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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묵지/추억의 책장 · 메모

[잉카 1 : 태양의 공주] 신비의 잉카 문명과 그 몰락에 관한 대하역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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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중에서


#01  1526년 12월, 포코나[각주:1] 근교 - 29p.

아나마야는 용기를 내어 엄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엄마의 이마 한가운데 붉은 꽃이 피어 있었다. 눈은 감겨 있고, 입술이 맞닿은 곳에서는 갈색 물이 조금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안다.

엄마 손에 여전히 쥐여 있는, 혼령이 감춰져 있던 초록색 액체에 흠씬 젖은 헝겊을 쳐다보았다. 아나마야는 꽉 쥐인 손가락을 펴고 헝겊을 빼냈다. 그녀에게는 승리한 병사들의 웃음소리도, 죽어가는 사람들의 신음 소리도, 어느 오두막집 안 해먹에 버려진 아기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쓰러지는 마지막 투사들, 울타리와 오두막집을 불태우는 첫 번째 불꽃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마음속의 모든 문이 차례로 닫히듯, 그녀의 내부에는 침묵뿐이었다.

공기를 태우는 뜨거운 불길이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가운데, 그녀는 조용히 무릎을 꿇고 엄마의 배를 끌어안았다. 더는 숨결도 생명도 없었다. 꺼져가는 약간의 온기뿐.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 슬픔을 만들어낼 온기뿐.

그녀는 그렇게 병사에게 발견되었다.

병사가 데려가려 하자, 그녀는 입을 앙다물고 안간힘을 다해 저항했다. 병사는 엄마를 살리려고 깍지 낀 손으로 엄마 몸에 달라붙어 있는 그녀를 떼어내야 했다. 마침내 두 몸을 떼어낸 뒤, 병사는 마치 죽은 사람을 잡아끌듯 먼지와 진창 속에서 그녀를 끌고 갔다.

살아 있지만 죽은 그녀를.



# 06  1528년 2월, 키토 – 86p.

그는 세상이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그녀에게 차분하게 설명했다. 그중 한 부분은 바로 그녀의 눈 아래 있는 것으로, ‘카이 파차’ 라고 불린다. 거기에는 산, 호수, 동물,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내는 물건, 인간의 전쟁과 기쁨, 분만과 질병이 포함된다. 그리고 쿠스코 잉카의 법과 질서, 사방위 제국의 왕자들과 태양신이 아들로 여기는 인간으로서의 유일한 군주들이 포함된다.

“태양신은 윗세상에 살고 계신다. 그곳에 그분의 누이이자 아내인 달의 신과 그분의 형제인 천둥신 일라파가 오가지. 그리고 코야 카마켄, 네 발밑에는 조상들의 주거지가 있다.”

“그러면 이제 유일한 군주님은 어디 계신 건가요?”

아나마야가 놀라며 물었다.

“어디에든 계신다. 윗세상의 아버지이신 태양신 옆에. 아랫세상의 조상들 곁에. 그리고 여기 우리와 함께 계시지. 분신 형제와 그분의 말씀을 듣는 코야 카마켄 네 덕분에…… 네게 그럴 능력이 있다면 말이지!”



# 16  1529년 2월, 투메밤바 – 193~194p.

그녀는 눈을 감았다. 잠을 자는 것도, 깨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꼼짝 않고 있는 것도, 움직이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도 아니고, 이전도 이후도 아니다.

그녀는 밀림의 축축한 냄새를, 오래된 행복의 내음을 들이마신다. 하늘은 낮고 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 그녀는 바로 그 구름 밑에서 숨이 차도록 달리고 웃었다.

목소리가 들리고 얼굴이 보인다. 아름답고 부드러운, 사랑이 가득 담긴 얼굴이다. 그 얼굴은 멀리, 너무 멀리 있다!

심장 고동이 멎는다. 엄마가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아나마야!”

그것은 그녀의 귓전에 울리는 중얼거림일 뿐이다.

