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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묵지/추억의 책장 · 메모

[백인의 눈으로 아프리카를 말하지 말라] 더 진실한 아프리카의 역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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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중에서


# 4. 후추에 감춰진 슬픈 진실 - 65p.

당시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팔려간 노예의 수는 1,200만 명에서 2,000만 명 사이라고 한다. 이 중 5% 정도만 미국으로 갔고 나머지는 브라질, 카리브 섬 등으로 팔려갔다. 아프리카에서 대서양을 통해 항해하는 동안 약 20%의 노예들이 배 안에서의 열악한 위생과 영양결핍으로 사망했다.

흥미로운 점은 노예 거래를 통해 가장 이득을 많이 본 영국이 가장 먼저 노예제도를 폐지했다는 것이다. 1772년 솜머셋 사건(Sommersett Case)에서 영국 법원은 영국 내의 노예제도를 불법이라고 판결한다. 비록 영국의 식민지에서는 노예제도를 여전히 인정하였지만...

이후 윌리엄 윌버포스(Willian Wilberforce)와 토마스 클락스(Thomas Clarkson) 등의 활약으로 영국에서는 1807년에 노예 폐지법이 통과했으며, 영국으로 들어오는 배에서 노예가 발견되면 노예 1인당 100파운드의 벌금을 부과했다. 이후 영국은 1833년에 자국의 식민지에서도 노예제도를 불법으로 규정했으며, 1838년에 이 법이 최종 실행됐다.

당시 전 세계 노예 거래의 41%를 차지하고 있던 영국으로서는 큰 결심(?)을 한 셈이다. 그렇다면 영국은 과연 노예제도가 잔인하거나 비 인간적이어서 폐지한 것일까? 아니면 영국이 다른 국가들에 비해 더 신사 나라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폐지했을까?

절대 아니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의 영국에서는 유럽의 다른 나라에 앞서 산업혁명이 심화되면서 노예의 노동력에 의존하던 산업이 기계화되어 갔다. 따라서 노예제도의 필요성은 점점 사라져 갔고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것이 오히려 영국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6. 착취의 시대, 아프리카를 쟁탈하라 - 88~90p.

베를린 조약의 주요 내용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아프리카 영토 합병 시 다른 유럽 제국에게 통고

2. 합병의 유효화를 위한 효과적인 점령

3. 콩고 분지에서의 교역의 자유

4. 니제르 및 콩고 강의 항해의 자유

5. 노예 거래의 금지


매우 슬픈 사실이지만 이 베를린 컨퍼런스(1884.11 ~ 1885.02)는 아프리카라는 대륙이 유럽인들의 땅따먹기 대상이 됐다는 사실을 공식화한 자리였다. (중략)

베를린 컨퍼런스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벨기에, 덴마크,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네덜란드, 포르투갈, 러시아, 스페인, 스웨덴-노르웨이, 오스만투르크, 미국이 초청됐다.

그리고 너무도 지당(!)하게도 이 회의에는 단 한 명의 아프리카 사람도 초청받지 않았고 참석하지도 않았다. 아프리카의 주인인 아프리카 사람들의 참석 없이 아프리카의 영토 분할은 이렇게 합의가 됐다.


# 유럽 제국주의 국가별 식민지 표 -117p.


 제국주의 국가

 식민지 

 벨기에

 콩고자유국 및 벨기에 콩고(오늘날의 콩고민주공화국), 루안다-우룬다(르완다 및 부룬디) 

 프랑스

 프렌치 서부 아프리카 

 모리타니아, 세네갈, 알브레다(감비아의 일부), 프렌치 수단(말리), 프렌치 기니(기니), 아이보리코스트(코트디부아르), 니제르, 프렌치 상볼타(볼타 강 상류 지역으로 부르키나파소), 프렌치 다호메이(베닌), 프렌치 토고랜드(토고)

 프렌치 적도 아프리카

 가봉, 프렌치 카메룬, 프렌치 콩고(콩고공화국), 우방기차리(중앙아프리카공화국), 차드

 프렌치 북부 아프리카

 프렌치 알제리, 프렌치 튀니지아보호령, 프렌치 모로코

 프렌치 동부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코모로, 프렌치 소말리랜드(지부티), 레위니옹 등 인도양 섬들(아직도 프랑스 식민지)

