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화되어서 유명해진 '살인자의 기억법' 알츠하이머에 걸린 늙은 살인자의 이야기인데, 영화를 본 주변 지인들은 너도나도 추천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영화관에 갈 시간이 마땅히 나지 않았고, 책으로라도 먼저 만나보리라 마음을 먹고 있었다. 


저자 김영하 작가가 직접 책을 읽어주는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를 찾아 이 소설의 도입부를 들었다. 작가는 약 5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담담히 읽었다. "죽음이라는 건 삶이라는 시시한 술자리를 잊어버리기 위해 들이켜는 한 잔의 독주일지도." 이 독백을 끝으로 저자의 목소리로 듣는 소설은 끝이 났다. 소설을 내 눈으로 읽는 것과 저자의 목소리로 듣는 것에 차이가 있었다. 문장은 간결했다. 김병수와 호흡을 따라 박주태를 의심했고, 은희를 염려했다. 소설의 도입부를 읽고 난 후, 작가는 치매와 살인자에 대해 약간의 해설을 곁들였다. 인간이 자기라는 존재에 대해 확신하려면 일관성이 필요하다고 했다. 나 스스로는 일관적인가. 존재에 대한 확신을 할 수 있는가. 그것을 작가다운 표현으로 '어제 잠들었던 곳에서 깨어날 수 없다면 일상이 꿈과 같을 것이다.' 라며 무심히 뱉어낸 그 한마디에 사고는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리고 나는 책을 찾아 내 눈으로 다시 살인자 김병수와 함께 그의 기억을 더듬었다. 분량은 길지 않았다. 책장을 넘기면서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해 댄다. 살인자의 독백을 담은 문장에는 감정이 없지만 그의 감정이 느껴진다. 살인자의 사고(思考)를 담아낸 이성적인 표현은 세세하였고 너절하지 않았다. 객관적이면서도 주관적이었다. 


글을 잘 쓰고 싶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나에게 이런 말끔한 문장을 써내는 작가가 더없이 위대해 보였다. 시종일관 독자를 몰입해서 빠져나올 수 없게 만드는 이야기를 창의적으로 전개해내는 작가의 재능이 부러웠다. 김훈 작가의 문장을 읽던 어느 날, 존경과 함께 느꼈던 무언의 패배감처럼, 작가의 재능이란 날 때부터 점지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어찌 되었건 소설을 다 읽고 나니, 영화로 소개된 이야기가 궁금해서 영화를 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졌다. 개봉한지 몇 달이 지난 탓에 상영관을 찾을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늦은 밤 소파에 반쯤 누워 캔맥주를 손에 들고는, IPTV의 리모컨에서 결제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다시 김병수와 함께 그의 기억을 더듬는다. 




■ 본문 중에서


- 17p.

카그라스증후군이라는 게 있다. 뇌의 친밀감을 관장하는 부위에 이상이 생길 때 발생하는 질병이다. 이 병에 걸리면 가까운 사람을 알아보기는 하지만 더이상 친밀감을 느낄 수가 없게 된다. 예컨대 남편은 갑자기 아내를 의심한다. "내 마누라 얼굴을 하고 꼭 내 마누라처럼 구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야? 누가 시킨 거지?" 얼굴도 똑같고 하는 일도 똑같은데 아무래도 남처럼 느껴진다. 낯선 사람으로만 보인다. 결국 이 환자는 낯선 세계에 유배된 것과 같은 기분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비슷한 얼굴의 타인들이 모두 함께 자기를 속이고 있다고 믿는다.

그날 이후로 은희는 자신을 둘러싼 이 작은 세계, 나와 자신만으로 이루어진 가정을 낯설게 여기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래도 우리는 같이 살았다.



- 51p.

나는 살아오면서 남에게 험한 욕을 한 일이 없다.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고 욕도 안 하니 자꾸 예수 믿느냐고 묻는다. 인간을 틀 몇 개로 재단하면서 평생을 사는 바보들이 있다. 편리하기는 하겠지만 좀 위험하다. 자신들의 그 앙상한 틀에 들어가지 않는 나 같은 인간은 가늠조차 못 할 테니까.



