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사람과산 2019 10월호 (Vol. 360)

케냐 헬스게이트 국립공원 암벽 등반

글·사진 차승준 (Liah Cha)

 

피셔 클리프 4.5번 크랙 루트의 상단부를 레이백 자세로 등반 중이다.

 

킬리만자로 등반을 마치고, 탄자니아에서 국경을 넘어 케냐의 나이로비로 이동했다. 유일한 일행이었던 신차원정대 대원 하섭이는 업무 일정으로 먼저 귀국을 했고, 홀로 남은 내게 나이로비에서 하루의 시간이 주어졌다. 고민할 여지도 없이 나이로비 인근의 등반지와 함께 암벽등반을 함께할 수 있는 현지인을 수소문했다.

 

운이 좋게도 나이로비 시내에는 동아프리카 유일의 실내 클라이밍 센터인 클라임 블루스카이(Climb Bluesky)가 있었다. 곧 바로 센터에 연락을 넣어 센터의 매니저로 일하고 있는 나오미(Naomi)와 등반 약속을 잡았다. 등반지로 정한 곳은 주상절리 크랙이 매력적인 헬스게이트(Hell's Gate) 국립공원으로, 나이로비 시내에서는 차로 2시간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 위치한 동아프리카 유일의 실내 클라이밍 센터인 클라임 블루스카이. 볼더링, 리드, 톱로핑 등 다양한 등반이 가능하고, 100여 개가 넘는 루트가 있다.

 

다음날 새벽 6시, 나오미를 만나 마트에서 간단하게 먹을거리를 사서 등반지로 함께 출발했다. 나오미와는 나이가 비슷해 금방 친구가 되었다. 우리는 아프리카의 뜨거운 태양을 피하고자 오전에는 등반을, 오후에는 여유롭게 공원을 둘러보기로 했다.

헬스게이트 국립공원 입구 전경. 차량을 타고 입장 가능하며 차량 입장 시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자전거를 대여하여 국립공원을 돌아볼 수도 있다.


헬스게이트 국립공원은 영화 '라이온 킹'의 배경으로 유명한 관광지이다. 실제로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익숙한 장소들을 이곳에서 만날 수 있는데, 공원을 어슬렁거리며 무심히 돌아다니느 품바 가족부터 영화 속 심바의 아버지인 '무파사'가 죽는 장소와 매우 흡사한 리프트 밸리(Rift Valley) 협곡, 그리고 영화의 상징과도 같은 '프라이드 락'을 빼다 박은 절벽까지 돌아볼 수 있다. 공원에 도착하니 라이온 킹의 주인공 심바가 절벽을 오르내리던 장면이 떠올라 괜스레 미소가 새어 나왔다.

 

피셔 타워 전경, 관광객을 대상으로 체험 등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제임스가 붉은색 티셔츠를 입고 타워 압에 서있다.


계획에 없던 급하게 잡은 등반 일정이라 장비를 제대로 챙겨오지도 못했지만, 새로 사귄 친구 나오미와의 오늘 하루 같이 등반하며 보낼 생각을 하니 모든 게 다 잘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쿠나 마타타! - 하쿠나 마타타(Hakuna matata)는 아프리카 언어인 스와힐리어로 '문제없어! 걱정 마 다 잘 될 거야!'라는 뜻을 갖는다. - 

 

피셔 타워 정상에서 바라본 메인벽 전경

 

아프리카 첫 바위, 피셔 타워(Fischer's Tower)

 

헬스게이트 국립공원 내에는 피셔 타워(Fischer's Tower), 피셔 클리프(Fischer's Cliff), 입구벽(Entrance Wall), 메인벽(Main Wall), 봄의 벽(Spring's Wall) 등 등반 섹터가 곳곳에 다양하게 펼쳐져 있다. 대부분 크랙으로 이루어진 루트이며, 탑 앵커에만 고정 볼트가 설치되어 있는 트래드 클라이밍(Trad Climbing) 루트이다.

