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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묵지/추억의 책장 · 메모

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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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

정해진 시간표대로 수업을 한다면 전투기가 오기로 예정된 시각에는 산수를 가르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체육시간으로 대체시키고 학생들을 운동장으로 내몰았다. 학생들에게 편지의 내용을 소상하게 이야기해 주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아버지도 학생들도 수업은 건성이었고, 수시로 하늘을 쳐다보면서 전투기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예고된 시간이 되자 요란한 비행음이 천지를 진동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학생들은 일제히 동작을 멈추고 숨ㅂ을 죽인 채 하늘을 쳐다보았다. 가을이었다. 하늘은 눈부신 쪽빛이었고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일순 전투기 편대가 서쪽 산머리에 나타나서 빠르게 학교 상공을 가로지르더니 동쪽 산머리로 사라져 버렸다. 하늘에는 비행운만 남아 있었고 운동장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한동안 미묘한 실망감과 불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다시 비행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돌아온다아.
학생들의 환호성과 때를 같이하여 편대는 한 번 더 그 모습을 나타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동체를 약간 옆으로 기울이더니 원만한 곡선을 그리며 학교의 상공을 선회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와아아 하는 함성이 터지면서 교실 여기저기에서 선생님과 학생들이 달려나오기 시작했다. 교장선생님도 달려나왔고 교감선생님도 달려나왔다. 며칠 전부터 소문이 학교 전체에 퍼진 모양이었다. 면소재지의 조그만 국민학교였다. 운동장은 순식간에 하늘을 쳐다보며 손을 흔들어대는 선생님과 학생들로 가득차 있었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편지의 내용대로 전투기 편대는 학교의 상공을 크게 세 바퀴 선회하고 돌아갔다. 텅 빈 하늘에는 비행운만 남아 있었다. 선생님과 학생들은 전투기 편대가 사라지고 난 다음에도 오래도록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전투기 편대가 학교 상공을 세 바퀴 선회하고 떠나는 데는 불과 3분밖에 안 되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아버님은 그 3분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을 떠올리면 한평생 누적되어 있던 고통이며 울분이며 피로들이 순식간에 말끔히 사라져버린다고 말씀하신다. 아버님과 교분이 있는 분들이시라면 누구나 이미 스무 번도 넘게 들었을 이야기겠지만


<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
이외수 지음
해냄출판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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