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양장)
국내도서>비소설/문학론
저자 : 우광호
출판 : 여백미디어 2011.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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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뷰

지난해 말, 지인으로부터 '울지마, 톤즈'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에 대해 소식을 접했다. 그리곤 그 주말 시간을 내어 그 영화를 조조로 보았다. 이태석 신부님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 만남의 잔향은 오래도록 가시지 않았고, 며칠 후 신부님께서 직접 집필하셨다는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를 구입했다. 몇 시간 남짓 앉은 자리에서 한달음에 책을 다 읽어 내려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신부님과의 두 번째 만남에서도 주책 맞게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알려진 신부님의 아름다운 향기. 비단 천주교 신자뿐 아니라, 이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이태석 신부님을 모르는 이보다 아는 이들이 더 많아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신부님의 향기는 더 깊고 진하게 우리 삶에 내려 앉았다.

신부님의 어린 시절은 그저 부산 송도의 가난한 집 학생이었다. 타고난 성실함으로 성당에 나가며 열심히 공부를 했고 의대에 진학했다. 전도유망한 그의 미래를 믿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시 신학의 길에 올랐으며 사제 서품을 받는다. 아들을 하느님께 바친 어머니의 심정은 오죽 아팠을까, 하지만 신부님의 어머니 또한 강한 분이셨다. 신부님은 사제 서품을 받고 곧장 아프리카 수단으로 향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큰 사랑을 실천하러 떠난 것이다.

이태석 신부님의 조건 없는 사랑과 아름다운 삶에 대해서 혹자들은 성인이라 칭하기도 하고 혹자들은 바보라 부르기도 한다. 본인의 몸을 돌볼 겨를도 없는 아프리카의 수단, 톤즈에서의 무거운 삶의 무게를 그 분은 행복이라 하셨다 한다. 그의 삶의 끝자락을 잠시 스친 최인호 소설가 역시 이별의 아쉬움을 책의 말미에 실었다. 육신은 허물을 벗고 자유와 기쁨이 충만한 곳으로 가셨다고 한다. 향기는 우리들에게 남긴 채...

이제 이태석 신부님이 떠나고 없는 곳에, 대한민국의 우경민 신부님이 톤즈를 지키고 계신다고 한다. 학교를 세우고 정립하는 일을 이어 아이들을 돌보고 청빈의 삶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태석 신부님의 향기가 아직 우리 가슴을 울리고 있거늘. 우리들은 스스로의 삶의 무게가 무겁다는 핑계로 잠시 감사하고 기도하는 마음을 가질 여유를 갖지 못한 건 아닌지. 많은 것을 손에 쥐려고만 하는 마음으로 너무도 바쁘게 내달리기만 한 것은 아닌지. 지금이라도 잠시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그 분의 향기와 톤즈의 어린 영혼들의 애달픈 삶을 생각해보자. 


■ 이태석 신부

1962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경남고등학교와 인제대학교 의과 대학을 졸업했다. 군의관으로 군복무를 마친 뒤 1991년 가톨릭 수도회인 살레시오회에 입회하여 성직자의 길을 걸었다. 1992년부터 광주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공부하고 1997년에 이탈리아 로마로 유학을 떠났다. 2001년 서울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그 해 11월 아프리카 수단 남부의 톤즈로 향했다.

오랜 내전으로 폐허가 된 톤즈에서 그는 선교활동을 펼치는 한편, 의료시설이 전무한 그곳에 병원을 짓고 오지 마을을 순회하며 이동진료를 하는 등 의사로서 활동했다. 그리고 톤즈의 아이들을 위해 학교 건물을 재건하고 교사들을 영입하여 고등학교 과정까지 가르치는 학교를 세웠다. 이태석 신부가 세운 돈 보스코 초중고등학교는 수단 남부에서 가장 실력 있는 학교로 알려졌다. 뿐만 아니라 내전과 궁핍으로 상처가 깊은 아이들의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음악을 가르치면서 브라스 밴드를 구성했다. 이 브라스 밴드는 뛰어난 실력으로 유명세를 떨치며 정부행사를 비롯한 각종 행사에 초청되어 공연을 했다.