 

공원에 도착하자마자 피셔 타워 섹터로 향했다. 피셔 타워 전면부는 일반인도 즐길 수 있도록 톱로핑 체험 등반 코스가 있는데 2~3개 루트 상단에 미리 로프가 걸려 있었다. 우리는 피셔 타워에서 피셔 타워 클라이밍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제임스(James)를 만났다.

"반가워 리아! 피셔 타워 뒤로 돌아가면 정상까지 오를 수 있는 재미있는 코스가 있는데, 혹시 등반해볼래?"

제임스는 단피치 코스만 있는 전면부와 달리 타워 후면부에 트래드 등반이 가능한 멀티 피치 루트가 있다는 설명을 하며, 내게 함께 등반하자고 제안했다. 즉석에서 제임스와 함께 피셔 타워의 정상까지(2피치) 등반하기로 의견을 맞추고, 제임스와 등반을 다녀올 동안 제임스를 대신해 체험 프로그램은 나오미가 잠시 맡아주기로 했다.

 

피셔 클리프 등반 중 나오미와 함께. 키도 몸무게도 체형도 비슷한 덕분에 환상의 등반 짝꿍이 되었다.

 

"타워 정상에 오르면 공원 입구 지역을 한눈에 볼 수 있을 거야! 여기는 걱정하지 말고, 안전하게 등반하고 와!"

"고마워 나오미!"

 

피셔 타워 후면은 태양빛을 받아 살짝 붉은빛을 머금고 있다. 우리가 오르기로 한 루트는 '초승달(Crescent Monn, 5.10a)'로 아프리카의 뜨거운 이미지와 대비되는 이름의 루트였다. 두 피치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 등반 길이가 약 45cm의 짧은 루트로, 난이도도 평이해서 몸풀이 등반으로는 제격이었다. 피셔타워 정상의 멋진 풍광을 기대하며 그 이름도 뜨거운 아프리카의 첫 바위 등반을 시작했다.

 

피셔 타워 정상에 오른 필자. 타워 정상에 오르면, 공원이 한눈에 들어오는 멋진 풍광이 펼쳐진다.


타워 후면부는 해를 정면으로 받고 있었다. 아프리카의 강렬한 태양 빛은 아침부터 뜨거웠고, 정상까지 그늘 한 점이 없었다. 한껏 달구어진 바위는 마치 불에 달구어진 냄비 같았고, 민소매를 입은 등판 위로 작렬하는 태양을 그대로 받고 있으니 철판 위의 호떡이 따로 없었다. 등반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서 빨리 뜨거운 태양을 피해 그늘로 피신하고 싶었다. 결국 우리는 피치를 끊지 않고 정상까지 한 번에 오르기로 했다. 전체 등반 길이가 45m이니 둘이서 로프 한동으로 무리 없이 오를 수 있었다.

 

실력이 좋아진 것은 아닐 터인데, 뜨거운 태양에 쫓겨 본의 아니게 속공으로 등반을 마쳤다. 하강을 마치고 타워 전면부로 돌아오니 한 가족이 서로 열심히 응원하며 체험 등반을 즐기고 있었다. 해를 등지고 있는 서늘한 그늘에 들어서서야 여유로움을 되찾았다. 전면부 체험 등반을 마친 관광객들과 쉬엄쉬엄 수다도 떨고, 간식도 먹으며 오전 나절을 보냈다. 아프리카에서는 시곗바늘도 여유롭게 흘러가는 기분이다.

 

피셔 클리프 2.75번 크랙 루트의 완등 지점까지 올라서니 제법 고도감이 느껴진다.

 

 

크랙 등반의 천국, 피셔 클리프(Fischer's Cliff)

 

"이따 시간 나면 피셔 클리프로 놀러 갈게, 재밌는 등반해~!"

