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중에서



#02  1533년 4월 14일, 카하마르카 – 73p.

구름 낀 하늘에서 한줄기 태양빛이 쏟아졌다.

기병은 찰쿠치막 바로 앞에 와서 멈춰 섰다. 그는 무릎으로 말의 몸통을 조여 앞발을 들어 올리게 했다. 말은 울음소리를 내면서, 정복당한 장군의 머리 위 허공을 발굽으로 사납게 후려쳤다.

찰쿠치막은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태양신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그의 얼굴에 태초의 산맥처럼 주름이 졌다.

두려움을 느낀 것은 외눈박이 이방인이었다.



#03  1533년 6월, 카하마르카 – 92p.

고함 소리와 싸우는 소리로 시끄러운 어두운 길을 걸으며 가브리엘은 생각했다. 단지 살아남는 일과 신을 경외하는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들이 이 도시에서 살았던 시절이 있었음을. 하지만 지금 여기에는 열에 들떠서 불길한 새처럼 황금과 영광을 탐하는 우리가 있었다! 이따금 길모퉁이에서는, 쉰 명의 기병 중 야간 보초를 서는 한 사람의 횃불이 반짝였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알마그로 휘하의 사람들이 가장 공격적이었다. 제일 가난하기 때문이었다. 돈도 없고, 여자도 없고, 마실 것도 거의 없었다.

“곧, 곧 있으면, 두고 보세요…….”

금괴를 가지고 마늘 값을 치르는 카하마르카 사람들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11  1533년 10월 15일, 아툰 사우사

– 202~203p.

“…(중략)… 티소크! 그들은 온순하지도 선량하지도 않소. 황금을 집어삼키는 그들의 배는 밑 빠진 독이오! 티소크 잉카, 그들이 쿠스코에 도착하면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쓸어가리라는 걸 모르시오? 그들은 당신의 땅, 당신의 여자들, 당신의 아이들, 당신의 하인들을 앗아갈 것이오…… 언제나 소유하고 또 소유할 것이오. 그들은 갖기 위해 여기 온 것이니! 나 찰쿠치막이 여러분께 말하건대, 그들의 숫자가 얼마 되지 않을 때 그들을 죽여야 하오.”


- 214~215p.

둘은 잠시 그대로 나란히 있었다. 발밑의 땅이 흔들리는 듯했다. 둘은 움직이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했다. 꽃향기가 스치자, 가브리엘은 눈을 감고 그 향기 속으로 도망쳤다.

그녀가 행렬로 돌아가려다 말고 돌아보았다.

“조심해요.”

그가 목멘 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말하려고 입을 벌리고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녀의 입술과 눈에 그가 맺혀 있었다.

“사랑해요……”

그에게 그 말을 하는 것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미처 깨달을 새도 없이, 그녀는 달려가 행렬과 합류했다.



# 21  1533년 11월 15 밤, 쿠스코 

– 328~329p.

쿠스코 시는 잠들지 않았다.

쿠스코 시는 결코 잠들지 않았다.

제국의 삶에 필요한 활동은 쿠스코 시에서 결코 멈추지 않았다. 아클라우아시에서 직물을 짜는 처녀들의 활동, 금은세공사와 조각가와 신관 들의 활동, 죽은 군주들을 섬기며 끊임없이 보살피고 음식을 주고 제사를 지내고 아랫세상에서 와서 이 세상의 흐름에 계속 영향을 미치는 죽은 군주들의 말을 수집하는 모든 파나카들의 활동. 

사크사우아만의 사각 탑 안에서는 병사들이 교대로 보초를 섰다. 그리고 모요크마르카의 둥근 탑에서는 언제나처럼 잉카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날 밤 궁전에서나 평범한 집에서나 많은 수군거림이 있었고, 우아타나이의 강물은 무시무시한 비밀을 싣고 흘러갔다.

미라들은 그들의 궁전에서 눈을 뜬 채 잠을 잤다.

미라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었다.


- 342~343p.

“지금 있는 것은 반드시 그대로 있을 거예요.”

“지금 있는 것은 반드시 그대로 있겠지.”

망코의 목소리는 아나마야 목소리의 메아리가 되고, 세상은 질서를 되찾았다. 그는 수없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팔을 잡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동작을 멈추었다. 그는 자기 고통의 정체를 알아냈다. 지금 있는 것은 반드시 그대로 있겠지만, 지금 있지 않은 것은 있어서도 안 되고 앞으로도 없을 터였다. 그것은 정말 잔인한 일이었다.