2008년 11월, 휴가와 모금활동을 겸하여 한국에 입국했다가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수단을 돕기 위한 활동을 쉬지 않았다. 병을 이겨내고 수단으로 돌아가리라는 희망을 끝까지 잃지 않았지만, 결국 2010년 1월 14일 새벽에 4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가 있으며, 수단에서의 활동을 다룬 다큐멘터리 <울지마, 톤즈>가 영화관에서 상영되어 많은 이들의 가슴을 적셨다. 2005년에 인제인성대상과 2007년 보령의학 봉사상, 2009년 한미자랑스러운의사상을 수상했으며, 2011년 7월 봉사와 선행의 공로가 인정되어 국민훈장 무궁화장에 추서되었다. 


■ 본문 중에서

# 고통의 성자, 다미안 신부 - 44p.
"진실로 내 인생은 행복이었습니다."
"사랑은 함께 있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고통까지 함께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다미안 신부는 하와이 한센병 환자들의 모습에서 가장 큰 행복을 발견했다. 이태석 신부도 아프리카 수단의 고통을 껴안으며 행복을 느꼈다고 했다. 다미안 신부와 이태석 신부가 선종했을 때, 두 사람 모두 마흔여덟 살이었다.

# 첫 서원 그리고 첫 만남 - 106p.
나이로비는 유럽 도시의 축소판이었다. 높은 빌딩들이 즐비했고, 길거리는 말끔하게 포장되어 있었다. 공원도 있었고, 쇼핑몰도 갖추어져 있었다.
'이건 아니다......'
나이로비에서는 '아프리카의 아픔과 상처'를 찾을 수 없었다.

# 눈물의 첫 미사 - 113p.
세상의 모든 '처음'은 설렌다. 첫 사랑이 그렇고 첫 직장이 그렇다. 특히 의미 있는 인연과의 첫 만남은 가슴 한 구석에 평생 동안 아련하게 남는다.

# 아프리카에 살았기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 133p.
인간의 삶에는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성장할 수 없다. 십자가의 고통 없는 부활은 불가능하다. 죽어야 부활할 수 있다. 형설지공의 고통 없이는 학업의 성취도 없다. 뼈를 깎는 훈련없이 강인한 군인이 될 수 없다. 산고 뒤에 새 생명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울리는 법이다. 험한 파도가 최고의 뱃사람을 만든다. 그래서 기원전 그리스의 극작가 아이스킬로스는 "고통스러운 기억에 우리는 저항하지만 그럴 필요 없다네. 고통과 함께 성숙함도 찾아오니까"라고 노래했다.

- 144p.
한국에서는 손만 뻗으면 시원한 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또 언제든지 시원한 콜라를 마실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모릅니다. 길을 가다 배가 고플 때면 어디서든지 쉽게 식당을 찾아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습니다. 전기는 또 어떻습니까? 아프리카에선 전기 쓸 때는 휴대폰 배터리 충전하듯이 늘 신경을 써야 합니다. 한국에선 전기의 감사함을 느끼기 힘듭니다. 밤에도 늘 환하게 생활할 수 있습니다.
매일 바치는 '보다 많이 가지게 해 달라'는 기도 대신 가끔은 '보다 적게 가지게 해 달라'는 기도가 우리들에겐 더 어울릴 듯합니다.

# 톤즈 돈 보스코 학교의 기적 - 165p.
톤즈의 아이들에게는 희망이 없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현재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이태석 신부는 가장 먼저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다. 톤즈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만큼이나 아름다운 희망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수단에는 한국에서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움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엄청난 수의 별입니다. 공해가 없어서 밤하늘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밤이 되면 별빛이 하늘을 빈 틈 없을 정도로 꽉 채웁니다. 저는 수단에서 은하수를 처음 봤습니다. 별빛이 마치 우유를 엎질러 놓은 것처럼 흘러갔습니다. 또 다른 아름다움은 아이들의 눈입니다. 아이들의 눈이 아주 큽니다. 어떨 때 보면, 건드리면 터질 것 같습니다. 그 눈은 많은 것을 담고 있습니다. ..."


