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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묵지/추억의 책장 · 메모

[엄마를 부탁해] 피에타, 그 영원한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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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국내도서
저자 : 신경숙
출판 : 창비(창작과비평사) 2008.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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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중에서


# 1장 아무도 모른다

- 그러는 너는?

나? 너는 입을 다물었다. 너는 엄마를 잃어버린 것조차 나흘 후에나 알았으니까. 너의 가족들은 서로에게 엄마를 잃어버린 책임을 물으며 스스로들 상처를 입었다.

오빠 집에서 나온 너는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다가 엄마가 사라진 지하철 서울역에서 내렸다. 엄마를 잃어버린 장소로 가는 사이 수많은 사람들이 네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아버지가 엄마 손을 놓친 자리에 서 있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네 어깨를 앞에서 뒤에서 치고 지나갔다. 누구도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너의 엄마가 어쩔 줄 모르고 있던 그때도 사람들은 그렇게 지나갔을 것이다. - 16p.


엄마가 스스럼없이 너를 혼낼 때는 네가 엄마, 엄마를 더 자주 불렀던 것 같다. 엄마라는 말에는 친근감만이 아니라 나 좀 돌봐주, 라는 호소가 배어 있다. 혼만 내지 말고 머리를 쓰다듬어줘, 옳고 그름을 떠나 내 편이 되어줘, 라는. 너는 어머니 대신 엄마라는 말을 포기하지 않았다. 엄마를 잃어버린 지금까지도. 엄마라고 부를 때의 너의 마음에는 엄마가 건강하다고 믿고 싶은 마음도 섞여 있었다. 엄마는 힘이 세다고, 엄마는 무엇이든 거칠 게 없으며 엄마는 이 도시에서 네가 무언가에 좌절을 겪을 때마다 수화기 저편에 있는 존재라고. - 27p.


네가 작은오빠에게 문자를 배울 때마다 엄마는 양말을 깁거나 마늘을 까면서 마루에 어드려 글자를 쓰고 있는 너를 건너다 보았다는 생각. 네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너의 이름을 쓰고 엄마 이름을 쓰고 드디어 더듬 더듬 책을 펼쳐놓고 읽게 되었을 때 박하꽃처럼 되던 엄마의 얼굴이 네가 읽을 수 없는 점자 위로 겹쳐졌다. - 49p.


# 2장 미안하다, 형철아

- 너는 내가 낳은 첫애 아니냐. 니가 나한티 처음 해보게 한 것이 어디 이뿐이간? 너의 모든 게 나한티는 새세상인디. 너는 내게 뭐든 처음 해보게 했잖어. 배가 그리 부른 것도 처음이었고 젖도 처음 물려봤구. 너를 낳았을 때 내 나이가 꼭 지금 너였다. 눈도 안 뜨고 땀에 젖은 붉은 네 얼굴을 첨 봤을 적에...... 넘들은 첫애 낳구선 다들 놀랍구 기뻤다던디 난 슬펐던 것 같어. 이 갓난애를 내가 낳았나...... 이제 어째야 하나....... 왈칵 두렵기도 해서 첨엔 고물고물한 네 손가락을 제대로 만져보지도 못했어야. 그렇게나 작은 손을 어찌나 꼭 쥐고 있던지. 하나하나 펴주면 방싯방싯 웃는 것이...... 하두 작아 자꾸 만지면 없어질 것도 같구. 내가 뭘 알았어야 말이지. (중략) 어서어서 자라라 내 새끼야, 매일 노랠 불렀네. 그러다 보니 이젠 니가 나보다 더 크더구나.

엄마는 그를 향해 등을 세우고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 어서어서 자라라, 했음서도 막상 니가 나보다 더 커버리니까는 니가 자식인데도 두렵데.

- ........

- 너는 다른 애덜 같지 않게 말이 필요없는 자식이었다. 뭐든 니가 알아서 했잖어. 얼굴은 이리 잘생기구 공부는 또 얼마나 잘했구. 자랑스러워서 난 지금도 가끔 니가 진짜 내 속에서 나왔나 신기하다니까...... 봐라, 너 아니믄 이 서울에 내가 언제 와 보겄냐. - 93~94p.


이놈아! 형철아! 그를 끓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울음을 그친 엄마는 이제 그를 달랬다. 누가 해주든 밥은 먹어야 한다고 했다. 그에게 네가 밥을 잘 먹고 있어야 엄마가 덜 슬프다고 했다. 슬픔. 엄마에게서 슬프다라는 말을 처음 들은 순간이었다. 그는 왜 자신이 밥을 잘 먹고 있어야 엄마가 덜 슬픈지 알 길이 없었다. 그 여자 때문에 엄마가 집을 나갔으니 그 여자가 해주는 밥을 먹으면 엄마가 슬퍼야 맞을 것 같은데 엄마는 반대로 말했다. 그여자가 해주는 밥인데도 그걸 먹어야 엄마가 덜 슬프다니.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그는 엄마를 슬프게 할 생각은 없었으므로 그제야 먹을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래야지. 눈물이 가득 담긴 엄마의 눈에 웃음이 담겼다. - 103p.


