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태후의 여름 별장 이화원(頤和園, Summer Place),
곤명호(昆明湖 , Kunminghu) 뒤로 보이는 만수산(萬壽山)과 이화원의 상징 불향각(佛香閣)
■ 서태후의 여름 별장, 이화원(頤和園, Summer Place)
- 주소 : 北京市海定区新建宫门路19号
- 전화 : (+86) 010 6288 1144
- 입장료 : 11月~3月까지 성인 20元, 학생 10元 (학생증 지참 필수), 4月~10월까지 성인 30元
- 운영시간 : 11月~3月까지 07:00~19:00 (입장 마감 시간 17:00), 4月~10月까지 06:30~18:00
- 홈페이지 : http://www.summerpalace-china.com/
- 찾아가는 길 : 지하철 4호선 서원(西苑, Xiyuan)역 하차
베이징의 서북부 해정구에 위치하고 있는 이화원은 199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중국 황실의 여름 별장이자 황실 정원이다. 중국에 현존하는 황실 정원 중 가장 크고 보존 상태가 온전하다. 면적은 약 3㎢로 곤명호(昆明湖 , Kunminghu)와 만수산(萬壽山)으로 구성되어 잇다. 전체의 약 70%가 호수(곤명호)로 이루어져있는데, 곤명호(昆明湖 , Kunminghu)는 사람의 힘으로 만든 인공 호수이다. 만수산(萬壽山) 역시 곤명호의 흙을 퍼내어 만든 인공 산이다.
1153년 금(金)나라의 안완량 황제 때 행궁으로 처음 지어졌다가, 원나라 때 곤명호와 만수산을 만들었다. 청나라 건륭 15년(1750)에 청의원을 지원 황실의 여름 별궁으로 사용하다가 1860년 제2차 아편 전쟁으로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공격으로 많은 부분이 유실되고 약탈되었다. 광서 12년(1886) 서태후에 의해 재건을 시작하여 광서 14년(1888) 복원되면서 현재의 이름인 이화원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후 광서 26년(1900)에 다시 팔국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파괴되었다가 1902년 다시 복원되었고, 1924년 공원으로 대외에 개방되었다. 서태후는 1889년부터 죽을때(1908)까지 이 곳 이화원에서 거주했고, 죽음도 이화원에서 맞이했다고 한다.
베이징에 방문했다면 이화원은 반드시 들러야 할 필수 코스로, 성수기에는 단체 관광객들로 발디딜 틈이 없다.
△ 이화원(頤和園, Summer Place)의 매표소
△ 이화원(頤和園, Summer Place)의 오디오 가이드 대여소
오디오 가이드 대여료는 40元이고, 보증금(Deposit)은 50元이다.
보증금은 오디오 가이드 기기를 반납할 때 돌려 받을 수 있다.
반납은 동궁문 앞 대여소, 북궁문 앞 대여소 어느 곳에서나 가능하다.
△ 이화원의 오디오 가이드, 한국어로 셋팅을 해주고 사용법을 설명중인 대여소 직원
오디오 가이드 앞면에는 이화원 지도가 표기되어 있고 주요 관광 스팟에서 자동으로 설명이 재생된다.
한 번 지나간 곳을 다시 지나가도 설명을 들을 수 없으니, 놓치지 말고 잘 들어두자.
■ 이화원의 정문, 동궁문(東宮門)
이화원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건축물은 동궁문(東宮門)이다. 동궁문은 이화원(頤和園, Summer Place)의 정문으로 앞에는 한 쌍의 청동사자가 놓여 있고 문에는 3개의 통행용 출입구가 있는데 가운데 문은 황제와 황후가 출입하던 문으로 어로(御路)이라고 불렸다. 문 위에 걸린 '이화원(頤和園)'의 세글자 편액은 광서제(光緖帝)의 친필이다. 동궁문 북쪽에는 후비들이 거주하던 동8소(東八所)가 있었다.
