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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묵지/추억의 책장 · 메모

[그는 추억의 속도로 걸어갔다] 고통스럽고, 슬프고, 쓸쓸하고, 외롭게 젊음을 살아낸 예민한 영혼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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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둡고 쓸쓸한 날들의 평화 


#6 - 18p.


솔직히, 그는 애처로울 정도로, 때론 몸에 해로울 만큼이나 심각하고 비관적이다. 마음 깊이 좋아하기엔 누구라도 부담스러운 스타일인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그를 쉽사리 멀리 할 수 없는 건, 현재 그에게 나밖에는 친구가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친구는 하나가 필요할 뿐이지. 둘도 필요 없다고 생각해. 인류 전체와 말싸움을 하며 살아도 괜찮다구. 날 이해해주는 단 한 사람이 있으면 되는 거야."

그렇게 말하는 그는, 내가 그를 잘 이해할 수 없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니라면, 이미 그것까지도 감안하고 하는 말일 수도 있다. 왜냐고? 그는 영리하니까. 그리고 나는 꼭 그 반대편의 거리만큼 멍청하니까. 그는 어쩌면 내 앞에서조차, 순간순간 짜낸 각본에 따라 연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6 - 25p.


"너 할리우드 영화 싫어하지?"

"볼 땐 재미있어도 나중에 남는 게 없잖아. 돈만 잔뜩 쏟아 붓고 말이지."

"난 할리우드 영화가 한 가지 이유만으로 참 좋아."

"어떤?"

"양키들 말이지, 아무리 아슬아슬한 상황에서도 꼭 농담을 하거든. 총알 맞고서도, 집에 따끈한 핫케이크가 있는데, 하고 죽는 게 그네들이지. 아마도 천성인가 봐. 그래서 다른 나라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잔인한 지소 많이 하지만. 언뜻 그런 우스갯소리들이 엉터리인 것 같지만, 사실 전쟁터에서도 사람이 늘 찡그리고만 사는 건 아니거든. 사람들은 우울한 환경 속에서도 해학을 수신할 수 있는 안테나를 제공받게 마련이지. 생존하려고 말이야. 웃음은 폭풍이 몰아치는 인생의 강을 건너게 해주는 배와도 같아. 내가 아는 희극 배우는 이런 말을 하더라. 이 세상에 웃지 않을 수 있는 일은 결단코 하나도 없다고. 그 사람, 굉장히 고생을 많이 했고, 또 지금도 무지 가난하거든. 그런데도 그러더라구. ... ... 어쨌든, 참 맞는 얘긴거 같아."



○ 이제 나무묘지로 간다


#3 - 61p.


그녀는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눈동자엔 물기가 가득했다. 슬픔이 이글거렸다. 맑은 슬픔이.

"청무로 돌아가려고 해. 좀 쉬고 싶거든. 이젠 안개가 파랗지 않을 것 같애. 설혹 그렇다 해도 상관 없구."



○ 그는 추억의 속도로 걸어갔다


- 93p.

책 한 권에 의해 인생이 변화 받았노라고 떠벌리는 인간들과는 상종하지 말아라. 그들은 언제 너를 책 한 권 정도의 값어치로 팔아넘길지 모른단다.


- 95p.

흰색에 관해 우리는 너무 오해가 많아왔어, 음, 그렇구말구, 흰색은 결코 나약하거나 소극적인 세계가 아니다. 전 우주를 통해 가장 강렬하고 황홀한 창조의 빛! 우리를 질식시키고도 남았을 힘! 그것은 황금빛이 아니라 흰색이었을 것이다. 이 어두운 지구상에 처음으로 눈이라는 것이 내려왔을 때를 상상해봐라. 얼마나 멋졌겠니! 


