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슨: 가자, 일어나

에드: 난 두고 가요 (Leave me here...)

       난 걸음이 느려요, 두고 가요.

앨리슨: 포기하지마

에드: 다리가 부러졌는데 나더러 어쩌란 말이에요.

앨리슨: 안부러졌어. 걸을 수 있잖아.


에드: 괜한 일을 했나봐요.

앨리슨: 무슨 말이야?

에드: 아이를 그냥 둬야 했는지도 몰라요.

앨리슨: 뭐라고?

에드: 내 말 잘 들어봐요.

        애가 왜 여기있죠?

        왜 동유럽 여자아이가 스코틀랜드 한가운데에 있죠?

앨리슨: 난 모르겠어. 알면 말해봐.

에드: 유괴된 거에요. 교복차림이잖아요.

        분명히 학교 밖에서 유괴되었겠죠.

        대부분 돈을 원하잖아요.

        어떤 경우엔... 다른 공모자들도 있어요. 경찰이라던가...

        만약 우리가 일을 그르치는 거라면요?

        애가 무사히 돌아갈 수 없다면요?

        애가 죽는다면요?

        그게 다 우리 탓이라면요?


앨리슨: 아이를 봐!

에드: 난 그저...

앨리슨: 아이를 보라고!

          땅속에 놔둘 수 있겠어? 응? (Could you?)

에드: 아뇨.

앨리슨: 그게 정답이야. (It's your answer.)

           가족이 그랬냐고?

           유괴를 당했냐고?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일이야.

           지금은 그런 거 따질 때가 아니야, 일어나.

           길을 찾아.



<A Lonely Place to Die, 2011>

감독 줄리안 길베이

출연 멜리사 조지, 에드워드 스펠리어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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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평범한 이름 '김지영'. 작가는 평범한 여성의 삶을 대변하려고 가장 평범한 이름을 골랐는지도 모르겠다. 김지영씨의 딸 지원이보다 다섯 살 많은 딸이 있다는 작가의 글을 읽고 팬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 사회에서 여자로 살아간다는 일은 녹록지 않다는 것을 과격하지 않고 세련되게 표현한 조남주 작가. 태어날 때부터 30대 중반이 된 지금 이 순간까지 수도 없는 불합리와 편견에 감정을 소모하게 되는 주인공 김지영. 그녀는 출구가 없는 거대한 미로 속에서도 징징거리지도 않고, 매번 내뱉고 싶은 말을 삼키며 담담하게 상황을 모면한다.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는 여사우의 복지를 위해 어린이집도 운영하고, 모성보호 제도를 운용하고, 대부분의 여직원들이 육아휴직을 꽉 채우고 돌아온다. 비교적 남녀가 평등한 회사에서 나는 차별받지 않는 터울 안에서 지낸다고 생각하다가도, 더듬어 생각해보면 여자는 사회의 여러 가지 제도, 회사의 복지제도 등 법적인 테두리, 보호의 테두리를 만들지 않으면 남자와 동등한 사회생활은 꿈도 못 꾸는 사회에 살고 있으니... 역시 평등을 논하기에는 아직 아쉬운 점이 많다.


결혼을 포기하고, 육아를 포기하고 점점 많은 것들을 포기하는 여성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는 요즘. 아직도 가정 내에서 잃는 것은 오롯이 여자의 몫이어야 하는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이 서글프기만 하다.




# 1995년~2000년


- 61p.

"따뜻한 거 많이 먹어야 한다. 옷도 따뜻하게 입고."

아버지께 꽃다발을 받았다는 친구도 있었고, 가족들과 케이크를 자르며 파티를 열었다는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에게는 엄마, 언니, 여동생과만 공유하는 비밀일 뿐이다. 귀찮고 아프고 왠지 부끄러운 비밀. 김지영 씨네 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머니는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직접 언급을 피하며 라면 국물만 떠주었다.