문 앞 양쪽에는 청동 사자가 두 마리가 양쪽에서 동궁문을 지키고 있다. 문을 바라보고 좌측이 암컷, 우측이 수컷이다. 암컷 청동사자는 새끼 사자를 왼쪽 앞발로 누르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데, 이는 어미 사자가 젖을 먹이고 있는 모습을 상징한다. 과거 중국인들은 암사자의 젖이 앞발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 이화원(頤和園, Summer Place), 동궁문(東宮門)
■ 곤명호(昆明湖 , Kunminghu)와 만수산(萬壽山)
곤명호는 본래 서호(西湖), 속칭을 태박호(太泊湖)라 하였으나 건륭 15년에 현재의 이름으로 고쳤다. 만수산(萬壽山)은 본래 옹산(甕山)이라 하여 명 ∙ 홍치(弘治) 7년(1494) 산의 남쪽에 원정사(円靜寺)를 세웠으나 역시 건륭 15년에 현재의 이름인 만수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 이화원(頤和園, Summer Place), 곤명호(昆明湖 , Kunminghu)와 유유히 떠있는 석방(石舫)
■ 십칠공교(十七孔橋)
십칠공교(十七孔橋)는 남호도(南湖島)와 동제 사이를 가로지르는 다리이다. 청(淸) 건륭제 때 축조되었으며, 길이 150m, 너비 8m로 17개의 아치가 있다. 다리의 난간에는 작은 돌사자 544마리가 조각되어 있는데, 모두 표정이 다르다고 해서 많은 관광객들이 사자의 표정을 익살스럽게 따라하며 기념 사진을 찍기도 한다.
■ 치수(治水)의 상징, 동우(銅牛, Tong niu)
십칠공교의 동쪽에는 구리로 주조한 소 한 마리가 꽃무늬를 조각한 석좌 위에 앉아 있는데 이가 바로 동우(銅牛)이다. 동우는 건륭 20년(1755) 설치되었는데, 치수(治水)에 성공한 우왕이 동우를 바쳐 수재를 막은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소의 등에는 전자(篆字)체로 '금우명(金牛銘)'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또 동우는 견우를, 이화원 서편의 정취는 직녀를 상징하며, 1년에 한 번 황제의 은혜로 배운전 아래에서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 동우(铜牛, Tong niu)
■ 봄을 맞이하는, 지춘정(知春亭)
이화원의 서북부 호수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지춘정은 이화원에서 가장 먼저 봄을 맞이하는 곳이다. 지춘정 주변의 얼음이 녹기 시작하면 봄이 온다는 뜻으로 버드나무가 살랑이는 황제의 낚시터로도 알려져 있다.
△ 이화원(頤和園, Summer Place), 유리창 너머로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 문창제군(文昌帝君)을 모신, 문창각(文昌閣)
동궁문을 지나 십칠공교로 향하려면 반드시 지나야 하는 관문인 문창각(文昌閣)은 십자형 2층 누각으로, 문창제군(文昌帝君)의 동상을 모시고 있다. 문창제군은 사기(史記), 천관서(天官書)에 따르면, 북두칠성의 첫 번째 별부터 네 번째 별 사이에 있는 여섯개의 별을 신격화 한 것이라고 한다. 일설에는 황제의 아들이 문창제군이라고도 전해진다.
문창제군은 학문의 신이자 수험의 신으로 어려운 과거 제도에서 발탁되고자 희망하여 문창제군의 은덕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문창제군이 수험생의 소원을 들어주는 신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명(明)대에 접어들면서 인기가 높아져 문창제군을 모시는 사당이 건립되었고, 청(淸) 대에도 역시 인기가 대단했는데, 그의 탄신일인 음력 2월 3일에는 이화원(頤和園, Summer Place)에 있는 사당에서 성대한 제사를 치렀다.