아버지는 완성되지도 않은 그 그림에 홀딱 빠져버렸더랬다. 나는 아버지의 천진한 눈빛에 당황했다. 난 그때의 그림을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작업실에 그대로 놔두고 있다. 아버지와 함께할 적에는 완성된 그림이 오히려 아버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까 봐 그랬고, 헤어진 후에는 왠지 그 그림을 다 채워버리면 아버지를 내 마음속에서 완전히 잃어버리게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 108p.

하얀 고양이의 회색 동공 같은 나날이다. 흘러가는 계절 뒤에 무심히 잊혀지고 있다는 것을 숨길 수가 없었던 우리는 서로에겐 피차 슬픈 악습. 발은 피로의 미역에 감겨 자꾸 미끄러지고 입은 새의 부리처럼 지난 추억을 씹어 삼킬 수 없다고 전한다. 차라리 나를 이 저무는 하늘의 소금 속에 푹 절여다오. 무엇이 시작이고 무엇이 그 시작의 바로 다음인가를 천년 동안만 생각할 수 있도록. 그리고 긴 송곳으로 네가 나의 눈을 찔렀기에 너의 눈가에 녹슨 피가 흐르는 것이라고.


- 108p.

이 세상에서 인간을 구원할 가망이 있는 것은 오직 사랑밖에 없다고, 나와 그녀는 그렇게 저 희미한 사랑의 처음을 무작정 믿어보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그 애처로운 사랑의 빛마저 바래고 허무해지면서도 우리가 서로를 원망하지 않고 헤어질 수 있었던 까닭의 배경에는, 우리의 첫날에 우리 스스로 인정하고 말았던 그 패배감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이미 부정적으로 결정이 난 싸움에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너무 많은 것들을 희생하며 살아간다. 아내와 나는 이별하며, 오히려 인생에 커다란 깨달음을 준 우리의 짧았던 부부로서의 인연에 감사했다. 누가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 내가 그녀를 내 목숨만큼 사랑하고 숭배했었다는 사실을. 헤어져 있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은 거짓이다. 그 말은, 미워한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은 거짓이다, 라는 문장과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난 아내가 아직 날 사랑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단지 우리가 헤어졌던 것은, 함께 살아가기에는 서로의 절망이 각자에게 너무 큰 짐이 되기 때문이었을 뿐이다. 내 어머니에게 내가, 혹은 내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 109p.

추억에도 속도라는 것이 있다. 나는 아주 드물게 그 속도를 감지하곤 한다. 나는 내 그림 속의 인물과 사물 들이 그 추억의 속도로 움직이길 원했고, 그 그림들에서 지나간 내 모습들을 반추할 수 있기를 추구했다. 만약 내가 벌레를 그리거나, 혹은 흩어지는 노을을 그린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것들은 내 빈 가슴을 추억의 속도로 밟고 지나간 스스로의 모습이었다. 이론가들은 진리를 추상적인 개념으로 밝혀낸다. 예를 들어 1+1=2가 그렇다. 하지만 예술가들은 구체적인 형상으로 말한다. 내가 하나에 하나가 더해지면 둘이 된다는 것을 표현하고자 한다면, 해지는 가을 들녘에서 뛰노는 두 아이나, 비바람에 흔들리는 아름드리 너도밤나무 두 그루를 그리는 것이다. 나는 내가 느끼는 추억의 속도를 공식으로 종이에 적어 남에게 가르칠 만한 재주가 없을뿐더러, 내 그림은 공식이 아니기에 타인이 그것을 활용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추억에 속도가 없는 것은 절대 아니다. 덧없는 예술을 보고 울어주는 얼간이들이 있는 한, 세상에는 시적인 것들의 드문 승리가 반드시 존재한다. 저들은 이혼했다, 라고 말하는 것은 개념이지만, 그 개념은 나와 아내의 사이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다. 거기엔 형상이 필요하다. 그림이건, 음악이건, 가슴 아픈 형상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내가 느끼고 있는 추억의 속도 또한 그렇다.


- 117p.