- 57p.

살인자로 오래 살아서 나빴던 것 한 가지: 마음을 터놓을 진정한 친구가 없다. 그런데 이런 친구, 다른 사람들에게는 정말 있는 건가?



- 92p.

은희는 모른다. 내가 추구하던 즐거움에 타인의 자리가 없다는 것을. 나는 타인과 어울려 함께하는 일에서 기쁨을 얻어본 기억이 없다. 나는 언제나 내 안으로 깊이깊이 파고들어갔고, 그 안에서 오래 지속되는 쾌락을 찾았다. 뱀을 애완용으로 키우는 이들이 햄스터를 사들이듯이, 내 안의 괴물도 늘 먹이를 필요로 했다. 타인은 그럴 때만 내게 의미가 있었다. 노인들이 손뼉을 치며 좋아하는 것을 보자마자 나는 즉각적으로 그들을 혐오하게 되었다. 웃는다는 것은 약하다는 것이다. 타인에게 자기를 무방비로 내준다는 뜻이다. 자신을 먹이로 내주겠다는 신호다. 그들은 힘이 없고 저속하고 유치해 보였다.



- 94p.

나는 조용한 세상이 좋다. 도시에서는 살 수가 없다. 너무 많은 소리가 나를 향해 달려든다. 너무 많은 표지판, 간판,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표정들. 나는 그것들을 해석할 수가 없다. 무섭다.



- 105p.

수치심과 죄책감: 수치는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것이다. 죄책감은 기준이 타인에게, 자기 바깥에 있다. 남부끄럽다는 것. 죄책감은 있으나 수치는 없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타인의 처벌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나는 수치는 느끼지만 죄책감은 없다. 타인의 시선이나 단죄는 원래부터 두렵지 않았다. 그런데 부끄러움은 심했다. 단지 그것 때문에 죽이게 된 사람도 있다. - 나 같은 인간이 더 위험하지.


- 147~148p.

눈을 뜨기가 어렵다. 지금이 몇 시인지, 아침인지 저녁인지도 도통 가늠할 수가 없다.

사람들이 하는 말을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다.

(중략)

미지근한 물속을 둥둥 부유하고 있다. 고요하고 안온하다. 내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공(空) 속으로 미풍이 불어온다. 나는 거기에서 한없이 헤엄을 친다. 아무리 헤엄을 쳐도 이곳을 벗어날 수가 없다. 소리도 진동도 없는 이 세계가 점점 작아진다. 한없이 작아진다. 그리하여 하나의 점이 된다. 우주의 먼지가 된다. 아니, 그것조차 사라진다.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문학동네, 2013


살인자의 기억법
국내도서
저자 : 김영하(Young Ha Kim)
출판 : 문학동네 2013.07.24
상세보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작가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 얼마 전부터 출퇴근 시간에 차 안에서 '책 읽는 시간'을 듣고 있다. 출근길 운전 중에 무료함을 없애보겠다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김영하 작가의 팬이 되고 말았다. 몇 에피소드에서는 작가 본인의 소설을 직접 읽어주기도 하는데, 작가의 호흡으로 읽어주는 이야기는 몇 배 더 매력이 가미되기에 해당 에피소드는 나도 모르게 여러 번 반복해서 듣곤 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본인의 소설을 단 한 권 밖에 읽을 시간이 없다면, 어떤 책을 추천하겠냐고 물어온다면 그는 주저 없이 "검은 꽃"이라는 소설을 고를 것이라고 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작가로서 잘 살아갈 수 있을지 이런 문제들에 대해 고민을 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이 소설을 쓰면서 작가로서 평생을 살아갈 수 있겠구나라고 확고하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모험이었으나 과테말라와 멕시코에 머물며 취재를 하며 소설의 첫부분을 썼고, 한국에 돌아와서 나머지 부분을 완성했다. 서울에서 뒷부분을 쓸 무렵에는 격렬한 깊은 감정의 격동을 작가로서 처음 경험해보았다는 고백을 담담히 털어놓는다. 작가가 읽어주는 이 소설의 첫 부분을 듣고 나니, 이야기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1905년 일포드호를 타고 멕시코로 떠난 이들의 이야기. 인물들이 모자이크를 이루며 이야기가 전개되어가는 소설의 형식도 형식이거니와, 개성 강한 각 인물들의 행동과 사건이 손에 잡히는 것처럼 흥미롭게 묘사되어 지루할 틈이 없었다. 열녀문을 가문의 자랑으로 여기던 한 세기 전, 여성의 권리라고는 발설할 수조차 없던 그 시절에 나를 위한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던 여인, 왕족의 딸 이연수. 여러 인물들 가운데서도 연수와 소년 이정의 이야기는 세대를 뛰어넘는 절절한 로맨스로 읽는 내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작가는 소설을 써나갈 무렵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책상으로 달려가 다음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했는데, 십수 년이 지난 지금 독자인 나는 책의 다음 페이지를 빨리 읽고 싶어 안달을 하고 있으니, 분명 '먼 곳으로 떠나 종적 없이 사라져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무언가를 홀리는 매력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 본문 중에서