“아나마야!”

엄마의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 이제 주변 세상은 숲은 아니지만 호수처럼 푸르고 투명해진다. 엄마는 거기, 온 사방에, 이 세상처럼 거대하고 환대하는 모습으로 존재한다. 모든 것이 엄마의 배이고, 모든 것이 엄마의 가슴이다. 엄마의 웃음소리는 새를 떠받쳐주는 바람처럼 진동하고 엄마의 어깨는 산처럼 동그랗다. 입술은 사랑과 환영의 노래를 한다. 손과 팔에는 감미로운 행복이 배어 있다. 그 손과 팔이 그녀를 감싸고, 보이지는 않지만 너무도 다정한 손가락이 그녀의 이마를 쓰다듬고 목덜미를 힘주어 잡는다.

그녀도 모르게 두 뺨 위로 눈물이 줄줄 흘러내린다.

“울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잖니……”

차츰 그녀는 진정된다. 여전히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과 온기가 느껴진다. 그 어루만짐 속에서 도둑맞은 지난 모든 세월이 사랑으로 변한다. 그녀의 두려움과 끔찍한 기억도 지워진다. 그러더니 그녀를 보호해 주는 부드러움이 바람에 밀려가듯 모든 것이 사라진다.



# 21  1529년 4월, 톨레도 – 236p.

“성모 마리아님, 성모님은 저를 한 번도 저버리신 적이 없었나이다! 늘 제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셨지요. 폭풍 속에서 제 배를 인도해주셨고 온갖 함정에서 제 목숨을 구해주셨습니다. 성스러운 동정녀여, 말씀드리건대, 성모님은 저를 인도하시는 목소리입니다. 성모님께서 제게 더 많은 것을 바라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성모님의 힘과 빛이 페루의 황금벽 위에서 반짝이기를 원하십니다. 오! 너무도 성스러운 성모님, 그곳으로 저를 인도해주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카를로스 왕이 저를 받아들이고 제 말을 듣게 해주십시오! 제가 아침에 일어나 한없이 초조하게 기다리는 것은 성모님을 위해서입니다! 자야로운 어머니여, 저를 버리지 마시옵소서. 성모님의 품안에 막 태어난 아기처럼 페루를 안겨드리겠습니다. 제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언제나 사랑스러운 성모님의 아들인 제가 말입니다…… 아멘!”



# 37  1532년 10월, 카하스 – 389~390p.

눈…… 낮, 밤…… 가브리엘은 소스라치게 놀라서 잠에서 깼다. 누군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어둠 속에 박힌 눈이 자신에 대해 악착같이 캐내려고 뜯어보고 있다는 확신이. 목숨을 잃는 것쯤 두렵기도 하고 두렵지 않기도 했다. 그것은 참으로 기이한 느낌이었다. 생각의 실타래를 풀어놓아보면, 아마도 이 계획이 완전히 미친 짓이라는 걸 알게 되리라. 창과 화살로 무장한 수만 군사가 고개 입구를 포위한 채 기다리고 있다가 입가에 미소를 흘리며 그들을 끔찍하게 학살하는 장면이 떠오르리라. 하지만 가브리엘을 살피는 눈엔 애조에 가까운 우울함이 담겨 있어, 그 푸른 어둠에 빠지는 것은 즐거운 일이기도 했다. (중략) 

분명 싸워야 할 터였다. 그런데 무엇과 싸운단 말인가?



#  43  1532년 11월 15일, 카하마르카 – 480p.

주변의 모든 것은 그녀와 그를 갈라놓고 있는 텅 빈 공간에 불과했다. 그녀를 향한 희망과 어느새 싹튼 그녀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그를 갈라놓고 있는 공간.

그는 더 이상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그녀의 심장 고동 소리만 들렸고 그녀의 눈만 보였다.

그저 한 번 보고도 그리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일까?

