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사람과산 2019 10월호 (Vol. 360)
케냐 헬스게이트 국립공원 암벽 등반
글·사진 차승준 (Liah Cha)
킬리만자로 등반을 마치고, 탄자니아에서 국경을 넘어 케냐의 나이로비로 이동했다. 유일한 일행이었던 신차원정대 대원 하섭이는 업무 일정으로 먼저 귀국을 했고, 홀로 남은 내게 나이로비에서 하루의 시간이 주어졌다. 고민할 여지도 없이 나이로비 인근의 등반지와 함께 암벽등반을 함께할 수 있는 현지인을 수소문했다.
운이 좋게도 나이로비 시내에는 동아프리카 유일의 실내 클라이밍 센터인 클라임 블루스카이(Climb Bluesky)가 있었다. 곧 바로 센터에 연락을 넣어 센터의 매니저로 일하고 있는 나오미(Naomi)와 등반 약속을 잡았다. 등반지로 정한 곳은 주상절리 크랙이 매력적인 헬스게이트(Hell's Gate) 국립공원으로, 나이로비 시내에서는 차로 2시간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다음날 새벽 6시, 나오미를 만나 마트에서 간단하게 먹을거리를 사서 등반지로 함께 출발했다. 나오미와는 나이가 비슷해 금방 친구가 되었다. 우리는 아프리카의 뜨거운 태양을 피하고자 오전에는 등반을, 오후에는 여유롭게 공원을 둘러보기로 했다.
헬스게이트 국립공원은 영화 '라이온 킹'의 배경으로 유명한 관광지이다. 실제로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익숙한 장소들을 이곳에서 만날 수 있는데, 공원을 어슬렁거리며 무심히 돌아다니느 품바 가족부터 영화 속 심바의 아버지인 '무파사'가 죽는 장소와 매우 흡사한 리프트 밸리(Rift Valley) 협곡, 그리고 영화의 상징과도 같은 '프라이드 락'을 빼다 박은 절벽까지 돌아볼 수 있다. 공원에 도착하니 라이온 킹의 주인공 심바가 절벽을 오르내리던 장면이 떠올라 괜스레 미소가 새어 나왔다.
계획에 없던 급하게 잡은 등반 일정이라 장비를 제대로 챙겨오지도 못했지만, 새로 사귄 친구 나오미와의 오늘 하루 같이 등반하며 보낼 생각을 하니 모든 게 다 잘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쿠나 마타타! - 하쿠나 마타타(Hakuna matata)는 아프리카 언어인 스와힐리어로 '문제없어! 걱정 마 다 잘 될 거야!'라는 뜻을 갖는다. -
아프리카 첫 바위, 피셔 타워(Fischer's Tower)
헬스게이트 국립공원 내에는 피셔 타워(Fischer's Tower), 피셔 클리프(Fischer's Cliff), 입구벽(Entrance Wall), 메인벽(Main Wall), 봄의 벽(Spring's Wall) 등 등반 섹터가 곳곳에 다양하게 펼쳐져 있다. 대부분 크랙으로 이루어진 루트이며, 탑 앵커에만 고정 볼트가 설치되어 있는 트래드 클라이밍(Trad Climbing) 루트이다.
공원에 도착하자마자 피셔 타워 섹터로 향했다. 피셔 타워 전면부는 일반인도 즐길 수 있도록 톱로핑 체험 등반 코스가 있는데 2~3개 루트 상단에 미리 로프가 걸려 있었다. 우리는 피셔 타워에서 피셔 타워 클라이밍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제임스(James)를 만났다.
"반가워 리아! 피셔 타워 뒤로 돌아가면 정상까지 오를 수 있는 재미있는 코스가 있는데, 혹시 등반해볼래?"
제임스는 단피치 코스만 있는 전면부와 달리 타워 후면부에 트래드 등반이 가능한 멀티 피치 루트가 있다는 설명을 하며, 내게 함께 등반하자고 제안했다. 즉석에서 제임스와 함께 피셔 타워의 정상까지(2피치) 등반하기로 의견을 맞추고, 제임스와 등반을 다녀올 동안 제임스를 대신해 체험 프로그램은 나오미가 잠시 맡아주기로 했다.
"타워 정상에 오르면 공원 입구 지역을 한눈에 볼 수 있을 거야! 여기는 걱정하지 말고, 안전하게 등반하고 와!"