 # 14  - 55p.


사간동의 집에서 이연수는 자기 몸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몸은 그저 거기 있었고 그녀는 그것을 사용할 뿐이었다. 그녀의 관심은 오히려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것에 가 있었다. 나는 어디에서 왔고 무엇을 위해 살며 어떻게 죽을 것인가. 그녀의 부모는 그녀가 조상에게서 왔으면 아비와 남편을 위해 살다 그 명이 다하는 순간 혼백이 된다고 가르쳤다. 모든 사대부가 여자들이 배우고 납득하는 것을 그녀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부모의 뼈와 살로부터 자신이 비롯되었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생각이 달랐다. 너무 위험한 생각이었으므로 차마 발설하지 못한 그녀의 내심은,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산다, 는 것이었다. 남편이 죽으면 자살을 강요받고 그 죽음의 대가로 와에게서 열녀문을 하사받던 시절은 이제 지나갔지만 그렇다고 누구도 여자가 저 자신을 위해 살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안 될 것은 무어냐. 배우고 익히는 즐거움에 남녀가 따로 있으랴. 비록 얌전히 앉아 십장생을 수놓고 있었지만 열여섯 소녀의 머릿속엔 시대가 용납하기 어려운 위험한 사고가 자라나고 있었다. 구체적인 실현 방도가 없었기에 그녀의 의지는 더욱 강렬해졌고, 그러느라 이연수는 상대적으로 제 몸의 변화에는 애써 눈을 감았다. 달거리가 시작되고 수유가 가능할 정도로 가슴이 나오고 얼굴의 젖살이 빠져나가는데도 그럴수록 그녀는 관념적인 문제에 매달렸다.



 # 42  - 167-68p.


이종도는 말했다. 폐하께 편지를 쓰는 중이다. 여러분이 이 땅에서 흘린 피눈물을 두 눈으로 보아 잘 알고 있다. 이 멕시코에도 분명 우편제도가 있을 터이다. 누가 메리다까지만 나가 이것을 부치기만 한다면 폐하께서 곧 방도를 마련하실 것이다. 개 돼지도 이보다는 나은 대접을 받으리라. 이종도의 말에, 지난 석 달, 아니 배를 탔을 때부터 계산하면 거의 반년간의 고통이 떠올라 몇몇은 벌써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한 명이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쭈볏거리며 이종도 곁에 서 있는 진우에게 건네주었다. 우리를 위한 일이니 사양치 말고 보태 쓰시게. 그러자 사람들이 너도나도 돈을 내놓았다. 집으로 돌아가 쌀을 퍼온 사람도 있었다. 진우는 그것을 정중히 사양했다. 이종도는 안으로 들어가 다시 궤짝 앞에 앉았다. 처음으로 글을 배운 보람을 느꼈다. 어려서부터 단 한 번도 글을 읽고 쓰는 일의 소박한 즐거움을 느낀 바 없는 이종도였다. 그것은 언제나 의무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이종도의 머릿속으로 까맣게 잊고 있었던 수많은 글귀들이 개미떼처럼 몰려들었다.


