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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묵지/추억의 책장 · 메모

[자전거 여행] 연필로 꾹꾹 눌러 쓴 우리시대 최고의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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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흙의 노래를 들어라_남해안 경작지 - 38~39p.

봄 미나리를 고추장에 찍어서 날로 먹으면서, 우리는 지나간 시간들과 전혀 다른, 날마다 우리를 새롭게 해주는 새로운 날들이 우리 앞에 예비되어 있음을 안다. 새들이 떠난 강가에서 우리는 산다. 아내를 따라서 시장에 가보니, 바다를 남에게 내준 뒤로 생선 값은 무섭게 올랐고, 지천으로 널린 봄나물은 싸다.



# 망월동의 봄_광주

- 51p.

유복난 할머니는 광주 대인시장에서 반찬 장사를 하고 있어다. 왼쪽 유방 밑으로 총알이 박혔다. 할머니는 그 후로 장사를 할 수 없게 되었고, 지금까지 병석에 누워 있다. 할머니의 왼쪽 유방 밑에는 아직도 총알이 그대로 박혀 있다. 그 합병증으로 다른 여러 증세들이 도졌다. 총알을 빼려고 서울의 대학병원까지 갔었으나 빼지 못했다. 워낙 민감한 부위에 총알이 박혀 있어서 외과뿐 아니라 여러 분야의 전문의 7~8명이 함께 수술에 참가해야 하는데, 병원에서는 이걸 못하겠다고 하더란다. 여러 병원을 돌아다녔으나 모두 다 허사였다. 그래서 할머니는 네 아들을 젖 먹여 키운 유방 속에 총알을 지니고 산다. 그러니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다. 할머니는 총알을 품고 죽어야 할 모양이다. 의사는 어디에 있고, 정부는 어디에 있는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면 그때는 총알을 빼내기가 수월할 것이다.


- 52p.

5월 18일에는 권투선수 박찬희의 타이틀 매치가 5회 KO로 끝나는 걸 보고 친구들을 만나러 거리에 나왔다가 행진하는 군인들을 보면서 "공수부대는 과연 멋지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군인들한테 붙잡혀서 무조건 두들겨 맞았다. 맞고나니까 도대체 왜 맞았는지를 알 수가 없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 대한 그의 의문은 시작되었다. 군인들이 사람들을 마구 쏘아죽이는 걸 보고 나서야, 저자들을 저대로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다. 그는 도청으로 향하는 시위 대열에 끼어들었다. 복부에 총알 두발을 맞았다. 척추가 관통되어 다리를 쓸 수가 없게 되었다. 몸을 쓸 수 없게 되자 구둣가게 꿈은 끝났다. 그는 불구가 된 몸으로 1990년에 결혼했다. 


- 53p.

5.18 민중항쟁 20주년을 맞는 광주에서는 비엔날레가 열리고 있다. 소설가 임철우의 장편소설 『봄날』이 연극으로 꾸며져 광주 공연을 앞두고 있고, 시인 황지우는 <5월의 신부>라는 시극(詩劇)을 무대에 올린다. 임철우는 이 시대의 용서와 화해가 가능한지를 고통스럽게 묻고 있고, 황지우는 치욕 속에서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산 자의 슬픔을 절규하고 있다. 삶은 소설이나 연극과는 많이 다르다. 삶 속에서는 언제나 밥과 사랑이 원한과 치욕보다 먼저다.



# 가까운 숲이 신성하다_안면도

- 83p.

숲은 가까워야 한다. 숲은 가까운 숲을 으뜸으로 친다. 노르웨이의 숲이나 로키 산맥의 숲보다도 사람들의 마을 한복판에 들어선 정발산(경기도 고양시 일산동)의 숲이 더 값지다. 숲은 가깝고 만만하지만, 숲이 사람을 위로할 수 있게 되는 까닭은 그곳이 여전히 문화의 영역이 아니라 자연이기 때문이다.

숲의 시간은 헐겁고 느슨하다. 숲의 시간은 퇴적의 앙금을 남기지 않는다. 숲의 시간은 흐르고 쌓여서 역사를 이루지 않는다. 숲의 시간은 흘러가고 또 흘러오는 소멸과 신생의 순환으로서 새롭고 싱싱하다. 숲의 시간은 언제나 갓 태어난 풋것의 시간이다.