 

이른 오후가 되어서야 나오미와 단둘이 본격적인 등반을 위해 피셔 클리프 섹터로 이동했다. 제임스도 등반에 합류하고 싶은 기색이었지만, 주말이라 손님이 많아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피셔 클리프는 난이도 5.7부터 5.12까지의 수십 개의 루트가 있으며, 대부분 15~20m의 수직 크랙으로 이루어져 있다. 핑거 재밍, 피스트 재밍, 암바 등 여러 기술을 연습할 수 있는 다양한 사이즈의 크랙들이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곧게 뻗어있는 자태가 장엄했다.

 

피셔 클리프 3번 크랙 루트의 중단부를 등반 중이다. 크랙 사이즈가 제법 커서 팔꿈치까지 쑥 밀어 넣어 암바(arm bar)를 시도했다.

 

각 루트는 완등 지점에 설치된 볼트가 유일한 볼트였다. 일정 거리마다 볼트가 설치돼 있는 스포츠 루트에만 익숙했기 때문에, 나오미에게 앵커 볼트를 비롯해 피셔 클리프 전체적인 안전성에 대해 자꾸만 물어보게 됐다.

 

"그럼 당연하지~! 미국의 등반가들과 클라임 블루스카이 센터는 정기적으로 교류하고 있어. 틈틈이 이곳을 방문해 루트 점검과 개보수를 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안전해! 걱정 마!"

 

급할 일이 없으니 쉬엄쉬엄 등반하자고 너스레를 떨며 등반을 시작했지만, 아프리카 바위를 언제 다시 만져보겠나 싶어 한 루트라도 더 등반하고 싶은 마음에 어느새 욕심을 부리고 있었다. 난이도가 쉬운 3번 루트부터 5.10b에 이르는 2.75번 루트와 9번 크랙까지 쉴 새 없이 등반을 이어나갔다. 크랙으로만 이루어진 루트는 난이도가 훨씬 어렵게 체감되었는데, 크랙 등반 경험이 많지 않아 재밍 기술이 익숙하지 않은 탓에 힘이 많이 드는 레이백 자세로 등반했기 때문이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바위에 새겨진 선을 따라 올랐다.

 

피셔 클리프 전경. 다양한 사이즈의 크랙들이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곧게 뻗어있어 장엄하고 아름답다.

 

"헥헥, 나중에 이 루트 이름 지을 계획 있으면 '숨 쉴 곳을 주세요'라고 이름 붙여줘"

 

"아니야 그것보다는, 지금 네 등반 자세가 영화에 나오는 스파이더맨 같으니까 '스파이더 걸'이라고 붙이는 게 낫겠어!"

 

나오미와 함께 등반을 즐기는 동안 우리는 마치 학창시절 여고생으로 돌아간 듯했다. 작은 일에도 꺄르르 웃음보를 터트리며 한껏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지나가던 야생 멧돼지 품바들도 무슨 일인가 싶어 사람 구경하기에 이르렀다. 나오미와 나는 키도 몸무게도 체형도, 게다가 성격까지 비슷했고, 우리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금새 환상의 등반 짝꿍이 되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우연히도 이렇게 호흡이 잘 맞는 자일파트너를 만나다니! 나는 운이 좋은 게 틀림없다.

 

부지런히 5~5개 루트의 크랙을 등반하고 나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하다. 남은 시간을 아껴 관광객들에게 유명한 코스인 헬스게이트 국립공원의 협곡(Hell's Gate Gorge)까지 둘러보고 긴 하루를 마쳤다.

 

공원을 어슬렁거리며 여유를 즐기고 있는 버펄로 무리들.

 

헬스게이트 국립공원은 크랙 등반가들에게는 천국과 같은 곳이다. 이런 등반지가 근처에 있어서 주말마다 등반할 수만 있다면 영화 라이온 킹에서 아기 사자 심바가 동물의 왕으로 거듭났던 것처럼, 크랙 등반 병아리인 나도 금방 한가락 하는 크랙 등반가로 성장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자마자, 지난 아프리카 일정들이 마치 기분 좋은 꿈을 꾼 것만 같았다.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새로운 등반 장비로 크랙 등반 필수품인 캐머롯 세트를 추가로 구매한 것이다. 가격이 만만치 않으니, 역시 회사를 열심히 다녀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바위도 크랙도 늘 그자리에 있을 테니, 꿈일랑 잠시 미뤄 두고 오늘도 어김없이 출근길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오늘 하루도 하쿠나 마타타!

