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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묵지/추억의 책장 · 메모

[여행자의 인문학 노트] 스페인에서 인도까지,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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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중에서


# 책머리에 

- 6p.

저는 이런 봉지족의 존재와 그에 대한 경배를 바라보며 정설처럼 여겨지는 한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 여행이 거듭될수록 배낭은 간소해진다. "

어쩌면 이 말은 너무나 당연한 말일 것입니다. 아마 배낭여행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말에 공감할 테죠. 길 위에서는 등에 짊어진 모든 것들이 버릴 것이 되니까요. 길을 오래 걷는다면 비움은 미학의 차원을 넘어 생존의 문제가 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간소하게 짐을 꾸리는 노하우가 여행 이력을 가늠하게 하는 지표가 되는 까닭에, 때로는 배낭의 무게가 여행자들의 자존심이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유치해 보이겠지만 정말 그렇습니다. 그리고 도량에서 오랜 시간 수행해도 비우는 것에 익숙해지지 않는 인간의 본성 대문인지 가벼워진 배낭에는 비워낸 무게만큼 필연적으로 허위가 섞이게 됩니다. 예컨대 파키스탄 훈자를 실제로 다녀온 사람들보다 훈자를 더 잘 묘사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예사이며, 제부도의 석양을 묘사하면서 발리의 석양이라고 우격다짐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사람의 가치가 금액으로 환산되는 시대에 스스로 상품이 되지 못해 안달 난 이런 '뚝심 있는 바보'들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지요.

길 위에서 이런 뚝심 있는 바보들을 몇 번 목격하면서 "여행은 비움의 과정"이라는 암묵적인 정의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수학에서 말하는 '극한'의 개념을 생각해봅시다. 길 위를 오래 걸으며 버리다 버리다 봉지족으로 남은 자들의 무용담은 알 수 없어야 하지 않을까요? 비움의 정점에서는 이야기마저 버려져야 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그냥 솔직해지기로 했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훌훌 다 비워낼 깜냥이 되지도 않고 비움이 여행의 본질이라고 믿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여행의 길목에서 비워내는 부분이 있다면 분명히 그 자리에 차곡차곡 채워지는 것이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다만 그 빈자리에 허위와 허풍이 들어차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무엇을 넣을 것인가?"가 길 위에서 저를 사로잡은 고민이었습니다.


-12p.

여행은, 특히 배낭을 짊어지고 홀로 나서는 여행은, 스스로를 자발적인 국외자로, 자발적인 이산자로 만듭니다. 그러니까 여행은 내가 존재하지 않던 사회에 '나'라는 이질적인 존재가 투입되면서 그곳의 사람들과 만나고 충돌하도록 만들어줍니다. 만남을 통해 이해하고 이해를 구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공통적인 속성과 완벽하게 다른 습성을 체득하게 됩니다. 그렇게 그들과 나 사이에 충돌과 화해가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일상으로부터 탈주를 꿈꾸었던 우리는 스스로 쌓아올린 벽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여행에서 목도한 가장 장엄한 풍경을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저는 스스로 둘러싼 이 '벽'을 꼽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벽을 허물기 위해 고민하는 것을 멈추지 않다 보면, 여행을 떠난 사람들이 저마다 품에 안은 공통적인 동경과 염원인 '자유'에 수렴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일상에서 탈주하여 여행에서 얻고자 하는 '자유'란 무엇일까요? 저는 여기에 대한 답으로, 백 년 전 세상을 바꾸기 위해 치열하게 살다 죽은 삶 자체로 '자유'(Freiheit)로 불리었던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 자유, 그것은 항상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다."



# 삽질과 꼴값 - 32p.

마주치고 싶지 않은 과거가 기억날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런 기억은 의도적으로 지우려고 애쓸수록 다시금 생각하게 도고, 생각할수록 기억은 또렷해진다. 사랑에 대한 기억은 이러한 아이러니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모두 한두 번쯤 지옥 같았던 시간이 있었고, 그때 분명 그것을 지옥 같다 생각했음에도 생각할수록 또렷해지는 것은 고통과 함께 했던, 혹은 그 이전을 장식했던 아름다운 기억이다. 그러다 보면 우습게도 지옥이 천국으로 환원되고 허우적거렸던 시간이 아름답기만 한 순간이 온다. 시야의 바깥은 진창이 되었음을 알면서도 그 시간에 대해 하염없는 감상에 젖게 된다. 부질없이 옛 기억을 또렷하게 만드는 것을 두고 우리는 '전문용어'로 삽질이니, 꼴값이니 부르게 되는 것이다.