아버지, 다시 돌아가면 우리 모두 일본으로 끌려가 비참하게 죽게 되리라 하셨잖습니까? 이종도는 담담하게 말했다. 여기보다야 못하겠느냐. 설마 네 손바닥이 톱날처럼 갈라지도록 일을 시키기야 하겠느냐. 애비가 잘못 생각했다.



 # 59  - 239p.


이보시오. 농장에서 얻은 자식은 그 농장주의 것이오. 그 여자가 누구의 것이오? 농장주인 내 것이오. 그런데 그 여자가 애를 낳았소. 그럼 그건 누구의 것이오? 방화중이 말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이는 아버지의 것으로 간주됩니다. 메넴이 시가에 불을 붙였다. 여기는 당신네 나라가 아니오. 그리고 그가 정말 그 아이의 아버지라는 것을 과연 당신들이 증명할 수 있겠소? 왜 세상의 모든 나라에서 아이에게 아버지의 성을 붙여주는 줄 아시오? 그래야 아버지들이 제 자식이라고 믿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키워주기 때문이오. 다시 말해 성은 아버지들의 불신에 대한 사회적 대가라는 거요.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오? 남자들은 열 달 전에 저지른 어떤 일의 결과로 아이가 나온다는 것을 아직까지도, 20세기가 밝아왔는데도 여전히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단 말이오. 오직 확실한 것은 어미가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뿐이오. 멕시코의 아시엔다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불확실하고 불분명하고 심지어 불필요하오. 메리다로 돌아가 물어보시오. 법률도 나의 편이오. 법은 애매한 것을 좋아하지 않소.


메넴은 제 나름의 고급한 유머로 불청객들을 격퇴한 것에 대해 기분이 좋아졌다. 반면 메리다로 돌아온 한인들과 변호사는 그 문제에 관한 한 농장주들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멕시코와 유카탄의 법률은 메넴의 주장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모든 법률가가 농장주인 곳에선 송사를 벌여봐야 희망이 없었다.



 # 72  - 272p.


시간이 흘렀다. 아주 오래 전에 잊어버린, 그 격심한 고통과 환각이 그를 찾아왔다. 형체 없는 어둠이 말했다. 나는 너를 대신하여 죽은 자다. 최선길은 손을 저었다. 아니야, 누가 누구를 대신하여 죽는단 말이야. 도대체 당신은 누구야? 누구냔 말이야?  형체는 최선길의 목을 졸랐다. 나는 네가 죽인 자들의 예수다. 최선길은 발버둥을 쳤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소? 그들은 죽일 만하니까 죽였소. 그리고 내가 그들을 죽이기 전부터, 저 일포드 호에서부터 당신은 내 목을 졸랐소. 아, 제발 그 손 좀 치우시오. 숨막혀 죽겠소. 형체는 말했다. 나의 시간은 너의 시간과 다르다. 죄는 먼저와 나중이 없다. 죄를 모르는 것이 바로 너의 죄다.


그는 눈을 떴다. 어느새 광장이었다. 어깻죽지가 뽑힐 듯이 아파왔다. 발등은 누군가 인두로 지지는 것 같았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놀라워라. 그는 공중에 떠 있었다. 벌써 죽은 것일까? 그러나 아니었다. 아래쪽에서 사람들이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옆을 보니 이그나시오 벨라스케스가 십자가에 묶인 채 광장 바닥에 누워 있었다. 대머리 사내가 히죽거리며 망치로 벨라스케스의 손바닥에 못을 박고 있었다. 그제서야 최선길은 왜 어깻죽지가 이토록 아픈지를 알았다. 그는 양팔을 벌린 채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다. 중력 때문에 몸은 자꾸 아래로 처져내렸다. 손바닥에서 흘러내린 피가 겨드랑이를 적셨다. 대못에 관통당한 발등은 그악스런 다족류가 파고들어 먹어치우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팠다. 최선길은 다급히 외쳤다. 이것들 보시오. 나는 예수도 믿지 않고 멕시코 사람도 아닙니다. 나는 조선인입니다. 나는 구경꾼이오. 살려주시오. 제발! 한 사람이 다가와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분명히 말했다. 너는 우리를 때리고 강간하고 죽였다. 너는 죽어야 한다. 땀이 눈으로 흘러들었다. 최선길은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부에나비스타 농장의 마야인 노동자였다.