 

피셔 타워 등반을 마치고 제임스, 나오미와 함께.

 

INFO 

헬스게이트(Hell's Gate) 국립공원 암벽등반

헬스게이트는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서 북서쪽으로 약 100km에 위치한 국립공원이다. 공원 내 협곡에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이루어진 절경 때문에 지옥의 문(Hell's Gate)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공원 곳곳에서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바위와 굴러다니는 흑요석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나이로비 시내의 클라이밍 센터 '클라임 블루스카이 케냐'에서 교통비 포함 5,000KSH(교통비 제외 3,500KSH)의 저렴한 가격에 월 1~2회 헬스게이트 등반 투어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www.blueskykenya.org/climb)

 

1. 피셔 타워(Fischer's Tower) 섹터

타워 앞쪽은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체험 등반 코스가 2~3곳 마련되어 있고, 공원을 찾는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도록 기본 등반장비를 대여해준다. 체험 등반 가격은 1,000KHS로, 기본 등반장비 대여 비용이 포함된 가격이다. 타워 뒤로 돌아가면 트래드 등반이 가능한 루트가 있고, 1피치 종료점과 타워 정상에 하강이 가능한 볼트 앵커가 있다. 피셔 타워 후면의 대표적인 트래드 루트로 아프리카 태양과 초승달이 있다.

- 아프리카 태양(African Sun) : 총 37m, 2피치, 난이도 5.8-, 필요 장비 너트 및 BD캠 0.5~3호

- 초승달(Crescent Moon) : 총 45m, 2피치, 난이도 5.10a, 필요 장비 너트 및 BD캠 0.5~3호

 

2. 피셔 클리프(Fischer's Cliff) 섹터

피셔클리프는 대부분 단 피치의 수직 크랙이며, 완등지점의 하강 앵커가 각 루트의 유일한 볼트이다. 총 15~50m 단 피치~3피치의 5.8~5.12급 크랙 루트들로, 필요 장비는 너트 및 BD캠 0.4~5호이다. 일부 루트는 2~3피치까지 등반이 가능한 루트도 개척되어 있으나, 대부분의 현지 클라이머들은 단피치 크랙 등반을 즐긴다.

 

3. 헬스 게이트 협곡(Hell's Gate Gorge)

좁은 협곡을 따라 한 시간 남짓의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협곡 바닥에는 물이 흐르고 깊은 곳의 벽에서 뜨거운 온천물이 흘러내리는 탓에 악마의 목욕탕(Devil's bedroom)이라는 별명이 있으며, 뜨거운 물에서 피어오른 수증기 때문에 협곡은 신비로운 풍경을 연출한다. 협곡 관광을 위해서는 가이드 동반이 필수이며, 가이드 비용은 1,000KHS 정도이다.

 

헬스게이트 협곡. 좁은 협곡을 따라 한 시간 남짓의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해질녘의 협곡. 협곡 깊은 곳의 벽에서 뜨거운 온천물이 흘러내리는 탓에 악마의 목욕탕 (Devil's bedroom)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 본문 중에서 

 

#서문_ 웬만하면 걸어다니는 배우 하정우입니다

- 8p.

글쎄, 언제부터였을까? 돌아보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오직 걷기밖에 없는 것만 같았던 시절도 있었다. 연기를 보여줄 사람도, 내가 오를 무대 한 뼘도 없었지만, 그래도 내 안에 갇혀 세상을 원망하고 기회를 탓하긴 싫었다. 걷기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았던 과거의 어느 막막한 날에도, 이따금 잠까지 줄여가며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지금도 꾸준히 나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이 점이 마음에 든다. 내가 처한 상황이 어떻든, 내 손에 쥔 것이 무엇이든 걷기는 내가 살아 있는 한 계속할 수 있다는 것.