 독일

 게르만 카메룬(카메룬과 나이지리아 일부), 게르만 동부 아프리카(르완다, 부룬디, 탄자니아), 게르만 남서부 아프리카(나미비아), 게르만 토고랜드(토고와 가나의 동쪽 일부)

 이탈리아 이탈리아 리비아, 이탈리안 에리트리아, 이탈리안 소말리랜드, 이탈리안 에티오피아

 포르투갈

 앙골라, 포르투갈 통고(앙골라 카빈다지방), 모잠비크, 포르투갈 기니(기니비사우), 까보 베르데, 사오토미 프린시페, 우이다(베닌의 일부)

 스페인

 스페니시 사하라(서사하라), 스페니시 모로코, 스페니시 기니(적도기니)

 영국

 이집트, 앵글로-이집트 수단, 브리티쉬 소말리랜드(소말리아 일부), 케냐, 우간다, 탄자니아(탕가니카 지역), 잔지바르, 베슈아나랜드(보츠와나), 남부 로데지아(짐바브웨), 북부 로데지아(잠비아),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역(트란스발, 케이프, 나탈, 오렌지공화국), 나미비아, 감비아, 시에라리온, 나이지리아, 브리티쉬 토고랜드(가나 일부), 카메룬(카메룬과 나이지리아 일부), 브리티쉬 골드코스트(가나), 니야사랜드(말라위), 바수토랜드(레소토), 스와질랜드

 독립 국가들

 - 라이베리아 (미국에서 이주한 노예들에 의해 1821년 성립, 1847년 독립 선포)

 - 에티ㅗ피아 제국 또는 압비시니아(1936~1941년 이탈리아에 의해 잠시 점령 당한 것을 제외하고는 독립국가 체제 유지)


# 12. 자유를 향한 눈물의 땅 ,라이베리아 - 161p.

한국 진출을 꿈꾸는 베트남 노동자들이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사용하는 <생활 한국어> 책에는 '때리지 마세요', '욕하지 마세요', '도와주세요'가 주요 예문으로 사용된다. 이것이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 아니라고 강변할 수 있는가.

약자로서 설움을 겪었으면 그 설움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약자가 강자의 위치에 올랐다고 해서 약자의 설움을 까맣게 잊고 강자의 횡포를 휘두른다면 그것은 역사의 진보가 아니라 역사적 비극이다.


# 아프리카의 국가별 식민지배자 및 독립 연도 - 173~175p.


 국가 명

식민지 이름 

 제국주의 명

 독립일

 초대 수반

 라이베리아

 라이베리아 연방

 없음

 1847. 07. 26

 조셉 로버츠

 이집트

 이집트 영국 1922. 02. 28 사르와 파샤
 남아공 남아공 연합 영국

 1931. 12. 11

 
 에티오피아 이태리동부 아프리카 이태리

 1941. 05. 05

 하일레 셀라시에
 리비아 이태리 리비아 이태리, 영국, 프랑스 1951. 12. 24 이드리스 국왕
 수단 영국이집트수단 영국, 이집트 1955. 12. 19 이스마일 알 아즈하리
 튀니지

 튀니지프랑스보호령

 프랑스 1956. 03. 20 무하마드 알아민
 모로코 모로코프랑스보호령 프랑스, 스페인

 1956. 04. 07

 모함마드 5세
 가나 황금해안 영국, 독일 1957. 03. 06 크왐 은크루마 
 기니 프렌치기니 프랑스 1958. 10. 02 세코 뚜레
 카메룬 카메룬

 독일, 프랑스, 영국

 1960. 01. 01

 아마두 아히조
 토고 프렌츠 토고랜드 독일, 프랑스

 1960. 04. 27

 실바누스 올림피오

 말리

 프렌치수단

 프랑스 1960. 06. 20 모디보 케이타
 마다가스카르 말라가시보호령 프랑스 1960. 06. 26 필리베르 치라나나
 DR 콩고 벨기에콩고 벨기에

 1960. 06. 30

 패트리스 루뭄바
 소말리아 영국 소말리랜드,
 이태리 소말리랜드
 영국, 이태리 1960. 06. 26
 1960. 07. 01
 무하마드 하지,
 아덴 압둘라
 베닌