 # 77  - 306p.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쩌면 우리 모두 당장 내일 죽을 수도 있어. 왜놈이나 되놈으로 죽고 싶은 사람 있어?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아. 이정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차라리 무국적은 어때? 돌석이 말했다. 이정은 고개를 저었다. 죽은 자는 무국적을 선택할 수 없어. 우리는 모두 어떤 국가의 국민으로 죽는 거야. 그러니 우리만의 나라가 필요해. 우리가 만든 나라의 국민으로 죽을 수는 없다 해도 적어도 일본인이나 중국인으로 죽지 않을 수는 있어. 무국적이 되려고 해도 나라가 필요한 거라구.

이정의 논리는 어려웠다. 그들을 설득한 건 논리가 아니라 열정이었다. 그리고 그 열정은 기묘한 것이었다. 그것은 무엇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되지 않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 달 후, 이들은 신전 광장에 띠깔 역사상 가장 작은 나라를 세웠다. 국호는 신대한이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국호는 대한과 조선뿐이었으므로 별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 작가의 말  - 354-355p.


나는 내 소설 속의 인물들이 거쳐갔음직한 곳을 일일이 훑고 바로 그곳에서 먹고 자며 천천히 전진했다. 멕시코시티에서 유카탄 반도로, 유카탄 반도에서 띠깔로 이동했다. 마지막으로 과테말라 남부의 안티구아란 도시에 머물며 소설의 상당 부분을 썼다. 과테말라의 관광 캐치프레이즈는 “영원한 봄의 나라(The Land of Eternal Spring)”다. 북부의 밀림과는 달리 남부의 고원지대엔 정말 일 년 내내 봄날씨가 계속된다. 그래서 시간이 전혀 흐르지 않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땐 못 견디게 지루했는데 어쩌면 이런 소설을 쓰기엔 적합한 도시였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곳에서 매일 일정량의 소설을, 마치 전국대회를 준비하는 고등학교 육상 선수처럼 꾸준히 썼다.

서울에 돌아와 스타벅스에 들렀더니 안티구아 커피원두를 팔고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안티구아엔 스타벅스가 없는데 스타벅스엔 안티구아가 있었다. 스타벅스는 과테말라의 플랜테이션에서 마야인들을 고용해 커피를 길러 그것을 서울 광화문에서 팔고 있었다. 이 세상은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아주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 글을 쓰기 바로 직전에 소설의 제목을 정했다. 그러고 나니 갑자기 우울했다. 어떤 것도 돌이킬 수 없게 되었고 이 모든 과정이 비로소 끝난 것이다. 이제 다음 소설을 생각해야한다.



<검은 꽃>
김영하
문학동네, 2003

검은 꽃 - 2004년 제35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국내도서
저자 : 김영하(Young Ha Kim)
출판 : 문학동네 2003.08.20
상세보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 김수환 추기경 연보 - 204~205p.


1922년 5월 8일 대구 출생(음력)

1933년 성 유스티도 신학교 예비과 입학(대구)

1941년 3월 서울 동성상업학교 을조(乙組) 졸업

1941년 4월 일본 도쿄 조치(上智)대학교 입학(유학)

1944년 1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하여 학업 중단

1947년 9월 혜화동 성신대학 편입

1951년 9월 15일 사제 수품, 안동성당 주임

1953년 4월 대구대교구 교구장 비서

1955년~1956년 김천성당 주임 겸 성의 중고등학교장

1956년~1963년 독일 유학, 뮌스터 대학교 대학원 사회학 전공

1964년~1966년 가톨릭시보사(현 가톨릭신문) 사장

1966년 5월 31일 주교 수품, 마산교구장에 오름

1968년 5월 대주교로 승품, 제12대 서울대교구장

1969년 3월 28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 서임 (당시 47세, 전 세계 추기경 134명 중 최연소)

