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중에서
#서문_ 웬만하면 걸어다니는 배우 하정우입니다
- 8p.
글쎄, 언제부터였을까? 돌아보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오직 걷기밖에 없는 것만 같았던 시절도 있었다. 연기를 보여줄 사람도, 내가 오를 무대 한 뼘도 없었지만, 그래도 내 안에 갇혀 세상을 원망하고 기회를 탓하긴 싫었다. 걷기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았던 과거의 어느 막막한 날에도, 이따금 잠까지 줄여가며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지금도 꾸준히 나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이 점이 마음에 든다. 내가 처한 상황이 어떻든, 내 손에 쥔 것이 무엇이든 걷기는 내가 살아 있는 한 계속할 수 있다는 것.
- 10~11p.
사람마다 보폭이 다르고, 걸음이 다르다. 같은 길을 걸어도 각자가 느끼는 온도차와 통점도 모두 다르다. 길을 걸으면서 나는 잘못된 길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조금 더디고 험한 길이 있을 뿐이다.
# 말 한마디에 천릿길 걷는다 - 26~28p.
많은 사람들이 길 끝에 이르면 뭔가 대단한 것이 있을 거라 기대한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농담처럼 시작된 국토 대정장은 걷기에 대한 나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우리가 길 끝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것들이 아니었다. 내 몸의 땀냄새,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꿉꿉한 체취, 왁자한 소리들, 먼지와 피로, 상처와 통증...... 오히려 조금은 피곤하고 지루하고 아픈 것들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별것 아닌 순간과 기억들이 결국 우리를 만든다.
말 한마디로 시작된 천릿길 대장정 끝에는 놀랍게도, 아무것도 없엇다. 하지만 괜찮다. 나는 길 끝에서 무언가 대단한 것을 움켜쥐려고 걸은 게 아니니까. 지금도 나는 길 위의 소소한 재미와 추억들을 모으며 한 걸음 한 걸음 걷는다. 그리고 내가 알게 된 이 작지만 놀라운 비밀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 왜 자꾸만 나를 잃어버리지? - 41p.
한때 나는 열정을 잃어버린 느낌을 받았다. 나 자신을 추스르는 시간이 필요했다.
내 갈길을 스스로 선택해서 걷는 것, 내 보폭을 알고 무리하지 않는 것, 내 숨으로 걷는 것. 걷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묘하게도 인생과 이토록 닮았다.
# 내 인생의 마지막 4박 6일 - 48p.
마음의 안식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종종 여행을 떠났지만, 여행중에도 나는 잘 쉬는 게 아니라 내가 다닌 곳의 흔적을 남기려 안달했던 것 같다. 무엇을 먹고 어디를 가봤고 웬만한 데는 전부 다 돌아다녀봤다는 확인을 받기 위해 여행한 것이다. 이러니 남들이 좋다는 곳에 가도 친구들과 술 한잔 마시고 나면 '아이고, 잘 놀았다. 근데 얼른 집에 가고 싶네......'하며 남몰래 허전해하는 수밖에.
# 휴식은 가만히 누워 있는게 아니야 - 58p.
정작 일은 너무나 열심히 하는데 휴식 시간에는 아무런 계획도 노력도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그대로 던져두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지치고 피로한 자신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곧 휴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방기'는 결과적으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누적된 피로를 잠시 방에 풀어두었다가 그대로 짊어지고 나가는 꼴이 되는 경우가 많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휴식을 취하는 것은 다르다. 나는 휴식을 취하는 데도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적어도 일할 때처럼 공들여서, 내 몸과 마음을 돌봐야 하지 않을까?
# 10만 보 일기 - 82p.
죽을 만큼 힘든 사점을 넘어 계속 걸으면, 결국 다시 삶으로 돌아온다.
죽을 것 같지만 죽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 조금 더 걸을 수 있다.
