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 얼마 전부터 출퇴근 시간에 차 안에서 '책 읽는 시간'을 듣고 있다. 출근길 운전 중에 무료함을 없애보겠다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김영하 작가의 팬이 되고 말았다. 몇 에피소드에서는 작가 본인의 소설을 직접 읽어주기도 하는데, 작가의 호흡으로 읽어주는 이야기는 몇 배 더 매력이 가미되기에 해당 에피소드는 나도 모르게 여러 번 반복해서 듣곤 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본인의 소설을 단 한 권 밖에 읽을 시간이 없다면, 어떤 책을 추천하겠냐고 물어온다면 그는 주저 없이 "검은 꽃"이라는 소설을 고를 것이라고 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작가로서 잘 살아갈 수 있을지 이런 문제들에 대해 고민을 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이 소설을 쓰면서 작가로서 평생을 살아갈 수 있겠구나라고 확고하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모험이었으나 과테말라와 멕시코에 머물며 취재를 하며 소설의 첫부분을 썼고, 한국에 돌아와서 나머지 부분을 완성했다. 서울에서 뒷부분을 쓸 무렵에는 격렬한 깊은 감정의 격동을 작가로서 처음 경험해보았다는 고백을 담담히 털어놓는다. 작가가 읽어주는 이 소설의 첫 부분을 듣고 나니, 이야기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1905년 일포드호를 타고 멕시코로 떠난 이들의 이야기. 인물들이 모자이크를 이루며 이야기가 전개되어가는 소설의 형식도 형식이거니와, 개성 강한 각 인물들의 행동과 사건이 손에 잡히는 것처럼 흥미롭게 묘사되어 지루할 틈이 없었다. 열녀문을 가문의 자랑으로 여기던 한 세기 전, 여성의 권리라고는 발설할 수조차 없던 그 시절에 나를 위한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던 여인, 왕족의 딸 이연수. 여러 인물들 가운데서도 연수와 소년 이정의 이야기는 세대를 뛰어넘는 절절한 로맨스로 읽는 내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작가는 소설을 써나갈 무렵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책상으로 달려가 다음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했는데, 십수 년이 지난 지금 독자인 나는 책의 다음 페이지를 빨리 읽고 싶어 안달을 하고 있으니, 분명 '먼 곳으로 떠나 종적 없이 사라져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무언가를 홀리는 매력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 본문 중에서


 # 14  - 55p.


사간동의 집에서 이연수는 자기 몸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몸은 그저 거기 있었고 그녀는 그것을 사용할 뿐이었다. 그녀의 관심은 오히려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것에 가 있었다. 나는 어디에서 왔고 무엇을 위해 살며 어떻게 죽을 것인가. 그녀의 부모는 그녀가 조상에게서 왔으면 아비와 남편을 위해 살다 그 명이 다하는 순간 혼백이 된다고 가르쳤다. 모든 사대부가 여자들이 배우고 납득하는 것을 그녀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부모의 뼈와 살로부터 자신이 비롯되었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생각이 달랐다. 너무 위험한 생각이었으므로 차마 발설하지 못한 그녀의 내심은,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산다, 는 것이었다. 남편이 죽으면 자살을 강요받고 그 죽음의 대가로 와에게서 열녀문을 하사받던 시절은 이제 지나갔지만 그렇다고 누구도 여자가 저 자신을 위해 살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안 될 것은 무어냐. 배우고 익히는 즐거움에 남녀가 따로 있으랴. 비록 얌전히 앉아 십장생을 수놓고 있었지만 열여섯 소녀의 머릿속엔 시대가 용납하기 어려운 위험한 사고가 자라나고 있었다. 구체적인 실현 방도가 없었기에 그녀의 의지는 더욱 강렬해졌고, 그러느라 이연수는 상대적으로 제 몸의 변화에는 애써 눈을 감았다. 달거리가 시작되고 수유가 가능할 정도로 가슴이 나오고 얼굴의 젖살이 빠져나가는데도 그럴수록 그녀는 관념적인 문제에 매달렸다.