부끄러움은 괴로움으로 쉽사리 바뀌어 나를 아무와도 대화할 수 없는 외딴 곳으로 데리고 갔다.


대신, 대신, 나는 열심히 그림을 그리지 않았는가! 나는 내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모르는데도 비평가들은 내가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들을 마치 내 곰삭은 철학인 양 신문 지상에 떠벌리고 있었다. 세상에서 유명해지기란 너무도 쉬웠다. 단지 더불어 북 치고 장구를 쳐주는 족속들이 필요할 뿐이다. 얼마나 많은 진정한 예술가들이 그런 광대들의 도움이 없어 사장되는가를 생각하면, 세상은 한심 그 자체였다.



○ Lemon Tree


#1 - 121p.


다만 멀리 존재함으로 환상처럼 여겨지는 것들이 있다. 별들의 세계가 그러하다. 초저녁 서쪽 하늘의 고혹스런 비너스는, 너무 아름다운 사람들이 자주 그러하듯 쉽사리 사라지고 만다. 



#6 - 141p.


너는 다시는 날 찾지 않을 거였다. 신호등의 파란불이 벌써 깜빡 깜빡댔다. 너는 내게서 탈출하고 있었다. 예전에 내가 너로부터 그랬듯이.


네가 탄 차가 건너편에서 멀어질 때, 뭔가 붉고 짙은 것이 내 발목으로 떨어졌다. 나는 그것을 주워든다. 낙엽이었다. 아, 서른 번째 가을마저 이렇게 흘러가는구나. 불행도 아무에게나 찾아오는 것은 아닌가 보다. 슬퍼하거나 아파해야 할 자격이 있는 이에게 그것은 온다. 고통은 감당하는 게 아니라 수행하는 것이라던 누군가의 말이, 내게 오늘처럼 두려운 적이 있었던가.



○ 달의 뒤편으로 가는 자전거 여행


#2 - 147p.


마음의 중심이 심하게 지쳤음을 자인하게 되고, 그래서 그것이 급기야 육체적으로도 심각하게 다가오는 때가 한두 번쯤은 있게 마련이다. 거기에 특정한 병명이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사랑의 슬픔으로 상처받은 가슴에 어떤 명약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오랜 세월을 두고 녹슨 노인의 어깨가 지난날의 후회마냥 아련하게 쑤셔대는 일과도 같이, 내가 서울에서 얻은 얼굴 없는 절망의 실체에 의학적인 의미를 부여한다는 건 부질없단 말이다.


#2 - 148p.


나는 당분간 새로운 꿈 따윈 꾸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큰형의 조언대로 아무 목적 없이 여기에 멈춰보기로 말이다. 회복의 열망 자체가 없는 진짜 휴식을 즐겨보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리고 요즘 와서는, 이처럼 맥없이 늙어감도 나쁜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곤한다. 조용하다. 사방이 그렇게 조용할 수가 없다. 이곳에서, 나는 낮잠 속에서조차 낮잠을 잔다.


#4 - 154p.


스무 살 무렵의 한때를 회상하는 일이란 인생 전체를 탐구하는 것만큼이나 힘겹다. 또한 어떤 사람이 있어, 백 번째 해를 살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의 스무 살 시절보다 커다란 의미를 지닐 순 없다. 이미 백 년을 산 사람은 죽음의 초소(哨所)에 기대어진 빈총이지만, 스무 살이란, 삶의 작렬하는 태양을 향해 굳센 팔뚝으로 정조준되어진 푸른 총구와도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무 살 즈음에, 어떤 형태로든 요정(妖精)이 된다. 생활과는 전혀 다른 일들에 미쳐 있기도 하고, 없는 것을 있다고 믿고, 반대로 존재하는 것들을 상상조차 못 하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을 배우고, 거의 예외 없이 실패한다.



○ 내 가슴으로 혜성이 날아들던 날 밤의 이야기


#3 - 197p.