언젠가 나의 인생길에서도 사점이 나타날지 모른다. 그때도 나는 하와이에서 10만 보를 찍었던 기억으로, 아무리 힘들어도 결국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는 맏음으로, 버티고 걸어나갈 것이다.
# 먹다 걷다 웃다 - 127p.
그런 단어들이 우리에게는 참 많다. 함께 모였을 때 만들어진 단어들, 우리가 쓰면서도 자꾸 웃게 되는 말들. 웃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든 단어들이 아닌데도, 돌아보면 우리끼리 쓰는 즐거운 암호와 농담으로 인해 관계가 더 돈독해진다. 나는 앞으로도 우리가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일로 함께 웃을 일이 많기를 바란다.
# 한 발만 떼면 걸어진다
- 155p.
눈을 떴을 때 온몸이 천근 만근처럼 느껴지는 날. 그런 날은 마음도 울적해서 도로 눈을 감고 이불 속에서 꼼짜고 하고 싶지가 않다. 때로는 그런 날이 하루로 그치는 게 아니라 다음 날, 또 그다음 날로 하염없이 늘어지기도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종일 집안에만 머물고 싶은 날. 집밖이 왠지 낯설고 오직 내 방만이 안전하게 느껴지는 날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아침이면 나는 생각을 멈추고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한다. 몸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 생각이 무거운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를 조금씩 달래고 설득해 일단 누운 자리 밖으로 끌어낸다.
- 158p.
일단 몸을 일으키는 것.
다리를 뻗어 한 발만 내디뎌보는 것.
이러한 행동들이 매일같이 이어져 습관이 되면 그다음부터는 별다른 노력 없이도 일어나 걸을 수 있다. 몸에 익은 습관은 불필요한 생각의 단계를 줄여준다. 우리는 때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에 갇혀서 시간만 허비한 채 정작 어떤 일도 실행하지 못한다. 힘들 때 자신을 가둬놓는 것, 꼼짝하지 않고 자신이 만든 감옥의 수인이 되는 것, 이런 것도 다 습관이다. 스스로 키워놓은 절망과 함께 서서히 퇴화해가는 것이다. 하지만 걷기가 습관이 되면 굳이 고민하지 않고 결심하지 않아도 몸이 절로 움직인다.
# 언령을 믿으십니까
- 186p.
말에는 힘이 있다. 이는 혼잣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지만 결국 내 귀로 다시 들어온다. 세상에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은 없다. 말로 내뱉어져 공중에 퍼지는 순간 그 말은 영향력을 발휘한다. 비난에는 다른 사람을 찌르는 힘이, 칭찬에는 누군가를 일으키는 힘이 있다. 그러므로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말을 최대한 세심하게 골라서 진실하고 성실하게 내보내야 한다.
- 189p.
말에는 힘이 있고 혼이 있다. 나는 그것은 '언령(言靈)'이라 부른다. 언령은 때로 우리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자신의 권력을 증명해 보이고, 우리가 무심히 내뱉은 말을 현실로 뒤바꿔놓는다. 내 주위를 맴도는 언령이 악귀일지 천사일지는 나의 선택에 달려 있다.
# 내가 만난 노력의 장인들 - 286p.
지금 고통받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곧 노력하고 있는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혹시 내가 정류장이 아닌 곳에서 오지 않을 버스를 기다리는 건 아닌지 수시로 주변을 돌아봐야 한다.
살아가면서 나는 지금까지 내가 해온 노력이 그다지 대단한 게 아님을 깨닫는 순간들을 수없이 맞게 될 것이다. 정말 최선을 다한 것 같은 순간에도, 틀림없이 그 최선을 아주 작아지게 만드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엄청난 강도와 밀도로 차원이 다른 노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새로운 날들이 기다려진다.
작업은, 작품은 정직하다. 몸을 움직인 만큼 정직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걷기처럼, 작품과 작업도 결코 '야료'를 부리지 않는다.
나는 그 정직성을 믿는다.
<걷는 사람, 하정우>
하정우
문학동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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