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p.
이별은 쉬웠다. ‘이제 그만하자’ ‘그래, 그만하자’는 말을 주고받는 것으로 끝이었다. 그리고 그만한 자리에 들어차던 허무. 짙은 먹구름. 오래도록 나타나지 않던 태양. 너는 혼자였다. 그와 연애하던 때에도 혼자라고 느꼈던 때가 있었다. ’혼자‘에는 너무나도 다양한 상태가 존재한다. 너는 너에게 가장 적합한 혼자의 상태를 찾고 싶다. 혼자인 채로 사랑하고, 실망하고, 단념하고, 이별하고, 다시 사랑하고 싶다. 사랑에 이기거나 지지 않고 화합하고 싶다.
- 31p.
네가 기억하는 장면들을 모아 시간으로 바꾼다면 열흘도 채우지 못할 것이다. 기억하는 날보다 기억하지 못하는 날이 압도적으로 많다. 잠시나마 말을 나눠본 사이까지 헤아린다면 만났으나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훨씬 많을 것이다. 네가 잊은 것들을 모조리 되살려 이어 붙인다면, 망각을 복원한다면, 그렇다면 타인을 사랑하듯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 너는 네가 망각한 것들을 그리워한다. 망각은 돌에 가까운가 돌과 돌 사이 바람 통로에 가까운가. 망각과 기억 중 무엇에 기대어 아직 무너지지 않고 살아가는 것일까. 아니, 이미 어느 정도 허물어졌는지도 모른다. 완전히 와르르 무너지지 않았을 뿐 어쩌면 귀퉁이부터 조금씩…….
핸드폰이 울린다.
너는 받지 않는다.
돌을 하나 쌓는다.
핸드폰 메모장에 사야 할 물건을 적으려던 너는 우선 메시지 창을 연다. 상념이 증발하기 전에 문장으로 적어 너에게 보낸다.
그러나 선택할 수 없다. 내게 남는 것이다.
- 49p.
몰랐다는 말은 소용없다. 알게 된 다음에도 그만두지 않았으로. 멈추려는 시도로는 부족하다. 분명하게 멈추어야 했다. 그것만이 네 결백을 증명할 수 있지만, 결백이 무슨 소용인가? 이미 사랑해버린 것을.
너는 방바닥에 누워 발코니를 바라본다. 잠든 너와 죽은 새의 눈높이는 비슷했을 것이다. 어딘가에서, 밤마다 새가 죽는다. 사람이 죽는다. 이별한다. 운다. 사랑한다고 말한다. 믿음 없는 사랑은 가능하다. 사랑 없는 믿음은 비참하다. 사랑이 제일이란 말을 수긍할 수밖에 없다. 너는 핸드폰을 꺼내 문장을 적어 너에게 보낸다.
- 71p.
그에게 전화를 걸어 원하는 게 뭐냐고, 지금 나와 뭘 하자는 거냐고 물어보려다가…… 맥없이 핸드폰을 내려놓는다.
만약 그가 호소한다면. 자기 처지와 상황을. 힘든 마음을.
만약 그가 싸움을 건다면. 상처를 주고 마음을 다치고 실망하는 과정을 거쳐 진짜 이별을 하려는 거라면.
만약 그가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무엇을 원하든 소용없다. 달라질 것 없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상상하면 심장이 아프다. 그의 소식을 듣고 싶지 않지만, 그가 죽기를 바라진 않는다. 너는 너의 죽음을 상상한다. 심장이 아프진 않고 다만 슬프다. 너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죽은 새를 생각한다.
<오로라>
최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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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라] 들키면 어떻게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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