 프렌치 다호메이

 프랑스 1960. 08. 01 휴버트 마가
 니제르 니제르식미닞 프랑스 1960. 08. 03 하마니 디오리
 부르키나 파소 프렌치상류볼타 프랑스 1960. 08. 05 모리스 야메오고
 코트디부아르 아이보리코스트 프랑스 1960. 08. 07 펠릭스 후페브와니
 차드 프렌치챠드 프랑스 1960. 08. 11 프랑스와 톰발바예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우방귀샤리 프랑스 1960. 08. 13 데이비드 다코
 콩고공화국

 프렌치콩고

 프랑스

 1960. 08. 15 풀베르 율로우
 가봉 프렌치적도기니 일부 프랑스 1960. 08. 17 레옹 음바
 세네갈 수단공화국 일부 프랑스 1960. 08. 20 레오폴드 셍고르
 나이지리아 영국령 나이지리아 영국 1960. 10. 01 엔남디 아지키웨
 모리타니아

 프렌치 서부아프리카 일부

 프랑스 1960. 11. 28 목타 다다
 시에라리온

 세에라리온

 영국

 1961. 04. 27

 밀턴 마르가이
 탄자니아 탕가니카,
 잔지바르
 영국 1961. 12. 09
 1963. 12. 10

 줄리어스 니에레레,
 잠시드 압둘라 

 르완다

 루안다우룬디 일부

 벨기에

 1962. 07. 01

 그레고리 카이반다
 부룬디 루안다우룬디 일부 벨기에 1962. 07. 01 앙드레 무히르와
 알제리 프렌치알제리 프랑스 1962. 07. 03

 아흐메드 벤 벨라

 우간다 우간다 보호령 영국 1962. 10. 09

 밀턴 오보테

 케냐 케냐 식민지 영국

 1963. 12. 12

 조모 케냐타
 말라위 니아살랜드 보호령 영국 1964. 07. 06 헤이스팅스 반다
 잠비아 북부로데지아 영국 1964. 10. 24 케네쓰 카운다
 감비아 감비아 영국

 1965. 02. 18

 도다 자와라

 짐바브웨 남부로데지아 영국 1965. 11. 11 이안 스미스
 보츠와나 베쿠아나랜드 보호령 영국 1966. 09. 30 세레체 카마
 레소토 바수토랜드

 영국

 1966. 10. 04 리부아 조나단
 모리셔스  영국

 1968. 03. 12

 
 스와질랜드 스와질랜드 영국 1968. 09. 06 소브하자 2세

 적도기니

 스페니시기니

 스페인

 1968. 10. 12

 프란시스코 엔구에마

 기니비사우

 포르투갈기니

 포르투갈

 1973. 09. 24

 루이스 카브랄

 모잠비크

 포르투갈동아프리카

 포르투갈

 1975. 06. 25

 사모라 마셀

 카보 베르데 (Cape Verde)

 

 포르투갈

 1975. 07. 05

 

 코모로

 

 프랑스

 1975. 07. 06

 

 사오토메 프린시페  포르투갈 1975. 07. 12 
 앙골라

 포르투갈서부아프리카

 포르투갈 1975. 11. 11 아고스티뇨 네토

 세이셀

 

 영국

 1976. 06. 29

 제임스 리차드

 지부티 프렌치 소말리랜드 프랑스 1977. 06. 27 하산 압티돈
 나미비아 넘서아프리카 남아공 1990. 03. 21 샘 누조마

 에리트리아

 에리트리아

 에티오피아

 1993. 05. 24

 아사이아스 아페웨르키

 남수단

 남부수단

 수단

 2011. 07. 09

 살바 마야르딧


# 14. 아프리카를 검은 대륙으로 만든 독재자들 - 180p.

연속되는 독재와 쿠테타 속에서 경제는 더욱 피폐해졌다. 또 제국주의 국가들은 이들 독재자들을 뒤에서 지원해 주면서 경제적 실리를 챙겨왔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냉전체제에서 아프리카의 독재자들은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면서 독재체제를 유지해 왔다. 미국과 소련은 독재정부이건 민주정부이건 상관없이 자기편에 서기만 하면 그들을 지지했다. 이런 정치상황 속에서 유례없는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 발생해 극심한 기근이 대륙을 휩쓴 가운데 설상가상으로 에이즈라는 신형 병균이 아프리카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 가장 악랄했던 독재자, 보카사 (재임 1966 ~ 1979), 중앙아프리카공화국 