■ 서태후의 침실, 낙수당(樂壽堂)
낙수당(樂壽堂)은 장랑(長廊)의 동쪽 시작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태후의 처소로 사용되던 곳이다. 서태후의 거처였던 만큼 이화원에서 가장 화려한 곳으로 내부에는 독일에서 수입한 샹들리에가 걸려 있다. 서태후는 하루 세끼 식사를 이 곳에서 했는데, 한끼에 128종의 음식을 진상했기 때문에 덕화원의 동쪽에 위치한 전용 주방인 수선방(壽膳房)에서 낙수당까지 음식을 나르는 데에만 200여 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낙수라는 명칭은 '논어(論語)'에 나오는 '지혜로운 자는 즐겁고 어진 자는 장수한다(知者樂 仁者壽)'는 구절에서 유래했다. 낙수당 앞에 놓인 청동 사슴(鹿)·학(鶴)·병(甁)은 한자음을 빌어 '육합태평(六合太平)'을 상징한다. 낙수당 본채는 서태후가 일상적으로 활동하던 장소이고 서난각은 침실이며 동난각은 탈의실이다.
△ 이화원(頤和園, Summer Place), 서태후의 침실 낙수당(樂壽堂)
■ 인수전(仁壽殿)
1750년(건륭 15)에 지어질 때는 근정전(勤政殿)이었다가 광서제 때 재건하면서 인수전으로 개칭했으며, 동향으로 된 정면 9칸의 전각이다. 서태후와 광서제는 이곳에서 정무를 돌보며 외국 사절과 그들의 부인을 접견했다.
인수전 북쪽에는 연년정(延年井)이라는 이름의 우물이 있다. 인수전 앞에는 건륭제 때 청동으로 주조한 봉황, 용, 항아리, 향로가 놓여 있다. 보통 용(龍)은 제왕을 상징하므로 가운데에 놓여야 하지만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부터는 용을 밀어내고 봉황을 가운데에 놓아 황제보다 우월한 서태후의 권력을 과시했다고 한다. 이는 서태후가 과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 광서(光緖) 황제가 유폐되었던, 옥란당(玉蘭堂)
옥란당(玉蘭堂)은 인수전 서쪽에 자리한 건물로 건륭 15년(1750)지어졌다. 후에 서태후가 광서제를 연금한 곳이 바로 이 곳 옥란당이다.
광서 황제는 개혁 운동을 빌미로 정권을 잡고자 변법자강운동을 펼치다 실패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1898년 무술정변(戊戌政變)사건이다. 무술정변 이후, 서태후가 광서제를 연금했던 장소가 바로 옥란당이다. 광서제와 외부와의 연락을 완전히 차단하고자 했던 서태후는 정문 이외의 모든 곳을 겹겹의 벽돌을 쌓아 봉쇄하여 광서제를 가두었다. 지금도 그때 쌓았던 담장이 남아있어 창문조차 벽돌로 막힌 처참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 장랑(長廊)이 시작되는 동쪽에 위치한 문, 요월문(邀月門)
■ 야외 미술관, 장랑(長廊, Chang lang)
장랑(長廊)은 273칸으로 구성된 무려 728m에 달하는 긴 회랑으로 세계에서 가장 긴 회랑으로 기네스북에도 등재 되었다. 동쪽의 요월문(邀月門)에서 서쪽의 석장정까지 이어져 있어 각종 산수화나 <홍루몽>, <삼국지연의>, <서유기>, <수호전> 등에서 따온 그림 약 1만 4천여 점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서태후의 거처였던 낙수당에서 만수산 불향각 입구까지 이어진 초대형 회랑인 장랑은 서태후가 불향각으로 불공을 드리러 가거나 산보 할 때 애용했다고 전해진다. 과연 서태후는 이 긴 회랑을 걸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그녀이지만 고독한 순간이 있었으리라.
△ 이화원(頤和園, Summer Place)의 장랑(長廊)에 걸터 앉아 여유를 즐기는 관광객들
△ 이화원(頤和園, Summer Place), 장랑의 들보에 그려진 장랑회화(长廊绘画).