 

- 10~11p.

사람마다 보폭이 다르고, 걸음이 다르다. 같은 길을 걸어도 각자가 느끼는 온도차와 통점도 모두 다르다. 길을 걸으면서 나는 잘못된 길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조금 더디고 험한 길이 있을 뿐이다.

 

 

# 말 한마디에 천릿길 걷는다 - 26~28p.

많은 사람들이 길 끝에 이르면 뭔가 대단한 것이 있을 거라 기대한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농담처럼 시작된 국토 대정장은 걷기에 대한 나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우리가 길 끝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것들이 아니었다. 내 몸의 땀냄새,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꿉꿉한 체취, 왁자한 소리들, 먼지와 피로, 상처와 통증...... 오히려 조금은 피곤하고 지루하고 아픈 것들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별것 아닌 순간과 기억들이 결국 우리를 만든다.

 

말 한마디로 시작된 천릿길 대장정 끝에는 놀랍게도, 아무것도 없엇다. 하지만 괜찮다. 나는 길 끝에서 무언가 대단한 것을 움켜쥐려고 걸은 게 아니니까. 지금도 나는 길 위의 소소한 재미와 추억들을 모으며 한 걸음 한 걸음 걷는다. 그리고 내가 알게 된 이 작지만 놀라운 비밀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 왜 자꾸만 나를 잃어버리지? - 41p.

한때 나는 열정을 잃어버린 느낌을 받았다. 나 자신을 추스르는 시간이 필요했다.

내 갈길을 스스로 선택해서 걷는 것, 내 보폭을 알고 무리하지 않는 것, 내 숨으로 걷는 것. 걷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묘하게도 인생과 이토록 닮았다.

 

 

# 내 인생의 마지막 4박 6일 - 48p.

마음의 안식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종종 여행을 떠났지만, 여행중에도 나는 잘 쉬는 게 아니라 내가 다닌 곳의 흔적을 남기려 안달했던 것 같다. 무엇을 먹고 어디를 가봤고 웬만한 데는 전부 다 돌아다녀봤다는 확인을 받기 위해 여행한 것이다. 이러니 남들이 좋다는 곳에 가도 친구들과 술 한잔 마시고 나면 '아이고, 잘 놀았다. 근데 얼른 집에 가고 싶네......'하며 남몰래 허전해하는 수밖에.

 

 

# 휴식은 가만히 누워 있는게 아니야 - 58p.

정작 일은 너무나 열심히 하는데 휴식 시간에는 아무런 계획도 노력도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그대로 던져두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지치고 피로한 자신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곧 휴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방기'는 결과적으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누적된 피로를 잠시 방에 풀어두었다가 그대로 짊어지고 나가는 꼴이 되는 경우가 많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휴식을 취하는 것은 다르다. 나는 휴식을 취하는 데도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적어도 일할 때처럼 공들여서, 내 몸과 마음을 돌봐야 하지 않을까?

 

 

# 10만 보 일기 - 82p.

죽을 만큼 힘든 사점을 넘어 계속 걸으면, 결국 다시 삶으로 돌아온다.

죽을 것 같지만 죽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 조금 더 걸을 수 있다.

언젠가 나의 인생길에서도 사점이 나타날지 모른다. 그때도 나는 하와이에서 10만 보를 찍었던 기억으로, 아무리 힘들어도 결국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는 맏음으로, 버티고 걸어나갈 것이다.

 

 

# 먹다 걷다 웃다 - 127p.

그런 단어들이 우리에게는 참 많다. 함께 모였을 때 만들어진 단어들, 우리가 쓰면서도 자꾸 웃게 되는 말들. 웃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든 단어들이 아닌데도, 돌아보면 우리끼리 쓰는 즐거운 암호와 농담으로 인해 관계가 더 돈독해진다. 나는 앞으로도 우리가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일로 함께 웃을 일이 많기를 바란다.

 

 

# 한 발만 떼면 걸어진다

- 155p.

