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암묵지/추억의 책장 · 메모

집 나가면 생고생 그래도 나간다

반응형


# 허영만 선장과 집단가출호 대원들

허영만 - 만화가 / 정상욱 - 회사원 / 이정식 - 사진작가 / 김상덕 - 고무공장 사장 / 송영복 - 치과 의사
송철웅 - 목수, 칼럼니스트 / 박영석 - 산악인 / 김성선 - 보험사 영업 사원 / 정성안 - 요트선수 / 이진원 - 건축가
임대식 - 고층빌딩 유리창닦이 / 이상헌 - 다큐멘터리 PD / 김기철 - 카메라맨 / 홍선표 - 요트제조업체 사장



# 2차 항해, 서해 끝 격렬비열도
     - 동쪽 끝에는 독도, 서해 끄트머리에는?

남-북반구의 경계선 적도에는 돌드럼스(Doldrums, 적도무풍대)가 있다고 한다.
옛날 범선들이 적도를 통과하다 돌드럼스에 갇히면 며칠씩 꼼짝 못하는 것은 예사였는데 
무풍이 길어지면 선원들이 거의 정신분열 단계에 이른다는 것이다.

뜨거운 태양 아래 돌드럼스의 바다를 달팽이 속도로 건너며 대원들은 말린 생선처럼 여기저기 널브러져 기진맥진했다. 
바다가 아니라 사막을 건너는 것만 같았다.
격렬비열도가 육안으로 보인 것은 출항한 지 무려 12시간이 지나서였다.


     -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에는 땡볕이 있었다

영해 기점이 되는 외곽의 섬들을 연결하는 항로는 멀고도 길다. 
전곡항에서 격렬비열도까지는 13시간 30분이 걸렸다.
인천공항에서 LA까지 날아가고도 남는 긴 시간이어서 적어도 두세 번은 화장실을 가게 된다.
헤드(head)라고 부르는 요트의 화장실은 밸브와 펌프를 조작해야 하는 등 사용법이 다소 복잡했다.
우선 밸브 2개를 열어야 하는데 하나는 바닷물을 끌어들이는 파이프, 또 다른 하나는 내보내는 파이프의 밸브다.
일을 마치면 변기 옆에 있는 Y밸브를 '물내림' 모드로 세팅하고 수동 펌프를 작동시켜 생산물(!)을 내보낸다. 
그다음 Y밸브를 '물 끌어들임' 모드로 놓고 다시 펌프질을 한 뒤 처음에 열었던 2개의 밸브를 닫으면 끝이다.
격렬비열도에서 파수도로 향하는 길에 일어난 '화장실 폭발 사건'은 밸브 조작 실패와 높은 기온 탓에 빚어진 참사였다.
사고는 이진원이 Y밸브를 여는 찰나, 순식간에 일어났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오물이 화산의 마그마처럼 솟구쳐 오른 것이다.
누구나 피하고 싶은 액체를 뒤집어쓴 채 이진원은 절망, 황당, 좌절감에 한동안 꼼짝을 못했다.
이진원이 치를 떨며 바다로 뛰어들어 몸을 씨는 동안 사고조사단이 코를 싸쥐고 현장 조사를 한 끝에 원인이 밝혀졌다.
메인밸브와 Y밸브 사이 파이프 안에 갇혀 있던 오수에서 가스가 발생해 압력이 높아져 있었는데 
무심코 Y밸브를 열자 변기를 통해 분출된 것이다.
메인밸브를 먼저 열어 압력을줄였어야 했다.
이 끔찍한 사건 이후 대원들은 가능하면 육지에 도착할 때까지 참고 참는 버릇이 생겼다.





# 12차 항해, 독도다! 독도가 보인다!
     - 서로의 시린 옆구리를 보듬어주며

"형, 들어가 쉬시죠?"
졸음에서 깨어난 정 부선장이 대답 대신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문다.
라이터가 젖어 불을 붙이는 데 한참 걸렸다.
"내가 들어가면 네 옆구리가 시리잖아."
그 한마디가 몸에서 몸으로 전해지는 체온보다 따뜻했다.
한밤중 들끓는 망망대해를 가로지르는 돛단배의 갑판에서 파도와 싸우는 시간은 처절하고 고달팠지만 한편 감동적이었다.

하늘 가득 틀어박힌 뭇별들의 반짝임.
파도의 포말 부분을 신비롭게 빛내는 야광충들의 푸르스름한 인광(燐光).
베링해에서 캄차카 반도를 지나온 북태평양 한류와 적도에서 발원한 쿠로시오 난류가 이 바다 어디쯤에서 충돌하고 있을 것이다.
이 밤, 바다는 대적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돛 끝을 벼려 바람을 베며 서로가 서로를 의지해 다만 견딜 뿐이었다.

새벽 3시 교대 근무를 위해 나온 허 선장이 틸러를 잡자마자 덮쳐든 파도에 맞아 휘청한다.
임대식, 김상덕 대원이 허 선장의 양 옆에 붙어 앉아 체온을 나눠주고 파도를 막아줬다.
두 살배기 손자가 있는 63세의 만화가는 우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듯 차분하게 바다를 상대했다.
바람은 새벽 4시경 28노트를 기록했다.
영원할 것만 같던 밤이 지나고 마침내 새벽이 오고 태양은 다시 떠올랐다.




1차 항해 2009. 06. 05 ~ 06. 07 || 경기 전곡항, 인천 굴업도, 선갑도, 경기 풍도, 전곡항
2차 항해 2009. 07. 03 ~ 07. 05 || 전곡항, 충남 격렬비열도, 외도, 오천항
3차 항해 2009. 08. 14 ~ 08. 16 || 오청항, 전북 어청도, 십이동파도, 상왕등도, 목포
4차 항해 2009. 09. 04 ~ 09. 06 || 목포, 흑산도, 우이도, 목포
5차 항해 2009. 10. 09 ~ 10. 11 || 목포, 제주 도두항, 화순항, 마라도, 화순항
6차 항해 2009. 12. 04 ~ 12. 06 || 화순항, 신양항, 거문도, 여수
7차 항해 2009. 12. 04 ~ 12. 06 || 여수, 소리도, 경남 물건항
8차 항해 2010. 01. 08 ~ 01. 10 || 물건항, 통영 욕지도, 거제 지세포, 이수도, 진해
9차 항해 2010. 02. 19 ~ 02. 21 || 진해, 부산 수영만, 울산 방어진, 일산항, 포항 양포항
10차 항해 2010. 03. 05 ~ 03. 07 || 양포항, 영덕 강구항, 축산항, 울진 후포항
11차 항해 2010. 04. 09 ~ 04. 11 || 후포항, 삼척 장호항, 금진항, 속초, 삼척항
12차 항해 2010. 04. 30 ~ 05. 03 || 삼척항, 울릉도 사동항, 저동항, 독도, 삼척항


<허영만과 열 세 남자, 집나가면 생고생 그래도 나간다>
허영만 · 송철웅 지음, 이정식 사진
가디언, 2010
반응형

'암묵지 > 추억의 책장 · 메모' 카테고리의 다른 글

There's a Fly in My Toilet  (2) 2010.08.01
늦깎이 노총각의 좌충우돌 싱글 유학기  (0) 2010.07.31
Travel a la carte  (0) 2010.07.25
POSITIONING  (0) 2010.07.23
Marketing Warfare  (0) 2010.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