찬찬히 이동하며 중국고전문학을 모태로 한 장랑회화들을 감상해보자.
유비가 제갈량을 세 번이나 찾아갔다는 '삼고초려(三顧草廬)'의 그림도 찾을 수 있다.
■ 서태후의 생일 잔치가 열리던, 배운전(排云殿)
매년 음력 10월 10일 서태후의 생일 축하연을 열던 장소로 서태후의 초상화를 볼 수 있다. 이곳은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는데, 진귀한 전시품들은 대부분 서태후의 70회 생일을 맞이하여 왕공대신(王公大臣)들이 바친 선물이다.
■ 이화원의 상징, 불향각(佛香閣, Fo xiang ge)
불향각(佛香閣)은 만수산의 중앙 부분에 위치하며 높이 20m에 기단 위에 세워진 약 41m 높이의 8각 4중 처마의 3층 목탑이다. 이화원 내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건물이자 이화원 전경을 담은 사진에서 빼놓지 않고 나오는 건물이다. 건륭 15년(1750) 최초에는 9층탑으로 지으려다가 원안을 수정해 8층탑으로 변경하였다. 이는 건축학 적으로 아름다운 구조를 유지하게 되었다. 청(淸) 함풍 10년(1860) 아편전쟁 때 영·프 연합군에 의해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광서 17년(1891) 서태후에 의해 재건되었다. 78만 냥의 은을 사용해 중건을 시작해 1894년 완공되었다.
불향각 1층에는 무게가 5톤에 달하는 천수천안(千手千眼)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봉안되어 있는데, 1574년(만력 2)에 제작되었으며 높이 5m, 12개의 얼굴, 36개의 눈, 24개의 팔이 달린 불상이 999개의 꽃잎이 조각된 연화보좌 위에 서 있다. 2층에는 건륭제(乾隆帝)때의 삼세불상(三世佛像), 3층은 불향각(佛香阁)의 건축예술을 전시하고 있다.
△ 이화원, 뒤로 보이는 불향각(佛香阁)과 배운전(排云殿)의 정문인 배운문(排雲門)
■ 만수산(万寿山)의 입구, 운휘옥우(雲輝玉宇)
호숫가에 서 있는 운회옥우(雲輝玉宇) 패방은 만수산 건축물의 시작을 나타낸다. '구름과 노을과 궁전이 서로 빛을 받아 함께 빛난다'는 의미인 운휘옥우(雲輝玉宇)를 시작으로 일직선 상에 놓인 배운문(排雲門), 이궁문(二宮門), 배운전(排云殿), 불향각(佛香阁)과 산 정상의 지혜해(智慧海)까지 점점 높아지는 형상을 이루고 있다.
△ 만수산(万寿山)의 입구 운휘옥우 패방(雲輝玉宇 牌坊)
■ 청(淸)나라 말 최고의 통치자, 철의 여인 서태후(西太后, 1835~1908)
서태후는 청(淸)나라 말기, 47년간 천하를 호령하며 정국을 주도하던 철의 여인이다. 이화원의 복원에 힘썼으며 이화원에 크게 집착하여 대부분의 시간을 이화원에서 보내고 죽음도 이화원에서 맞았다.