눈을 떴을 때 온몸이 천근 만근처럼 느껴지는 날. 그런 날은 마음도 울적해서 도로 눈을 감고 이불 속에서 꼼짜고 하고 싶지가 않다. 때로는 그런 날이 하루로 그치는 게 아니라 다음 날, 또 그다음 날로 하염없이 늘어지기도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종일 집안에만 머물고 싶은 날. 집밖이 왠지 낯설고 오직 내 방만이 안전하게 느껴지는 날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아침이면 나는 생각을 멈추고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한다. 몸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 생각이 무거운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를 조금씩 달래고 설득해 일단 누운 자리 밖으로 끌어낸다.

 

- 158p.

일단 몸을 일으키는 것.

다리를 뻗어 한 발만 내디뎌보는 것.

이러한 행동들이 매일같이 이어져 습관이 되면 그다음부터는 별다른 노력 없이도 일어나 걸을 수 있다. 몸에 익은 습관은 불필요한 생각의 단계를 줄여준다. 우리는 때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에 갇혀서 시간만 허비한 채 정작 어떤 일도 실행하지 못한다. 힘들 때 자신을 가둬놓는 것, 꼼짝하지 않고 자신이 만든 감옥의 수인이 되는 것, 이런 것도 다 습관이다. 스스로 키워놓은 절망과 함께 서서히 퇴화해가는 것이다. 하지만 걷기가 습관이 되면 굳이 고민하지 않고 결심하지 않아도 몸이 절로 움직인다.

 

 

# 언령을 믿으십니까

- 186p.

말에는 힘이 있다. 이는 혼잣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지만 결국 내 귀로 다시 들어온다. 세상에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은 없다. 말로 내뱉어져 공중에 퍼지는 순간 그 말은 영향력을 발휘한다. 비난에는 다른 사람을 찌르는 힘이, 칭찬에는 누군가를 일으키는 힘이 있다. 그러므로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말을 최대한 세심하게 골라서 진실하고 성실하게 내보내야 한다. 

- 189p.

말에는 힘이 있고 혼이 있다. 나는 그것은 '언령(言靈)'이라 부른다. 언령은 때로 우리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자신의 권력을 증명해 보이고, 우리가 무심히 내뱉은 말을 현실로 뒤바꿔놓는다. 내 주위를 맴도는 언령이 악귀일지 천사일지는 나의 선택에 달려 있다.

 

 

# 내가 만난 노력의 장인들 - 286p.

지금 고통받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곧 노력하고 있는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혹시 내가 정류장이 아닌 곳에서 오지 않을 버스를 기다리는 건 아닌지 수시로 주변을 돌아봐야 한다.

살아가면서 나는 지금까지 내가 해온 노력이 그다지 대단한 게 아님을 깨닫는 순간들을 수없이 맞게 될 것이다. 정말 최선을 다한 것 같은 순간에도, 틀림없이 그 최선을 아주 작아지게 만드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엄청난 강도와 밀도로 차원이 다른 노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새로운 날들이 기다려진다.

작업은, 작품은 정직하다. 몸을 움직인 만큼 정직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걷기처럼, 작품과 작업도 결코 '야료'를 부리지 않는다.

나는 그 정직성을 믿는다.

 

 

<걷는 사람, 하정우>

하정우

문학동네, 2018

 

걷는 사람, 하정우
국내도서
저자 : 하정우
출판 : 문학동네 2018.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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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인수봉 등반을 마치고 내려오던 도선사 입구 주차장에서 화려한 색의 바지를 입은 한 산악인을 만났고, 주변의 선배님들께서 '꿈속의 알프스' 임덕용 선배님이라고 알려주셨다. 멀고 높게만 느껴지는 선배님께 멋쩍은 인사를 드리고는 기회가 되면 얼른 책을 찾아보아야지 마음먹었다.