"고마워 나오미!"
피셔 타워 후면은 태양빛을 받아 살짝 붉은빛을 머금고 있다. 우리가 오르기로 한 루트는 '초승달(Crescent Monn, 5.10a)'로 아프리카의 뜨거운 이미지와 대비되는 이름의 루트였다. 두 피치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 등반 길이가 약 45cm의 짧은 루트로, 난이도도 평이해서 몸풀이 등반으로는 제격이었다. 피셔타워 정상의 멋진 풍광을 기대하며 그 이름도 뜨거운 아프리카의 첫 바위 등반을 시작했다.
타워 후면부는 해를 정면으로 받고 있었다. 아프리카의 강렬한 태양 빛은 아침부터 뜨거웠고, 정상까지 그늘 한 점이 없었다. 한껏 달구어진 바위는 마치 불에 달구어진 냄비 같았고, 민소매를 입은 등판 위로 작렬하는 태양을 그대로 받고 있으니 철판 위의 호떡이 따로 없었다. 등반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서 빨리 뜨거운 태양을 피해 그늘로 피신하고 싶었다. 결국 우리는 피치를 끊지 않고 정상까지 한 번에 오르기로 했다. 전체 등반 길이가 45m이니 둘이서 로프 한동으로 무리 없이 오를 수 있었다.
실력이 좋아진 것은 아닐 터인데, 뜨거운 태양에 쫓겨 본의 아니게 속공으로 등반을 마쳤다. 하강을 마치고 타워 전면부로 돌아오니 한 가족이 서로 열심히 응원하며 체험 등반을 즐기고 있었다. 해를 등지고 있는 서늘한 그늘에 들어서서야 여유로움을 되찾았다. 전면부 체험 등반을 마친 관광객들과 쉬엄쉬엄 수다도 떨고, 간식도 먹으며 오전 나절을 보냈다. 아프리카에서는 시곗바늘도 여유롭게 흘러가는 기분이다.
크랙 등반의 천국, 피셔 클리프(Fischer's Cliff)
"이따 시간 나면 피셔 클리프로 놀러 갈게, 재밌는 등반해~!"
이른 오후가 되어서야 나오미와 단둘이 본격적인 등반을 위해 피셔 클리프 섹터로 이동했다. 제임스도 등반에 합류하고 싶은 기색이었지만, 주말이라 손님이 많아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피셔 클리프는 난이도 5.7부터 5.12까지의 수십 개의 루트가 있으며, 대부분 15~20m의 수직 크랙으로 이루어져 있다. 핑거 재밍, 피스트 재밍, 암바 등 여러 기술을 연습할 수 있는 다양한 사이즈의 크랙들이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곧게 뻗어있는 자태가 장엄했다.
각 루트는 완등 지점에 설치된 볼트가 유일한 볼트였다. 일정 거리마다 볼트가 설치돼 있는 스포츠 루트에만 익숙했기 때문에, 나오미에게 앵커 볼트를 비롯해 피셔 클리프 전체적인 안전성에 대해 자꾸만 물어보게 됐다.
"그럼 당연하지~! 미국의 등반가들과 클라임 블루스카이 센터는 정기적으로 교류하고 있어. 틈틈이 이곳을 방문해 루트 점검과 개보수를 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안전해! 걱정 마!"
급할 일이 없으니 쉬엄쉬엄 등반하자고 너스레를 떨며 등반을 시작했지만, 아프리카 바위를 언제 다시 만져보겠나 싶어 한 루트라도 더 등반하고 싶은 마음에 어느새 욕심을 부리고 있었다. 난이도가 쉬운 3번 루트부터 5.10b에 이르는 2.75번 루트와 9번 크랙까지 쉴 새 없이 등반을 이어나갔다. 크랙으로만 이루어진 루트는 난이도가 훨씬 어렵게 체감되었는데, 크랙 등반 경험이 많지 않아 재밍 기술이 익숙하지 않은 탓에 힘이 많이 드는 레이백 자세로 등반했기 때문이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바위에 새겨진 선을 따라 올랐다.
"헥헥, 나중에 이 루트 이름 지을 계획 있으면 '숨 쉴 곳을 주세요'라고 이름 붙여줘"
"아니야 그것보다는, 지금 네 등반 자세가 영화에 나오는 스파이더맨 같으니까 '스파이더 걸'이라고 붙이는 게 낫겠어!"
