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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묵지/추억의 책장 · 메모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 세상에 다시 맞설 용기를 얻기 위해 그래, 떠나는거야. 신들의 땅 히말라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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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네팔정부가 경제정책의 일환으로 대중적인 트레킹코스를 개발한 덕에 졸개들에게도 히말라야로 입성하는 길이 열려 있었다. 안나푸르나만 해도 다양한 코스들이 있었다. 일주일 내외로 다녀올 수 있고 초보자에게 적합한 푼힐 전망대나 묵티나트 트레킹, 10일 정도 걸린다는 베이스캠프(ABC캠프, 해발 4130미터) 등. 눈길을 붙잡은 건 환상종주(Circuit) 였다.

안나푸르나는 크게 두 지역으로 구분된다고 했다. 마르상디 강(Marsyangdi Nadi)을 따라 오르는 동부 마낭 지역, 칼리간다키 강(Kali Gandaki Nadi)을 따라 내려오는 서부 무스탕 지역. 동에서 서, 혹은 서에서 동으로 도는 것이 환상종주였다. 약 18일이 소요되고 어느 쪽으로 돌든 쏘롱라패스(Thorung La Pass: 5416미터)를 통과해야 한다는 미션이 있었다. - 12~13p.



넉넉잡아 이틀이면 끝낼 일이건만, 첫 문장조차 잡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텅 빈 노트북 화면을 노려보다 맥없이 드러누어 버리기 일쑤였다. 마감을 하루 앞둔 날까지도 그랬다. 발을 구를 일이었다. 벽에 머리를 찧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 달 가까이 끙끙대고도 원고지 30매를 못 채우다니. 100미터 달리기를 하듯, 소설 초고 2500매를 써대던 나는 어디로 갔을까.

이건 단순히 청탁원고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였다. 슬럼프와는 증세 자체가 달랐다. 암반에 갇힌 불길이 아니라 불씨까지 타버린 잿더미였다. 욕망이라는 엔진이 꺼져버린 것이었다. 이야기 속 세계, 나의 세상, 생의 목적지로 돌진하던 싸움꾼이 사라진 것이었다.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그에 대한 대비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저 혼란스러웠다. 책상 위에 쌓아둔 다음 소설 자료와 책, 새 노트가 신기루처럼 비현실적이었다. 덮쳐오는 허망함에 당혹을 넘어 공포를 느꼈다. 누군가 내 상태를 알아차릴까 봐. 다시는 글을 쓰지 못하게 될까 봐. 고작 소설 몇 편 쓰고 무너지는구나, 싶어서. 나는 강아지처럼 낑낑대다가 끝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무슨 일이야?"

안방에서 코를 골며 자던 남편이 벌떡 일어나 뛰어나왔다. 나는 코를 풀며 대꾸했다.

"나 안나푸르나 갈 거야."

선택사항이 아니야. 생존의 문제라고.

- 16p.



... 몸이 뿌리를 내려도 마음이 떠돈다. 붙박였다고 갇힌 게 아니고, 떠난다고 늘 자유로운 건 아니다. 맹그로브 씨앗이 바닷물에 떠 다니는 이유는 분명하지만, 인간이라는 종은 죽을 때까지 떠다니는 숙명을 벗을 길 없다. 떠나온 곳을 모르니 돌아갈 곳인들 알겠는가. <조용호, 떠다니네> - 36p.



# 1 Day : 9월 5일 - 46p.


혜나가 히말라야의 어원을 물었다. 그는 '눈(雪)'의 거처'라고 대답했다. 산스크리트어로 눈을 뜻하는 히마(Hima)와 집을 뜻하는 알라야(Alaya)의 합성어. 나는 6000미터가 넘는 봉우리에만 히말을 붙이는 이유를 내 식대로 이해했다. 고도가 그쯤 돼야 만년설이 거주할 수 있는 모양이라고. 



