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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묵지/추억의 책장 · 메모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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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생의 밴드마스터
- 은미희

그 지난하고, 신산하고, 가슴 떨리던 삶의 과정들과 순간 가운데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던가. 찬찬히 톺아보니 참으로 다양하고 구구절절하다. 연애의 쓰라린 이별은 기본이고, 아무것도 모른 채 누군가의 달콤한 설득에 덥석 있는 패를 모두 걸었다 빈손으로 마감 지어야 했던 주식 투자며, 모든 것이 뼈아픈 교훈이 아닐 수 없다.
누군가 미리 내가 가야 할 길을 걸어갔다가 그 미립으로 경고해주는 충고는 어딘지 미심쩍을 때가 많다. 저이는 나와 환경과 입장이 다르니, 저이가 우려하는 것은 나에게 해당되지 않을 터. 게다가 내가 하면 다르다는 식의 차별감에 자꾸만 어리석어지니 어쩌랴. 그러니 기어이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갔다가 피멍이 들어 주저앉아버릴 수밖에.
하지만 여전히 나는 실패한 연애에 대해서는 내성을 키우지 못한채 새로운 사랑 앞에서 허둥대고 있다. 그러나 그 외의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마음을 비울 줄도 알게 되었다. 과욕은 금물, 그저 깜냥대로 살기 같은 것들. 그러니 어찌 지나간 생에 허방처럼 들어앉은 그 우울한 사건들을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어찌 됐건 나는 나를 나무라는 선생님 앞에서 서럽게 울었다. 한번 터진 울음은 좀체 그칠 수 없었다. 서러움이 서러움을 길어 올리고 울음이 울음을 끌어냈다. 너무 슬퍼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속으로 잦아드는 울음을 울고 있는데 창문을 통해 쭈뼛쭈뼛 넘어다보는 아이들의 얼굴이 보였다.
그게 무참했다. ... ...
그래도 울음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울음이 다하면 다시 뺨 맞은 순간을 떠올리며 끝나려는 울음의 끝을 이어갔다. 질기게도 울었다. 울음이 나오지 않으면 투레질로 남은 울음을 울었다.

나는 지금 혼자 밴드마스터가 되어 있다. 쿵쿵. 머릿속에서 작은북과 큰북의 울림이 울려오고 멜로디언과 실로폰의 소리도 들어 있다. 나는 한 손을 허리에 얹고 한 손으로는 술이 달린 지휘봉을 돌린다. 나는 이제 그 모든 것을 혼자 다 해낸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을 엽렵하게 살아갈 수 없다. 나는 내 생의 밴드마스터인 것이다. 지쳐도 쉬지 못하고 지휘봉을 휘두르며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안다. 이 세상에는 나보다 더 훌륭하고 멋진 밴드마스터가 많다는 사실도.
밴드마스터. 누가 나 대신 이 지휘봉을 맡아주면 좋겠다. 
나는 그 신호에 따라 그저 수굿하게 따라가기만 하면 좋겠다. 그러면 이 생이 얼마나 편할까.




# 걸레 좀 가져와라
- 김나정

물론 그다음 날이 되어 내 사정이 훨씬 좋아진 건 아니다. 신데렐라가 왕자랑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딴 결말 따윈 없었다. 하지만 빌길질이 멈췄고, 내 가방은 구원받았다. 말끔한 얼굴로 학교를 오갔다. 
난 사람이나 생에 대해, 결정적으로 실망하지 않는다. 그 종례 시간 이후 그래왔다. 누군가가 날 봐줬다. 내 마음을 봐줬으니 영영 혼자는 아니다. 선생님은 나를 발견해줬다. 마음을 끌어안아줬다.
몇 주 뒤 선생님은 내 작문 숙제도 칭찬해주셨다. 횡단보도 앞에선 아이 이야기였다. 별다른 얘긴 아니었다. 신호등은 나한테 윙크를 한다. 신호등이 녹색으로 바뀌면 이상한 나라가 열린다. 선생님은 내게 글 솜씨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아이들이 시큰둥해하자, 한 줄 한 줄 다 읽어주셨다. 아이들은 박수를 쳐줬다. 나한테 글 솜씨란 게 있다니. 내 속에서 뭔가 반짝이는 걸 발견한 느낌이었다. 난, 그냥 돌멩이는 아니었다.

그분 성함은 김기택. 탁구 선수도, 남자도 아니다. 호랑이 같은 여자 선생님이셨다. 
내 가방의 은인이시다. 가방 주인이 글을 쓰게 하셨다.

얼음 땡!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김기택 선생님. 또 듣고 싶습니다, 그 말을요.
"걸레 좀 가져와라."
제 마음속 어린아이가 날아갑니다. 가방에는 날개가 돋습니다. 
저는 암만 노력해도 영영 불행한 사람은 못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 김규나

지금도 가끔 한강을 바라볼 때면 꿈꾸는 일조차 힘겨웠던 날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강물이 지쳐 흐르는 것을 중단한 일은 한 번도 없다. 나는 비로소 한 발도 뗄 수 없이 캄캄한 밤에도 어느 별에선가는 어린 왕자와 그의 장미가 나누고 있을 사랑을 믿는다. 끝나지 않을 어둠 속에서도 곧 새벽을 깨우는 종소리가 들려올 거라는 희망도 놓지 않는다. 세상 모두가 서로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누군가의 가슴에 작은 씨앗 하나 토닥토닥 심어줄 수 있는 온기가 사라지지 않는 한, 그래서 꿈꿀 수 있는 한.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수업>
김용택.도종환.양귀자.이순원 외 지음
황소북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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