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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묵지/추억의 책장 · 메모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작별, 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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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 <작별>

-18p.

농담인 줄 알았는데,

달리 설명할 말이 없어 그녀는 그에게 물었다.

좀 걸을까요, 우리?

실상 걷는 것 말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실내에 들어갈 수 없으니 저녁을 함께 먹을 수 없고, 물론 카페에서 따뜻한 차를 마실 수도 없다.

나란히 천변 길을 걸으며 그들은 한동안 침묵했다. 그가 그녀의 장갑 위로 손을 잡았는데, 몇 초 지나지 않아 그녀가 손을 빼냈다. 녹을 것 같아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는 무안해했다.

이제 어떡하지요?

그가 물었다. 자신에게 묻는 것인지, 그녀에게 묻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이제는 밥을 함께 먹을 수 없고 따뜻한 데로 들어갈 수도 없고......

그가 멈춰 섰다.

만질 수도 없는 거예요?

 

- 30~31p.

시작이 언제였는지 그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마치 몇 달 만에 굴 밖으로 나온 초식 짐승처럼 그녀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그의 모습을 보았을 때인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불쑥 그가 그녀의 짐을 받아 들었을 때인지, 시간을 거슬러 그녀가 그의 그릇에 국수를 덜어주었던 저녁부터인지 분명치 않았다. 어느 쪽이든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전까지 없었던 무엇인가가 두 사람의 사이에 생겨난 이유를. 보이지 않는 길고 가느다란 실 같은 것이 그들을 연결하는 실체로서 존재하게 되고, 그 실의 진동이 출발하고 도착하는 투명한 접지가 몸 어딘가에 더듬이처럼 생겨난 까닭을.

지난 가을 그 실에 대해 그녀가 처음으로 말했을 때 그는 대답했다. 그걸 사랑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녀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가 알기로 사랑이란 것은 감정인데, 강렬하게 생겼다가는 사라지고 뜨거워졌는가 싶으면 환멸 속에서 식는 무엇인데, 이 실과 접지의 느낌은 무색무취인 데다 마치 영원처럼 느껴지는 고요함이어서 거의 인간적인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오히려 더 진지한 고백으로 받아들일 것 같아 그만 두었다.

처음부터 그는 그녀가 앞날에 대한 생각을 털어놓고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자신이 해결책도, 해결 의지도 없는 가난에 수인처럼 갇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그에게 조언하거나 의지처가 될 처지도 아니었다. 함께할 어떤 미래의 기약도 없이, 일 년이 채 되지 않는 지난 시간 동안 그녀는 다만 그 실의 감각만을 매 순간 실체로서 느꼈다. 밤에도 낮에도, 함께 있거나 떨어져 있거나, 그 실은 변함없이 진동하며 두 사람 사이에 고요히 걸쳐져 있었다. 그것의 존재감이 너무나 분명해서, 때로는 그가 있는 서울과 그녀가 옮겨 간 신도시 사이의 분명한 물리적 거리가 마치 부채처럼 접혔다가 활짝 펼쳐지는, 반쯤 생명을 가진 유동하는 덩어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 41p.

언제나 어둠보다 빛을 택하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해, 윤아. 그 아래 연도와 날짜, 주소와 주민등록번호, 이름을 적고 사인하며 그녀는 자신이 방금 쓴 다소 상투적이고 연극적인 문장에 대해 생각했다. 그 문장을 따르자면 그녀의 시간은 어느 쪽이었을까? 아마도 사이일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희지도 검지도, 뜨겁지도 차지도, 살아 있지도 죽어 있지도 않은 사이. 밝은 방과 어두운 방을 가르는 딱딱하고 불투명한 격벽 같은 것.

하지만 어떤 불순물도 없이 밝았다고 말할 수 있는 한 순간을 택한다면, 갓 돌이 된 아이와 나란히 누워 맞았던 오래전 여름의 새벽일 거라고 그녀는 그때 생각했다. 아침 빛에 저절로 떠진 그녀의 눈이, 미리 깨어 있던 아기의 검은 눈과 마주쳤었다. 왜 그랬는지 그날따라 아기는 보채지 않은 채 그녀가 눈을 뜨길 기다리며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둘의 눈이 마주친 순간 아기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렇게 절대적인 믿음이 담긴 웃음을 그녀는 그날 처음 보았다. 흔히 말하는 절대적인 사랑은 모성애가 아니라 아기가 엄마에게 품은 사랑일지 모른다고, 신의 사랑이란 게 있다면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 52~53p.

이렇게 두고는 못 가요.

그것이 진심인지 의무감인지 그녀는 잘 알 수 없었다. 그가 그녀에게 책임을 느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어떤 약속도 그에게 하지 않았다. 끝까지 그녀는 확신 할 수 없었다. 그 갈색 얼룩 고양이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두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끈질긴 두려움과 고독 속에서, 떨리는 실의 한쪽 끝을 붙든 채 그녀는 언제까지나 망설이고 있었다.

부탁이에요, 이제 가요. 혼자서 생각을 하고 싶어요.

진심이었다. 그녀는 혼자 있고 싶었다. 그녀 자신의 삶이라고 불렸던 몇십 년의 시간에 대해, 잠시라도 제대로 생각을 하고 싶었다. 정말로 집중할 수 있다면, 평소라면 떠오르지 않았을 기억들을 좀더 되찾게 될지도 모른다. 삼 남매가 회전목마를 타며 서로의 작은 몸들을 껴안았던 순간, 젖먹이 윤이가 깨어나 스물네 살 난 엄마를 고요히 바라보던 여름 아침 같은 순간들을 더.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인가, 그녀는 불현듯 자신을 향해 물었다.