그날 밤 불편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언니의 옆에 누워 김지영 씨는 자신에게 벌어진 일들을 차분히 되짚어 봤다. 월경과 라면에 대해 생각했다. 라면과 아들에 대해, 아들과 딸에 대해, 아들과 딸과 집안일에 대해 생각했다.



- 109p.

몇 번의 시도 끝에 얼핏 육각형 모양이 살아 있는 커다란 눈송이가 남자 친구의 검지 끝에 살며시 앉았고, 김지영 씨는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물었다.

"너 회사 잘 다니게 해 달라고. 덜 힘들고, 덜 속상하고, 덜 지치면서, 사회생활 잘하고, 무사히 월급 받아서 나 맛있는 거 많이 사 달라고."

김지영 씨는 가슴속에 눈송이들이 성기게 가득 들어차는 느낌이었다. 충만한데 헛헛하고 포근한데 서늘하다. 남자 친구의 말처럼 덜 힘들고, 덜 속상하고, 덜 지치면서, 어머니의 말처럼 막 나대면서 잘 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 123p.

대표는 업무 강도와 특성상 일과 결혼 생활, 특히 육아를 병행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여직원들을 오래갈 동료로 여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원 복지에 힘쓸 계획은 없다. 못 버틸 직원이 버틸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보다, 버틸 직원을 더 키우는 거시 효율적이라는 게 대표의 판단이다. 그동안 김지영 씨와 강혜수 씨에게 까다로운 클라이언트를 맡긴 것도 같은 이유였다. 두 사람을 더 신뢰해서가 아니라, 오래 남아 할 일이 많은 남자들에게 굳이 힘들고 진 빠지는 일을 시키지 않은 것이다.

김지영 씨는 미로 한가운데 선 기분이었다. 성실하고 차분하게 출구를 찾고 있는데 애초부터 출구가 없었다고 한다. 망연히 주저앉으니 더 노력해야 한다고, 안 되면 벽이라도 뚫어야 한다고 한다.




# 우리 모두의 김지영, 김고연주 - 183~184p.


김지영의 삶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눈에 밟히는 장면들이 반복된다. 목소리를 삼키는 모습이다.


선배는 평소와 똑같이 다정하고 차분히 물었다. 껌이 무슨 잠을 자겠어요, 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김지영 씨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 94p.


영업 중인 빈 택시 잡아 돈 내고 타면서 고마워하기라도 하라는 건가. 배려라고 생각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무례를 저지르는 사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항의를 해야 할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고, 괜한 말싸움을 하기도 싫어 김지영 씨는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 100~101p.


주량을 넘어섰다고, 귀갓길이 위험하다고, 이제 그만 마시겠다고 해도 여기 이렇게 남자가 많은데 뭐가 걱정이냐고 반문했다. 니들이 제일 걱정이거든. 김지영 씨는 대답을 속으로 삼키며 눈치껏 빈 컵과 냉면 그릇에 술을 쏟아 버렸다. - 116p.


조금도 서운하지 않았다. 견딜 수 없는 것은 오히려 그 순간들이었다. 김지영 씨는 충분히 건강하다고, 약 같은 것은 필요 없다고, 가족 계획은 처음 보는 친척들이 아니라 남편과 둘이 하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니에요, 괜찮아요, 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 133~134p.


그럼 너두 계속 구역질하고, 제대로 먹지도 싸지도 못하면서, 피곤하고, 졸립고, 여기저기 아픈 상태로 지내든지, 겉으로 말하지는 못했다. - 138p.


김지영 씨는 나도 당당하고, 먹고 싶은 음식 다 잘 먹고 있다고, 그런 건 아이의 성별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왠지 열등감으로 보일 분위기라 그만두었다. - 142p.