그저 한 번 보고도 그 얼굴의 숨결과 그 입술의 타는 듯한 느낌 없이는 숨 쉴 수 없으리라는 걸 알 수 있을까?

그는 한기를 느꼈다. 그녀를 만져야만 몸이 다시 따뜻해질 것 같았다.



# 45  1532년 11월 16일, 카하마르카

– 542~543p.

태양이 사라졌다.

저기, 울부짖는 여자들 머리 너머로, 아나마야는 이방인들이 키 큰 옥수수를 베듯 종복들과 군주들의 팔을 베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용맹스러운 군주들이 아타우알파를 향해 달려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들의 손과 머리와 피와 목숨을 바치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이방인들의 사나운 공격에, 그들은 끝없이 쓰러지고 헛되이 피를 흘렸다. 감춰둔 투석기, 보잘것없는 무기, 철퇴와 활, 그런 것들은 아이들의 장난감일 뿐이었다!

“난 태양신의 아들이다.”

아타우알파가 곧추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그러나 수많은 전사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다.

그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고, 모두들 죽을 때까지 끝끝내 순종하다가 학살당하고 헛되이 난자당했다!

치차에 너무 취하고, 맹위를 떨치는 이방인들에게 넋이 나가 명령을 내리지 못한 것일까?

태양은 사라진 뒤였다. 유일한 군주였던 아타우알파, 이제 아나마야는 죽음을 살포하는 이방인들에게 붙잡히지 않으려고 한낱 범인(凡人)으로 항거하는 그의 모습을 보았다.

온 사방에 고함과 신음 소리뿐이었다. 그녀는 이리저리 떠밀리고 밀쳐졌다. 사람들이 매달려 그녀의 튜닉이 찢어졌다. 그녀는 몸뚱어리들의 강물에 휩쓸리고 들어 올려지고 짓눌렸다. 그것은 놀라운 폭풍을 일으키는 다른 세상의 바람이었다.

그때 그녀는 아이의 말을 떠올렸다.

‘과거의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거야!’


- 547~548p.

“전투는 이겼다, 아들아!”

전투라고? 가브리엘의 눈길은 광장과 저 멀리 평원에 자리잡고 있는 공포 위를 떠돌았다. 전투는 시작된 적이 없었다. 싸움에는 둘이 필요한 법. 그것은 살육이자 도륙이고, 살아남아 도망칠 수 있는 인디언들에게는 이제 미친 듯한 도주일 뿐이다.

가브리엘은 총독에게 대답하려다가 어떤 확신에 이끌려 입을 다물었다. 이 혼란의 와중에 처음이자 유일하게 솟은 확신이었다. 이제 그가 구해야 할 사람은 그녀였다. 전투, 진정한 전투는 그녀가 오늘밤도, 내일도, 언제까지나 살아 있는 것이었다. 신과 왕의 명령을 초월하는 전투,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치러내야 할 전투, 한없는 애정으로 다정하게 그를 ‘아들’이라고 부르는 돈 프란시스코의 명령을 넘어서는 유일무이한 전투.

한마디 말도 없이, 그는 말고삐를 돌리고 말의 엉덩이를 쳐서, 지친 말을 공포 속으로 다시 내몰았다.



#47  1532년 11월 17일 새벽, 카하마르카 – 562~563p.

곧 말해야 하리라. 그의 충성과 배반을 변명하고, 혼란의 다음 날이라는 이 기이한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하리라.

곧 받아들여야 하리라. 이 세상이 늘 서로 바라보고, 만지고, 사랑한다는 말 없이도 서로 사랑하기만 하면 되는 그 그늘진 오두막이 아니라는 것을.

곧, 그러나 당장은 아니다.



<잉카 1 : 태양의 공주>

앙투안 B. 다니엘 지음, 진인혜 옮김

문학동네, 200



잉카 1
국내도서
저자 : 앙투안 B. 다니엘 / 진인혜역
출판 : 문학동네 2007.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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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포코나 : 현재의 볼리비아에 있는 지명(원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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