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인수봉 등반을 마치고 내려오던 도선사 입구 주차장에서 화려한 색의 바지를 입은 한 산악인을 만났고, 주변의 선배님들께서 '꿈속의 알프스' 임덕용 선배님이라고 알려주셨다. 멀고 높게만 느껴지는 선배님께 멋쩍은 인사를 드리고는 기회가 되면 얼른 책을 찾아보아야지 마음먹었다.

 

그리고는 서점에서 책을 찾으려는데, 절판된 오래된 산서는 구해 읽기가 마땅치 않았다. 스마트폰 메모 앱 구석에  '산서 구매 목록'을 만들어 두고, 틈나는 대로 책들을 검색해보곤 했는데, 오래된 헌책방에서 어렵사리 '꿈속의 알프스'를 찾을 수 있었다. (95. 6. 12. 미선) 이란 메모와 함께 '내 좋은 山 친구에게'라는 선물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아마도 80년대 출판되었던 이 책은 95년 선물이 되어, 95부터 20여 년을 어느 책장에 머물다가 이곳으로 왔으리라. 덕분에 절판되어 구할 수 없는 책을 읽을 수 있음에 감사드린다.

 

살아 숨 쉬는 전설 같은 선배님들의 청년 시절 북벽 등반기를 읽으며, 키득키득 웃음이 세어 나왔다. 생생하게 전해지는 30여 년 전 멋진 선배님들의 등반 기록들. 책장을 덮으며 "척"하는 삶에 더 가까운 내 모습을 돌아보았다. 나도 언제쯤이면 진심으로 미칠 수 있을까? 아니 나는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 여전히 오늘도 "척"하는 삶이지만, 그 "척"이 진짜가 되기를 갈망한다.

 

 

■ 본문 중에서

 

# 이 책을 쓰고나서 - 2p.

 

10년 동안 나는 철저히 미쳐 왔었다. 오직 미쳐야만이 그리고 철저히 미쳐야만이 해낼 수 있다는 신념 외엔 없었다. 남들이 하는 흡연이나 음주는 커녕 영화구경 한 번 군것질 하나 제대로 하지 않고 오로지 산에만 미쳐 왔었다.

이제 조용히 지나 온 날을 돌아 본다. 내가 과연 미칠만큼 모든 일에 나의 최선을 다했던가?

운동을 한 날보다 안한 날이 부지기수였고 늦잠드는 날이면 아예 걸렀으며 조금 힘들면 쉬길 원했고 배고프고 목마르면 조금도 참지 못하고 먹고 마시기를 원했다. 배낭이 무거우면 짐을 줄이려 애썼고 비가 퍼붓고 있을 땐 텐트 밖에 나가길 주저했으며 몸이 피곤해 지쳐있을 땐, 누가 버너를 먼저 꺼내지 않을까 눈치를 보았으며, 말로만 그림이 어떻고 작품이 어떻고, 고갱이, 고흐가 어떻다고 떠들었지 실상 산행 중에 산그림 그린 것 몇 장 없으며 시헌 전날 책 펴놓고 공부한 적 또한 한번도 없는 것이다.

다만 "척" 했을뿐. 그러나 "척"하다 보면 그 "척"이 진짜가 되었다. 누가 그 "척"을 일찍하느냐, 얼마나 빨리 시작하느냐에 성공의 승패가 좌우된다고 감히 말해도 될까?

 

 

# 불효자의 눈물

 

- 19~20 p.

집에 돌아와 래다를 나의 자일인 빨랫줄을 잘라 이었다. 나에겐 이미 굵고 하얀 멋진 자일이 생겼던 것이다. 장비들을 가지고 정신없이 노닥거리는데 놀랍게도 아버지께서 불쑥 방에 들어 오셨다. 당연히 화가 나신 아버지는 처참하게도 나의 전 재산이고 모든 기쁨인 장비들을 몽땅 몰수 해서는 캐비넷 금고에 넣고 잠가 버리셨다. 야단 맞는 일은 문제도 아니었다. 나의 최대 보물이고, 기쁨인 그것들을 잃어버린 슬픔에 비하면. 그러나 다행히도 캐비넷 번호를 알고 있어 꺼내 볼 수 있다.

 

- 23p.

