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의 말_ 아름다운 것에 끌리는 건 동물의 본능이지만 아름답지 않은 것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만의 오래된 특권입니다


<엘리펀트맨>은 실제 다발성 신경섬유종증이라는 희귀병으로 심각한 기형을 가졌떤 존 메릭의 일화를 다룹니다. (중략) 사교장의 셀러브리티가 된 이후에도 존 메릭은 여전히 '서커스의 괴물'로 기능합니다. 일종의 구경거리죠. 거리를 내달리며 "나는 사람이다"라고 비명을 지르던 존 메릭은 결국 자기 방에서 자살합니다.


TV를 틀고 라디오를 켜고 책을 읽으면 지금 당장 박차고 일어나 무슨 짓이든 해서 성공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성공하지 않는 삶은 뒤처지는 삶이고 뒤처지는 삶은 불행한 삶이니 지금 당장 신분 상승을 위해 노력하라고 외칩니다. 맞습니다. 사람들은 노력으로 신분 상승이 가능하다 말합니다. 그 희박한 일말의 가능성은 너희도 언제든지 TV 속의 저 화려한 사람들처럼 될 수 있다는 일종의 희망고문으로서 사회적 역할을 합니다.




#3_ 연애든 섹스든 결국 신라면 같은 겁니다 - 33∼34p.


그러니까 연애든 섹스든 결국 신라면 같은 겁니다. 신라면 맛이 변한 건지 내 입맛이 변한 건지 어찌됐든, 요는 사람에게 한결같은 감정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리고 저는 바로 그 지점에 있어서 남자든 여자든 어느 쪽도 한때의 약속을 빌미로 규탄받을 이유가 없다고 보는 겁니다. 갑수씨가 자리를 뜨며 마지막으로 물어왔다. 오늘은 왜 통 말이 없어요?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갑수씨는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이며 멀어져갔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 갑수씨는 아까부터 내내 당장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남자를 울리고 싶지는 않아. 갑수씨는 택시를 탔고 나는 오징어짬뽕을 사러 편의점으로 향했다.



#4_ "사랑이란 게 지겨울 때가 있지이?" - 36∼38p.


누워 있다가 벽에 뺨이 닿았다. 잠이 오지 않아 길고 긴 밤. 벽은 벽인데 오늘따라 벽 같지 않다. 만져보았다. 쓰다듬었다. 수천 번의 낮과 밤이 습기마냥 서려 있다. 눅눅하진 않았다. 온기가 느껴졌다.

이 방을 공유했던 사람들을 떠올렸고 사건들을 환기했다. 처음 이 방에 발을 들여놓았던 날이 생각났다. 하루종일 업무를 보고 들어와 날이 밝도록 혼자 글을 끄적거리던 날이 생각났다. 천장에 물이 스며들어와 유리테이프를 붙여가며 밤새 골치를 썩었던 날이 생각났다. 하늘 아래 제일 밑바닥에 자리잡은 생각들만 집어들어 머리를 흔들고 때리던 날이 생각났다. 장마 내내 옷장 가득 곰팡이가 피어올라 신세를 저주했던 날이 생각났다.

욕심냈던 날들. 지루했던 날들. 가슴에 칼이 돋아 났던 날들. 시작하고 싶지 않았던 날들. 끝내고 싶지 않았던 날들. 아 저 빨간 밥통은. 아 저 문지방 위의 철봉은. 아 저 벽걸이 에어컨은. 아 그리고, 사람이. 소소한 기억들은 살갑고 강인하다. 이 안에서 정말 많은 일이 있었구나, 새삼. 많이 웃었고 엉엉 울었고 발을 굴렀고 불안해 뒤틀렸고 행복해 뻐근했다. 더불어 어리석었다.

내일 아침 이 방을 떠난다. 다른 반지하방으로 간다. 내 삶의 가장 강렬한 순간들을 함께했던 공간과의 마지막 밤이다. 가슴이 저리고 시원하다. 나는 내일 갈 거야. 너보다 잘나지도 않았어. 그냥 반지하방이야. 그래도 나는 갈 거야. 덜 어리석겠다. 혹시 약이 오를까. 사람 같다.



#인터미션 #3_ INTERMISSION - 124∼125p.


다시 잠에서 깼다. 조용한 천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반지하에 볕이 들어올 리 만무하다. 다행히 날씨는 좋다. 바람도 적당하다. 새삼스레 세상이 참 맑네. 간밤에 꿈을 꾸었다. 마음이 여전히 아픈 걸 보니 와 정말 대단했어. 무언가 애틋하고 아련한 게. 그럼 꿈속에서 꿈이라고 생각했던 건 모두 현실인 건가요.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위배되지 않는 것일 테지요. 위배요? 위배죠. 그것은 무엇에 대한 위배입니까. 그것은 진심과 오해의 쌍곡선 법칙에 대한 위배입니다. 그게 뭔 개수작이지요. 진심이면 진심일수록 곧이곧대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그럼 다시 자볼까. 꿈꾸면 한번 더 볼 수 있을까. 한번 더 보면 이번에는 소중하게 여길 수 있을까. 눈을 감았따, 뜨며 나는 조금 괴롭다. 쪽지를 잃어버리지 말자. 쪽지를 일어버리지 말아야겠어. 쪽지를 잃어버리지 말아야겠다. 그러나 쪽지는 영영 사라졌다.



