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810일부터 814일까지 정곽식과 남선우, 김정원 세 명이 함께 아이거 북벽을 오른 45일간의 처절한 등반기를 다룬 <영광의 북벽>은 한국의 산악문학 넘버원으로 꼽히며 유명한 책이라고 등산학교 정규반 시절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아이거 북벽은 알프스 3대 북벽 중 하나로 수많은 클라이머들의 목숨을 앗아가 악명이 높다. 라인홀트 메스너도 이곳을 험난한 등반지 중 하나로 꼽았다고 한다. 이 지옥같은 험난한 등반지를 오르는 처절한 등반기를 읽으며 흡사 눈 앞에 펼쳐진 바위와 얼음 속에서 내가 같이 오르고 비박을 하고 있는 듯 빨려들어 갔다.

 

작가가 아이거 북벽에 오르기로 마음을 먹은 이유, 그리고 그곳을 향해가는 그의 마음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1981년 사랑하는 선배와 동기를 잃은 그는 이듬해 그들이 오르려고 했던 북벽으로 원정을 떠난다. 회사의 뉴욕 지사에 근무하며 홀로 떨어져 있던 그는 좋아하던 술도 끊고 5개월 동안 열심히 훈련한다. 그리하야 1982721일 취리히 공항에 도착하고, 뮌헨의 기차역에서 한국에서 날아온 동기들을 만난다. 함께 만나 재회를 하고 함께 인터라켄 행 기차에 올라 그린델발트에 도착한다. 이어 알핀글렌의 통나무집 베이스 캠프에서 날씨의 변화를 보며 북벽의 등반을 준비한다. 클라이네 샤이데크에서의 며칠이 얼마나 설레고 또 긴장되었을까.

 

810일 아침 드디어 최소한의 짐만을 꾸려 북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등반 전에는 (미끄러질까봐!) 미역국을 잘 먹지 않는데, 이 거대한 북벽 등반에 앞서 아침으로 미역국을 먹었다고 하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졌다. 1필라, 힘든크랙, 힌터슈토이서 트래버스, 1설원, 램프, 신들의 트래버스, 거미, 엑시트크랙, 그리고 정상 설원으로 이어지는 등반기를 읽는 내내 나는 이 세 명의 등반대와 함께 낙석과 낙뢰를 피하는듯 함께 긴장했다. 이 지옥같은 험난한 등반지를 오르는 힘든 과정 중에서 느끼는 감정들을 손에 잡힐 듯 상세히 묘사해 놓았고, 몇 장 곁들여진 등반 사진들을 통해 그 생생함은 배가되었다.

 

낙뢰 속에 고통받으며 마지막 비박을 마치고, 814일 오전 830분 드디어 그들은 정상에 섰다. 그러나 정상에 섰다는 희열과 행복감보다는 함께 오른 두 친구와 울컥 치밀어 오르는 정만 느껴졌다고 고백하니, 생사를 함께한 파트너들에 대한 끈끈한 동지애에 존경심이 가져졌고, 한편으로는 그런 파트너를 만나 훌륭한 등반을 이루어낸 그가 부러워졌다.

정상에서 그들은 지난해 이곳을 오르려다 미쳐 오르지 못하고 산화한 두 명의 사진을 묻고 하산한다. 오르는 것만 생각하고 내려올 생각흔 하지 않은 나머지 하산을 위한 산악열차(기차)표를 구입할 돈도 없었던 그들은 국제적 외상을 하고 안전하게 하산을 마친다. 이 책은 감동과 극한 스토리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익살스런 성격까지 느낄 수 있는 훌륭한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또 하나 감명 깊었던 부분은 등반보고서의 형식이다. 지금껏 나는 이처럼 훌륭한 등반을 한 적은 없지만 앞으로 어떤 작은 등반에서라도 등반보고서를 꼭 쓰리라 마음을 먹었다. 북벽을 오르기 위해 얼마나 많이 고민하고 공부하고 자료를 수집했는지, 코스의 개념도와 루트의 정보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장비목록과 경비 명세까지 후에 북벽에 오를 사람들이 교과서로 삼아도 되만한 훌륭한 정보지임에 틀림없다. 물론 세월이 흐르고 장비는 발전하여 예전의 방식과는 다를 수 있겠지만 누구든 아이거 북벽을 오르려 하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이책을 일독하라 추천하고 싶다.

말미에 각종 참고문헌을 참고하며 북벽에서 생을 달리한 수십명의 클라이머들의 사고 경위와 위치를 상세히 명기해놓은 북벽의 공동묘지와 아이거 북벽에서의 죽음들 부분에서 또 한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광식 선배님은 훌륭한 산악인일뿐 아니라 학자로서 작가로로서도 후배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 본문 중에서

 

# 또 후배를 떠나 보내며 8~9p.

나는 그가 자신이 못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안 하고 원정을 나섰다고 짐작했다. 30년 전 나는 못 돌아올 것을 대비해 내 자리에 앉을 후임자를 위해 책상 서랍 속의 먼지까지 걸레로 닦아내고 떠났었는데.... 난 무표정한 표정의 주민등록증 사진에 절하며 내 영정사진은 내 마음에 드는 것으로 미리 준비해놓겠다고 결심했다.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막걸리에 조금은 취해있는, 사람들이 금방 알아볼 만한 익숙한 내 모습의 사진으로 말이다.