<82년생 김지영>

조남주 장편소설

민음사, 2016


82년생 김지영
국내도서
저자 : 조남주
출판 : 민음사 2016.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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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다닌다 하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한 번쯤은 도전해보고자 꿈꾸는 백두대간 종주. 『하얀 능선에 서면』은 종주 1세대라 불리는 여성 산악인 남난희 씨의 종주 등반기를 담은 이야기다. 책의 말미에는 등반 보고서의 형태로 식량, 운행, 대원 등에 대한 기록들이 남겨져 있으며, 본문의 내용은 70여 일이 넘는 기간 동안 홀로 종주를 이어가던 저자의 일기 형태로 채워져있다.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던 1984년. 여자 혼자의 몸으로 동계 종주를 이어가던 그녀가 산에서 홀로 느끼는 감정의 기복은 실존적이고, 감정이입하지 않을 수 없이 생동감이 전해진다.


이제 산에 다닌 지 일이년 남짓 된 병아리 주제에 '나는 산에 왜 가는가?'라는 겸연쩍은 질문도 스스로에게 던져보고, 힘든 산행을 할 때면 어김없이 '오늘, 산에 왜 왔지?'라는 답없는 질문도 던져보곤 했다. 누가 부추기지도 않았고 부득불 혼자 결정해서 다니는 산행인데 누구 탓이라도 하고픈 알 수 없는 심리. 설산에서 홀로 잠들며 외로움과 사투를 벌이는 저자의 산행기에서 내 '알 수 없는 심리'와 비슷한 동질감마저 느껴졌다. 


그녀가 종주를 했던 당시에는 태백산맥이라는 개념으로 부산의 금정산에서 진부령까지의 코스를 등반했으며, 이는 현재의 백두대간 종주 코스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태백산맥이라는 용어는 1903년 일본인 지질학자 고토분지로가 발표한 '조선산악론(朝鮮山嶽論)'에서 처음 생겨났으며 우리나라 전통적인 산줄기는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가장 크고 긴 산줄기를 백두대간이라 칭한다. (아래 개념도 참조)


(출처: 데일리안)


지리산권 (7개코스,142,2km)

천왕봉→장터목산장→촛대봉→세석산장(8,1km)→선비샘→벽소령→연하천산장→총각샘→토끼샘(1,2km)→뱀사골산장→

임걸령→노고단→고리봉→헬기장(23,6km)→만복대→정령치→수정봉→임망치(24,9km)→여원재→고남산→상사바위→

매요마을(21,2km)→이실재→새맥이재→시리봉→복성이뒤재→꼬부랑재(21,4km)→봉화산→월경산→중고개재(21,8km)

 

덕유산권(8개코스 219,4km)

중고개재→백운산→육십령(28,4km)육십령→바위지대→서봉→남덕유산→삿갓봉→삿갓골재(20,5km)→두룡산→동엽령→

중봉→헬기장→빼재(35,5km)→삼봉산→초점산→대덕산→쑥병이(30,6km)→삼도봉(13,7km)→질매재→바람재(29,2km)→

비로봉→ 여시골산→궤방령→모리골→가성산→눌의산→당마루(29,2km)→사기점→갈현고개→국수봉→큰재(32,3km)

 

속리산권(8개코스 185,1km)

큰재→백학산→선유골→지기재(33,3km)→신의터고개→화령산→봉황산(33,3km)→비재→828고지(3,1km)→형제봉→

속리산 천황봉→문장재→눌재(27,3km)→청화산→조항산→고모치(13,8km)→대야산→분란치재→장성보→헬기장(24,9km)→

은치재→구왕봉→희양산→시루봉→이만봉→981고지(21,8km)→백화산→황악산→조봉→이화령(18,1km)

 

소백산권(7개코스 196,7km)

이화령→조령산→마패봉→조령3관문→부봉→하늘재(30,1km)→포함산→대미산(24,9km)→황장봉→벌재→저수재(28,8km)→

배재→싸리재→뱀재→묘적령→도솔봉→죽령(37,1km)→연화봉→소백산(비로봉)→국망봉→상월산→1272고지(27,7km)→

마당치→고치령→미내리→ 마구령(27,1km)→마구령→늦은목이→석달산→박달령(21,0km)

 

태백산권(8개코스 181,6km)

