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국내도서
저자 : 공지영
출판 : 오픈하우스 2010.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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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중에서


1. 나에게 남은 유일한 진실은 내가 이따금 울었다는 사실뿐이다

어렸을 때는 생각했었다. 서른이 넘은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살까, 모든 것은 다 정해져 버렸을 텐데 ...... 그리고 스물두 살 때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난 너무 늙어버렸어. 인생에 대해서 다 알아버린 걸...... 그리고 결혼을 했었다. 친구들이 하나둘 시든 낙엽처럼 시집을 갔고 유학을 떠났고 그리고 스물여덟에 혜완은 이혼을 했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른 하나...... - 19p.


2. 한 소녀가 울고 있다

별 거 아니란다. 정말 별 거 아니란다 ! 그런 일은 앞으로도 수없이 일어난단다. 네가 빠져있는 상황에서 한 발자국만 물러서서 바라보렴...... 그러면 너는 알게 된다. 니가 지금 느끼는 건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고 울 일은 더더욱 아니고...... 그저 산다는 건 바보같은 짓거리들의 반복인 줄을 알게 될 거란다...... 자, 이제 울음을 그치고 물러서렴. 그 감정에서 단 한 발자국만, 그 밖을 향해서.

하지만 혜완은 담배를 비벼끄면서 희미한 육체의 고통을 느꼈다. 그녀의 육체는 한때 울고 있었던, 그리고 지금 실제로 혜완의 뒷자리에서 흐느끼는 여자 아이의 울음소리에 따라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왜냐하면 한 발자국 물러서는 일이 때로는 전 우주를 들어올리는 것보다 힘들 수가 있다는 것을 그녀가 잘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 40p. 


3. 절대로, 어차피, 그래도

혜완은 절대로, 라는 말을 경혜는 어차피, 라는 말을 그리고 영선은 그래도...... 라는 말을 자신들도 모르게 자주 사용하고 있다는 걸 이야기하면서였다. 그때는 우스갯소리였던 말들이 이제사 혜완의 살갗에 소름을 돋게 만든다. 어차피와 절대로와 그래도의 차이는, 이제 마치 영점 영일도의 각도가 십년동안 우주로 달려나가 만든 그 거리처럼 까마득하게 혜완에게는 느껴지는 것이었다. 혜완은 말하고 싶었다. 경혜야, 나같으면 절, 대, 로, 그렇게는 안 살텐데...... 그러면 영선은 말하겠지. 그래도, 어떻게 하니? 생각하다가 혜완은 웃어버렸다. - 50p.


6. 외로울 때 줄넘기를 하는 여자

그렇다고 해도 곧 더 힘든 시간들이 오리라는 걸 혜완은 알고 있었다. 극복했다고 생각하고 돌아서면, 환영처럼 그 견뎌냄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그 불안정한 시기들을 견뎌야 하리라. 하지만 어차피 그것은 영선이 몫이었다. 그녀가 남편과 아이들에게 돌아가든 그렇지 않든 말이다. - 109p.


7. 그것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산다는 건 언제나 말해야 할 곳에서 할 말을 하지 못하고 말하지 말아야 할 곳에서 말을 꺼내는 실수의 반복이었다. 누구든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나이든 할머니들을 만나면 누구나 자신의 인생을 소설에 비견하는지도 몰랐다. 이미 그 상황 속에서 소설만큼 멋들어지게 생을 살아버린 사람은 더이상 쓰고 싶을 여지가 없을 테니까. - 141p.


생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불어닥치지 않았던가. 언제나 제멋대로 그녀가 어떤 준비도 하기 전에 생은 그녀의 머리칼을 잡아 다른 골목길로 내팽개치지 않았던가...... 그러니 갑작스레, 더 돌아보지 말고 해치워버리자. 돌연히 다가온 이 이별의 기회를 다시는 놓치지 말고...... 놓치고 나서 이 가을밤을 또다시 잠못이루지 말고...... 그녀는 걸음을 천천히 내딛었다.

그러나 생이 그녀를 예까지 데려와 팽개쳐 버린 것은 사실이라 해도...... 그렇다고 해도...... 모든 것이 그녀의 손을 거쳐서 지나갔다. 선택은 어쨌든 그녀가 했던 것이다. - 147p.


8. 불행하지 않다

그때 문득 혜완은 어떤 사람도 언제나 불행한 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한때 그렇게 오두마니 앉아서 이 세상 모든 불행이 자신에게만 쏟아져 내린다고, 마치 하늘이 무너지듯이 쏟아져 내린다고 생각했던 자신은 지금 여기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웃고 있는 사람이 언제나 행복한 건 아니듯이 울고 있다고 언제나 슬픈 것은 아닐 것이다...... - 163p.


13. 노을을 다시 살다

사랑이라니...... 말같은 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미 경혜를 택해버렸던, 빗속에 서있던 학교방속국의 그 선배도, 이혼을 하고 난 다음 혜완의 전남편도, 그리고 이미 자살을 기도한 후 영선의 남편도, 주정을 부리던 영선의 아버지도 모두 그런 말을 사용하지 않았던가. 사랑한다고...... 그것도 언제나 가장 나쁜 순간에 말이다. 사랑하느냐는 질문은 그러므로 무의미했다. 오히려 그들은 이렇게 질문을 받았어야 했다.

─ 저를 사랑하는 방법을 알고 계세요? - 254~255p.


15.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들어봐......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중략)

그랬다 영선은 그 말의 뜻에 귀를 기울여야 했었다. 경혜처럼 행복하기를 포기하고, 혜완처럼 아이를 죽이기라도 해서 홀로 서야 했었다. 남들이 다 하는 남편 뒷바라지를 그냥 잘하려면 제 자신의 재능에 대한 욕심 가튼 건 일찌감치 버려야 했었다. 그래서 미꾸라지처럼 진창에서 몸부림치지 말아야 했다. 적어도 이 땅에서 살아가려면 그래야 하지 않았을까.

누군가와 더불어 행복해지고 싶었다면 그 누군가가 다가오기 전에 스스로 행복해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재능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다면 그것을 버리지 말았어야 했다. 모욕을 감당할 수 없었다면 그녀 자신의 말대로 누구도 자신을 발닦개처럼 밟고 가도록 만들지 말아야 했다. - 294p.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공지영

오픈하우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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