 # 42  - 167-68p.


이종도는 말했다. 폐하께 편지를 쓰는 중이다. 여러분이 이 땅에서 흘린 피눈물을 두 눈으로 보아 잘 알고 있다. 이 멕시코에도 분명 우편제도가 있을 터이다. 누가 메리다까지만 나가 이것을 부치기만 한다면 폐하께서 곧 방도를 마련하실 것이다. 개 돼지도 이보다는 나은 대접을 받으리라. 이종도의 말에, 지난 석 달, 아니 배를 탔을 때부터 계산하면 거의 반년간의 고통이 떠올라 몇몇은 벌써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한 명이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쭈볏거리며 이종도 곁에 서 있는 진우에게 건네주었다. 우리를 위한 일이니 사양치 말고 보태 쓰시게. 그러자 사람들이 너도나도 돈을 내놓았다. 집으로 돌아가 쌀을 퍼온 사람도 있었다. 진우는 그것을 정중히 사양했다. 이종도는 안으로 들어가 다시 궤짝 앞에 앉았다. 처음으로 글을 배운 보람을 느꼈다. 어려서부터 단 한 번도 글을 읽고 쓰는 일의 소박한 즐거움을 느낀 바 없는 이종도였다. 그것은 언제나 의무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이종도의 머릿속으로 까맣게 잊고 있었던 수많은 글귀들이 개미떼처럼 몰려들었다.


아버지, 다시 돌아가면 우리 모두 일본으로 끌려가 비참하게 죽게 되리라 하셨잖습니까? 이종도는 담담하게 말했다. 여기보다야 못하겠느냐. 설마 네 손바닥이 톱날처럼 갈라지도록 일을 시키기야 하겠느냐. 애비가 잘못 생각했다.



 # 59  - 239p.


이보시오. 농장에서 얻은 자식은 그 농장주의 것이오. 그 여자가 누구의 것이오? 농장주인 내 것이오. 그런데 그 여자가 애를 낳았소. 그럼 그건 누구의 것이오? 방화중이 말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이는 아버지의 것으로 간주됩니다. 메넴이 시가에 불을 붙였다. 여기는 당신네 나라가 아니오. 그리고 그가 정말 그 아이의 아버지라는 것을 과연 당신들이 증명할 수 있겠소? 왜 세상의 모든 나라에서 아이에게 아버지의 성을 붙여주는 줄 아시오? 그래야 아버지들이 제 자식이라고 믿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키워주기 때문이오. 다시 말해 성은 아버지들의 불신에 대한 사회적 대가라는 거요.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오? 남자들은 열 달 전에 저지른 어떤 일의 결과로 아이가 나온다는 것을 아직까지도, 20세기가 밝아왔는데도 여전히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단 말이오. 오직 확실한 것은 어미가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뿐이오. 멕시코의 아시엔다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불확실하고 불분명하고 심지어 불필요하오. 메리다로 돌아가 물어보시오. 법률도 나의 편이오. 법은 애매한 것을 좋아하지 않소.


메넴은 제 나름의 고급한 유머로 불청객들을 격퇴한 것에 대해 기분이 좋아졌다. 반면 메리다로 돌아온 한인들과 변호사는 그 문제에 관한 한 농장주들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멕시코와 유카탄의 법률은 메넴의 주장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모든 법률가가 농장주인 곳에선 송사를 벌여봐야 희망이 없었다.



 # 72  - 272p.


시간이 흘렀다. 아주 오래 전에 잊어버린, 그 격심한 고통과 환각이 그를 찾아왔다. 형체 없는 어둠이 말했다. 나는 너를 대신하여 죽은 자다. 최선길은 손을 저었다. 아니야, 누가 누구를 대신하여 죽는단 말이야. 도대체 당신은 누구야? 누구냔 말이야?  형체는 최선길의 목을 졸랐다. 나는 네가 죽인 자들의 예수다. 최선길은 발버둥을 쳤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소? 그들은 죽일 만하니까 죽였소. 그리고 내가 그들을 죽이기 전부터, 저 일포드 호에서부터 당신은 내 목을 졸랐소. 아, 제발 그 손 좀 치우시오. 숨막혀 죽겠소. 형체는 말했다. 나의 시간은 너의 시간과 다르다. 죄는 먼저와 나중이 없다. 죄를 모르는 것이 바로 너의 죄다.