 

그리고는 서점에서 책을 찾으려는데, 절판된 오래된 산서는 구해 읽기가 마땅치 않았다. 스마트폰 메모 앱 구석에  '산서 구매 목록'을 만들어 두고, 틈나는 대로 책들을 검색해보곤 했는데, 오래된 헌책방에서 어렵사리 '꿈속의 알프스'를 찾을 수 있었다. (95. 6. 12. 미선) 이란 메모와 함께 '내 좋은 山 친구에게'라는 선물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아마도 80년대 출판되었던 이 책은 95년 선물이 되어, 95부터 20여 년을 어느 책장에 머물다가 이곳으로 왔으리라. 덕분에 절판되어 구할 수 없는 책을 읽을 수 있음에 감사드린다.

 

살아 숨 쉬는 전설 같은 선배님들의 청년 시절 북벽 등반기를 읽으며, 키득키득 웃음이 세어 나왔다. 생생하게 전해지는 30여 년 전 멋진 선배님들의 등반 기록들. 책장을 덮으며 "척"하는 삶에 더 가까운 내 모습을 돌아보았다. 나도 언제쯤이면 진심으로 미칠 수 있을까? 아니 나는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 여전히 오늘도 "척"하는 삶이지만, 그 "척"이 진짜가 되기를 갈망한다.

 

 

■ 본문 중에서

 

# 이 책을 쓰고나서 - 2p.

 

10년 동안 나는 철저히 미쳐 왔었다. 오직 미쳐야만이 그리고 철저히 미쳐야만이 해낼 수 있다는 신념 외엔 없었다. 남들이 하는 흡연이나 음주는 커녕 영화구경 한 번 군것질 하나 제대로 하지 않고 오로지 산에만 미쳐 왔었다.

이제 조용히 지나 온 날을 돌아 본다. 내가 과연 미칠만큼 모든 일에 나의 최선을 다했던가?

운동을 한 날보다 안한 날이 부지기수였고 늦잠드는 날이면 아예 걸렀으며 조금 힘들면 쉬길 원했고 배고프고 목마르면 조금도 참지 못하고 먹고 마시기를 원했다. 배낭이 무거우면 짐을 줄이려 애썼고 비가 퍼붓고 있을 땐 텐트 밖에 나가길 주저했으며 몸이 피곤해 지쳐있을 땐, 누가 버너를 먼저 꺼내지 않을까 눈치를 보았으며, 말로만 그림이 어떻고 작품이 어떻고, 고갱이, 고흐가 어떻다고 떠들었지 실상 산행 중에 산그림 그린 것 몇 장 없으며 시헌 전날 책 펴놓고 공부한 적 또한 한번도 없는 것이다.

다만 "척" 했을뿐. 그러나 "척"하다 보면 그 "척"이 진짜가 되었다. 누가 그 "척"을 일찍하느냐, 얼마나 빨리 시작하느냐에 성공의 승패가 좌우된다고 감히 말해도 될까?

 

 

# 불효자의 눈물

 

- 19~20 p.

집에 돌아와 래다를 나의 자일인 빨랫줄을 잘라 이었다. 나에겐 이미 굵고 하얀 멋진 자일이 생겼던 것이다. 장비들을 가지고 정신없이 노닥거리는데 놀랍게도 아버지께서 불쑥 방에 들어 오셨다. 당연히 화가 나신 아버지는 처참하게도 나의 전 재산이고 모든 기쁨인 장비들을 몽땅 몰수 해서는 캐비넷 금고에 넣고 잠가 버리셨다. 야단 맞는 일은 문제도 아니었다. 나의 최대 보물이고, 기쁨인 그것들을 잃어버린 슬픔에 비하면. 그러나 다행히도 캐비넷 번호를 알고 있어 꺼내 볼 수 있다.

 

- 23p.

