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작성 [2008/04/19]



올해 크리스마스이브는 허탈하게 넘어갔다.
혹시 우리를 부르지 않을까 해서 집 청소까지 해놓고 온 나 자신이 미웠다.
아무리 떨어져 지내지만 아이를 위해 예전처럼 촛불을 켜고 크리스마스 파티는 할 것 같았는데.
백화점에 가서 산 선물을 미리 알려주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
작년에 백화점에 갔을 때 그가 진열장 안의 만년필을 물끄러미 구경한 적이 있다.
나중에 값을 물어봤다가 기겁을 했지. 무슨 만년필이 그렇게 비싼지.
내가 왜 무리를 해서 그 만년필을 샀는지 나 자신도 모르겠다.
이별 선물이라도 하려는 것이었을까?
그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나보다.

연휴가 지나도록 전화 한 통 없었다.
연락을 기다린 건 아니었지만. 역시 그렇지.
그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지. 내가 또 깜빡했지.
그렇게 속으면서도 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걸까?

그런데 연휴 다음날 예나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택배로 도착했다.
그렇게 예쁜 인형은 어디서 골랐는지.
나를 위해서는 그렇게 무관심한 사람이 딸에게는 그렇지않은 모양이다.
예나는 어쩔 줄 모르며 온 방안을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나도 잠깐이나마 정말 기분이 좋아졌다.
전화 한 통 없는 무심한 사람이 어떻게 이런 선물을 준비한 것일까?
이렇게 조금만 마음의 여유를 가지면 될 것을.

그가 가시 달린 철갑옷을 벗고 예전처럼 따뜻한 사람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나는 안다. 그의 갑옷을 벗겨주는 역할은 나의 몫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건 너무 힘이 들 것 같다. 자신이 없다.


<배려 : 마음을 움직이는 힘>
한상복 지음
위즈덤하우스,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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