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잊고 살았던 것들 - 10~11p.
8,000미터를 넘어서면 곳곳에 시신들이 즐비합니다. 예전에도 그들은 그곳에 있었습니다. 오직 정상만을 바라보는 등반을 할 때 저는 그들의 시신을 넘어 앞으로 나아갔었습니다. 성취욕에 눈이 멀어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잊었던 겁니다.
과연 히말라야의 정상에 선다는 것이 동료들의 시신을 외면하고 그것을 뛰어넘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만큼 가치 있는 일일까요?
# 내려오지 못한 친구들 - 25~26p.
"내가 가서 무택이를 데려올게!"
그것은 감히 표현하건대 일생일대의 결단이었다. 탈진한 채로 설맹에 걸려 해발 8,750미터 부근에 고립되어 있는 사람을 홀로 구조하러 간다? 그것도 이미 해가 져서 사위가 암흑 속에 묻혀버린 캄캄한 밤에? 만일 이것이 수학 문제였다면 정답은 부정적이다. 이성만으로 판단한다면 고개를 가로저어야 옳다. 하지만 백준호에게 박무택은 이성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었고 수학 문제도 아니었다. 그는 산속에서 수많은 밤을 함께 보낸 산악회의 후배였고, 술자리에서 수많은 잔을 함께 기울인 정겨운 동생이었다. 그런 무택이를 저렇게 홀로 죽어가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 백준호의 머릿속에는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 세상의 반대에도 결성된 휴먼원정대 - 54p.
세계 최초의 7대륙 최고봉 등정기인 《불가능한 꿈은 없다(Seven Summit)》를 보면 흥미로운 기록이 나온다. 1983년에 남미 최고봉인 아콩카과6,960미터)를 오르는 도중 '이상한 한국인'을 만났는데, 그는 등산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운동화를 신고 저 홀로 정상으로 향하더니 끝끝내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상한 한국인'이 바로 손칠규였다.
그는 그렇게 단독등정(한국초등기록)에 성고안 이후 하산길에서 그만 실족하여 수백 미터를 추락한다. 목숨을 잃기에 충분한 추락거리였지만 운이 좋게도 계속 눈 위를 굴러 살아남았다. 그리고 장비와 식량을 모두 잃어버린 그는 무려 열흘 동안 뱀을 잡아먹으며 인적미답의 정글 숲을 헤맨 끝에 가까스로 인간세상으로 돌아온다. 최근 박정헌의 촐라체 조난 사건과 더불어 한국 등반사상 가장 극적인 생환 기록이다.
# 가족을 울리는 불효자식들
- 70~71p.
슬픔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슬픔이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넘어가고 나면 슬픔이 아닌 그 무엇으로 변해버린다. 그래서인지 정작 남편을 잃은 당사자인 미망인은 극도로 말을 아꼈다. 미망인은 우리가 앉아 있는 마루를 피해 부엌 쪽으로 몸을 숨긴채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조난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의 그녀가 생각났다. 그녀는 남편의 결단을 수긍하고 이해하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수긍과 이해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 80p.
산에 다니는 놈들은 모두가 불효자식들이다. 제 부모보다 먼저 죽는 놈들은 정말 나쁜 놈들이다. 그것도 도저히 찾아갈 수 없는 세상의 지붕 끝에서 꽁꽁 언 채로 죽은 놈들은 정말 뭐라고 형언할 수도 없는 죄를 짓고 간 놈들이다.
# 쉴 틈이 없는 베이스캠프 - 135~136p.
"베이스캠프에 오니까 살 거 같아요. 집에 돌아온 것 같아요."
베이스캠프란 그런 곳이다. ABC(6,400미터), 캠프1(노스콜 7,100미터), 캠프2(7,700미터), 캠프3(8,300미터)에 머물다가 내려오는 대원들은 한결같이 그렇게 말한다. 어떤 뜻에서 베이스캠프란 터미널과도 같다. 이곳은 끊임없이 떠나고 돌아오는 대원들로 북적인다. 대원들은 이곳에서 새로운 작전을 짜고 체력을 비축하여 다시 도전의 길에 오르는 것이다. 두 번째 오를 때에는 산행 시간이 대폭 짧아진다. 인트롬에서의 1박을 생략하고 그냥 하루 만에 올려치는 것이다. 베이스캠프에서 ABC까지를 열 시간 정도로 주파하면 괜찮은 기록이다. 완전히 고소에 적응하고 나면 그 기록을 여섯 시간 이하로 줄일 수도 있다.
# 우리랑 같이 내려가자 - 186p.
먼저 간 산 친구들이 그리웠다. 우리도 언젠가는 그들처럼 떠나갈 것이다. 하지만 흔적을 모두 불태워버린다 해도 끝끝내 사라지지 않는 것들도 있다. 우리는 그들을 사랑했었다. 그들과 우리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애틋한 우정을 나눠 가졌다. 우리는 그들을 우리의 가슴속에 묻었다. 우리의 육신과 흔적들이 모두 다 사라져버린다 해도 이 가슴만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히말라야의 눈물>
심산 지음
지식너머,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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