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 무엇이냐?" 라는 질문에 대답하기를, 어느 위대한 철학자는 "밀크 스프와 편안한 잠자리, 거기에 육체적인 고통이 없을 것. 그것도 과하다." 라고 말한 바 있다. 우리는 거기에 더 부연을 한다. 마른 의복, 믿을 수 있는 하켄, 맛있고 생기가 돋아나는 느낌을 주는 음료만이 아이거 북벽에서의 최대 행복이라 하겠다. 진정으로 우리는 행복했다. - 64p.
우리들은 때때로 행복을 체험한다. 그때는 그 행복이 무엇이었던가를 확연히 알지 못한다. 한참 지나고 난 후라야 비로소 그때의 행복이 어떤 것이었던가를 깨닫게 된다. 그때 나는 행복하였노라고. 더욱이 지금 우리들의 비박지점에서 나는 행복했다. 그리고 그 행복이 어떤 것인가를 나는 잘 알고 있다. 아이거 북벽에서의 이번 비박지는, 그 장소만 가지고 말하면 카스파레크와 나에게는 세 번째의 비박이었으나, 가장 옹색한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즐거웠다. 어째서 그렇게 느껴졌을까? 그 이유는 우리 누구나 느낄 수 있었던 고요와 안온한 마음, 즐거운 정, 그리고 뜻 깊은 만족감에 있었다.
이미 지나간 몇 시간 동안, 만약 우리들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낙오가 되거나 단 1초라도 용기를 잃었다면... 만약 한 사람이라도 개인적으로 자기를 지키려는 본능에서 동지들의 곁을 떠나 혼자 살려는 마음을 먹었다 하더라도 그럴 때 다른 동지들은 아무 소리 안 하고 잠자코 있을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동지들과 함께 있을 때의 용솟음치던 유쾌한 기분을 동네로 내려간 자는 느낄 수 없겠지. 그렇기에 우리들은 이렇게, 이 아이거 북벽의 비박지에서 다함께 상쾌한 기분을 음미하고 있는 것이다. - 111p.
때는 오후 3시 30분. 1938년 7월 24일의 일이었다. 우리들은 아이거 북벽을 완등한 최초의 인간이 되었다. 환희의 정? 살았다는 생각? 승리의 도취? 그런 것은 털끝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해방은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우리들의 감각과 심경은 너무나 호된 고행에 시달렸고, 몸은 극도로 피곤해졌기 때문에 여간해선 취한 듯한 감정이 우러나올 여유가 없었다. 카스파레크와 나는 85시간, 헤크마이어와 푀르크는 61시간이나 암벽에 있었던 것이다.
간신히 모든 파멸의 구렁에서 벗어나온 것은 아니었다. 우리들의 우정에는 시종 의지하려는 마음과 신뢰하려는 마음을 그윽히 간직하고 있었다. 단 한 번도 우리들의 계획에 대한 성공을 의심해본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여기까지 오는 길은 너무나 험난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정상의 열품은 몸이 움츠러들 정도로 매서웠다. 눈과 입과 코의 언저리는 두꺼운 얼음의 크러스트(Krust)가 매달려서, 마주 쳐다보거나 말을 할 때, 그리고 호흡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것을 문질러 떼어내야 했다. 어쩌면 북극에서 찾아든 수수께끼의 짐승과도 흡사한 몰골이었으리라. 그러나 우리는 이런 꼬락서니를 보고도 우스꽝스럽다고 느낄 감각마저 남아있지 않았다. 더구나 그곳은 배꼽이 빠져라 웃어대거나 순수한 기쁨과 행복감이 우러나와 웃어댈 수 있는 장소도 아니며, 그럴 때도 아니었다. 단지 우리들은 묵묵히 악수를 나누었을 뿐이었다. - 136p.
<하얀거미>
하인리히 하러, 이종호 옮김
에코클럽 발행, 알파인웍스 편집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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