'뇌가소성'이란, 같은 생각이나 행위를 반복할수록 대뇌피질에 그것을 기억하는 회로가 생기는 것을 뜻한다. 지우고 싶은 기억을 지우기 위해 끊임없이 그 기억을 떠올려야 하는 역설은 왜 사람들이 사랑을 하고 나면 '삽질'을 했다고 고백하면서 '꼴값'을 떠는가에 대해 설명해준다. 그러나 삽질이니 꼴값이니 업신여기면서도 하게 되는것, 그것도 사람의 일이다.



# 마법 - 36p.

"만약 당신에게 마법과 같은 힘이 생긴다면, 내일 당장 무엇이 되고 싶나요?"

"날아다니는 것 같은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지, 당신의 미래 말입니다. 마법과 같은 힘이 주어진다면 내일 당장 어떤 사람이 되어 살고 싶은지 묻는 거예요."

"지금으로서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그런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면 한 번은 그렇게 살아보고 싶어요."

"그럼, 그렇게 될 겁니다."

"네?"

"왜냐하면, 삶이 곧 마법이니까요."



# 얕은 나눔의 깊은 부끄러움 - 83 ~ 84p.

'나눔'이란 무엇인가? 내게 나눔이란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에게 퍼주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지지 못한 자들, 힘없는 자들, 소외된 자들이 더 이상 타의에 의해 가지지 못하게 되거나 힘없게 되거나 소외되지 않도록 세상을 함께 바꾸어나가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이상과 이념이 현실 앞에서 망각되어 스스로가 초라하고 남루해지는 순간, 전날 사막의 밤에 느꼈던 그 딜레마가 다시 뱃속부터 목을 타고 머리까지 기어올라온다. ... (중략) ...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에서 연말이면 예외 없이 모든 미디어를 도배하는 것이 '나눔'이다. 그러나 이 '나눔' 이라는 것은 어쩌면 지독할 정도로 '행동해야 하는 것'이 아닐는지. 얼마간의 헌금에서 위안을 느낀다면 돈으로 심적 평안을 구입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헌금과 헌물은 할수록 아파지고, 어려워지고, 슬퍼져야 하는 것이리라. 수많은 동정심들이 세상에 존재하고 거기서 비롯된 헌금과 헌물들이 한반도 서른 개 정도는 사고도 남겠지만 현실은 여전하다. 바뀌지 않는 현실에 아파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행위가 자기 위안 외에 그 무엇이 될 수 있을까? 



# 그것이 신의 뜻이라면 - 85p.

여행자들은 보통 작별인사로 "잘 가요" 보다는 "다음에 다시 만납시다"를 더 선호한다. 언젠가 어디에선가, 정 안 되며 다음 생에라도 다시 만나게 되리 모르는 연(緣)의 끈을 느끼게 하는 인사말이기에 더욱 긴 여운이 남을 것이다. 나 역시 이브라힘에게 그렇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다음에 다시 만나요. See you again. 이브라힘은 활짝 웃으면서 나를 끌어안더니 그 또한 다음에 다시 만나자며 인사를 하고는 한마디를 덧붙인다.

"인샬라."



