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 뷰


몇해 전부터 읽으려고 벼르고 있던 <봉순이 언니>. 미루고 미루다 드디어, 2015년 첫번째로 읽은 책이 되었다. 아프리카를 다녀오는 비행기 안에서 시차 적응을 위해 밤을 꼬박 지샌다고, 10시간이 넘는 비행 시간을 버티기 위해 준비한 4권의 책 중에 가장 먼저 집어든 책이 <봉순이 언니> 였다. 우연이었을까? 2주 남짓한 시간 아프리카 5개국을 여행하며 내 마음은 이리저리 어지럽던 차였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피지배 계급으로 몰락한 흑인. 그들은 삶의 터전을 고스란히 빼앗겼을 뿐 아니라 가난까지 이어받았다. 백인들은 침략자에서 지배 계급으로, 지금은 부를 거머쥐고 이 검은 대륙을 망가뜨렸다. 왜 가난한 이들은 가난하게 태어나는가. 세상이 평등하다는 이 시대에 왜 그들은 끊이 없이 가난하고, 가난은 세습되는가. 잘난 그들은 정말 그 인간이 잘난 건지, 잘난 세상에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서 잘난 것인지. 따뜻한 세상을 만든다고 부르짖고 연말이면 나눔을 실천한다고 선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이 사회 전체가 표리부동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던 차에 봉순이 언니를 만난거다. 


공지영은 전쟁 후 60년대 고성장의 시대를 가속하던 대한민국을 어린 아이의 눈으로 그려냈다. 60년대 초 산동네 세입자로 살다가, 박정희 정권이 전개한 근대화, 산업화를 거쳐 70년대 중산층에 진입하고 아파트로 이주하는 짱아네 가족. 그 집의 식모 살이를 하는 봉순이 언니. 배고픈 그 시대가 그러했듯, 그저 밥을 먹을 수 있다면 남의 집 살이를 하며 식모로 살았다. 사람을 돈을 주고 살 수 있다는 점이 어린 짱아에게도 낯설게 다가왔고, 나에게는 아프리카의 노예 제도와 다르지 않게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노동력(?)을 회사에 헌납하고 매달 월급을 받아 생활하는 이 시대 봉급쟁이는 모두가 마찬가지 인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점점 염세주의자가 되어가는 것만 같아 순간 두려웠다. 나도 때로는 회사에서, 삶에서 불만을 느끼며 하염없이 속상하고 우울해 하던 때가 있지 않았던가. 그런 면에서는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며 삶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는 봉순이 언니가 측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대하게 느껴졌다. 자신을 가둔 삶의 틀 안에서 불행을 탓하지 아니하고 불행이라 느끼지 아니한다. 때로는 현대인들에게도 이런 마음가짐이 필요한 것은 아닌지. 그리고, 머릿속은 아직도 어지러운데 작가 후기에서 공지영이 말한 것과 다르지 않게, 나 역시 침묵하며 묵묵히 내 자리에서 나의 일들을 해내리라 조용히 다짐한다.


생각해보면 어려운 시대에 절망하기는 얼마나 쉬운가, 허망해져 버리기는 또 얼마나 쉬운가. 한때는 나도 허무의 뭉게구름 엷게 흩뜨리며 우아하게 도피하고도 싶었다. 절망하거나 허망한 사람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 그러나 형벌처럼 내 마음 깊숙이 새겨진 단어 하나,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얼마간 귀찮음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희망은 수첩에 약속 시간을 적듯이 구체적인 것이고,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쓰레기를 치우는 것처럼 구차하기까지 한 것이지만, 나는 그저 이 길을 걷기로 했다.


비록 너무나 짧은 엎드림으로부터 나온 상투적인 결론이라 해도, 나는 이 붓을 멈추지는 않으리라. 나 자신을 믿고 나 자신에게 의지하며 그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하면서, 고이는 내 사랑들을 활자에 담으리라. 가슴이 아플까 봐 서둘러 외면했던 세상의 굶주림과 폭력들과 아이들을 이제는 오래 응시하면서 


- <작가 후기> 중에서



■ 본문 중에서


아버지가 돌아온 그날, 언니는 결국 서서 밥을 먹었다. 하지만 서서 밥을 먹으면서도 언니는 손을 뒤로 돌려서 내 입에 녹두전이며 물에 씻은 김치에 싼 조그만 제육을 넣어주었다. 나는 날름날름 그것을 받아먹고 언니의 등에서 잠들었다. 나를 놀리기만 하는 언니와 오빠를 대신해서 이제 아버지가 나의 편이 되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무너져버렸고, 내게 남은 것은 봉순이 언니뿐이었다. 그녀만이 우는 나를 달래주었고, 그녀만이 내 잠자리의 베개를 고쳐놓아 주었다. 그녀는 나와 마주친 최초의 세계였다. - 32p.


"미국까지 다녀오셨군요. 거기 사람들 잘살지요?"