1970년~1975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1차 역임)

1975년~1998년 평양교구장 서리 겸임

1981년~1987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2차 역임)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함께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과 103위 시성식 개최 (여의도)

1998년 5월 29일 서울대교구장 및 평양교구장 서리 퇴임

2002년 북방 선교에 투신할 사제를 양성하기 위한 '옹기장학회'를 공동 설립

2009년 2월 16일 선종 (향년87세), 안구 등 장기 기증



# 인생덕목 - 49~52p.


一. 말 (言)

말을 많이 하면 필요 없는 말까지 나온다.

양 귀로 많이 들으며, 입은 세 번 생각하고 열라.


二. 책 (讀書)

수입의 1퍼센트를 책을 사는 데 투자하라.

옷이 해어지면 입을 수 없어 버리지만,

책은 시간이 지나도 위대한 진가를 품고 있다.


三. 노점상 (露店商)

노점상에서 물건을 살 때 깎지 말라.

그냥 돈을 주면 나태함을 키우지만,

부르는 대로 주고 사면 희망과 건강을 선물하는것이다.


四. 웃음 (笑)

웃음을 생활화하라.

웃음은 만병의 예빵약이며, 치료약이며

노인을 젊게 하고, 젊은이를 동자(童子)로 만든다.


五. TV (바보상자)

텔레비전과 많은 시간 동거하지 말라.

술에 취하면 정신을 잃고,

마약에 취하면 이성을 잃지만

텔레비전에 취하면 모든 게 마비된 바보가 된다.


六. 성냄 (禍)

화내는 사람이 언제나 손해를 본다.

화내는 사람은 자기를 죽이고 남을 죽이며

아무도 가깝ㄱ 오지 않아서 늘 외롭고 쓸쓸하다.


七. 기도 (祈禱)

기도는 녹슨 쇳덩이도 녹이며 천년 암흑 동굴의 어둠을 없애는 한 줄기 빛이다.

주먹을 불끈 쥐기보다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자가 더 강하다.

기도는 자성을 찾게 하며 만생을 요익하게 하는 묘약이다.


八. 이웃 (隣)

이웃과 절대로 등지지 말라.

이웃은 나의 모습을 비추어 보는 큰 거울이다.

이웃이 나를 마주할 때, 외면하거나 미소 짓지 않으면, 목욕하고 바르게 앉아 자신을 곰곰이 되돌아봐야 한다.


九. 사랑 (慈愛)

머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에는 향기가 없다.

진정한 사랑에는 이해, 관용, 포용, 동화, 자기를 낮춤이 선행된다.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 칠십 년 걸렸다."



#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 - 82p.


아침이면 태양을 볼 수 있고

저녁이면 별을 볼 수 있는 나는 행복합니다.

잠이 들면 다음 날 아침 깨어날 수 있는 나는 행복합니다.

꽃이랑 보고 싶은 사람을 볼 수 있는 눈,

아기의 옹알거림과 자연의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입,

기쁨과 슬픔과 사랑을 느낄 수 있고

남의 아픔을 같이 아파해 줄 수 있는 가슴을 가진 나는 행복합니다. (중략)



# 창조와 순리 그리고 사랑의 표현 - 159p.


민주주의는 만들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의 활력 속에서

화합이 이루어질 때 창조되는 것입니다.

정의 또한 규격품으로 배급되어 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강물처럼 순리로 흐르고 넘치게 해야 합니다.

복지는 소외된 이웃 형제들에 대한 모든 사람의 사랑 표현이어야 합니다.



<바보가 바보들에게>

김수환 

산호와진주, 2009


바보가 바보들에게
국내도서
저자 : 김수환
출판 : 산호와진주 2009.03.10
상세보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