그는 눈을 떴다. 어느새 광장이었다. 어깻죽지가 뽑힐 듯이 아파왔다. 발등은 누군가 인두로 지지는 것 같았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놀라워라. 그는 공중에 떠 있었다. 벌써 죽은 것일까? 그러나 아니었다. 아래쪽에서 사람들이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옆을 보니 이그나시오 벨라스케스가 십자가에 묶인 채 광장 바닥에 누워 있었다. 대머리 사내가 히죽거리며 망치로 벨라스케스의 손바닥에 못을 박고 있었다. 그제서야 최선길은 왜 어깻죽지가 이토록 아픈지를 알았다. 그는 양팔을 벌린 채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다. 중력 때문에 몸은 자꾸 아래로 처져내렸다. 손바닥에서 흘러내린 피가 겨드랑이를 적셨다. 대못에 관통당한 발등은 그악스런 다족류가 파고들어 먹어치우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팠다. 최선길은 다급히 외쳤다. 이것들 보시오. 나는 예수도 믿지 않고 멕시코 사람도 아닙니다. 나는 조선인입니다. 나는 구경꾼이오. 살려주시오. 제발! 한 사람이 다가와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분명히 말했다. 너는 우리를 때리고 강간하고 죽였다. 너는 죽어야 한다. 땀이 눈으로 흘러들었다. 최선길은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부에나비스타 농장의 마야인 노동자였다.



 # 77  - 306p.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쩌면 우리 모두 당장 내일 죽을 수도 있어. 왜놈이나 되놈으로 죽고 싶은 사람 있어?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아. 이정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차라리 무국적은 어때? 돌석이 말했다. 이정은 고개를 저었다. 죽은 자는 무국적을 선택할 수 없어. 우리는 모두 어떤 국가의 국민으로 죽는 거야. 그러니 우리만의 나라가 필요해. 우리가 만든 나라의 국민으로 죽을 수는 없다 해도 적어도 일본인이나 중국인으로 죽지 않을 수는 있어. 무국적이 되려고 해도 나라가 필요한 거라구.

이정의 논리는 어려웠다. 그들을 설득한 건 논리가 아니라 열정이었다. 그리고 그 열정은 기묘한 것이었다. 그것은 무엇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되지 않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 달 후, 이들은 신전 광장에 띠깔 역사상 가장 작은 나라를 세웠다. 국호는 신대한이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국호는 대한과 조선뿐이었으므로 별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 작가의 말  - 354-355p.


나는 내 소설 속의 인물들이 거쳐갔음직한 곳을 일일이 훑고 바로 그곳에서 먹고 자며 천천히 전진했다. 멕시코시티에서 유카탄 반도로, 유카탄 반도에서 띠깔로 이동했다. 마지막으로 과테말라 남부의 안티구아란 도시에 머물며 소설의 상당 부분을 썼다. 과테말라의 관광 캐치프레이즈는 “영원한 봄의 나라(The Land of Eternal Spring)”다. 북부의 밀림과는 달리 남부의 고원지대엔 정말 일 년 내내 봄날씨가 계속된다. 그래서 시간이 전혀 흐르지 않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땐 못 견디게 지루했는데 어쩌면 이런 소설을 쓰기엔 적합한 도시였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곳에서 매일 일정량의 소설을, 마치 전국대회를 준비하는 고등학교 육상 선수처럼 꾸준히 썼다.

서울에 돌아와 스타벅스에 들렀더니 안티구아 커피원두를 팔고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안티구아엔 스타벅스가 없는데 스타벅스엔 안티구아가 있었다. 스타벅스는 과테말라의 플랜테이션에서 마야인들을 고용해 커피를 길러 그것을 서울 광화문에서 팔고 있었다. 이 세상은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아주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 글을 쓰기 바로 직전에 소설의 제목을 정했다. 그러고 나니 갑자기 우울했다. 어떤 것도 돌이킬 수 없게 되었고 이 모든 과정이 비로소 끝난 것이다. 이제 다음 소설을 생각해야한다.



<검은 꽃>
김영하
문학동네, 2003

검은 꽃 - 2004년 제35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국내도서
저자 : 김영하(Young Ha Kim)
출판 : 문학동네 2003.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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