#16_ 결혼을 했다. 고맙습니다. 이혼을 했다. 미안합니다. - 127∼129p.


결혼을 했다. 고맙습니다. 이혼을 했다. 미안합니다. 수년 동안 머물렀던 곳을 떠나 지금 이 동네로 이사 왔다. 하루는 뱃속에 서러움이 너무 많이 차올랐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 무작정 뛰었다. 미친 듯이 뛰었다. <엘리펀트맨>의 존 메릭 같아 보였을까. 실존인물이었던 존 메릭은 선천적인 얼굴 기형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코끼리 인간이라고 불렀다. 영화 속에서 존 메릭은 수많은 인파에게 구경거리로 쫓기면서 "나는 사람입니다!" 라고 외친다. 하지만 그와 달리 내 뒤를 쫓은 건 호기심 많고 잔인한 군중이 아니라 구름같이 많은 수의 나, 였다. 구름같이 많은 약속들. 우리 세대에 본이 되는 부부가 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책임지지 못했다. 결국 말만 번지르르한 인간이었다. 형편없다. 

(중략) 갑수씨는 내가 만나본 모든 치들 가운데 가장 솔직한 사람이었다. 모순되고 일그러진 세상의 풍경 앞에서도 그러했다. 자신의 삶이 누군가에 의해 그렇게 되기를 원치 않는 것만큼이나, 윤리를 내세워 타인의 삶을 재단하지 않았다. 거기에 합당한 맥락이 있으리라 여기며 어떻게든 설명 가능한 것으로 이해해보고자 노력했다. 그는 더러운 것을 더럽다고 말할 줄 알았다. 더불어 더러운 것을 더럽다고 피하거나 못 본 척하지는 않았다. 그 더러움 안에 뛰어들어 함께 몸을 더럽히며 즐거워했다. 그것은 유연함이 아니라 되레 강직함이었따. 때로는 위악처럼 보일 정도로 과감한 것이었다.


#인터미션 #4_ INTERMISSION - 148∼158p.


사람들은 타인의 삶에 대해 한 치의 의혹도 남기고 싶어하지 않는 묘한 취미가 있따. 연예인의 가십을 논하는 카페 테이블에서도, 누구네 엄마를 탓하는 반상회 뒷담화에서도, 하물며 틀어진 관계를 두고 서로를 탓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듬성듬성한 사실 사이의 공백들을 참지 못한다. 명쾌하지 않다면 거기 무언가 더 있을 거라 단정한다. 결국 그 빈틈들을 이야기로 채워넣는다. 타인의 사연은 그렇게 아침드라마가 되고 어느 순간 진실보다 더 설득력 있는 사실로 굳어진다.


(중략) 처음으로 되돌아가보자. 사람들은 타인의 삶에 대해 한 치의 의혹도 남기고 싶어하지 않는 묘한 취미가 있다. 그래서 관계의 비극에 관해 괴상한 음모론과 설명을 끼워맞추고 상대를 욕한다. 그러나 그것은 대부분 '말이 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위한 노력으로부터 파생된 상상일 뿐이다. 삶이란 '한 치의 의혹 없이 존재하거나 투명하게 설명될 수 없는 거대하고 허무맹랑한 서사'다. 그(녀)가 당신을 포기한 이유를 자기 자존감의 보존을 위해 굳이 설명하려다보면 위악과 거짓과 파괴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된다. 그것은 결코 설명 가능한 영역이 아니며 괜히 설명을 하려 드는 순간 초라해질 수밖에 없다.


잔인한 진실이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 사랑을 청산하게 된다. 그러게 마련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잔인하고 비겁한 일이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살다보면 그런 일들이 종종 일어나고야 만다. 이 글을 쓴 나나 그것을 읽은 독자들이 그러한 관계의 어찌하려야 어찌할 수 없는 위계를 깨닫고 나아가 더 나은 관계를 가질 수 있을까. 아니라고 본다. 이런 건 가끔 깨닫고 대개 까먹고야 마는 것이다. 관계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신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는 이상, 우리는 결국 이 모든 과정을 붕어처럼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인생이며 사랑이라 일컬어지는 것의 실체다.




<개포동 김갑수씨의 사정>

허지웅 소설

아우름(문학동네), 2014



개포동 김갑수씨의 사정
국내도서
저자 : 허지웅
출판 : 아우름(문학동네) 2014.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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