# 3장 나, 왔네

다른 사람이 아내에게 딸의 소설을 읽어주고 있을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이 젊은 여자 앞에서 글을 모른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아내는 얼마나 애를 썼을까. 얼마나 딸의 소설을 읽고 싶었으면 이 젊은 여자에게 이 소설을 쓴 작가가 내 딸이라는 말은 못하고 눈이 잘 보이지 않으니 읽어달라고 했을까. 당신의 눈이 시어졌다. 이 젊은 여자에게 딸을 자랑하고 싶은 걸 아내는 어떻게 참았을까. - 147p.


열일곱의 아내와 결혼한 이후로 오십년 동안 젊어서는 젊은 아내보다 늙어서는 늙은 아내보다 앞서 걸었던 당신이 그 빠른 걸음 때문에 일생이 어딘가로 굴러가 처박혀버렸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일분도 걸리지 않았다. 지하철을 타고 나서라도 바로 뒤를 돌아 확인했더라면 이리되지 않았을까. 젊은날부터 아내가 당신에게 했던 말들. 어딘가 함께 갈 때면 항상 걸음이 늦어 뒤처지곤 하던 아내는 늘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힌 채 당신을 뒤따르며 좀 천천히 가먼 좋겄네, 함께 가먼 좋겄네...... 무슨 급한 일 있소? 뒤에서 구시렁대었다. 마지못해 당신이 기다려주면 아내는 민망한지 웃으며 내 걸음이 너무 늦지라오? 했다.

- 미안한디...... 그래도 남들이 보믄 뭐라고 하겄소. 같은 집에 사는 사람들이 한 사람은 저만치 앞서서 가고 한 사람은 저 뒤에서 오믄 저이들은 옆에서 같이 걸어가고 싶지도 않을 만큼 서로 싫은 가비다 할 것 아니요. 남들한티 그리 보여서 좋을 거 뭐 있다요. 손 잡고 가자고는 안할 것잉게 좀 천천히 가잖게요. 그러다가 나 잃어 버리믄 어짤라 그러시우. - 167~168p.


# 4장 또다른 여인

당신 이름은 이은규요. 의사가 다시 이름을 물으면 박소녀,라 말고 이은규라고 말해요. 이젠 당신을 놔줄 테요. 당신은 내 비밀이었네. 누구라도 나를 생각할 때 짐작조차 못할 당신이 내 인생에 있었네. 아무도 당신이 내 인생에 있었다고 알지 못해도 당신은 급물살 때마다 뗏목을 가져와 내가 그 물을 무사히 건너게 해주는 이였재. 나는 당신이 있어 좋았소. 행복할 때보다 불안할 때 당신을 찾아갈 수 있어서 나는 내 인생을 건너올 수 있었다는 그 말을 하려고 왔소.

...... 나는 이제 갈라요 - 236~237p.


저기,

내가 태어난 어두운 집 마루에 엄마가 앉아 있네.

엄마가 얼굴을 들고 나를 보네. 내가 이 집에서 태어날 때 할머니가 꿈을 꾸었다네. 누런 털이 빛나는 암소가 막 무릎을 펴고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네. 누런 털이 빛나는 암소가 막 무릎을 펴고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네. 소가 힘을 쓰며 막 일어서려는 참에 태어난 아이이니 얼마나 기운이 넘치겠느냐며 이 아이 때문에 웃을 일이 많을 것이니 잘 거두라 했다네. 엄마가 파란 슬리퍼에 움푹 파인 내 발등을 들여다보네. 내 발등은 푹 파인 상처 속으로 뼈가 드러나 보이네. 엄마의 얼굴이 슬픔으로 일그러지네. 저 얼굴은 내가 죽은 아이를 낳았을 때 장롱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네. 내 새끼. 엄마가 양팔을 벌리네. 엄마가 방금 죽은 아이를 품에 안듯이 나의 겨드랑이에 팔을 집어넣네. 내 발에서 파란 슬리퍼를 벗기고 나의 두 발을 엄마의 무릎으로 끌어올리네. 엄마는 웃지 않네. 울지도 않네.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 나에게도 일평생 엄마가 필요했다는 것을. - 254p.


# 에필로그 장미 묵주

시청 앞 은행나무에 손톱만한 새잎이 돋기 시작했을 때 너는 삼청동으로 빠지는 큰길의 아름드리나무 밑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엄마가 없는데도 봄이 오고 있다니. 언땅이 녹고 세상의 모든 나무엔 물이 오르고 있다니. 그동안 너를 버티게 하던 마음, 엄마를 찾아낼 수 있으리란 믿음이 뭉개졌다. 엄마를 잃어버렸는데도 이렇게 여름이 오고 가을이 또 오고 또 겨울은 찾아오겠지. 나도 그 속에서 살고 있겠지. 텅 빈 페허가 네 눈앞에 펼쳐졌다. 그 길을 터벅터벅 걷고 있는 파란 슬리퍼를 신은 실종된 여인. - 274p.



<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창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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