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암묵지/추억의 책장 · 메모

여행의 기술

반응형

# 기대에 대하여
   - 장소 : 런던 해머스미스, 바베이도스
   - 안내자 : J.K. 위스망스

행복을 찾는 일이 우리 삶을 지배한다면, 여행은 그 일의 역동성을 그 열의에서부터 역설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활동보다 풍부하게 드러내준다. 여행은 비록 모호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일과 생존 투쟁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여행에서 철학적 문제들, 즉 실용적인 영역을 넘어서는 사고를 요구하는 쟁점들이 제기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여행할 장소에 대한 조언은 어디에나 널려 있지만, 우리가 가야 하는 이유와 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듣기 힘들다. 하지만 실제로 여행의 기술은 그렇게 간단하지도 않고 또 그렇게 사소하지도 않은 수많은 문제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또 여행을 연구하게 되면 그리스 철학자들이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렀던 것, 즉 '인간적 번영'을 이해하는 데도 대단치는 않지만 도움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 여행을 위한 장소들에 대하여
   - 장소 : 휴게소, 공항, 비행기, 기차
   - 안내자 : 샤를 보들레르

그는 모리셔스에서 파리에 돌아오자마자 다시 어딘가로 떠날 꿈을 꾸기 시작했다. "삶은 모든 환자가 자리를 바꾸어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힌 병원이다. 이 환자는 난방 장치 앞에서 아프고 싶어 하며, 또 저 환자는 창가에 누워 있으면 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그는 부끄러움 없이 자기도 그런 환자들 가운데 하나라고 인정했다. "늘 여기가 아닌 곳에서는 잘 살 것 같은 느낌이다. 어딘가로 옮겨가는 것을 내 영혼은 언제나 환영해 마지않는다."
보들레르는 가끔 리스본에 가는 꿈을 꾸었다. 그 곳에 가면 따뜻하겠지. 그리고 나는 도마뱀처럼 햇볕 속에 몸을 쭉 뻗고 힘을 얻을 수 있겠지. 그곳은 물과 대리석과 빛의 도시였으며, 사고와 평온에 도움이 되는 도시였다. 

   - 안내자 : 에드워드 호퍼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이끌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과 우리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 사이에는 기묘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관관계가 있다. 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다른 경우라면 멈칫거리기 일쑤인 내적인 사유도 흘러가는 풍경의 도움을 얻으면 술술 진행되어나간다.
해야 항 일이 오직 생각분일 때에 정신은 그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것 같다. 마치 남의 요구에 의해 농담을 하거나 다른 사람의 말투를 흉내 내야 할 때처럼 굳어버린다. 그러나 정신의 일부가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는 생각도 쉬워진다. 예를 들어 음악을 듣고 있을 때나, 줄지어 늘어선 나무들을 눈으로 쫓을 때. 



# 이국적인 것에 대하여
   - 장소 : 암스테르담
   - 안내자 : 귀스타브 플로베르

왜 다른 나라에서 현관문 같은 사소한 것에 유혹을 느낄까? 왜 전차가 있고 사람들이 집에 커튼을 달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떤 장소에 사랑을 느낄까? 그런 사소한(또 말 없는) 외국적 요소들이 강렬한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이 터무니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다른 삶에서도 비슷한 반응 양식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우리는 사랑의 감정이 상대가 빵에 버터를 바르는 방식에 닻을 내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도 하고, 또 상대가 구두를 고르는 취향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기도 한다. 이런 자잘한 일에 영향을 받는다고 우리 자신을 비난하는 것은 세밀한 것들도 그 속에 풍부한 의미를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 호기심에 대하여
   - 장소 : 마드리드
   - 안내자 : 알렉산더 폰 훔볼트

어린 시절에 우리는 이렇게 묻는다. '왜 선과 악이 있을까?' '자연은 어떻게 움직일까?' '나는 왜 나일까?' 상황과 기질이 허락한다면,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도 이런 질문들을 중심에 놓고 살아간다. 우리의 호기심은 세계의 점점 더 많은 부분을 포괄하다가, 마침내 어느 지점에서는 어떤 것에도 지루함을 느끼지 않는 오묘한 경지에 이를 수도 있다. 뭉뚱그려진 커다란 질문들은 언뜻 보기에는 남의 관심을 끌 수 없을 것 같은 작은 질문들과 관련을 맺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산속에서 파리에 대해 궁금해하기도 하고, 16세기 궁전의 벽에 그려진 특정한 벽화에 대해 궁금해하기도 한다.


# 시골과 도시에 대하여
   - 장소 : 레이크디스트릭트
   - 안내자 : 윌리엄 워즈워스

우리가 부분적으로라도 워즈워스의 주장을 받아들이려면, 그 이전에 우리의 정체성에는 다소간 순응성이 있다는 원칙, 즉 우리가 함께 있는 사람 - 때로는 사물 - 에 따라 변한다는 원칙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어떤 삶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감수성이 예민해지는 반면, 어떤 사람과 함께 있으면 경쟁심이 생기고 질투가 일어난다. 따라서 A가 지워와 위계에 강박감을 가지고 있다면, 거의 눈치도 못 채는 상태에서 B까지 자신의 의미에 대해서 걱정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심지어 A의 농담으로 인해 지금까지 잠복해 있던 우스꽝스러운 느낌들이 슬며시 머리를 내밀 수도 있다. 그러나 B를 다른 환경에 갖다 놓으면, 그의 관심은 새로운 상대에게 반응하며 미묘하게 변할 것이다.


