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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묵지/추억의 책장 · 메모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류시화 제3시집, 우리는 시가 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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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옹이 – 12p.


흉터라고 부르지 말라

한때는 이것도 꽃이었으니

비록 빨리 피었다 졌을지라도

상처라고 부르지 말라

한때는 눈부시게 꽃물을 밀어 올렸으니

비록 눈물로 졌을지라도


죽지 않을 것이면 살지도 않았다

떠나지 않을 것이면 붙잡지도 않았다

침묵할 것이 아니면 말하지도 않았다

부서지지 않을 것이면, 미워하지 않을 것이면

사랑하지도 않았다


옹이라고 부르지 말라

가장 단단한 부분이라고

한때는 이것도 여리디여렸으니

다만 열정이 지나쳐 단 한 번 상처로

다시는 피어나지 못했으니




# 사하촌에서 겨울을 나다 – 17p.

(중략)

며칠째 눈 오고

마음이 오래 변방에서 젖었다

누가 어디 먼 데서 걸어온다

아무 슬플 일 없는데 이 무명의 슬픔은 어디서 오는가

아무 울 일 없는데 이 무음의 울음은 어디서 오는가

눈송이처럼 세상 속으로 내리더라도

세상과 무연한 곳에 내리고 싶다

결린 옆구리께 꽃들이 기침하는 폐사지로




# 내가 아는 그는 – 31p.

(중략)

누고도 소유할 수 없는 지평선 같은 사람이어서

그 지평선에 뜬 저녁 별 같은 사람이어서

때로 풀처럼 낮게 우는 사람이어서

고독이 저 높은 벼랑 위 눈개쑥부쟁이 닮은 사람이어서

어제로 내리는 성긴 눈발 같은 사람이어서

만 개의 기쁨과 만 개의 슬픔

다 내려놓아서 가벼워진 사람이어서

가벼워져서 환해진 사람이어서

시들기 전에 떨어진 동백이어서

떨어져서 더 붉게 아름다운 사람이어서

죽어도 죽지 않는 노래 같은 사람이어서




# 시골에서의 한 달 – 41p.

(중략)

굳이 상실의 이유를 묻지 않아도

삶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당신이, 혹은 내가, 지나가는 배추흰나비로 말했지 그 뜰에서 

(중략)




# 첫사랑의 강 – 49p.

(중략)

우리를 만지는 손이 불에 데지 않는다면

우리가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가

기억을 꺼내다가 그 불에 데지 않는다면

사랑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때 나는 알았지

어떤 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우리가 한때 있던 그곳에

그대로 살고 있다고

떠나온 것은 우리 자신이라고




# 바르도에서 걸려 온 수신자 부담 전화 – 76~77p.

(중략)

봄 그리고 끝없이 얼굴을 바꾸며

너와 함께 이동해 준 여러 번의 계절들

해마다 날짜가 변하는 기억들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그만큼 살지 않았을 뿐

어느 날 갑자기 너는 그곳에 도착할 것이다

죽는 법을 배우지도 못한 채

사랑하는 법도 배우지 못한 채

질문과 회피로 일관하던 삶을 떠나

이미 떨어진 산목련 꽃잎들 위에

또 한 장의 꽃잎이 떨어지듯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모든 생들에

또 하나의 생을 보태며




# 이런 시를 쓴 걸 보니 누구를 그 무렵 사랑했었나 보다 – 110~111p.

(중략)

너는 나에게 상처를 주지만 나는 너에게 꽃을 준다, 삶이여

나의 상처는 돌이지만 너의 상처는 꽃이기를, 사랑이여

삶이라는 것이 언제 정말 우리의 것이었던 적이 있는가

우리에게 얼굴을 만들어 주고

그 얼굴을 마모시키는 삶

잘 가라, 곁방살이하던 애인아

종이 가면을 쓰고 울던 사랑아

그리움이 다할 때까지 살지는 말자

그리움이 끝날 때까지 만나지는 말자

사람은 살아서 작별해야 한다

우리 나머지 생을 일단 접자

나중에 다시 펴는 한이 있더라도

이제는 벼랑에서 혼자 피었다

혼자 지는 꽃이다




# 비켜선 것들에 대한 예의 – 118~119p.

(중략)

조금은 세상으로부터 물러나야 저녁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아, 나는 알지 못했다

나의 증명을 위해

수많은 비켜선 존재들이 필요했다는 것을

언젠가 그들과 자리바꿈할 날이 오리라는 것을

한쪽으로 비켜서기 위해서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비켜선 세월만큼이나

많은 것들이 내 생을 비켜 갔다

나에게 부족한 것은

비켜선 것들에 대한 예의였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잠깐 빛났다

모습을 감추는 것들에 대한 예의였다




# 독자가 계속 이어서 써야 하는 시 – 122p.

(중략)

어둡게 들어가야 어둠을 이해할 수 있다고

꽃나무의 눈을 털어 주는 것을 좋아한다 꽃의 잠을 깨우는 것을

가는 실에라도 묶여 있는 새는 날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 준 어느 성인을 좋아한다

지금까지의 모든 시들보다 아직 써지지 않은 시를 좋아한다




++ 그리고 요즘 류시화 샘께서 아침에 보내주시는 아침의 시. 잔잔하게 아침을 깨워주는 시.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류시화 지음,

열림원, 2015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국내도서
저자 : 류시화
출판 : 열림원 2015.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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