박달령→옥돌봉→도래기재(11,3km)→구룡산→고부령→장바위(26,5km)→태백산→화방재→함백→1233,1고지(26,8km)→

매봉산→피재→한의령→ 새맥이(32,7km)→덕향산→큰재→댓재(20,5km)→두타산→청옥산→고적대(24,0km)→이기령→

상월산→987.2고지(21,2km)

 

오대산권(6개코스 133,0km)

987.2고지→백봉령→지병산→생계령(22,3km)→석병산→두리봉→삽당령(22,5km)→석두봉→화란→닭목재(23,8km)→

고루포기산→능경목→대관령(22,3km)→대관령→선자령→곤신봉→매봉(20,9km)→소황벽산→노인봉→진고개(21,2km)

 

설악산권(8개코스 181,1km)

진고개→동대산→두로봉(14,9km)→신배령→만월봉→음복산→약수산→구룡령(25,8km)→갈전곡→쇠나드리(32,3km)→

조침령→북암령→단목령→4거리(24,2km)→점봉산→망대암산→한계령→샘터(25km)→끝청→대청봉→희운각→산장→

마등령(21,6km) →저항령→미시령(14,4km)→삼봉→신선봉→마산→진부령(23,4km)→향로봉(거리포함안됨)

 

計: 도상거리 672km, 실제거리 1,240km, 총구간 52개코스 (코스 출처: 산림청)





# 글쓴이의 말 - 9~10p.


6년이 지난 지금, 나의 심정은 다시는 그 같은 등반을 하지 않을 생각이다. 단지 태백산맥의 나머지 구간을 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그것은 제외된다. 그때는 이번 산행을 경험했으니까 좀더 여유있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좀더 유연하게, 어쩌면 즐기는 산행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장기 종주등반을 어떻게 해야 된다는 것을 직접 체험으로 겪었으니까...... 마음의 여유만 잃지 않는다면, 즐거움도 없지 않으리라.

만약 그때도 단독 등반을 해야 된다면 철저히 혼자이고자 한다. 지원대는 내게 모든 희망이기도 했지만 부담이기도 했다. 직접하는 행위와 서포트하는 행위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리고 지원대는 아무 보상없이 계속 베풀어야만 하니까 그것도 많은 부담이 되었으리라.

하지만 나는 다시는 혼자 길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우리는 더불어 살아야 한다. 서로 미워하고 증오까지 하더라도 혼자보다는 둘이 낫다.



# 궁하면 통한다 


- 42p.

나는 벅차기만 했다. 가슴은 자꾸 주체할 수 없이 울렁대고, 설레이고, 자랑하고 싶고, 응석 부리고 싶고, 웃고 싶고, 눈이 마주치고 싶고, 모든 것을 사랑하고 싶어졌다. 진심으로 누구에겐가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어린애가 따로 없다는 표정으로 나의 투정을 다 받아주니 고마울 뿐이었다. 오랜만에 텐트는 두 동이 쳐졌고 밥 냄새가 났고 모닥불도 피웠다.


- 44p.

난 무엇을 힘들어 하는 걸까? 행위 그 자체일까? 아니면 혼자 지내야 하는 시간 때문일까? 어쩌면 두 가지 다 해당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 총각은 군에 갔다 왔는가 - 49p.

 

난 항상 그래왔듯이 헤어지는 걸 못하는 편이다. 하고 싶은 말도 많고, 고맙고, 수고했다는 둥 그리고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등등의 말을 해야 되는데, 난 가슴에만 그 말을 남긴 채 그냥 돌아서고 말았다.



# 점아 점아 콩점아 - 90~91p.


뽀얀 안개 위로 두둥실 떠있는 산은 꼭 구름 같았다. 난 저 구름을 타고 하늘로라도 올라갈까, 산은 움직인다. 조용히, 굽이굽이 이어진 이 산들 나 혼자 눈으로 나 혼자 마음으로 간직하기에는 너무 벅차다. 누구 나눠줄 사람 없을까? 누구 함께 할 사람은 없을까? 누구라도 좋다. 다만 벅찬 가슴을 나눠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살아서 숨쉬는 산, 아침 저녁으로 표정이 변해 있는 산.

