결국 다른 인원들이 그를 무시했고, 당시 29살 헤르만 불이 본부의 지시를 어기고 단독으로 등정을 시도, 41시간 만에 살아 돌아왔다.
결국 헤를리히코퍼는 스스로 오르고자 재도전에 나서 1961년 재등정에 나섰지만 루퍼트 뢰브와 한스 킨스호퍼가 추락사하면서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우습게도 그 이듬해인 1962년, 독일인 토니 킨쇼퍼가 이끄는 등정대가 2번째 정상에 올라 헤를리코퍼에게 굴욕을 안겨줬다. 하지만 이 등정에서도 1명이 죽었으며 킨쇼퍼 또한 다른 산 등정 도중에 1964년 목숨을 잃었는데 헤르만 불과 똑같은 33살이었다.
그 뒤로도 3번이나 헤를리히코퍼는 재도전에 나섰지만 그 스스로 정상에 오르는 건 죄다 실패했다. 그 중 하나인 4차 도전 당시(이탈리아-독일 합작으로 등정 시도)인 1970년에 팀에 동생 건터 메스너와 함께 합류한 이탈리아의 라인홀트 메스너가 건터와 단둘이 최초로 루팔 벽을 통해 등정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서쪽의 디아미르 벽을 통해 하산하던 중 눈사태로 동생 건터를 잃고 혼자 내려왔다. 여담인데 이때도 대장인 헤를리히코퍼는 젊은 메스너가 영광을 차지하는 게 배가 아파서 메스너가 기록을 세우기에 급급해 정상에 오른 걸로 만족하지 못하고 고산병에 시달리는 동생을 강제로 더 위험한 루트로 내려보내다 죽인 것이라고까지 했다. 분노한 메스너는 "나는 내 동생을 죽이지 않았다!"는 입장을 밝히며 비로소 헤르만 불을 이해하겠다는 말로 그 역시 헤를리히코퍼를 공식적으로 비난했다. 참고로 이 등정을 그린 2010년작인 독일 영화 <운명의 산 낭가 파르밧/Nanga Parbat>(2013년 국내 개봉) 에서도 헤를리히코퍼는 찌질이 악역급으로 나왔다. 그뿐만 아니라 처음에는 메스너 형제가 정상에 오르기를 적극 지지했으나 실제로 이들 형제가 정상에 오르자 태도가 돌변했다고 그려졌다.
이렇게 헤를리히코퍼가 등정에 연이어 실패할 때 체코의 이반 갈피가 3번째 도전에(1969년에 1차 실패) 나선 1971년에 4번째 정상 등정에 성공하여 이전 3번의 등정이 모두 독일인 및 독일과 합작으로 이뤄진거랑 달리 비독일 나라가 홀로 등정에 성공하여 헤를리히코퍼를 좌절시켰다. 결국 그는 낭가파르바트에 직접 오르기를 포기했고 등산가로서 묻혔으며, 되려 헤르만 불이나 메스너를 질투한 찌질이로서 등산 역사에 추하게 남았을 뿐이다.
여성으로서는 1984년 프랑스의 릴리앙 베르나르(1948~1986)가 남편인 모리스 베르나르(1941~1986)와 같이 처음으로 등정에 성공했다. 생몰연도를 보면 알겠지만 이 내외는 1986년 6월, K2 등정 도중 같이 목숨을 잃었으며 나중에 그녀의 시체를 발견하여 묻어준 등정대가 바로 한국 등정대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 7월 광주전남합동대가 등정을 시도했으나 실패, 7900미터 지점에서 정성백 대원이 실종, 아니 사망했다.
이후 1992년 우암산악회가 첫 등정에 성공했다. 그리고 1999년에는 엄홍길 대장이 디아미르벽을 통해 등정하는 데 성공했다.
2005년엔 한국 루팔벽 원정대의 이현조, 김창호 대원이 라인홀트 메스너에 이어 35년 만에 루팔벽 재등에 성공하였다.
2009년에는 고미영이 등정 후 하산하는 중에 실족하여 사망하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영화 K2는 1978년 미국 최초로 K2 등정을 성공한 짐 위크와이어(Jim Wickwire, Seattle 변호사)와 루이스 라이하르트(Louis Reichardt, 교수)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이다.
K2(8,611m)는 에베레스트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높은 산으로 카라코람(Karakoram) 산맥, 파키스탄에 위치한다. K2라는 이름은 1856년 헨리 고드윈 오스턴이 카라코람 산맥의 두 번째 봉우리라는 의미로 붙인 이름으로 다른 봉우리도 K1(마셔브룸산), K3(브로드피크산), K4(가셔브룸 2봉), K5(가셔브룸 1봉) K1-5라는 이름에서 각각 현재의 이름으로 명명되었다. 에베레스트에 비해 높이는 낮지만 등반의 난이도는 더 높고 위험하다고 알려져 있다.