# 유리상자 - 108 ~ 109p.

하나의 사랑이 끝나면서 사랑과 함께 뜨거웠던 감정들은 빠른 속도로 소멸되어갔다. 소멸된 감정과 함께 증오의 타래도 서서히 풀려갔다. 함께 했던 시간을 증명할 만한 것들을 차례로 정리해나갔다. 차곡차곡 모아 두었던 편지를 버리는 것부터 시작했다. 오랜시간 장거리 연애를 하는 동안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모아두었던 기차표들도 버린다. 왠지 모르게 후련한 마음. 매몰차게 돌아선 내게 끊임없이 전화를 해오는 그녀의 전화번호를 스팸번호로 등록하고 전원을 끈다. 편리한 세상의 편하지만은 않은 방식이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두 다 지워버리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느끼지 않으려 해도 느껴지는 감촉이 나를 괴롭힌다. 별 것 아닌 일에 눈물이 난다. 많이 사랑했던 만큼 많이 지쳤다. 그만큼 지쳤기에 더 이상 우리는 아니었음을 안다. 우리가 손에 나눠 꼈던 반지 때문에 그을리지 않은 부분이 남아 백악기의 화석처럼 한때 그곳에 무엇인가 있었음을 표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녹이 슬고, 바람이 불고, 사람이 죽고, 고깃덩어리가 부패하는 것처럼 얼마 있지 않아 아무런 흔적도 감각도 남지 않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통조림에서 갓 꺼낸 복숭아처럼 하늘이 샛노랬다. 당장은 어려워 보이겠지만 자연스럽게 잊힐 것이리라. 계절은 돌고 사건은 반복되지만 그 아에 사는 이들은 바뀌는 것처럼. 사랑은 흙먼지처럼 가볍고 아마 이름도, 얼굴도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는 순간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관계의 종결을 선언하기 훨씬 전부터 우리의 따뜻했던 겨울은 끝나가고 있었을 것이다. 꿈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선명했던 기억이 아슬아슬 사라져 종내 희미한 마음만 남아 돌아볼 수 없게 된 그 겨울은 이미 한참 전부터 끝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겨울을 오래전부터 유리상자로 만들어 두었다. 그것은 건드리면 바스락하니 깨질 듯 얇고, 실루엣만 간신히 보이는 불투명한 유리벽으로 만들어진 상자였다. 오랫동안 얇은 유리를 밀어내지 않고 그대로 두고 있었던 나는 여전히 그 겨울에 스스로를 가두어 두었다. 사랑을 구하는 일이 가없이 가엽다고 여겨질지 모르나, 무너진 믿음으로 매몰차게 고개 돌린 그 마지막 순간에 다시 한 번 구해보았다면, 이토록 꼼짝없이 그 자리에 갇혀 겨울을 떠올리고, 그 따스함을 떠올리고, 그 온도에서 그 체온을 떠올리고, 그 체온을 감싸며 속삭였던 끊임없는 이야기를 살갑게 떠올리며, 아주 가끔씩 그리워하거나 후회하거나 기억을 떠올리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 Bon Voyage - 111p.

법륜(法輪)처럼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는 여행의 길 위에서 에로스를 수반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이 제아무리 길 위에서 스쳐 지나가는 연이라 해도 사람과 사람의 만남, 그리고 만남에서 비롯되는 관계는 필연적으로 사랑과 미움의 줄타기를 동반한다. 정도의 차이일 뿐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양가감정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과'와 같은 것이다. 없어도 크게 어색하지는 않지만 이어지기 위해서는 존재해야 하는 접속사 같은.



# 장기적으로 보면 우리는 모두 죽는다 - 265 ~ 266p.

아마도 그것은 '그 시대에 대한 그리움' 그 자체이지 않을까? 그 시절의 기억 중 유리한 것, 고통스럽지 않은 것, 내게 좋은 것들만이 편취되어 남고, 내가 직접 겪지 않은 고통에 대해서는 무감각하거나 망각해버린 결과 '그때 그 시절'과 '그때 그 사람'에 대한 향수에 더욱 젖어들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 평화의 속살 - 319p.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기에 조금이라도 이고 가는 짐의 무게가 가벼워지지 않을까? 비록 함께 걸어가는 것이 고단하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그렇게 고단하고 고통스러울 때 비로소 우리는 더욱 채근당하고 자극을 받기에, 아픔과 상처 속에서도 웃음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우리의 시간을 공유하며 당신과 나 사이에 벽이 허물어질 때, 양파껍질을 벗기듯 하나하나 평화의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여행자의 인문학 노트>

이현석 지음

한티재, 2013



여행자의 인문학 노트
국내도서
저자 : 이현석
출판 : 한티재 2013.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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