두고개라는 곳에 표지판이 있었다. 그래도 주왕산 국립공원이라고 표지판이 만들어져 있었다. '내원동 2킬로미터, 기사동 2킬로미터' 나와는 전혀 무관한 이정표, 그래도 이정표가 있으니 등산하는 기분이 들었다.

길은 비교적 잘 나있고 잡목과의 싸움이 없으니 생각이 많아졌다. 옛날 생각, 지원조와 만날 생각, 갑자기 외로움 하나가 예리한 칼날이 되어와 온몸 안을 오르내렸다. 머리에서 발가락까지, 손가락과 머리카락 한올 한올에도 이 고독 속에 자신이 꺼져버리는 것은 아닌가 불안했다.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꼼짝할 수도 없었다.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며 나는 스르르 무너져버림을 느꼈다. 울어볼까? 소리쳐 볼까? 하지만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고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내 국토를 알겠다고? 맥을 찾겠다고? 아무것도 아니다. 난 내 육신을 학대해서 무엇을 얻고자 하나? 무얼 버리려 하나?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 사람사는 세상을 홀로 그리며 - 113~114p.


산짐승 소리 하나 없는 밤은 너무나 고요해서 오히려 불안했다. 혼자라는 것이 때로는 좋기도 했지만 별로 좋지 않기도 했다. 항상 긴장해야만 하고, 그 대상이 무엇이든 항상 불안하고, 무엇이든 혼자 결정해야만 하고, 혼자 걷고, 혼자 생활하고, 나름대로 익숙해지는 일도 있고, 나름대로 잊혀져가는 일도 있었다.

편한 대로 간단히 해결하는 자질구레한 일도 있었고, 세수나 양치질 같은 것은 생략해도 탓할 사람없는 산생활은 편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 혼자의 담은 높아만 갔다. 나름대로 꼭 해야 할 일, 지켜야 될 것들은 철저히 지키고자 했다.

혼자의 담은 세상의 어떤 남보다 더 견고할지도 모른다.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견고한 담, 그 담이 무너지지 않게 난 또 아집을 부릴 수밖에 없다. 나는 내 자신에게 너무 인색했다. 자신에게 항상 긴장해 있을 것을 요구하며 완벽하고자 하며 남에게 뒤지기 싫어하며 무엇보다도 자신을 너무 학대하는 버릇이 있다.

산행도 은밀히 따지고 보면 자신을 학대하는 것이다. 어쩌다가 즐기는 산이 아닌, 이미 목적이 있고 그 목적에 따르자면 무리가 있기 마련인데 그 무리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산을 다닐 것인가? 어쩌면 나의 이번 등반이 끝나면 산을 그만 다니게 될지도 모르겠다.





# 태백을 먹고 사는 사람들 - 148p.


바라보며 시를 읊고, 술을 마시고, 경치를 즐기는 산.

하지만 세월은 흘러 오르는 산으로 탈바꿈했다. 인간은 항상 어딘가에 올라가고 싶어했고 정상에 자신이 존재하기를 원했다. 산은 인간의 위로 올라가고자 하는 욕망을 다 알기라도 하듯 자신의 정상을 공개하려 들었다.

산사람이 산을 올라가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미 그 산에 들면 그 산은 보이지 않았다. 아주 일부 이외에는 자신을 내보이지 않는다. 인간이 너무 작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라보는 산, 정말로 술이라도 한 잔 마셔가며 저 멋진 산을 보며 시라도 쓰고, 바라보는 산으로 만족하고 싶다. 나는 언제나 이 산에서 벗어날 수 있으려나.



# 태백산맥 2천리 - 176p.


산은 나를 마음껏 농락하고 있었다. 내 의지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철저히 자기방식대로 나를 부리고 있었다. 내가 벗어나고자 하면 할수록 산은 올가미를 죄어왔다.

