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강

(3)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작별, 한강 # 한강 -18p.농담인 줄 알았는데,달리 설명할 말이 없어 그녀는 그에게 물었다.좀 걸을까요, 우리?실상 걷는 것 말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실내에 들어갈 수 없으니 저녁을 함께 먹을 수 없고, 물론 카페에서 따뜻한 차를 마실 수도 없다.나란히 천변 길을 걸으며 그들은 한동안 침묵했다. 그가 그녀의 장갑 위로 손을 잡았는데, 몇 초 지나지 않아 그녀가 손을 빼냈다. 녹을 것 같아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는 무안해했다.이제 어떡하지요?그가 물었다. 자신에게 묻는 것인지, 그녀에게 묻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았다.이제는 밥을 함께 먹을 수 없고 따뜻한 데로 들어갈 수도 없고......그가 멈춰 섰다.만질 수도 없는 거예요? - 30~31p.시작이 언제였는지 그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마치 몇 달 만..
[소년이 온다] 당신들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2장 - 검은 숨 - 67p. 어스름이 내리자 새들이 울음을 그쳤어. 낮에 울던 풀벌레들 보다 가냘픈 소리를 내는 밤의 풀벌레들이 날개를 떨기 시작했어. 완전히 어두워지자, 간밤에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의 그림자가 내 그림자에 닿아왔어. 어른 어른 서로의 언저리를 어루만지다 우리는 흩어졌어. 어쩌면 우린 낮 동안 뙤약볕 아래 꼼짝 않고 머무르며 비슷한 생각에 골몰해 있었던 것 같았어. 밤이 되어서야 몸의 자력으로로부터 얼마간 떨어져나올 힘을 얻은 것 같았어. 그들이 다시 오기 직전까지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어루만졌고, 서로를 알고 싶어했고, 결국 아무것도 알아 내지 못했어. -74p. 썩어가는 내 옆구리를 생각해. 거길 관통한 총알을 생각해. 처음엔 차디찬 몽둥이 같았던 그것,순식간에 뱃속을 휘젓는 불덩..
[흰] 한강 소설 - 더럽혀지지 않는 어떤 흰 것에 관한 이야기 ■ 본문 중에서 # 나 - 11p. 시간의 감각이 날카로울 때가 있다. 몸이 아플 때 특히 그렇다. 열네 살 무렵 시작된 편두통은 예고 없이 위경련과 함께 찾아와 일상을 정지시킨다. 해오던 일을 모두 멈추고 통증을 견디는 동안, 한 방울씩 떨어져내리는 시간은 면도날을 뭉쳐 만든 구슬들 같다. 손끝이 스치면 피가 흐를 것 같다. 숨을 들이쉬며 한순간씩 더 살아내고 있다는 사실이 또렷하게 느껴진다. 일상으로 돌아온 뒤까지도 그 감각은 여전히 그 자리에 숨죽여 서서 나를 기다린다. 그렇게 날카로운 시간의 모서리- 시시각각 갱신되는 투명한 벼랑의 가장자리에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 살아온 만큼의 시간 끝에 아슬아슬하게 한 발을 디디고, 의지가 개입할 겨를 없이, 서슴없이 남은 한 발을 허공으로 내딛는다. 특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