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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묵지/칸타빌레 · 영화 리뷰

[운명의 산 낭가파르밧] 해발 8,125미터 그들의 운명을 가른 그 곳 (라인홀트 매스너 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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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 Karl : Perhaps one brother already weakened from the climb feel behind close to the summit.

          탈진한 동생은 정상을 눈앞에 두고 뒤쳐졌고

          The other stronger brother direct to himself down ...

          힘이 남아있던 형은 가까스로 피신했다고 합니다.


Reinhold : That's not true!

           사실이 아닙니다.

 

Dr. Karl : And thus saved his own life?

         자기 목숨만 보존한 걸까요?

         We will never find out.

         우린 진실을 알 수 없겠죠.

         It is not opt to meet to prove.

         진상을 밝히는 것은 제 임무가 아닙니다.

         How much guilty 

         얼마나 깊은 죄책감이..

         How much guilty ways on Reinhold Messner's soul.

         라인홀트 매스너의 영혼을 괴롭힐지 모르겠지만

         It is burden he will have to carry until the end of his days.

         그가 죽을 때까지 짊어져야 할 업보입니다.



Sponsor : What motivated you want to climb up to the highest mountain?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에 오르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You don't even know will get down again.

         다시 못 내려올 수도 있는데?

         Love of country?

         애국심 때문인가?

         Glory? Honor?

         영광, 아니면 명예 때문에?


Reinhold : Why does painters are painting?

         화가가 왜 그림을 그리죠?


Sponsor : You are saying a mountaineer is an artist?

         등반가도 예술가와 같다는 건가?

         And is behaves self-centered as an artist?

         아니면 예술가처럼 자기중심적이라는 건가?


Reinhold : Self-centered as a sponsor.

         후원자들만큼이나 자기밖에 모르죠.

         Because if it sells everybody benefits.

         팔리면 누이 좋고 매부 좋죠!




Reinhold : Neither Karl nor Felix attended a memorial service.

         칼과 펠릭스는 건터의 장례식에 안왔습니다.

         Karl's mountain destiny was always 'Nanga Parbat'.

         칼에게 운명의 산은 항상 '낭가파르밧' 이었죠.

         But it is superfluous mountain. Geological formation.

         하지만 낭가는 산이란 지형일 뿐입니다.

         We were that want to take emotions to mountains.

         우리가 산에 감정을 불어넣은 거죠.





Reinhold Messner couldn't let go of Nanga Parbat.

라인홀트 매스너는 낭가파르밧을 떨쳐내지 못했다.


In the following years he set off dozen of times to look for his brother.

수년간 동생을 찾으려고 12번도 넘게 낭가를 향했다.


In 1978 he conquered Nanga Parbat a second time.

1978년 그는 낭가파르밧 정상을 두 번째로 정복했고


Without the expedition. Without equipment. Alone.

원정대와 장비 없이 홀로 이뤄낸 성취였다.


Karl Herrligkoffer continued to lead expeditions in the Himalayas.

칼은 계속 히말라야 원정대를 이끌었고


Upon his death in 1991 there still was no reconciliation between him and Reinhold Messner.

1991년 사망할 때까지 라인홀트와 화해하지 않았다.


Shortly thereafter, Peter Sholtz, one of the finest German mountaineers, fell to his death on the Mont Blanc.

얼마 안 가 피터 숄츠는 몽블랑에서 등반 도중 사망했다.


Felix Kuen committed suicide a few years later.

펠리스 큐언은 몇 년 후 자살했다


In 2005, the ice released Gunther's mortal remains.

At an altitude of 4,300 meters, on the Diamir Glacier.

2005년에야 해발 4,300m 지점의 디아미르 빙하 위에서 건터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운명의 산 낭가파르밧>

Nanga Parbat, 2010

조셉 빌스마이어 감독

플로리안 슈테터(라인홀트), 안드레아스 





■ 낭가파르밧(Nanga Parbat)

 

낭가파르바트(Nanga Parbat)는 히말라야 산맥 끝, 파키스탄에 위치하고 있으며, 해발고도가 8,126미터로 세계에서 9번째로 높은 산이다. 이 지방 주민들은 '산 중의 왕'이란 뜻으로 '디아미르(Diamir)'라고 부르며 숭앙한다. 8,000미터 이상급 산 중에서는 가장 위험한 곳 중 하나로 손 꼽히는 곳.