쓰라림을 안고 다시 산을 찾아 나섰고 그곳에서 실컷 울었다. 눈꽃이 사르락사르락 내려앚는 소리와 잔잔한 바람이 가지에 부딪치는 소리 외에는 나의 울음을 방해할 아무 것도 없었다. 마음껏 울었다. 낙오자라서가 아니라 부모에게 죄스럽고 부끄러웠으며 떳떳하게 찾아 오겠다던 산과의 약속을 저버린 것이 미안해서 울었다. 이제는 산을 찾을 길이 막혀 버린 것 같았다. 그러나 산은 조용히 나를 지켜 보고 있었다.

 

 

# 내 너를 위해 울던 날

 

- 55p.

산사람들에겐 일종의 금기로 산행 전에는 머리와 손, 발톱을 안깎으며 개고기와 닭고기를 먹지 않는 일종의 미신같은 것이 있었다. 헌데 출발을 코앞에 두고 머릴 깎여야 하는 운명에 놓이다니......

 

- 59~60p.

두 발 사이로 한규의 불안한 표정이 들어왔다. 불안한 등반은 하는 이보다 보는 이를 더 초조하게 한다. 만일의 추락 사태에 대비하여 취하여야 할 행동을 미리 구상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안 꼽히면 몸이 뒤집혀지면서 그대로 추락해 버린다. 암벽보다 빙벽에서의 추락이 더 무섭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제동걸어 줄 확보물이 불안한데다 미끄러지는 속도를 예측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 북벽으로 가는 길 - 102p.

 

식량 담당에는 허 욱, 우리 대원 중 가장 낙천주의자. 이 등산가는 항상 유우머를 만들고 다닌다. 어디에서나 즐거워 보이는 그가 안경 속의 두 눈을 껌벅거릴 땐 만화의 주인공 꺼벙이 같지만 단단한 몸매에서 우러나오는 힘은 뽀빠이가 무색할 정도이다. 설악산 울삼암을 일곱 번 등반, 안산의 개척 등반, 대표 형과 아이거 북벽 등정을 다녀 온 기량있는 등산가 이기도 하다. 이번 대원 중 가장 힘이 세고 완력등반으로는 단연 제1인자이며 매그러운 암벽보다는 거친 틈새를 좋아하는 고전적인 멋을 가지고 있는 클라이머이다.

 

 

# 위험한 서주 - 123~124p.

 

대부분의 클라이머들은 자기 짐을 남에게 분산시키길 싫어한다. 누구나 거의 같은 무게를 지고 있고 같이 등반을 하는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에게 해를 주지 않으려는 것이다. 파트너간에는 더욱더 심해 상대에게 도움을 주지 못할 망정 청하길 꺼려하여 등반중 빨리 지치거나 피로해져 사실상 등반을 실패로 이끄는 예도 있다. 자신이 피로해 지기 전에 미리 양해를 구해 도움을 받는 방식이 마음에 안 내킬지라도 지독히 어려고 극한상태에서의 등반시에는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파트너 간의 거리낌없는 대화에서 서로의 상태를 토로하고 협력할 수 있어야 되겠다.

 

 

# 그랑드 죠라스 정상의 메아리 - 188p.

 

난 정말이지 그렇게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 정상의 세 명의 사나이는 나와 함께 정상에 서 있었다. 난 차마 눈을 뜨고 내려다 볼 수는 없었지만 나에게도 정상의 세찬 바람은 몰아치고 있었고 발아래 펼쳐진 파노라마는 마터호른의 정상에 섰던 기쁨보다 더해 동료들의 정상을 향한 모든 열의를 지켜볼 수 있는 마음은 더욱 나를 감동시키며 정신없이 눈물과 콧물이 교차되어 그치질 않고 있었다. 아니 엉엉 큰 소리로 울어도 부끄럽지 않았고 10년을 미쳐온 자신이 울고 있을 때 난 자랑스러운 미친애가 되었던 것이다. 울음은 알프스의 험난한 북벽을 메아리되어 퍼져 나가고 누가 있어 이런 미친애의 진정한 울음을 울 수 있는 선택된 자가 될 것인가? 누가 이 감격한 패배자의 화려한 웃음을 알 것인가?

 

 

<꿈속의 알프스>

임덕용

평화출판사,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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