비록 눈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아직 그녀는 사람이다. 하지만 언제까지일까, 그녀는 다시 스스로에게 물었다. 눈과 귀와 입술이 녹으면 어떻게 될까. 정수리부터 녹은 머리가, 눈 녹은 물이 되어 가슴으로 흘러내리면? 심장부터 발끝까지 형상이 남김없이 사라지면? 이 층계참에 흥건한 물웅덩이만 남으면.

그냥 끝이야.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여 그녀는 자신을 향해 말했다. 홀가분했다. 미치도록 후련했다. 아니, 억울했다. 이가 갈리게 분했다. 아니, 아무것도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을, 제발 더 생각을 해야 했다. 가능한 시간만큼, 조금만 더.

그녀의 휴대전화가 울린 것은 그때였다. 여보세요, 라고 그녀가 답하기 전에 아이의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엄마, 원래대로 돌아왔어?

아니.

더 이상 기회가 없을 수 있으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순간에 하고 싶어 하는 말, 모든 군더더기를 덜어낸 뒤 남는 한마디 말을 그녀는 했다. 날카로운 것에 움푹 찔린 것 같은 말투로 아이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나도 사랑해.

 

 

# 강화길 <손>

- 64~65p.

나는 그가 안정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를 이해하기 때문이었다. 그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경쟁적인 분위기 속에 홀로 서 있다고 느꼈고, 남들보다 더 많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가 돌을 막 지난 아이를 두고 해외 근무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나는 걱정 대신 응원을 보냈던 것이다. 잘 다녀오라고, 이왕 가는 거 열심히 해서 꼭 자리 잡으라고. 그런 의미에서 한 말이었다.

생각해보면 매사가 그랬다. 그의 해외 근무가 결정된 후, 잘해보자고 마음은 먹었지만 나 혼자 아이를 키우며 지낼 일이 걱정이었다. 그 때 시어머니가 민아를 봐주겠다고 먼저 연락을 해왔다. 이때가 아니면 아이가 언제 할머니와 살아보겠나 싶었고, 어머니를 홀로 두고 있다는 그의 걱정도 덜어주고 싶었다. 시골 학교라면 학생 수도 적고 잡무도 덜해서 지내기 편할 것도 같았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었나 싶다. 하지만 그때는 마땅한 일처럼 여겨졌고, 그러자 모든 면이 좋아 보였다. 나는 그와 함께 미래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결혼한 거였다. 도울 수 있다면 돕고, 잘할 수 있다면 잘하고 싶었다. 그게 우리의 삶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그해 말에 나와 상의 없이 근무 기간을 연장했다.

 

 

# 김혜진 <동네 사람>

- 136~137p.

너는 노인과 노인 곁에 선 학생들을 노려본다. 그러니까 이 동네에 사는 동안, 사람들이 너와 나에 대해, 우리에 대해, 우리도 모르는 말들을 주고 받으면서 불필요한 오해를 키우고 반드시 그게 어떤 부당한 일로 돌아올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냥 사과해. 미안하다고 하라고.

너나 해. 너나 사과하라고!

너는 내 손을 뿌리친 다음 소리 나게 대문을 열고 나가버린다. 나는 잠시 그곳에 서서 노인과 몇 마디를 더 나눈다. 연락처를 알려주고 학생들이 알려주는 노인의 계좌번호를 받아 적고,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오늘 저녁 틀림없이 돈을 보내겠다는 약속을 한다.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꼭 병원에도 가고, 강아지도 치료하라는 말을 한다. 그날은 아마 네가 당황하고 놀라서 그랬을 거라는 말을 덧붙일 때 보니 노인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져 있다.

그리고 집을 나설 때 내가 묻는다.

근데 차여 붙여둔 메모 말인데요. 저희 집을 어떻게 아신 거에요?

그걸 왜 몰라.

내가 무슨 말이지 하는 얼굴로 서 있자 노인이 중얼거린다.

다 알지. 다 알아. 다 안다고.

나는 버스정류장이 있는 큰 도로를 따라 걷고 첫 번째 골목 안으로 들어선다. 어디나 사람들로 붐빈다. 고개를 돌리면 환한 통유리 너머 테이블에 마주 앉은 사람들이 뭔가를 먹고 마시며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손을 잡고 팔짱을 끼고 느리게 걷는 사람들의 나지막한 말소리가 끊임없이 동네를 돌고 또 돈다.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 잠시 머물다 가는 사람들. 내가 모르는 사람들.

그들 속에 섞여 있을 때 느꼈던 편안하고 자유로운 기분은 다 사라지고 없다. 길가에 멈춰 서 숨을 골라본다. 숨을 크게 들이켜고 내쉬어도 화끈거리는 열기가 가시지 않는다. 목덜미를 타고 뜨거운 기운이 치솟는다. 그리고 그 순간 내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또렷해진다. 지금껏 수없이 오간 이 길에서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오싹함이다.

 

 

# 이승우 <소돔의 하룻밤>

- 173p.

파괴되지 않은 성이 파괴돈 성보다 더 정의로웠을 거라고 단정할 수 없다.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보다 더 착할 거라고 판단할 수 없다. 오늘 살고 있는 사람이 어제 죽은 사람보다 살 가치가 더 있는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롯은 그들과 함께 사는 것이 두려웠고, 성으로 피신한 자기 선택을 후회했고, 산으로 도망가라는 천사의 말을 들었어야 한다고 뒤늦게 깨달았고, 그래서 산으로 도망가서 숨어 살았다.

 

 

『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

한강 <작별>

강화길 <손>

권여선 <희박한 마음>

김혜진 <동네 사람>

이승우 <소돔의 하룻밤>

정이현 <언니>

정지돈 <Light from Anywhere(빛은 어디에서나 온다)>

은행나무,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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