- 아프리카의 히틀러, 이디 아민 (재임 1971 ~ 1979), 우간다

- 중동의 미친 개, 카다피 (재임 1969 ~ 2011), 리비아

- 라이베리아의 조폭, 찰스 테일러 (재임 1997 ~ 2003), 라이베리아

- 아프리카의 착복왕, 모부투 세세 세코 (재임 1965 ~ 1997), 자이르→콩고민주공화국

- 사창가 사장 출신으로 최고 권력을 잡은 카빌라 (재임 1997 ~ 2001), 콩고민주공화국

- 에티오피아의 마르크스주의자, 멩기스투 (재임 1974 ~ 1991), 에티오피아

- 늙을수록 강해지는 권력욕의 소유자, 무가베 (재임 1980~), 짐바브웨

- 아프리카의 무법자, 오마르 알 바시르 (재임 1989~), 수단

- 프랑스에게 덤벼든 겁 없는 독재자, 세코 뚜레 (재임 1958~1984), 기니


"수단은 한 나라로 존재하기에는 너무 크지만, 한국은 두 나라로 갈라지기에 너무 작다! (Sudan may be too big to be one, but Korea is too small to be two)" - 211p.


# 17. 핏빛 다이아몬드 - 237p.

'블러드 다이아몬드(Blood Diamond)'는 주로 아프리카 분쟁지역에서 생산되는 다이아몬드를 말한다. 다이아몬드 판매수익이 반란군에 의해 전쟁자금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다이아몬드가 없었다면 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또 설혹 분쟁이 일어났더라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분쟁 지역에서 생산된 다이아몬드는 선진국으로 수출됐고 (불법거래든, 합법거래든 구분 없이) 수익은 다시 선진국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는데 이용되었다.

블러드 다이아몬드가 생산된 아프리카의 대표적인 국가들은 앙골라, 라이베리아, 시에라리온, 코트디부아르, 콩고민주공화국, 콩고공화국, 짐바브웨 등이다. 1990년 콩고민주공화국에서 발견된 '1000년의 별(Millennium Star)' 이라는 다이아몬드는 크기가 무려 203캐럿이나 됐는데, 이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크다. 이 천년의 별은 다이아몬드 시장의 80%를 좌지우지하는 '드 비어스(De Beers)'사가 소유하고 있다.

다이아아몬드 판매대금이 분쟁 자금으로 사용되어 다툼이 지속되자 2000년 세계다이아몬드협회는 블러드 다이아몬드 거래를 막기 위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2002년에는 유엔에 의해 원산지 증명이 없는 다이아몬드는 거래를 금지하는 프로세스가 승인됐다. 국제사회에서 다이아몬드가 분쟁에 악용되는 것을 막기 위한 노력이 시작된 것이다.


# 18. 위도 10도, 신들이 충돌하다  - 248p.

아프리카 대륙을 가로로 반을 절단하면 그 절단선은 적도에서 위도 10도 사이에 자리를 잡는다. 이 지역을 '미들 벨트(middle belt)' 또는 '사헬 지역' 이라고 부른다. 아프리카 대륙 북쪽의 이슬람과 남쪽의 기독교가 만나는 아주 넓은 전선이기도 하다. (중략) 그리고 적도에서 위도 10도 사이에 전 세계 무슬림 인구의 절반과 기독교 인구의 60%가 살고 있다.

<위도 10도>라는 책을 쓴 미국의 엘리자 그리즈월드에 따르면 이 지역은 종교가 곧 전쟁이 되는 곳이다. 그리고 그러한 문명의 충돌은 이미 시작되었다. 종교라는 이름 아래 무차별적인 학살, 강간, 납치, 폭력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10~20명 정도의 사람이 죽어서는 뉴스에 보도도 되지 않는다.


언어를 바꾸는 것은 종교를 바꾸는 것 못지않게 어려운 일이다. 언어 속에는 그 민족의 역사와 문화가 스며들어 있다. 따라서 언어는 그 민족의 정신과도 같은 것이다. 자기 고유 언어를 포기한다는 것은 곧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제국들은 아프리카에 언어를 심는 데는 성공한다.

종교를 바꾸는 것과 언어를 바꾸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종교는 신념이지만, 언어는 의사전달 수단이다. 종교를 바꾼다고 해서 돈을 벌 수는 없지만, 언어를 바꾸면 이 언어를 사용하는 부유한 국가와의 거래를 통해서 돈을 벌 수 있다. 따라서 아프리카 대륙이 종교는 포기하지 않았으나 언어를 쉽게 포기한 것은 경제적 이익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 254p.


