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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묵지/추억의 책장 · 메모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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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셋이 좋은 이유 

건조한 성격으로 살아왔지만 사실 나는 다혈질인지도 모른다. 
집착 없이 살아오긴 했지만 사실은 아무리 집착해도 얻지 못할 것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짐짓 한 걸음 비껴서 걸어온 것인지도 모른다. 
고통받지 않으려고 주변적인 고통을 견뎌왔으며, 
사랑하지 않으려고 내게 오는 사랑을 사소한 것으로 만드는데 정열을 다 바쳤는지도 모를 일이다. 
때로 나는 나를 둘로 나눈다.
'보여지는 나'로 하여금 행동하게 하고 '바라보는 나'가 그것을 바라본다. 
'보여지는 나'는 나라기보다는 나로 보이고 싶어하는 나이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나'는 그저 본다. 
영화관 앞에서 우연히 마주친 꽤 괜찮은 남자를 보는 정도의, 호의를 품은 타인의 시선으로. 
그때 나를 보는 '바라보는 나'의 눈에는 나라는 자아가 제거되어 있다. 
그러면 고통에 대해서 조금은 둔감해질 수 있는 것이다. 
대신 내가 누군지 잘 모르게 되어버린다.
하지만 상관없다.  


8. 악역의 즐거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물론 고통스럽다. 
그러나 세상에 고통은 있게 마련이고, 나에게 그 고통이 오지 말란 법은 없다. 
마침 지금 고통의 시간이 왔을 뿐이다.
머리 위의 구름처럼 시간이란 머무는 것 같지만 결국은 흘러가버리는 존재이다. 
이 시간은 반드시 지나갈 것이고 다시 다른 시간이 머리 위에 드리워진다. 
지나간다는 것을 알면 고통을 견디기가 조금은 나아진다. 
이런 것을 두고 옛사람들은 세월이 못 고칠 병은 없다고 표현한 모양이다. 
옛사람들 역시 알았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간다는 말은 고통스러운 시간이나 행복한 시간 모두에게 해당된다. 
행복한 시간도 흘러가버리는 한순간일 뿐이라는 사실이 
고통스러운 사람에게는 행복을 놓친 데 대한 핑계가 되긴도 한다.


15. 아직은 괜찮다 

뒤돌아보기도 싫었고 서운해하기도 싫었다. 
사람의 삶에 헤어짐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음을 완전히 부려놓을 수 있는 장소, 거기에서 영원히 멈출 만한 시간이란 없었다.
삶은 흘러가는 것이다. 
그 흐름에 따라 주소를 옮기는 것뿐인데 일일이 헤어짐을 기억할 필요는 없다. 
모든 사람은 끝을 향해서 가고 있다. 
누군가 스톱 워치를 누르고 묻는다. 
괜찮아요? 
아직은요. 
자, 그럼 또 시작하죠. ...... 
그러니 걸어갈 뿐이다. 아직은 괜찮다.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은희경 장편소설 
 문학동네,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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