# 숭고함에 대하여
   - 장소 : 시나이 사막
   - 안내자 : 에드먼드 버크 욥

하느님은 착하게 살았는데도 왜 고난을 겪어야 하느냐는 욥의 질문을 받자 욥의 눈길을 자연의 엄청난 현상으로 돌린다. 하느님은 말한다. 일이 네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놀라지 마라. 우주는 너보다 더 크다. 일이 네 뜻대로 되지 않은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놀라지 마라. 너는 우주의 논리를 헤아릴 수 없다. 산 옆에 있으면 네가 얼마나 작은지 보아라. 너보다 큰 것,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여라. 세상이 너한테는 비논리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그 자체로 비논리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 삶이 모든 것의 척도는 아니다. 숭고한 곳들을 생각하면서 인간의 하찮음과 연약함을 생각하도록 하라.


# 눈을 열어주는 미술에 대하여
   - 장소 : 프로방스
   - 안내자 : 빈센트 반 고흐

우리는 눈이 차갑다거나 설탕이 달다고 느낄 때처럼 어떤 장소가 아름답다는 것도 즉시, 또 언뜻 보기에는 자연발생적으로 느끼는 것 같다. 따라서 우리가 느낀 매력이 바뀌거나 커질 것이라는 상상은 해보기 힘들다. 아름다움에 대한 느낌은 어떤 장소 자체에 내재한 특질들에 의해 또는 우리 심리의 내부 회로에 의해 결정이 나는 것 같다. 따라서 어떤 아이스크림이 특히 맛있다고 느끼는 것을 어쩔 수 없듯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장소에 대한 느낌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한다.


# 아름다움의 소유에 대하여
   - 장소 : 레이크디스트릭트, 마드리드, 암스테르담, 바베이도스, 런던 독랜즈
   - 안내자 : 존 러스킨

아름다움을 만나면 그것을 붙들고, 소유하고, 삶 속에서 거기에 무게를 부여하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끼게 된다. "왔노라, 보았노라, 의미가 있었노라"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우리가 결코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르는 곳에서만 자주 나타나거나, 계쩔과 빛과 날씨가 보기 드물게 조화를 이룬 결과로 나타나곤 한다.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소유할 것인가? 어떻게 공중에 뜬 열차를, 할바 사탕처럼 생긴 벽돌을, 잉글랜드의 골짜기를 붙들것인가?
카메라가 하나의 방법이다. 사진을 찍으면 어떤 장소의 아름다움을 보고 촉발된 근질근질한 소유욕을 어느 정도 달랠 수 있다. 귀중한 장면을 잃어버릴 것이라는 불안은 셔터를 누를 때마다 줄어든다. 아니면 아예 우리 자신을 물리적으로 아름다운 장소에 박아놓을 수도 있다. 우리 자신이 그 장소 안에 좀 더 확실하게 존재한다면, 그 장소도 우리 안에 좀 더 확실하게 존재할 수 있을지 모르니까.
   … …
사람들은 적극적이며 의식적으로 보기 위한 보조 장치로 사진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을 대체하는 물건으로 사용하였으며, 그 결과 전보다 세상에 주의를 덜 기울이게 되었다. 사진이 자동적으로 세상의 소유를 보장해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 …
우리는 눈만 뜨면 아름다움을 잘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이 기억 속에서 얼마나 오래 살아남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의도적으로 파악하느냐에 달려 있다. 카메라는 보는 것과 살피는 것 사이의 구별, 보는 것과 소유하는 것 사이의 구별을 흐려버린다. 카메라는 진정한 지식을 선택할 기회를 줄 수도 있지만, 어느새 그 지식을 얻으려는 노력을 잉여의 것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 카메라는 사진을 찍음으로써 우리 할 일을 다 했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다.


# 습관에 대하여
   - 장소 : 런던 해머스미스
   - 안내자 : 사비에르 드 메스트르

그렇다면 여행을 하는 심리란 무엇인가? 수용성이 그 제일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용적인 태도를 취하면,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새로운 장소에 다가가게 된다. 어떤 것이 재미있고 어떤 것이 재미없다는 고정관념은 버리게 된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우리 때문에 짜증이 난다. 우리가 교통섬이나 좁은 도로에 서서 그 사람들에게는 눈여겨 볼 것이 없는 사소한 것들에 감탄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부 청사 지붕이나 벽에 새겨진 글에 흥미를 느껴 차에 치일 위험을 무릅쓴다. 우리 눈에는 어떤 슈퍼마켓이나 미장원이나 유난히 매혹적으로 보인다. 
   … …
이와 대조적으로 집에 있을 때는 기대감이 별로 작동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동네에서 흥미 있는 것은 모두 발견했다고 자신한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그곳에 오래 살았다는 것이 주된 이유이다. 우리가 10년 이상 산 곳에 뭔가 새로운 것이 나타난다는 생각은 하기 힘들다. 우리는 습관화되어 있고, 따라서 우리가 사는 곳에 대해 눈을 감고 있다.
   … …
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이 지역으로 처음 이사 왔을 때는 나의 관심이 이렇게 배타적이지 않았다. 당시에는 나도 지하철까지 빨리 가겠다는 목표에 그렇게 단단히 얽매여 있지는 않았다.



<알랭 드 보통의 여행 에세이 THE ART OF TRAVEL; 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이레, 2004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