- 85p.

봄의 숲은 비리다.

이 비린내는 먼 냄새인지 가까운 냄새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이 비린내는 나무의 관능이다.

아, 관능은 먼 것인가 가까운 것인가.


- 87p.

산을 오르는 사람들.

지금, 5월의 산들은 새로운 시간의 관능으로 빛난다. 봄산의 연두색 바다에서 피어오르는 수목의 비린내는 신생의 복받침으로 인산의 넋을 흔들어 깨운다. 봄의 산은 새롭고 또 날마다 더욱 새로워서, 지나간 시간의 산이 아니다. 봄날, 모든 산은 사람들이 처음 보는 산이고 경험되지 않은 산이다. 그리고 이 말은 수사가 아니라 과학이다.



# 땅에 묻히는 일에 대하여_여수의 무덤들 - 121p.

영동 민주지산 아래 동네에는 한 집안의 다섯 어른 무덤을 대문 앞에 모신 집도 있다. 성묘가 따로 없고 후손들이 들고 나며 무덤에 절한다. 그 무덤들은 죽어서 떠났지만 결국 떠나지 않은 사람들의 무덤이었다. 그 무덤들은 삶의 지속성 속에서 평화로워 보였다. 그래서 모든 무덤들은 강물이 흐르고 달이 뜨는 것처럼 편안하다. 비가 개면 바람이 불듯이, 그 편안함이 순리로 다가올 때까지, 이승에 남아서 밥벌이나 하자. 벗들아, 그대들을 경멸했떤 내 꿈속의 적막을 용서해다오. 봄볕 쪼이는 흙 속의 유혹은 아마도 이 순리의 유혹이었을 것이다.

지상의 무덤들이 자꾸만 늘어난다.



# 충무공, 그 한없는 단순성과 순결한 칼에 대하여_진도대교 - 219p.

그는 늘 병고에 신음했고, 슬픔과 기쁨에 몸을 적시는 정한의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의 슬픔은 "나는 오늘 슬펐다"라고까지만 기록하는, 통제된 슬픔이었다. 그의 슬픔과 기쁨에는 수사적 장치가 없다. 이 통제된 슬픔의 힘이 "저녁 무렵에 동풍이 잠들고 날이 흐렸다. 부하 아무개가 거듭 군율을 범하기로 베었다" 같은 식의 놀라운 문장들을 쓰게 한다. 바람이 잠든 것과 부하를 죽인 일이 동등한 자격의 사실일 뿐이다.



# 문경새재는 몇 굽이냐_하늘재, 지름재, 조소령, 문경새재 - 235p.

한국인의 마음속에서 고개를 넘는다는 일은 삶의 전환과 확장을 의미한다. 그래서 모든 고갯마루는 그 전환의 통과 의례로서 괴기스런 전설과 민담을 빚어낸다. 문경새재를 넘어가는 영남대로는 서울-충주-상주-부산을 연결하는 조선 500년의 간선도로였다. 행정과 교역의 대부분이 문경새재를 넘나들며 이루어졌다. 영남대로 380킬로미터 중에서 옛 문경새재 구간은 30킬로미터에 달하고, 이 구간의 해발고도는 600미터이다.

문경새재는 여러 변방 오지에 흩어진 인간의 삶이 당대 현실과 관련을 맺으려 할 때 반드시 넘어야 할 고난의 고개로서 영남대로의 중허리를 철벽처럼 가로막고 있다. 그 마루턱은 늘 구름에 가려 있는데, 그 너머 아득한 북쪽이 서울이며, 거기가 당대의 핵심부이고, 현실을 만지고 주무르고 죽이고 살리는 일들은 모두 문경새재 너머에서 이루어졌다.




<자전거 여행 1>

김훈 지음

생각의 나무, 2000




자전거 여행. 1(한정특별판)

저자
김훈 지음
출판사
생각의나무 | 2007-12-12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자전거로 우리 땅의 풍경을 누비다! 소설 칼의 노래의 저자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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