효흠현황후(孝欽顯皇后), 자희황태후(慈禧皇太后)라고도 불리며 서태후는 본래 칭호는 자희태후(慈禧太后)이고, 본명은 난(蘭)이다. 1835년 안휘성 가난한 관리의 딸로 태어난 난은 청나라 말기 함풍 2년(1851), 16세의 나이로 입궁하였으나 입궁 후 3년 간 한 번도 황제의 수청을 들지 못했다. 난(蘭)은 당시 환관을 매수하여 , 황제가 좋아하는 '연명천'이라는 노래를 황제가 다니는 길목에서 불렀다. 이렇게 황제의 눈에 들게 된 난(蘭)은, 재순(載淳)황제를 낳아 의귀비(懿貴妃)에 봉해지게된다. 함풍 11년(1861) 황제가 병으로 죽자 6세의 재순 황제가 동치제로 즉위하고 의귀비였던 서태후는 자희황태후(慈禧皇太后)에 봉해졌다. 이때 함풍 황제의 모친은 자안(慈安)황태후에 봉해지는데, 이 두사람은 각각 동, 서 궁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동태후(東太后), 서태후(西太后)라 불리게 된다. 이 두 사람이 어린 황제를 대신해 정치를 행하였는데, 동태후는 그다지 정치에 관심이 없고 문맹이었기에 서태후에게 정치 전반을 맡기게 된다. 서태후는 바로 발을 내리고 정사(政事)를 듣는다는 뜻의 '수렴청정(垂簾聽政)' 으로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권력 앞에 모성마저 버린 비정한 철의 여인 서태후. 그녀의 아들 동치제도 그녀에겐 권력의 경쟁자로만 보였다. 아들을 환락에 빠지게 하고 홍등가에 드나들도록 환관을 사주했다. 6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해 줄곧 서태후의 섭정을 받던 동치제는 친정을 시작한 지 2년이 못되어 병에 걸려 사망했는다. 동치제가 병에 걸린 것을 안 서태후가 치료 받지 못하고 고통속에 죽어가도록 내버려 두었다고 전해진다. 동치제가 죽고 나자 본인의 손자, 황제의 아이를 가진 황후를 구박하여 자살하게 만든다.
서태후는 동치제를 이을 다음 황제로 함풍제의 동생과 자신의 여동생 사이에서 출생한 4살의 광서제를 지목했다. 서태후는 광서제에게 큰 어머니이자 이모였다. 광서제는 친아들마저 권력의 희생양으로 죽일 수 있는 서태후에 주눅이 들어 기 한 번 펴보지 못하고 자랐고, 서태후가 골라준 여인으로 황후도 맞아야 했다고 한다. 광서 11년(1889)년 서태후는 광서제를 결혼 시키면서 황제의 친정을 선포하고, 외형상으로는 권력을 이양하고 물러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최고 권력은 여전히 서태후에게 있었고 광서제는 허수아비 황제에 지나지 않앗다.
광서제는 서태후를 졸라 청·일전쟁을 일으켰으나 결과는 청나라가 패하고 말았다. 서태후는 군비를 이화원을 짓는데 빼돌리는 등 패배에 일조하였는데, 중국 사회는청·일전쟁의 패배를 자초한 서태후와 이홍장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다. 이 분위기에 적극 동조하며 광서제는 직접 나라를 통치하고자 희망하며, 지식인들과 함께 청나라 부흥을 꿈꾸는 개혁 운동인 '변법자강운동(1898.6월~9월)'에 나서게 된다. 이 운동은 서태후를 둘러싼 보수파들에게 번번히 방해를 받았다. 광서제와 개혁파는 위안스카이(袁世凱)를 끌어들여 그의 군대의 힘을 빌려 개혁을 성공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개혁파들의 계획은 위안스카이가 서태후의 연인 영록에게 전하면서, 고스란히 서태후에게 보고되었고, 1898년 9월 21일, 서태후에 의해 광서제는 궁중에 유폐되고, 1898년 9월 28일, 개혁파들은 모두 숙청당했다. 이른바 '무술정변(戊戌政變)'이다. 담사동, 강광인(康廣仁), 유광제(劉光第), 임욱(林旭), 양예(楊銳), 양심수(楊深秀) 여섯 명은 모두 죽음을 당했고, 이들을 ‘무술육군자(戊戌六君子)’라고 한다. 이렇게 개혁운동은 시작된지 103일 만에 백일천하의 실패로 끝나고 만다.
