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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터에서] 마씨(馬氏) 집안의 가족사에 담긴 20세기 한국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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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작가의 신작 소설 '공터에서'. 김훈 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도 읽어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소설의 배경은 192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작가가 살아온 근현대사를 아우르는 시간이다. 


작가의 어머니는 실제로 1.4후퇴 때 삼 남매를 데리고 부산까지 내려갔는데, 다행히 세 남매 모두 죽지 않고 살았다. 연소득 80달러의 가난한 나라를 살았던 작가가 말한다. 필리핀의 원조를 받아 살던 시대였다고. 폭력과 야만, 억압, 박해, 그리고 차별이 일상이던 그 시대. 비리와 모순의 세계. 가난과 억압의 울분. 그 모든 기억들이 몸속에 딱지처럼 붙어 있다고. 그것이 평생 작가를 괴롭혀 왔고, 그런 것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게 미성숙한 것일 수 있겠다는 느낌. 이것을 빨리 극복하고 없애버리고 싶다는 생각에 소설을 써서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졌고, 덕분에 우리는 김훈 작가의 문장으로 근현대사를 다시 읽는다.


다음 세대인 마장세와 마차세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어머니의 아버지의 시간들. 사소한 것들까지 손에 잡힐 듯 상세한 묘사를 따라가다 보면 복선처럼 의심되는 장면이 수차례 등장한다. 마차세가 오토바이 배달 일을 하는 장면의 묘사에서는 눈길에 사고가 날 것만 같은데 다행히 사고는 일어나지 않는다. 큰 사건이 날 것 같은 전개의 말미에 큰 사건은 없었다. 우리의 삶이 있을 뿐이었다. 결국 마장세는 고물 처리하는 과정의 비리로 구속되었지만 그저 잔잔한 사건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아들의 시선으로 사망에 이르는 아버지 마동수를 바라보던 떨쳐버리고 싶은 꼬부라진 기억들. 치매에 걸린 어머니 이도순이 죽기 전 꺼내든 초라한 기억들. 그 기억들을 타고 넘는 과거의 상흔들이 아프게 다가온다. 흥남부두에서 젖먹이와 남편을 잃은 어머니 이도순 삶. 일제시대 상해에서 해방 이후 부산에서 전쟁통에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던 아버지 마동수의 삶. 


삶의 터전을 떠나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던 우리네 아버지와 어머니 세대의 애달픔을 이도순과 마동수의 삶에서 읽었다. 그리고 아직도 남루한 인간의 비애는 우리 삶을 떠돈다.



■ 본문 중에서


# 아버지 - 9p.


외출에서 돌아와서 안방 문을 열었을 때, 마차세는 아버지의 꼬부라진 육신을 보고 죽음을 직감했다. 아버지의 사체는 태아처럼 보였다. 죽은 육신의 적막은 완강했다. 돌이킬 수 없고, 말을 걸 수 없었다.

아, 끝났구나, 끝났어...... 마차세 상병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의 생애는 그 사람과 관련이 없이, 생애 자체의 모든 과정이 스스로 탈진되어야만 끝나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사람이 죽어도 그의 한 생애가 끌고 온 사슬이 여전히 길게 이어지면서 살아 있는 사람들을 옥죄이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마차세는 예감했다. 끝이 아닐 수도 있다는 예감은 끝났다는 사실보다 더 절박했다.



# 세느주점 - 33p,


시화호에서 새들을 보면서 너를 생각했어. 너의 생명을 흐르는 시간과 나의 생명을 흐르는 시간이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만나는 것인지, 섞이는 것인지를 생각했고, 그런 생각을 화폭에 그려보려는 생각을 했어. 새들 때문에 그런 생각을 했을 거야.

거기도 새들이 많겠구나. 새를 보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생각해 줘. 그만 쓸게. 니가 있는 고지에 어서 봄이 왔으면 좋겠다. 그때는 호수의 새들이 다들 돌아가고 다른 새들이 와 있겠지. 



# 하관(下棺) - 46~47p.


이도순이 아들을 쳐다보았다. 눈동자에 시선의 방향이 없었다. 마차세는 어머니의 눈이 지나간 시간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차세는 어머니의 시선을 피했다.

이도순은 벽 쪽으로 돌아누워서 울었다. 터져 나오는 울음과 울음을 누르려는 울음이 부딪치면서 울음이 뒤틀렸다. 입 밖으로 새어 나온 울음이 몸속에 쟁여진 울음을 끌어냈다. 몸 밖의 울음과 몸 안의 울음이 이어져서 울음은 굽이쳤고, 이음이 끊어질 때 울음은 막혀서 끽끽거렸다. 그 울음은 남편과 사별하는 울음이 아니라, 울음으로써 전 생애를 지워버리려는 울음이었으나 울음에 실려서 생애는 오히려 드러나고 있었다. 몸속에 저렇게 맹렬한 폭발성 에너지가 쌓여서 조용한 일상이 되어왔던 어머니의 생애를 마차세는 짐작할 수 없었다. 돌아누운 이도순의 등뼈가 흔들렸다. 말리거나 달랠 수 있는 울음이 아니었다. 