나오미와 함께 등반을 즐기는 동안 우리는 마치 학창시절 여고생으로 돌아간 듯했다. 작은 일에도 꺄르르 웃음보를 터트리며 한껏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지나가던 야생 멧돼지 품바들도 무슨 일인가 싶어 사람 구경하기에 이르렀다. 나오미와 나는 키도 몸무게도 체형도, 게다가 성격까지 비슷했고, 우리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금새 환상의 등반 짝꿍이 되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우연히도 이렇게 호흡이 잘 맞는 자일파트너를 만나다니! 나는 운이 좋은 게 틀림없다.
부지런히 5~5개 루트의 크랙을 등반하고 나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하다. 남은 시간을 아껴 관광객들에게 유명한 코스인 헬스게이트 국립공원의 협곡(Hell's Gate Gorge)까지 둘러보고 긴 하루를 마쳤다.
헬스게이트 국립공원은 크랙 등반가들에게는 천국과 같은 곳이다. 이런 등반지가 근처에 있어서 주말마다 등반할 수만 있다면 영화 라이온 킹에서 아기 사자 심바가 동물의 왕으로 거듭났던 것처럼, 크랙 등반 병아리인 나도 금방 한가락 하는 크랙 등반가로 성장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자마자, 지난 아프리카 일정들이 마치 기분 좋은 꿈을 꾼 것만 같았다.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새로운 등반 장비로 크랙 등반 필수품인 캐머롯 세트를 추가로 구매한 것이다. 가격이 만만치 않으니, 역시 회사를 열심히 다녀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바위도 크랙도 늘 그자리에 있을 테니, 꿈일랑 잠시 미뤄 두고 오늘도 어김없이 출근길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오늘 하루도 하쿠나 마타타!
INFO
헬스게이트(Hell's Gate) 국립공원 암벽등반
헬스게이트는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서 북서쪽으로 약 100km에 위치한 국립공원이다. 공원 내 협곡에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이루어진 절경 때문에 지옥의 문(Hell's Gate)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공원 곳곳에서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바위와 굴러다니는 흑요석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나이로비 시내의 클라이밍 센터 '클라임 블루스카이 케냐'에서 교통비 포함 5,000KSH(교통비 제외 3,500KSH)의 저렴한 가격에 월 1~2회 헬스게이트 등반 투어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www.blueskykenya.org/climb)
1. 피셔 타워(Fischer's Tower) 섹터
타워 앞쪽은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체험 등반 코스가 2~3곳 마련되어 있고, 공원을 찾는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도록 기본 등반장비를 대여해준다. 체험 등반 가격은 1,000KHS로, 기본 등반장비 대여 비용이 포함된 가격이다. 타워 뒤로 돌아가면 트래드 등반이 가능한 루트가 있고, 1피치 종료점과 타워 정상에 하강이 가능한 볼트 앵커가 있다. 피셔 타워 후면의 대표적인 트래드 루트로 아프리카 태양과 초승달이 있다.
- 아프리카 태양(African Sun) : 총 37m, 2피치, 난이도 5.8-, 필요 장비 너트 및 BD캠 0.5~3호
- 초승달(Crescent Moon) : 총 45m, 2피치, 난이도 5.10a, 필요 장비 너트 및 BD캠 0.5~3호
2. 피셔 클리프(Fischer's Cliff) 섹터
피셔클리프는 대부분 단 피치의 수직 크랙이며, 완등지점의 하강 앵커가 각 루트의 유일한 볼트이다. 총 15~50m 단 피치~3피치의 5.8~5.12급 크랙 루트들로, 필요 장비는 너트 및 BD캠 0.4~5호이다. 일부 루트는 2~3피치까지 등반이 가능한 루트도 개척되어 있으나, 대부분의 현지 클라이머들은 단피치 크랙 등반을 즐긴다.
3. 헬스 게이트 협곡(Hell's Gate Gorge)
좁은 협곡을 따라 한 시간 남짓의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협곡 바닥에는 물이 흐르고 깊은 곳의 벽에서 뜨거운 온천물이 흘러내리는 탓에 악마의 목욕탕(Devil's bedroom)이라는 별명이 있으며, 뜨거운 물에서 피어오른 수증기 때문에 협곡은 신비로운 풍경을 연출한다. 협곡 관광을 위해서는 가이드 동반이 필수이며, 가이드 비용은 1,000KHS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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