"잘살죠. 이만한 고기를 아침 저녁으로 먹어요. 집집마다 차있고. 무엇보다 거기 사람들, 악다구니쓰고 살지 않아요. 매사가 합리적이죠. 일하려는 사람들은 누구나 일할 수 있어요. 솔직히 3년 만에 돌아와 보니까, 5.16혁명 나구 나서 사람들이 더 악다구니가 된 것 같고, 차라리 보지 않았더라면 비교도 안하구 그냥, 사는 게 이러려니 했을지도 모르는데, 그렇게도 살 수 있는데 우린 왜 이렇게밖에 살 수 없나 싶은 게...... 비참합니다." - 39p.


그때 깨달아야 했다. 인간이 가진 무수하고 수많은 마음갈래 중에서 끝내 내게 적의만을 드러내려고 하는 인간들에 대해서 설마, 설마, 희망을 가지지 말아야 했다. 그가 그럴 것이라는 걸 처음부터 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래도 혹시나 하는 그 희망의 독. 아무리 규칙을 지켜도 끝내 파울 판정을 받을 수도 있다는 악착스러운 진리를 내가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30년이나 지난 후였다. 하지만 그 3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아직도 궁금한 것이 있다. 이런 경험을 그 이후에도 무수히 반복하면서도 나는 왜 인간이 끝내는 선할 것이고 규칙은 결국 공정함으로 귀결될 거라고 그토록 집요하게 믿고 있었을까. 이런 일이 그 장소의 특수한 사건이라고, 그러니 그때 나는 운이 나빴을 뿐이라고 그토록 굳세게 믿고 있었을까? 그건 혹시 현실에 대한 눈가림이며, 회피, 그러므로 결국 도망치는 것은 아니었을까. - 56~57p.


아마도 그때 알아야 했으리라. 그때나 지금이나,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도 아주 오래도록, 사람들은 누구나 진실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막다른 골목에 몰릴 지경만 아니라면, 어쩌면 있는 그대로의 사실조차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그렇다고 이미 생각해온 것, 혹은 이랬으면 하는 것만을 원한다는 것을. 제가 그린 지도를 가지고 길을 떠났을 때, 길이 이미 다른 방향으로 나 있다면, 아마 길을 제 지도에 그려진 대로 바꾸고 싶어하면 했지, 실제로 난 길을 따라 지도를 바꾸는 사람은 참으로 귀하다는 것을.

이렇게 글을 쓰며 돌이켜보니 내 어린 시절의 지도에 이미 내 인생이 그려져 있지나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자주하는 실수와 내가 자주 겪는 슬픔과 내가 머뭇거리다 돌이키지 못한 정황들이, 인생은 이미 그때 내게 나침반을 표시해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상징적으로 압축된 상태도 아니었고 암호로 가득 찬 것도 아닌, 그러나 나는 결코 그 암호와 상징들을 돌아보려 하지 않았고, 그것이 다시금 비슷한 형태로 반복되리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고, 세월은 한번 가면 그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막연히 믿었던, 그래서 돌이켜보면 나는 언제나 같은 삶을 같은 항아리 속에서 반복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지. - 103~104p.


그래, 그 남자를 만나지 않았으면 봉순이 언니의 삶은 달라졌을 것이지만, 아마도 그녀는 다른 방식으로 불행해졌을 것이라고. 왜냐하면 삶에서 사소한 일이 없는 이유는, 매 순간 마주치게 되는 사소한 선택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총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사소한 그 일 자체가 아니라 그 사소한 것의 방향을 트는 삶의 덩어리가 중요하다는 걸 내가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 148~149p.


그러자 그때, 장지문을 열고 잠깐 밖을 내다본 나를, 간절하게 바라보던 메리의 눈빛이 다시 떠올라싸. 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문을 닫아버렸을 때 그의 심정이 어땠을까 헤아리는 일도 이제는 부질없었다. 사는 데 있어서 얼마나 많은 별리가 필요한지를, 그것이 본의는 아니었다 해도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얼마나 많이 다른 생명을 절망으로 몰아가는지, 생사의 절박한 갈림길에 선 것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고 사는지, 설사 그것이 본의가 아니었다 해도 - 허술한 유리창이 떨리는 소리가 세상을 뒤엎듯 들렸다 해도 - 난 정말 몰랐다는 말로 그 모든 이야기들이 용서가 될까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강아지가 죽고 나는 자라고 있었다. - 161~162p.


"나는 정말 몰랐어요. 내가 얼마나 그 말을 사랑하고 그 말을 자랑스러워했는지 아시잖아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잠시 침묵한 후 말한다.

"얘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아는 것이란다." - 163p.


머리에는 상중임을 표시하는 흰 핀을 꽂고 토끼처럼 빨간 눈으로 언니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내 심장은 후욱 하고 멎을 것만 같았다. 그녀의 슬픔에 압도된 것이었을까,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는 그 눈빛, 그건 내가 알던 봉순이 언니의 눈빛이 아니었다. 뭐랄까, 짓이겨지고 짓이겨지고 나서도 짓이길 수 없는 오만한 자존심이 그 안에 들어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이제 벼랑 끝까지 밀려와 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달관이 엿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눈빛, 그 눈빛으로 인해 나는 봉순이 언니가 이제 아주 멀어진 사람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언니는 이제 어떤 강을, 아주 건너가버린 것 같았다. - 180~181p.



<봉순이 언니>

공지영 지음

1998, 푸른숲


봉순이 언니
국내도서
저자 : 공지영
출판 : 푸른숲 1998.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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