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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묵지/추억의 책장 · 메모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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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작성 [2008/05/04]



사람들은 아버지를 난장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옳게 보았다. 아버지는 난장이였다.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아버지를 보는 것 하나만 옳았다.

그 밖의 것들은 하나도 옳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 어머니, 영호, 영희, 그리고 나를 포함한 다섯 식구의

모든 것을 걸고 그들이 옳지 않다는 것을 언제나 말할 수 있다.

나의 '모든 것'이라는 표현에는 '다섯 식구의 목숨'이 포함되어 있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도 천국을 생각해보지 않은 날이 없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지겨웠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 같았다.

우리는 그 전쟁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모든 것을 잘 참았다.

그러나 그날 아침 일만은 참기 어려웠던 것 같다.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나는 혼자 돌아왔다.

나는 그날 밤 아버지가 그린 세상을 다시 생각했다.

아버지가 그린 세상에서는 지나친 부의 축적을 사랑의 상실로 공인하고,

사랑을 갖지 않은 사람 집에 내리는 햇빛을 가려버리고,

바람도 막아버리고, 전깃줄도 잘라버리고, 수도선도 끊어버린다.

그 세상 사람들은 사랑으로 일하고, 사랑으로 자식을 키운다.

비도 사랑으로 내리게 하고, 사랑으로 평형을 이루고,

사랑으로 바람을 불러 작은 미나리아재비꽃줄기에까지 머물게 한다.

아버지는 사랑을 갖지 않은 사람을 벌하기 위해 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믿었다.

나는 그것이 못마땅했었다.

그러나 그날 밤 나는 나의 생각을 수정하기로 했다.

아버지가 옳았다.


모두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다.

예외란 있을 수 없었다.

은강에서는 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조세희 소설집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조세희 지음

이성과 힘,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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