# 서울 - 104~105p.


아편은 마동수의 목숨에서 시간을 제거시켰다. 약 기운이 돌 때 마동수는 시간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무시간(無時間)의 벌판에 누워 있었고, 약 기운이 풀리면 무릎뼈가 톱으로 썰어내듯 저렸다. 일본이 패전했다는 소식에 중국인들이 거리에서 아우성칠 때도 마동수는 그 무시간의 벌판에 침을 흘리며 누워 있었다. 일본 패전의 결과로 조선이 독립된다는 것을 마동수는 며칠 후에 알았다.



# 부산 - 114~115p.


서울이 다시 위태로워지자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전선의 일진일퇴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경거망동하지 말고 은인자중하라고 대통령은 말했다. 기자들이 서울 시민은 다시 피난을 가야 하는지를 대통령에게 물었다. 그것은 각자 임의로 결정할 일이고 정부가 간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대통령은 말했다. 피난은 명령도 아니고 권유도 아니며, 잔류 또한 명령도 아니고 권유도 아니다, 갈 곳이 있고 갈 힘이 있는 사람은 피난을 가는 것도 무방할 것이며, 서울에 남아 있는 것도 무방하겠지만, 옥쇄주의가 반드시 현명하다고 할 수도 없다고 대통령은 말했다. 다만, 피난을 가기로 했다면 날씨가 추우므로 이부자리와 식량을 지참하는 것이 좋겠고, 피난 가는 사람들은 질서를 지켜서 문명한 국민의 성숙도를 우방 여러 나라에 보여달라, 또 피난을 가거나 서울에 잔류하거나 근신자제하고 태연자약하라고 대통령은 당부했다.

계엄사령부 민사부도 대통령 담화에 따른 지침을 발표했다. 피난 가는 사람들은 간선 도로를 군에 양보하고 이면 도로나 논밭 길을 이용해 달라, 피난민들은 부산, 대구 등 대도시로 집중하지 말고 지방 소읍으로 산개하라, 피난 갈 때 두고 가는 김치, 간장, 된장, 메주는 군부대에서 이용할 수 있도록 포장을 해놓고 떠나라, 피난을 가지 않는 가정들은 마당에 방공호를 깊이 파라, 일선과 후방이 한 덩어리가 되어 모든 물자와 언동을 전력(戰力)으로 귀일(歸一)시키라고 계엄사는 말했다.



# 베트남 - 156~157p.


마장세는 구두를 닦아주고 받은 돈으로 거리에서 풀빵이나 꽁치구이를 사 먹었다. 점심때까지 번 돈이 없어서 오후 네댓 시쯤에야 허기를 면하는 날이 많았다. 배가 고프면 창자에서 찬바람이 일었고 몸속이 비어 투명했다. 배가 고프면 눈을 가늘게 뜨게 되는데, 눈꺼풀이 떨려서 세상이 흔들렸고 가까운 것들이 멀어 보였다. 배가 고프면 후각이 민감해져서 거리의 사람 냄새나 물이 오르는 가로수의 풋내가 코끝에 어른거렸다. 배가 고프면 배고픔이 몸속에 가득 차면서도 몸이 비어 있는 느낌이었는데, 음식 냄새가 코를 스치면 배고픔은 창끝처럼 뾰족해져서 창자를 찔렀다. 배가 고프면 마음이 비어서 휑했고, 그 빈 마음속에 배고픔이 스며 있었다. 배고픈 저녁에 마장세는 저녁노을을 보면서 배고픔은 노을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배가 고프면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맛의 헛것이 빈 마음에 번져 있었다. 풀빵은 너무 멀게서 깨물면 속이 흘러내렸다. 마장세는 풀빵을 먹을 때 입을 위로 치켜들고 흘러나오는 내용물을 빨아 먹었다. 풀빵은 멀겠지만 온기가 배 속으로 퍼졌다. 온도도 먹이가 될 수 있다는 걸 마장세는 풀빵을 먹으면서 알았다. 온도는 배가 부르지는 않았고 온도가 배 속으로 퍼지면 메마른 창자가 꿈틀거리면서 창자는 더욱 맹렬히 건더기를 요구했다.



# 당신의 손 - 207~208p.


바강희는 아이들이 손바닥으로 느끼는 소나무 껍질의 느낌이 아이들의 마음에 깊이 저장되어 있다가 종이 위에서 선이나 색으로 드러나기를 바랐다. 느낌의 내용을 말로 타인에게 전해 줄 수는 없었고 느낌을 느끼게 해주는 것만이 교사의 일이라고 박상희는 생각했다. 박상희는 아이들을 데리고 토끼, 다람쥐 사육장 앞에 가서 동물들의 손짓, 발짓, 표정과 움직임을 들여다보도록 했다. 박상희는 아이들이 다람쥐와 토끼의 몸놀림에서 생명의 느낌을 얻기를 바랐다. 박상희는 또 유자 껍질, 조개 껍데기, 달걀 껍데기를 교실에 가져가서 아이들에게 만져보도록 했고, 눈을 감고 서로 얼굴을 더듬어보도록 했다.