<나는 당신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우광호 지음
여백미디어, 2011 

고(故) 이태석 신부님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입소문으로 알음알음 듣고 영화를 예매를 했다. "울음으로 울음을 달래는 영화. 이 영화, 별점으로 평가하는 것 자체가 죄송스럽다." 한 포털사이트에 남겨진 영화평이었다. 영화가 시작하면서 부터 끝나는 그 순간까지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중간에 "사랑해 당신을.." 노래가 흘러나오던 순간에는 그만 꺼이꺼이 소리를 내며 울고 말았다. 덕분에 주말 내내 밤탱이처럼 부은 눈으로 다녀야 했지만, 내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숙연한 당신의 삶에 절로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홀어머니 아래 가난한 10남매의 어린 시절을 잘 견뎌내고 신부님은 의대에 진학했다. 그럼에도 신부의 삶을 선택하고 다시 아프리카라는 땅을 선택한다. 나름 열심히 살고있다고 자부하는 내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는 순간이었다. 앞만보고 달리는 치열한 삶엔 향기가 없다. 
암을 선고받던 날, 그리고 일주일 후. 보통 사람이라면 마음조차 추스르기 어려웠을 텐데 신부님은 아무에게도 사실을 알리지 않고 수단 어린이를 위한 기금마련을 위해 작은 음악회를 예정대로 치뤄낸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다른 이들에게 웃음을 주고 간 신부님. 그야말로 성인의 삶이다. 당신의 아름다운 향기에 수 많은 이들이 또 다시 아름다운 향기를 머금고 살아갈테지요. 

내전의 땅 수단, 그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절망의 황무지 톤즈를 아시나요? 
내전으로 분단된 남수단의 가난한 원주민 마을 톤즈. 그곳엔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딩카족이 산다. 이마에 선명한 V 칼자국을 낸 용맹함과 강인함이 상징인 그들에게 눈물은 가장 큰 수치다. 어린아이들 눈물을 흘리지 않는, 그런 그들이 쫄리 신부님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다며 흐느껴 울었다. 
 
아버지라 불리운 수단의 슈바이처, 쫄리 신부님
쫄리 신부는 세레명 요한(John)에 성 이(Lee)를 그들의 발음으로 부른 애칭이다.  하루에도 300여 명이 넘는 환자를 보고 밤에 찾아오는 환자들에게도 문을 두번 두드리게 하는일이 없었다. 쫄리 신부님을 만나면 살 수 있다는 믿음에 환자들은 100km 떨어진 곳에서도 그를 보기 위해 사나흘을 걸어왔다. 한국에서 그들을 돕기위해 간 의사가 아니라 수단, 현지인이 되어 그들을 어루만지셨다. 이런 신부님을 그들은 아버지와 같다고 했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 정기적으로 한센병 환자들의 마을에 이동 진료를 나갔는데, 발이 제각각인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손수 일일이 발모양을 그려 개별 맞춤 가죽 샌들을 만들어 주었다. 신부님은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항상 즐겁게 사는 한센병 한자들과 지내는 시간에 돌려받는 행복과 가르침이 더 크다고 말씀하신다.

꿈을 현실로, 희망을 기적으로 만들어낸 이야기 
너무 가난해서 꿈조차 가질 수 없던 아이들을 위해 신부님은 성당보다 학교를 먼저 짓기로 결심한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꿈만 꾸는 사람과 꿈을 현실로 만드는 사람. 쫄리 신부님은 한다면 한다는 사람이었다. 12년 과정의 톤즈 돈보스코 초.중.고등학교가 설립되었고 남부 수단에서 가장 실력있는 학교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진료가 없는 날엔 신부님이 직접 수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소년병으로 마음이 다쳤던 아이들은 뜨거운 배움의 열기속에 꿈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본인의 어린시절 지독히도 가난했던 힘든 어린 마음을 잡아주던 음악을 떠올려 톤즈 아이들의 상처받은 어린 마음도 치유해주고자 하는 꿈을 꾼다. 그리하여 남수단 최초 35인조 브라스 밴드를 만들었다. 잠자는 시간을 쪼개 악보도 손수 만들었으며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치기 위해 스스로 설명서를 보고 익혀 모든 악기를 당신이 먼저 배웠다. 남수단의 유일한 브라스밴드는 정부 행사가 있을 때마다 초청을 받았다. 아무런 꿈도 가질 수 없던 척박한 땅의 아이들에게 브라스밴드는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 
신부가 아니더라도 의술로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데 한국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많은데 왜 아프리카까지 갔냐는 질문을 자주받는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다만, 내 삶에 영향을 준 아름다운 향기가 있다.
가장 보잘것없는 이에게 해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프리카에서 평생을 바친 슈바이처 박사, 어릴 때 집 근처 고아원에서 본 신부님과 수녀님들의 헌신적인 삶, 마지막으로 10남매를 위해 평생을 희생하신 어머니의 고귀한 삶, 이것이 내 마음을 움직인 아름다운 향기다.




<울지마 톤즈(http://www.dontcryformesudan.com/)> 
감독 구수환, 글 윤정화, 나레이션 이금희 
KBS한국방송,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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