" 생각해 봐.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본래의 특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 과연 몇이나 남았는가를.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선 모든 게 변질되어버렸지. 밤다워야 할 밤은 술집과 유곽의 불빛 아래 사라졌고, 추위도, 바람도, 그리고 하늘의 별들마저도 인간세계에서 추방되고 말았어. 세상 대부분의 사물들이 신이 부여해 준 원형을 잃고, 인간생활 자체의 리듬은 불분명해진 거야. 바삐 움직이지 않는 것들이 없고, 시끄럽지 않은 게 없지. 우리는 늘 스스로를 보채기 때문에 길가에서 자라나는 꽃과 나무들의 색깔과 향기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바람이 불어도 그 바람에 풀잎들이 한들거리는 모습을 그냥 지나쳐버려. 그러나 지구상의 가장 높은 곳과의 만남, 그 무목적의 산행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거든. 그를 둘러싸고 있는 건 다만 망각의 고요함뿐이다. 마을에서 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밤하늘의 별들을 보게 되는 거야. 별들에게도 나름대로의 의미가 이겠으나, 어쩌면 그들도 엄연히 인간의 생활에 속하고 있어. 클라이머들의 운명이 별들에게 달려 있기도 하기 때문이지. 별이 빛나 때 클라이머의 마음은 즐겁다. 그러나 별들이 너무 총총히 반짝거리면 이내 불안에 잠기게 된다구. 폭풍을 예고하는 조짐이기도 해서야. 별들이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으면 이른 아침에 눈이 내릴 징조고. 저 아래서는 인가(人家)의 불빛 때문에 하늘의 별빛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르나, 높은 산에서 떠오른 수정과 같이 빛나는 별들은 산악인의 존재 자체가 되지. 왜 산에 오르냐구? 그건 우주의 별들과 가장 가깝게 지구가 공전하면서 일으키는 바람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한 뼘의 자리가 바로 거기라서 그래. 산을 오르는 사람에겐 별 역시 산이야. "



○ 초식동물의 음악


#1 - 228p.


따뜻한 물에 젖고 싶은 새벽이다.

나는 그러기 위해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다.



○ 길과 구름과 바람의 적 


#1 - 255p.


나는 길과 구름과 바람의 적, 시간에 썩어들지 않는 죽음의 적이다.


아무리 멀리 걸어가도 지치지 않는 길의 적, 안개의 몸으로 공중을 뒤흔드는 구름의 적. 지상의 모든 사랑과 질긴 인연으로도 저지하지 못하는 바람의 적이다. 나는 길보다 외롭고 구름보다 가벼우며 바람보다 쓸쓸하다. 나는 여행과 귀향의 처음이자 끝이고 내 찡그린 얼굴은 폭발하는 태양의 흑점이다. 나는 시체와 사슬의 적. 나는 자유로운 영(靈)이니 나의 차갑게 불타는 말씀이 두렵지 않은가.


#6 - 276p.


팔딱, 팔딱, 목숨이 뛰는 게 손바닥에 전해진다. 슬프다. 기쁘다. 슬프다. 슬프지 않다. 기쁘지 않다. 여자에게 입을 맞춘다. 까끌한 혀를 입술 사이로 밀어 넣어 잠든 여자의 부드러운 복종을 맛본다.



○ 작가의 말


나는 일기를 남기지 않는다. 내 이 부끄러운 오늘을, 그리하여 괴로움인 저 어제를 굳이 기록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대신 내 소설들을 보면 그것들을 빚어내려 애쓰던 무렵의 내가 타인은 해독해내지 못하는 암호가 되어 거기에 있다.


나는 내가 쓴 것들 말고는 모두 잃어버렸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는 추억의 속도로 걸어갔다>

이응준 지음

민음사, 2005



그는 추억의 속도로 걸어갔다
국내도서
저자 : 이응준
출판 : 민음사 2005.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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