쓰라림을 안고 다시 산을 찾아 나섰고 그곳에서 실컷 울었다. 눈꽃이 사르락사르락 내려앚는 소리와 잔잔한 바람이 가지에 부딪치는 소리 외에는 나의 울음을 방해할 아무 것도 없었다. 마음껏 울었다. 낙오자라서가 아니라 부모에게 죄스럽고 부끄러웠으며 떳떳하게 찾아 오겠다던 산과의 약속을 저버린 것이 미안해서 울었다. 이제는 산을 찾을 길이 막혀 버린 것 같았다. 그러나 산은 조용히 나를 지켜 보고 있었다.

 

 

# 내 너를 위해 울던 날

 

- 55p.

산사람들에겐 일종의 금기로 산행 전에는 머리와 손, 발톱을 안깎으며 개고기와 닭고기를 먹지 않는 일종의 미신같은 것이 있었다. 헌데 출발을 코앞에 두고 머릴 깎여야 하는 운명에 놓이다니......

 

- 59~60p.

두 발 사이로 한규의 불안한 표정이 들어왔다. 불안한 등반은 하는 이보다 보는 이를 더 초조하게 한다. 만일의 추락 사태에 대비하여 취하여야 할 행동을 미리 구상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안 꼽히면 몸이 뒤집혀지면서 그대로 추락해 버린다. 암벽보다 빙벽에서의 추락이 더 무섭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제동걸어 줄 확보물이 불안한데다 미끄러지는 속도를 예측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 북벽으로 가는 길 - 102p.

 

식량 담당에는 허 욱, 우리 대원 중 가장 낙천주의자. 이 등산가는 항상 유우머를 만들고 다닌다. 어디에서나 즐거워 보이는 그가 안경 속의 두 눈을 껌벅거릴 땐 만화의 주인공 꺼벙이 같지만 단단한 몸매에서 우러나오는 힘은 뽀빠이가 무색할 정도이다. 설악산 울삼암을 일곱 번 등반, 안산의 개척 등반, 대표 형과 아이거 북벽 등정을 다녀 온 기량있는 등산가 이기도 하다. 이번 대원 중 가장 힘이 세고 완력등반으로는 단연 제1인자이며 매그러운 암벽보다는 거친 틈새를 좋아하는 고전적인 멋을 가지고 있는 클라이머이다.

 

 

# 위험한 서주 - 123~124p.

 

대부분의 클라이머들은 자기 짐을 남에게 분산시키길 싫어한다. 누구나 거의 같은 무게를 지고 있고 같이 등반을 하는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에게 해를 주지 않으려는 것이다. 파트너간에는 더욱더 심해 상대에게 도움을 주지 못할 망정 청하길 꺼려하여 등반중 빨리 지치거나 피로해져 사실상 등반을 실패로 이끄는 예도 있다. 자신이 피로해 지기 전에 미리 양해를 구해 도움을 받는 방식이 마음에 안 내킬지라도 지독히 어려고 극한상태에서의 등반시에는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파트너 간의 거리낌없는 대화에서 서로의 상태를 토로하고 협력할 수 있어야 되겠다.

 

 

# 그랑드 죠라스 정상의 메아리 - 188p.

 

난 정말이지 그렇게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 정상의 세 명의 사나이는 나와 함께 정상에 서 있었다. 난 차마 눈을 뜨고 내려다 볼 수는 없었지만 나에게도 정상의 세찬 바람은 몰아치고 있었고 발아래 펼쳐진 파노라마는 마터호른의 정상에 섰던 기쁨보다 더해 동료들의 정상을 향한 모든 열의를 지켜볼 수 있는 마음은 더욱 나를 감동시키며 정신없이 눈물과 콧물이 교차되어 그치질 않고 있었다. 아니 엉엉 큰 소리로 울어도 부끄럽지 않았고 10년을 미쳐온 자신이 울고 있을 때 난 자랑스러운 미친애가 되었던 것이다. 울음은 알프스의 험난한 북벽을 메아리되어 퍼져 나가고 누가 있어 이런 미친애의 진정한 울음을 울 수 있는 선택된 자가 될 것인가? 누가 이 감격한 패배자의 화려한 웃음을 알 것인가?

 

 

<꿈속의 알프스>

임덕용

평화출판사,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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