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켄을 치고 안전을 확보한 후

돌아올라간 그곳에 G4의 정상이 있었다.

2시 27분이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산꼭대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곳엔 우리가 있었다.

한없이 외롭지만 미치도록 자유로운 우리가 있었다.


(중략)


사진: 네이버 영화



해외에서는 우리가 G4에 최초로 만든 루트 '코리안 다이렉트' 때문에 특집기사가 나가는 등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하산 중에 발생한 캠프2의 붕괴로 정상 필름이 일부 유실되었고, 

그것 때문에 국내 산악계 일부에서는 

정상까지의 표고차 5m의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정상 등정에 의문을 제기했다.


별안간 거짓말쟁이가 되고만 우리는 상처를 받았다.

주위에서 반론을 펴라는 권유가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우리는 누군가와 등정 시비를 가리기 위해 산을 오른 적이 없다.

대단한 기록을 남기기 위해 산을 오른 적도 없다.

개인적인 명예나 영화를 위해 오른적은 더더욱 없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정상에 올랐다.

무슨 더 이상의 말이 필요하겠는가.


우리는 저 높은 산의 정상을 올랐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저 산을 오른 것일까.

세상은 산을 오른 산악인에게 정복이라는 말도 안되는 표현을 쓴다.

역사 이래 인간은 한 번도 산을 정복한 적이 없다.

산이 가끔 정상에 설 기회를 주었을 뿐이다.

산을 오르내린지 벌써 40년.

더 높이 오를수록, 더 많이 오를수록

나는 점점 작아져가고

산들은 점점 커져갔다.

그렇게 커져가는 산 앞에서 작아질 수 있는 나는 행복하다.


사진: 네이버 영화



꽃피는 4월에 진달래 향기가 진 뒤

무 더운 매미 소리가 녹음에 묻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여름을 덮었던 푸르름이 

가을의 화려함으로 서서히 변해가는 산.

그 산은 오늘도 인구 천만 명의 대도시 서울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


북한산. 

그리고 인수봉.


그곳이 있었기에 이성보다 감성이 앞섰던 우리의 젊음은 행복했었다.

바위에서 미끄러져 손등이 까지고 멍이 들어도

바보처럼 낄낄대며 로프를 둘러메었고

어슴푸레한 가스등 아래 앉아

골짜기의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었다.

철없던 그 시절의 우리는

그곳에서 만나 젊은 날의 분노를 식혔고

더 높은 산을 꿈꾸며 같은 길을 걷게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을 올랐던 우리.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중 한 명을 또 다른 산에 눕혀두고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곳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그곳에 있었다, We were there>

감독 박준기

출연 유학재, 조성대, 김동관 등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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