# 31  1535년 8월, 쿠스코 – 459p.

“방금 전에 사내아이들 봤지? 그 아이들은 이방인 놀이를 하고 그들의 말을 썼어. 아이들 막대기는 잉카 전사들의 망치나 창이나 활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무기를 흉내낸 거였지. 그게 바로 요새 아이들이 좋아하고 즐기는 거야. 이방인들과 닮는 것 말이야! 그대로 내버려두면 그 아이들이 커서 뭐가 되겠어? 아이들은 인티와 마마 킬라를 사랑하지 않게 될 거야. 비라코차에게 사방위 제국을 부여받았던 인간들의 아들이 되기를 그만둘 거라고. 그들은 다른 세상의 우리 족장들을 경멸하고 우리나라를 ‘페루’라고 부르는 이방인들의 노예가 될 거야. 인구일, 너도 잘 알지. 찰쿠치막이 전쟁을 원할 때 난 평화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걸. 망코 군주님이 우리의 유일한 군주가 되려면 그렇게 해야 했어. 하지만 이제는 유일한 군주님 망코가 전쟁을 벌일 줄 아셔야 해.”



# 33  1535년 11월~12월, 투피사-살라르 대사막[각주:1] – 499~500p.

가브리엘은 쏟아지는 웃음과 야유 속에서 입을 다물었다. 쓰지만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셔야 하는 음료처럼 새로운 감정이 차올랐다. 그 웃음소리를 하나하나 들어야 하고, 냉소 하나하나를 양분으로 취하고, 가장 비열한 본능의 먹이가 된 인간들 얼굴에 미소를 지어야 한다. 일어나서 목구멍에 남은 담즙을 마저 삼켜야 한다. 감주처럼 달게.

모욕은 힘의 어머니인 법.



# 34  1535년 12월, 우추이 코스코 – 514~515p.

누더기 옷을 걸친 검은 살결의 그가 보였다. 그는 끝없는 평원 저 멀리 있다가 아주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탁한 숨결이 느껴지고 낡은 가죽처럼 주름이 진 뺨과 부어오르고 터진 입술이 보일 만큼 가까이. 그의 눈동자가 죽은 사람처럼 흰색으로 덮여 있었다. 눈썹에 맺힌 땀방울은 햇볕에 미세한 소금 결정체로 변해 있다. 손가락에 피가 잔뜩 엉겨 붙어 있었다. 그는 죽어가는 사람처럼 휘청거렸다. 더는 발치에 그림자를 달고 다니지 않는 사람처럼. 그의 멍한 시선은 무의식 상태에 빠져있었다.

거대한 사막으로 변한 세상에서, 그가 비틀거리며 발걸음을 뗄 때마다 미세한 먼지가 일어 발자국을 지웠다. 그러더니 대번에 그가 쓰러졌다.



# 35  1535 12월, 살라르 대사막 – 519~520p.

살라르 대사막에 들어서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소금밖에 보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곳에는 물뿐이었다. 어느새 높이 뜬 태양은 지평선을 지우는 옅은 안개에 가려져 있었다. 하늘과 물이 하나의 담채화로 뒤섞여 있었다. 가브리엘은 아직 손대지 않은 흰 캔버스 안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마치 동떨어진 세계의 불길한 영혼과 맞서기 위한 의식이라도 치르는 양, 그들은 눈을 가렸다.



# 38  1536년 4월, 칼카 – 563p.

훗날, 암울한 시기에, 돌과 화살이 휙휙 날아가는 전쟁의 혼돈 속에서 삶의 감각마저 잃게 될 때, 그는 고독과 절망에 맞서 그녀의 감미로운 입술을 간직하게 되리라. 종말 뒤에는 또다른 탄생이 있으리라는 확신을 말하던 그녀의 입술을.



<잉카 2 : 쿠스코의 황금>

앙투안 B. 다니엘 지음, 진인혜 옮김

문학동네, 2007



잉카 2
국내도서
저자 : 앙투안 B. 다니엘 / 진인혜역
출판 : 문학동네 2007.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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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투피사-살라르 대사막 : 투피사는 볼리비아 남서부의 지명이고, 그 근처에 거대한 소금 황무지인 살라르데우유니가 있다. 북쪽의 살라르데코이파사도 이곳과 비슷하지만 규모가 작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살라르 대사막은 살라르데우유니를 가리키는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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