최고 권력을 가졌던 서태후는 어린 시절 가난에 복수라도 하듯 사치를 일삼았다. 그녀의 식사때마다 한끼에 128가지에 달하는 음식이 진상되었다. 패션에도 관심이 많아 옷도 3천여 상자에 달하는 많은 옷을 하루에도 몇 번씩 갈아입었다. 특히 보석에 대한 욕심이 대단했는데, 머리는 언제나 비취와 진주 등의 보석으로 장식을 했으며, 반지, 팔찌 뿐만 아니라 손톱에도 비취 보호판을 달아 길고 뾰족하게 보이게 했다고 한다. 식탁 또한 비취로 만든 식기들로 차리게 했다고 전해진다. 서태후가 부린 사치 중 최고는 바로 중국 최고의 황실 정원이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화원(頤和園, Summer Place)이다. 서태후는 청일전쟁 중에도 해군의 돈을 빼돌려 이화원을 치장하는데 2천만 냥의 돈을 들였다고 한다.
그녀는 죽음이 권력을 허용하지 않는 순간까지 권력을 잡고 있었다. 그녀의 유언은 "다시는 부인네들이 국정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라. 환관들의 농간에 놀아나기 쉽고 가법에도 위배된다." 였다고 한다. 48년간 천하를 호령했던 철의 여인인 그녀의 유언이 여자가 나라를 통치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라고 하니 아이러니 하지 않을 수 없다. 서태후의 죽음과 함께 청(淸)나라는 곧 저물고, 서구 열강에 의해 농락당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서태후를 둘러싼 주요 인물]
○ 함풍제(咸豐帝, 1831~1861) - [재위기간 : 1850~1861] 청나라 9대 황제, 서태후의 남편, 시호 현황제(顯皇帝)
○ 동치제(同治帝, 1856~1875) - [재위기간 : 1861~1875] 청나라 10대 황제, 서태후의 아들, 본명 재순(載淳)
○ 광서제(光緖帝, 1871~1908) - [재위기간 : 1874~1908] 청나라 11대 황제, 서태후의 조카, 시호 경황제(景皇帝)
○ 선통제(宣統帝, 1906~1967) - [재위기간 : 1908~1912] 청나라 12대(마지막) 황제, 광서제의 조카, 본명 푸이(溥儀)
○ 영록(榮祿, 1836~1903) - 서태후의 신임을 받은 군기대신(軍機大臣), 서태후의 연인으로 야사에 거론되는 인물.
△ 서태후가 사랑했던 아름다운 이화원의 정취
■ 돌로 만든 배, 석방(石舫)
만수산 서쪽 길슭에 자리잡은 석방(石舫)의 원래의 명칭은 청연방(淸宴舫)으로 이화원 최고의 수상 건축물이다. 총 길이 36m에 달하고 상하 2층으로 선실이있다. 이 거대한 석방(石舫)은 청(淸)나라 건륭 20년(1755) 대리석으로 지어졌다. 건륭제는 물(백성)은 능히 배(왕조)를 띄울 수 있고, 전복시킬 수도 있다는 고사를 인용하며, '청(淸) 왕조는 반석위에 영원하며 뒤집어지지 않는다'는 의미로 강산이 수백 번 변해도 달라지지 않고, 영원히 침몰하지 않는 이 석방(石舫)을 제작했다고 한다.
원래는 목재로 창루(艙樓)가 있었는데, 영·프 연합군에 의해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서태후에 의해 재건되었다. 서태후는 광서 19년(1893) 석재로 프랑스 배를 본떠 창루를 건설하고, 2층 창루는 광서 29년(1903)에 추가했다. 창루는 색색의 유리인 스테인드 글라스로 꾸며놓고, 서태후는 달맞이를 즐기거나 비오는 날이면 이 앞에 앉아 차를 마시며 풍경을 감상했다고 전해진다.
△ 이화원(頤和園, Summer Place), 곤명호(昆明湖 , Kunminghu)에 유유히 떠있는 석방(石舫)
[중국, 북경] 서태후의 여름 별장 이화원(頤和園, Summer Place)
FEB 2014
Li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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