# 19. 르완다 그리고 콩고 - 269p.

'아프리카 세계대전(Africa's World War)'이라고 불리는 이 콩고 전쟁(1998~2003)은 8개 국가와 25개의 무장 세력이 직접적으로 개입했다. 2008년까지 전쟁과 그 후유증으로 사망한 사람 숫자만 540만 명이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질병과 기아로 목숨을 잃었다.

사망자 수를 기준으로 이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참고로 제1차 세계대전의 사망자 수는 약 1,500만 명이며, 제2차 세계대전의 사망자 수는 약 6,000만 명(전 세계 인구의 2.5%)이었다. 한국전쟁의 경우 45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과 콩고 전쟁 다음으로 많은 숫자이다. 콩고 전쟁은 이외에도 4만 건이 넘는 강간 및 이로 인한 에이즈 전염과 340만 명의 피난민을 낳았다.


# 20. 디스트릭트 나인과 아파르트헤이트 - 283p.

"잊지는 않겠지만, 용서하겠다"고 말했다. 만약 그가 "너희들이 한 일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다면 세계의 역사는 또 한 번 바뀌었을 것이고 지금 같은 남아공의 평화는 결코 오지 않았을 것이다. 만델라에 대한 정치적 업적을 논하기에 앞서 그 무거운 가슴 속의 한과 복수심을 화해와 용서로 승화한 그의 뜨거운 심장에 경의를 표한다.


# 25. 아직도 아프리카에는 식민지가 남아 있다

- 세계적인 절도 전문국가 프랑스 - 312p.

프랑스가 자랑하는 노트르담 대성당, 에펠탑, 엘리제궁, 사크레퀘르 대성당, 심지어 샹젤리제 거리까지 아프리카 노예들의 피로 건설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중략)

1994년 우리나라의 고속철 기종 선정 때 프랑스가 독일 및 일본과의 경쟁에서 이기면서 테제베(TGV)가 최종 기종으로 선정됐다.이 때 프랑스는 병인양요 때 훔쳐간 외규장각 도서 반환에 구두로 합의한 바 있다. 우리 정부는 테제베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가 가장 낮았는데도 불구하고 프랑스를 믿고 테제베를 선정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외규장각 도서는 돌려주지 않고(결국 대여 형식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같은 수준의 문화재를 교환하자고 고집했다. 프랑스의 그 야비하고 비열함이란.

소위 석학으로 불리는 프랑스의 기 소르망은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개관식에 와서 "서구가 아시아의 문화재를 약탈했다기 보다는 보호하고 있다"라는 희대의 헛소리를 지껄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개인이 도둑질을 한 물건을 전시해서 돈벌이를 하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법에 따라 처벌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도적질도 프랑스가 하면, 그것도 아주 대규모로 도적질을 하면 처벌이 뒤따르지 않는다. 결국 힘없는 국가들만 처량하다.


한 청년의 죽음, 그리고 피어난 재스민의 향기 - 332p.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의 수도 튀니스의 남쪽 300km 지저메 위치한 시디 부지드에서 26세의 젊은 남성이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이 청년의 이름은 모함메드 부아지지.

이슬람 세계에서 자살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이슬람교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율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대의를 위한 폭탄 자살 테러를 제외하면 자살이 숭고한 일로 칭송 받는 일이 거의 없다. 실제 이슬람 국가 국민들의 자살률은 세계적으로도 매우 낮다.

이런 상황에서 1984년생인 20대 중반의 부아지지는 자살을 감행한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결코 종교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는 그런 극단적인 행동을 했을까.

부아지지는 무려 9명의 가족을 먹여 살리는 가장이었다. 하지만 그의 하루 수입은 많아봐야 한화로 8,500원 정도였다. 현실은 척박했지만, 그는 과일 노점상을 하면서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애쓰고 있었다. 많은 아프리카 청년들이 그러하듯이 삶에 대한 투쟁은 그의 어깨에 지워진 숙명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노점상에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경찰은 노점상이 불법이라는 이유로 과일과 저울 등 그의 전 재산을 앗아갔다. 이와 함께 부아지지는 대로(大路) 한 복판에서 경찰들에게 폭행을 당했다. 경찰들은 그를 짓밟으며 끊임없이 인격을 모욕하는 말을 뱉어냈다.