내가 하는 행동은 하나의 몸부림일 뿐이었다. 처절한 몸부림. 산은 인간의 뜻과 의식은 아랑곳없이 나를 시험하려 들었다. 산의 질서를 교란시키려는 인간은 용서하려 들지 않았다. 산은 초연했다. 산은 완고했으며 웅장했다. 산은 모든 것을 지배하고자 했다. 산은 또 ---



# 이제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 200p.


누구에게라도 시비를 걸고 싶어졌다. 누구라도 좋았다. 싸우고 싶었다. 흠씬 두들겨 맞았으면 차라리 좋겠다. 무엇이라도 원망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좋아 시작한 일이니 누구를 두고 원망한단 말인가? 다시는 이런 무모한 짓을 하지 않겠다며 다시 일어 섰다.

하루 종일 눈에서 허우적대기만 했더니 지친 것은 고사하고 까진 발이 몹시 쓰려왔다. 눈은 많이도 오지 않았고 사각사각 내 옷깃만 스칠 뿐이었다. 경쾌한 리듬이었다. 눈이 무슨 얘긴가를 열심히 하는 듯했다. 이런 날은 따뜻한 아랫목에서 낮잠을 자면 얼마나 달콤할까? 온 산에 핀 설화가 아름답게 보이는 여유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감탄사를 모르는 사람처럼, 감격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모든 감정은 얼어붙고 메말라가고, 영혼이 달아난 사람처럼 무감각 상태인 자신이 불쌍했다.

오직 걷는 노예가 되어, 짐의 노예가 되어, 산의 노예가 되어 걷기만 할 뿐이었다. 전에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했는지 까마득했고 그 흔한 유행가 한 구절 못 주절대며 오늘도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 하얀 능선에 서면 


- 237p.

바람이 불었다. 첩첩산중에서 혼자 기진한 채 배낭도 내리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산은 무엇인가? 산은 내게 무엇인가? 등산이 건강에 좋다고 했는가. 마음이 넓어진다고, 순수한 스포츠라고, 누가 그렇게 호화로운 수식어를 썼는가?

정신, 육체, 고통, 비교? 어림없는 소리, 너무 편해서 하는 소리, 이것은 그 자체가 고통이다. 고문이다. 지옥이다. 죽음이다. 나는 차라리 전쟁터에 나가겠다. 지옥에 가겠다. "아아, 하느님, 부처님, 산신령님, 나 좀 도와주십시오. 내게 힘을...... 차라리 울 수 잇는 용기를 주십시오."

나는 왜 헤어나지 못하는가? 왜 이런 고통을 혼자서 고스란히 감당해야만 하는가? 난 힘이 없다. 꼼짝할 수 없었다. 산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꼼짝없이 산의 노예가 되었다. 내 의지대로는 한 발걸음도 용납하려 들지 않았다. '나를 용서해 주세요. 겸손할께요.'

날이 저물었다. 또 집을 지었다. 나는 쓰러지듯이 텐트 안으로 넘어졌다. 비로소 운다. 뜨겁게 뜨겁게 --- 또 눈이 온다. 걱정할 기력도 없다.


- 242p.

점봉산에서 바라본 설악은 정말 좋았다. 생각만 해도 가슴 두근거리는 산, 설악은 많은 것을 안고 있다. 공룡능선을, 가야동계곡을, 용아장성을, 옥녀봉을, 천화대를, 범봉을, 잦은바윗골을, 칠형제능선을, 석주길을, 설악골을, 울산암을, 나한봉을, 12선녀탕을, 귀때기청봉을, 에델바이스를, 오세암 전설을, 백담사를, 백운동계곡을, 선녀봉을, 화채릉을, 대청봉을, 토왕폭을, 눈을, 바람을, 구름을, 아아, 젊은 산쟁이의 한을...... 눈을 감으면 손에 잡힐 듯한 설악의 모든 것이다.





<하얀 능선에 서면>

남난희

수문출판사, 1990


하얀 능선에 서면
국내도서
저자 : 남난희
출판 : 수문출판사 2001.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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