<영광의 북벽>이 화근이다. 금서로 지정되어야 할 위험한 책이다. (중략) 늦가을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눈부시게 쏟아지는 햇빛은 두껍게 깔린 낙엽에 반사되어 세상을 온통 붉게 물들이고 있다. 산에나 가야겠다, 내 영정사진 찍으러....

 

# 재회주(再會酒) - 41p.

그리고 북벽 등반은 몇 명이 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명이 좋겠다는 선우의 의견과 세 명이 좋겠다는 정원이와 나의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각기 모두 장단점이 있다. 아이거 북벽같이 일기가 빨리 변하고 낙석이 심한 곳에서는 두 명이 등반할 경우 속도가 빨라 그만큼 위험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고, 세 명일 경우는 한 명이 낙석이라도 맞아 부상당했을 때, 다른 두 명이 도와 빨리 탈출할 수 있어 적어도 전원이 몰사할 가능성이 줄어든다는 것이 장점이다.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도 동기들이 모였으니 모두 같이 오를 수 있기를 원했을 따름이다. 인정에 끌리지 않는 냉철한 대원 선정의 당위성을 인정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 어찌 산만을 야속타 하리오

67p.

주방장 정원이가 짠 식단에 오늘의 중식은 빈대라고 나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영배 형의 없는 살림에 빈대붙어서 스파게티를 얻어 먹음으로써 계획을 충실히 따랐다.

68p.

우리는 산에서 참으로 크나큰 즐거움을 얻는다. 그러나 산은 또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아가서 그 즐거움의 양만큼 똑같은 슬픔을 안겨주니 어찌 산만을 야속타 하리오.

젖어오는 눈을 가스가 희미하게 덮여 있는 북벽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 ‘제비의 집으로 쏟아지는 별 123p.

현재 날씨는 무척 좋았다. 바로 앞쪽으로 북두칠성과 북극성이 보였다. 북벽 안에서 내다보는 밤하늘에도 별들은 쏟아질 듯이 무수히 많았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밤이었다.

 

# 북벽의 아침은 햇살과 함께 오지 않는다 137p.

북벽의 아침은 햇살과 함께 오지 않는다. 먼 발치의 클라이네 샤이데크가 빨갛게 밝아오며 시작하는 것이다. (중략) 어제 2설원을 계속 쳐올라오느라 나의 새 비브람까지 젖어 양말을 갈아 신고 자지 않을 수 없었으나 다시 젖은 양말로 갈아 신는다는 게 끔찍하게 생각되어 마지막 남은 마른 양말 위에 언 비브람을 신었다.

 

# 얼음 위에 매달린 빨간 시체 145~146p.

20m쯤 위에 빨간 우모복을 입은 사람이 얼음 위에 얼어붙은 채로 죽어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적인 공포감으로 눈을 뗄 수조차 없었다. 어찌할 것인가? 지나쳐서 올라가는 수밖에…….

한 스텝 한 스텝 오르면서 나는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북벽을 오르다가 비참하게 죽은 클라이머이며 어쩌면 우리의 장래 모습에 지나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점차 가까워지면서 그것이 단지 버려진 빨간 슬리핑 백이었음을 확인하고서는 애써 그렇게 생각할 필요도 없어졌다. 곧 이어 유마링으로 오르던 선우가 무엇이냐고 공포에 젖은 목소리로 물어 왔을 때 나는 간단하게 사람!” 이라고 대답하여 그가 받을 쇼크를 즐겼다.

 

# 대답 없는 선우 164p.

친구의 죽음을 아주 쉽게 받아들이는 습성이 몸에 배는 애처로운 클라이머들 중의 하나가 되어버린 나 자신을 잠시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다.

 

# 손가락 끝에서 올라가는 불 191p.

이 모든 현상은 주위에서 번개가 한 번 번쩍이면 모조리 없어지고 곧 이어 천둥소리가 들렸다. 그러다가 몇 초만 있으면 매미소리가 들리고 여기저기에서 빛의 기둥이 올라가기 시작했다(이 신비로운 빛이 St. Elmo’s Light 혹은 St. Elmo’s Fire라고 불린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이런 것이 있다는 것조차 들은 적이 없었다).

 

# 또 한번의 추락 200~201p.

, 임마! 죽으려면 거의 다 가서 죽어라. 너야 죽어도 상관 없지만 저 아래까지 메고 내려갈 생각 하니 끔찍하다.”

옆에 있던 선우도 한마디 거들었다.

! 너 죽으면 네 장비 내가 다 가져도 되냐?”

 

# 나의 사랑하는 동기들에게 210~211p.

사랑하는 두 명의 산 친구를 잃었을 때 우리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들을 대신해 오르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과연 이 벽을 살아서 벗어날 수 있을까라는 끈질긴 의구심에서 비롯된 절망감을 이겨내고 올라서고야 말았다.

동상과 굶주림의 고통 속에서 하강하면서 나는 북벽을 저주했고 나의 생의 전부라고 항상 자신 있게 이야기하던 클라이밍이라는 것을 증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제 다시는 클라이밍은 안 하리라고 이를 악문 지 하루가 채 가기도 전에 나는 아이스 해머를 끌어당겨 녹을 닦아내기 시작했고, 우리의 다음 원정은 어디로 할까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원했다.

내가 갈 곳이라곤 산밖에 없으므로…….

 

 

<영광의 북벽>

정광식

이산미디어, 2011

영광의 북벽
국내도서
저자 : 정광식
출판 : 이산미디어 2011.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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