ㅡ 선생님은 손으로 만져본 느낌을 그릴 수가 있나요?

라고 중학교 3학년 여학생이 물었다.

ㅡ 그릴 수 없어도, 그 느낌을 가지고 있어야 그림을 그릴 수가 있다.

라고 박상희는 대답해 주었지만, 전달되거나 이해될 수 없는 말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박상희는 아이들이 종이나 캔버스에 선을 긋고 물감을 칠할 때 그 종이나 캠버스를 빈 공간이 아니라, 이 세상으로 받아들여주기를 바랐으나 그 바람 또한 이해받기는 어려웠다. 어머니들이 박상희의 수업 방식에 항의했다.



# 어머니 - 243p.


이도순이 비척거리면서 서랍을 열어보고 화장실 안을 기웃거렸다. 이도순은 흥남부두에서 잃어버린 젖먹이 딸을 찾고 있었다. 길녀야 어딨니...... 이도순은 커튼 뒤쪽을 들여다보았다. 마차세는 어머니를 말리지 못했다. 그 아이의 이름이 길녀였구나...... 어머니는 어째서 한평생 입 밖에 낸 적이 없는 그 이름을 말년의 암흑 속에서 기억해 내는 것일까. 어머니의 치매는 망각된 고통의 기억을 극사실적으로 재생시키고 있었다. 길녀는 여자 이름이니까, 길녀가 살았으면 내 누나였겠구나...... 마차세는 길녀가 어머니의 치매속으로 살아 돌아오지 않기를 빌었다. 이도순은 침대 밑을 들여다보았다. 마차세는 고개를 돌렸다.



# 기별 - 270~271p.


임신의 기별은 몸속 깊은 곳에서 움트는 이물감이나 어지럼증 같았다. 기별은 멀고 희미했는데, 점차 다가와서 몸 안에 자리 잡았다. 낯선 것이 다가오고 또 자라서 몸 안에 가득 퍼져가는 과정을 박상희는 조용히 들여다보았다. 몸속의 어두운 바다에 새벽의 첫 빛이 번지는 것처럼 단전 아래에서 먼동이 텄다. 고등학교 여름방학 때 놀러 갔던 동해의 아침 바다는 어둠이 물러서는 시간과 공간 안으로 수평선 쪽에서 솟아오르는 빛의 입자들이 퍼졌고, 새로운 시간은 살아 있는 살끼리 서로 부비듯이 다가왔다. 박상희는 스며서 가득 차는 빛들을 떠올렸다. 임신은 몸의 새벽을 열었다. 가끔씩 안개 같은 것이 목구멍을 넘어왔다.

몸속을 덮은 안개 속에서 해독할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수런거리면서 이따금씩 가까이 다가왔다. 아직 발생하지 못한 세포들이 숨 쉬는 소리 같기도 했고, 우주공간을 날아가는 별들의 소리 같기도 했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무어라고 말하고 있었고, 말하고 있었지만 아직 말이 되어지지 않은 소리였다.



# 작가 후기


이 작은 소설은 내 마음의 깊은 바닥에 들러붙어 있는 기억과 인상의 파편들을 엮은 글이다.

그 기억과 인상들은 오랫동안 내 속에 서식하면서 저희들끼리 서로 부딪치고 싸웠다. 사소한 것들의 싸움을 말리기가 더욱 힘들었다.

별것 아니라고 스스로 달래면서 모두 버리고 싶었지만 마침내 버려지지 않아서 연필을 쥐고 쓸 수밖에 없었다.

당대의 현실에서 발붙일 수 없었던 내 선대 인물들에게서 들은 이야기와 그들의 기록, 언행, 체취, 몸짓, 그들이 남긴 사진을 떠올리면서 겨우 글을 이어나갔다. 이 글을 세상에 내놓으면서, 나는 그 기억과 인상들이 이제는 내 속에서 소멸하기를 바란다.

더 길게 쓰고 싶었지만, 기력이 미치지 못했다. 수다를 떨지 말아야 한다고 늘 다짐하고 있다. 쉬운 일은 아니다.


나의 등장인물들은 늘 영웅적이지 못하다. 그들은 머뭇거리고, 두리번거리고, 죄 없이 쫓겨 다닌다. 나는 이 남루한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늙기가 힘들어서 허덕지덕하였다. 의료비 지출이 늘어났다. 지금은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온 느낌이다. 여생의 시간을 아껴 써야 할 것이다. 



<공터에서>

김훈

해냄출판사, 2017


공터에서
국내도서
저자 : 김훈
출판 : 해냄출판사 2017.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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