# 2 Day : 9월 6일 - 60~61p.


당시 나는 광주에 있는 한 종합병원에 갓 취직한 새내기 간호사였다. 내 대장이었던 수간호사는 별명이 '프리마돈나'였을 만큼 대단한 미인이었다. 간호사로서 업무능력도 최고였다. 도도하고, 차갑고, 까다로운 독설가이기도 했다. 업무상 사소한 실수라도 발견되는 날엔 더 살았다 할 것이 없었다. 다혈질인 데다 선머슴처럼 덜렁대는 나와는 최악의 궁합이었던 셈이다. 그녀는 날이면 날마다 내가 저지른 온갖 실수들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공개적으로 혼쭐을 냈다. 'NS(신경외과: 머리를 뜻함)가 안 되면 OS(정형외과: 손발을 뜻함)가 고생한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나는 돌 맞은 개구리처럼 납죽해져서 퇴근하고, 도망칠 구멍만 찾는 도마뱀의 심정으로 출근하기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직장생활이 재미있을 리 만무했다.



# 8 Day : 9월 12일 - 150p.


마침내 언덕배기에 올라섰다. 나는 어깻숨을 몰아쉬면서 발아래를 내려다봤다. 좀 전까지 작렬하던 태양빛이 사라졌다. 언덕은 짙은 안개로 뒤덮였고, 희뿌연 대기 저편에서 둥근 햇무리가 눈을 마주쳐왔다. 인간이 살기 이전의 지상이 이랬을까. 설연이 흩날리는 은빛 연봉들, 산허리를 휘감고 흐르는 구름, 골짜기를 이루며 뻗어 나온 다갈색 암벽들, 거칠게 갈라진 황무지언덕, 그 위로 드리워진 고요. 기묘한 쾌감과 흥분이 진동처럼 발바닥을 두들겼다. 러너스 하이(Runner's High)에 도달한 마라토너처럼. 나는 머리를 압박하는 힘을 잠시 잊었다. 마침내 신의 영토로 들어선 기분이었다. 들어선 김에 안나푸르나의 가슴까지 가 닿고 싶었다. 매년 피의 제물을 요구한다는 저 쏘롱라패스에.



# 11 Day : 9월 15일 - 203~204p.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서 시작이 순조로웠던 적은 없었다. 학생 시절, 간호사 시절, 심사평가원 시절, 습작 시절... ... 인생의 새 관문으로 들어설 때마다 통과의례를 유별나게 치렀다. 신세계에 안착하기까지 남보다 두 배쯤 시간이 걸렸다. 좌충우돌을 일삼다 끝내 적응에 실패한 경우도 여러 번이었다. 대표적인 실패가 5년 남짓한 간호사 생활이었다. 어머니가 쓰러지지 않았다면, 그나마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낯선 세계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이 나이가 돼서야 세상 밖으로 나온 건 비단 바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의식적인 두려움도 한 몫했을 터였다. 내게 있어 새로운 세계로 들어선다는 건 '깨진다'와 동의어였으므로.



# 에필로그 - 301~302p.


비행기가 이륙하는 짤은 순간, 지난 한 달이 파노라마가 돼서 시야를 스쳐 갔다. 지팡이로 땅을 찍어가며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 내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목 밑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아마도 세상 밖 세상에 존재했던 나에 대한 그리움일 터였다. 특별한 곳에서 맞닥뜨린 특별한 '순간'에 대한 그리움. 쏘롱라패스에서, 새벽녘의 다울라기리 앞에서, 파우스트처럼 소리치고 싶었던 내 생애 첫 '축제'에 대한 그리움.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이들과 살고 싶다.

그러면 순간을 향해 이렇게 말해도 좋으리라

멈추어라, 너 정녕 아름답구나.



# 작가의 말 - 304p.


'네팔병'이라는 게 있다고 한다. 한 번 히말라야에 다녀오면 반드시 또 가고야 만다는 불치병이란다. 여정의 험난함과 육체적 고통 속에서 누리는 영혼의 자유로움, 온전히 자기 자신과 만나는 특별한 순간들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고산병만큼이나 흔하게 걸린다는 이 지병을 나 역시 피해가지 못했다. 포카라에 도착하자마자 히말라야가 그리웠다. 다음 소설을 끝내면 나에게 상을 주는 의미에서 에베레스트에 가야지, 마음먹었다. 그 다음 소설을 끝내고 나면 마나슬루, 그 다음다음은 무스탕...... 최종 목표는 다울라기리.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

정유정

은행나무, 2014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
국내도서
저자 : 정유정
출판 : 은행나무 2014.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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