부아지지는 이날 오전 지방정부 청사 앞으로 향했다. 그는 청사 앞에 도착하자마자 들고 온 휘발유를 온 몸에 끼얹고 불을 붙였다.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한 부아지지의 설움을 알리기 위해 가족들이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부아지지의 사촌이 부아지지의 모습을 담은 동영상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어찌 보면 아프리카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이 슬픈 사건 하나가 세계의 역사를 바꿔 놓는다. 사람들은 페이스북에 올라온 동영상 및 그 소식을 퍼 나르며 이 사건을 알리기 시작했다. 청년실업률이 30%에 육박하는 나라 튀니지에서 부아지지의 설움에 동감하는 젊은이들의 숫자는 차고 넘쳤다.

부아지지는 18일 동안의 투병 생활 끝에 2011년 1월 4일, 결국 세상을 떠났다. 튀니지 경찰은 그의 명복을 비는 장례 행진을 저지했다. 이에 분노한 민중들이 각 도시에서 봉기를 시작했다. 시위 진압 과정에서 수십 명의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민중들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1월 11일 마침내 성난 군중들의 시위가 수도 튀니스를 덮었다. 경찰의 총격으로 23명이 숨졌지만, 정부는 이미 시위대를 진압할 명분과 힘 모두를 잃고 있었다.



'아프리카의 노벨' 모 이브라힘 - 358p.


수단 출신의 모 이브라힘(Mo Ibrahim)은 가히 '아프리카의 노벨'이라는 칭호를 들을 만하다. 모 이브라힘은 1946년 수단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통신 관련 공부를 했다. 영국통신(British Telecom)에서 잠시 일하기도 했으나 1980년대 후반 수단에 돌아와 소프트웨어 회사를 운영한다. 그리고 그는 1998년 셀텔(Celtel)이라는 이동전화 회사를 세웠다.

당시 아프리카에서 이동 전화는 막 시작단계였는데, 그의 사업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2005년에 셀텔은 아프리카 14개 국에 걸쳐 2,400만 명의 가입자를 보유하게 됐다. 같은 해 모 이브라힘은 셀텔을 34억 달러에 매각하고 자기의 이름을 딴 '모 이브라힘 재단(Mo Ibrahim Foundation)'을 설립한다.

모 이브라힘은 아프리카의 독재와 부정부패의 원인을 정치인들과 공무원들이 느끼는 퇴직 후 불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브라힘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재단을 통해 재임 중 아프리카의 민주화 발전에 공헌을 한 국가 리더들에게 일시금 500만 달러와 매년 20만 달러의 연금을 주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세웠다. 

2007년 모잠비크의 시사노 전 대통령이, 2008년에는 앞 절에서 설명한 보츠와나의 모가에 전 대통령이 각각 모잠비크와 보츠와나의 평화 및 민주화를 이끈 공로로 이 상을 받았다. 2009년과 2010년에는 수상자가 나오지 않았으나 2011년 캬보 베르데(Cape Verde)의 페드로 피레스(Pedro Pires) 전 대통링이 다시 이 상의 영예를 거머쥐었다.

또 모 이브라힘 재단에서는 아프리카의 통치 구조에 대한 평가지수인 '이브라힘 지수(the Ibrahim Index of African Governance)'를 2007년부터 매년 발표하고 있다. 이 지수는 하버드 대학과 함께 개발했으며 모두 57개의 기준을 사용한다. 조사 대상 국가는 북아프리카 5개국(이집트, 리비아,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을 제외한 모든 아프리카 대륙의 국가들이다.

이 지수는 아프리카 시민사회단체, 연구소, 정부 등에 의해 많이 인용되는데, 아프리카개발은행도 이 지표를 중요한 정책 판단 기준으로 사용한다. 

모 이브라힘은 아프리카개발은행이 주최하는 각종 회의에도 자주 참석한다. 개인적으로 느낀 인상으로 이브라힘은 아주 명석하고 의지가 굳어보이는 인물이었다. 그의 총명한 눈에서 아프리카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백인의 눈으로 아프리카를 말하지 말라>

김명주 지음

미래를 소유한 사람들, 2012



백인의 눈으로 아프리카를 말하지 말라
국내도서
저자 : 김명주
출판 : 미래를소유한사람들 2012.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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