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중에서


# 어둠 속의 부름


솔직히 말해 ‘솔직’은 나의 장점이 아니다. 추구하는 가치도 아니다. 내가좋아하는 건 실용성이며, 당연히 그에 입각한 답을 내놓을 것이다. 어쩌다 약 먹는 걸 까먹었는데, 까먹은 걸 다음 날 또 까먹었으며, 기왕 까먹은 김에 지금까지 쭉 까먹었노라고. 가만히 앉아 천지를 꿰뚫어 보는 이모는 ‘중독성 투약 중단’이라는 판결을 내린다.  - 17p.



녀석의 눈이 노을 속에서 배시시 웃고 있었다. 나는 그 미소가 나를 위한 선물이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가 하염없는 두려움을 내 핏속에 쏟아넣는 사람이라면, 해진은 내 심장에 노을 같은 온기를 불어넣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네 편이라고 말해주는 존재였다. 참담하고 추웠던 그날에 그랬듯이, 이번에도 그러리라 믿고 싶었다. 아니, 그렇게 믿었다. – 56p.



수천 개의 감각들이 느릿느릿 나를 통과해갔다. 머리를 얼리는 한기, 내장을 뒤틀며 맹렬하게 번지는 불의 열기, 신경절 마디마디에서 폭발하는 발화의 전율, 규칙적으로 뛰는 내 심장 소리. 왼쪽에서 출발한 칼날은 삽시에 오른쪽 귀밑에 이르렀다. – 80-81p.



# 나는 누구일까


어머니는 말없이 팔을 벌려 해진을 끌어안았다. 가만가만 손을 움직여 녀석의 등을 쓸어주었다. 나는 한 발짝 떨어진 곳에 서서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미간에 깊은 주름을 잡고 이마를 찡그리는 것을, 코와 뺨이 동시에 빨개지는 것을, 칼날이라도 삼키는 양 어렵사리 침을 넘기는 것을. 3차 방정식 같은 표정이었다. 복잡하고도 낯선 얼굴이었다. 해진처럼 슬픈 것인지, 해진의 슬픔 때문에 마음이 아픈 것인지, 해진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인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이제 걱정 말라는 것인지, 전부다인지, 모두 아닌지. – 104-105p.



몸, 기분, 호떡의 반죽 상태가 모두 불량하다. 어쩐지 일진이 사나울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뼈 시리게 외로운 날, 바람이 분다. 울고 싶은 밤에 비가 내린다. 인간이 싫은 날, 보름달이 뜬다. 몸도 마음도 무거운 날, 날씨까지 무겁다. – 183p.



망각은 궁극의 거짓말이다. 나 자신에게 할 수 있는 완벽한 거짓이다. 내 머리가 내놓을 수 있는 마지막 패이기도 하다. 어젯밤 나는 멀쩡한 정신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저질렀고, 해결책으로 망각을 택했으며, 내 자신에게 속아 바보짓을 하며 하루를 보낸 셈이었다. 

모든 걸 알게 된 지금에 와서야 나는, 내가 살인을 저지르리라는 걸 예감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 206p.



# 작가의 말 – 381-382p.


히말라야에 다녀온 후 이 일을 해보겠다는 결심이 섰다. 안전거리를 확보하지 않아도 ‘나’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소설의 ‘나’는 작가인 ‘나’와 함께 진화해가리라고 내다봤다. 피식자에서 포식자로 변화해 가는 과정을 의미 있게, 나아가 그럴 법하게 형상화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나는 새 노트를 장만하고,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의 말을 인용해 이렇게 썼다.


“나는 마침내 내 인생 최고의 적을 만났다. 그런데 그가 바로 나인 것이다.”




<종의 기원>

정유정 장편소설

은행나무, 2016


종의 기원
국내도서
저자 : 정유정
출판 : 은행나무 2016.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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