1975년 처음으로 K2 등반을 시도했을 때 팀원 7명이 사망하고 짐 위크와이어는 6,700m 고지를 넘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다시 찾은 K2에서 1978년 9월 6일 루이스 라이하르트와 함께 정상 등정에 성공했지만, 해가 지기 전 하산을 마치지 못하고 8,200m의 고도에서 텐트, 침낭, 물도 없이 비박(bivouac)을 하게 된다. 산소 또한 바닥이 났고, 가스스토브도 사용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극단적인 추위 속에서 밤을 보낸 그는 저산소증, 동상, 폐부종 등 심각한 상태로 아침을 맞게 된다. 다음날 정상 등정을 성공한 존 로스켈리(John Roskelley)와 릭 리지웨이(Rick Ridgeway)가 그를 발견했고, 파키스탄 군대 헬리콥터로 수송되어 구출된다. 위크와이어는 폐 혈전으로 수술을 받았고, 발가락 2개를 잃었지만 후에 에베레스트, 맥킨리 등 등반을 계속했다.
영화에서 변호사 테일러는 친구 해럴드(H, 교수)와 K2 등정을 성공하지만, 하산 도중 해럴드가 추락해 심각한 골절을 당하는 사고를 당한다. 캠프와의 통신 두절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친구를 버릴 수 없던 그는 해럴드와 함께 하산을 하며 위기 상황을 맞지만, 구조 헬기에 발견된다.
등산은 인생이나 마찬가진다. 한 번 태어난 인생을 어떻게 취소하겠나. 한 번 오르기로 한 산은 올라가야 한다. 뭔가가 내 속에서 나를 격려하고 있었다. - 66-67p.
위기의 장점은 극한의 집중을 불러낸다는 것이다. 나는 그 칼날 능선 위에서 오로지 살아 돌아간다는 것만을 생각했다. 이전까지 겪었던 후회는 머릿속으로 들어올 틈이 없었다. 능선의 한 구비를 다 올라가자 또 한 구비가 눈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그 구비를 다 올라가자 또 한 구비가. 그렇게 열 번, 열한 번 올라가자 정상이 드러났다. 포베다는 우리 앞에 고개를 숙이고 푸른 창공을 마침내 보여줬다.
정상을 밟는 순간 환희의 극치가 찾아왔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나는 정상에 서봐서 안다. 그 순간의 절반만 기쁘다. 나머지 절반은 끔찍했다. 포베다의 정상은 편평했다. 거기 서자 눈물밖에 나오지 않았다. 정상이라는 표지는 십자가처럼 생긴 쇠막대였다. - 72p.
공기가 희박하고 찬바람 부는 정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면 다시 태어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소생의 기쁨, 우리가 받은 최고의 선물은 생명이란 걸 확인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몸속은 성취감으로 차오른다. - 81p.
1936년 독일의 토니 쿠르츠와 앤디 히토이서의 아이거북벽(Eigernordwand) 초등 도전 등반기를 다룬 영화. 대원 4명 중 3명은 차례로 목숨을 잃고, 토니는 끝까지 남아 구조대가 있는 아이거 윈도우(융프라우 철도 공사 시 만든 갱도로 아이거 북벽을 관통하는 5개의 터널이 창문처럼 나있음) 부근까지 오지만, 구조대가 건넨 로프의 길이가 짧아 구조대의 눈앞에서 허공에 매달린 채 동사한다.
아이거 산은 3,970m이지만 아이거 북벽은 1,800m에 이르는 넘기 힘든 직벽이 있어 클라이머의 공동묘지라 불리는 곳이었다. 아이거 북벽은 알프스 3대 북벽[각주:1] 중 하나로 알려진다. 1938년 독일의 안데를 헤크마이어와 루드빅 뵈르크, 오스트리아의 하인리히 하러, 프리츠 카스파레크 4명의 등반대가 아이거 북벽 등정에 성공한다. 등정에 성공한 독일, 오스트리아 등반대는 토니와 앤디의 루트를 따랐다고 알려진다. (힌테슈토이저 지름길, Hinterstoisser Traverse)
Andi Hinterstoisser(1914-1936), Toni Kruz(1913-1936), 구조대 눈앞에서 로프에 걸린채 사망한 토니 크루츠 (사진:AS Verlag, Zürich)
** 3 great north faces of the Alps (알프스 3대 북벽) **
[1] 그랑조라스 북벽(Grandes Jorasses, 4,208m, 프랑스/이탈리아 국경, 알프스 산맥 몽블랑 산군) - 초등: 리카르도 캐신, 에스포지토, 티초니, 1938년 8월
[2] 마터호른 북벽(Matterhorn, 4,478m, 스위스 체르마트/이탈리아) - 초등: 프란츠, 토니 슈미트 형제, 1931년 8월
[3] 아이거 북벽(Eiger, 3,970m, 스위스) - 초등: 안데를 헤크마이어, 루드뵉 뵈르크, 하인리히 하러, 프리츠 카스파레크, 1938년 7월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