'낭가파르바트'는 우르두어로 '벌거벗은 산'이란 뜻이다. 셰르파들 사이에서는 악마의 산으로 불리고 외국에서도 공공연히 'Killer Mountain'이란 명칭을 쓸 만큼, 난이도가 높고 사망자가 많이 나온 산으로 더더욱 유명하다. 산의 남동쪽 벽인 루팔 벽은 높이 4,500미터의 수직 암벽으로, 히말라야의 3대 난벽으로 꼽히는 곳이다. K2처럼 겨울 시즌에 등정된 바가 없는 산이었지만, 2016년 시모네 모로의 팀이 동계초등정에 성공하여 K2만이 동계등정이 안 된 유일한 산이 되었다. (출처: 나무위키)



■ 낭가파르밧(Nanga Parbat) 등정 역사 (출처: 나무위키)


1895년 영국의 알버트 프레데릭 머메리가 구르카 2명과 함께 처음으로 등반을 시도했다가 실종되었다. 그저 눈사태에 휘말려 죽었으리란 추정만 나올 뿐이다.


1932년 독일인 빌리 메르클, 빌로 벨첸바흐가 이끄는 독일 등산대가 도전했으나 1차는 실패했다. 

1934년에 2차 도전에 나섰으나 악천후로 하나둘 쓰러져 죽도 메르클과 빌란트ㆍ벨첸바흐 등 독일인 4명과 가이라이ㆍ다그시ㆍ니마노르부 등 현지인 포터 6명이 목숨을 잃었다. 포터인 앙체링이 극적으로 내려와서 마지막에 남은 메르클과 포터 가이라이를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눈보라 속에서 후발 등산대는 구경만 해야했고, 남은 이들은 끝내 스스로 내려오지 못했다.


1937년, 칼 비엔(Karl Wien) 대장이 이끄는 독일등산대가 재도전에 나선다. 그들은 6,180 m 지점에 제4캠프를 구축했다. 그리고 6월 14일 저녁 정상 공격을 위해 독일인 대원 7명과 셰르파 9명이 제4캠프에 모였고 그 자리에서 잠을 잤다. 그러나... 바로 그날 밤 거대한 눈사태가 제4캠프를 덮쳐 자고 있던 16명 모두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다.


1938년 파울 파우어 대장이 이끄는 독일 등산대가 다시 도전했으나 악천후에 시달려 결국 라키오트 루트(북동쪽) 무어즈 헤드 부근에 있던 얼음굴에서 4년 전 조난당한 빌리 메르클 대장과 포터 가이라이의 시신을 발견하고 물러나야만 했다.이 과정에서 포터인 히야이룸과 독일인 등산대원 리하르트 발뢴코프가 목숨을 잃으면서 사망자는 31명으로 늘어났다.


1939년 페터 아우프취나이터가 이끄는 독일 등반대 4인이 낭가파르바트 디아미르(서쪽 벽) 머메리 립(rib) 좌측에 위치한 거대한 바위 스퍼의 6,100 m 지점까지 올라갔으나 역시 악천후로 물러났다. 히틀러도 연이은 실패에 노발대발했지만 곧 터진 2차 세계대전 여파로 등산은 흐지부지 밀려났다.


1953년 독일인 의사 카를 마리아 헤를리히코퍼(1916~1991)가 등반대를 조직했다. 바로 그는 1934년 조난당한 빌리 메르클의 이복아우로, 등반에 문외한이었지만 형이 못한 걸 이루겠다는 집념으로 도전에 성공했다. 하지만, 문제는 헤를리히코퍼가 등반에 문외한이고 독선적이며 고집이 세서 다른 등반대와 충돌했다는 것. 결국 다른 인원들이 그를 무시했고, 당시 29살 헤르만 불이 본부의 지시를 어기고 단독으로 등정을 시도, 41시간 만에 살아 돌아왔다.


결국 헤를리히코퍼는 스스로 오르고자 재도전에 나서 1961년 재등정에 나섰지만 루퍼트 뢰브와 한스 킨스호퍼가 추락사하면서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우습게도 그 이듬해인 1962년, 독일인 토니 킨쇼퍼가 이끄는 등정대가 2번째 정상에 올라 헤를리코퍼에게 굴욕을 안겨줬다. 하지만 이 등정에서도 1명이 죽었으며 킨쇼퍼 또한 다른 산 등정 도중에 1964년 목숨을 잃었는데 헤르만 불과 똑같은 33살이었다.


그 뒤로도 3번이나 헤를리히코퍼는 재도전에 나섰지만 그 스스로 정상에 오르는 건 죄다 실패했다. 그 중 하나인 4차 도전 당시(이탈리아-독일 합작으로 등정 시도)인 1970년에 팀에 동생 건터 메스너와 함께 합류한 이탈리아의 라인홀트 메스너가 건터와 단둘이 최초로 루팔 벽을 통해 등정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서쪽의 디아미르 벽을 통해 하산하던 중 눈사태로 동생 건터를 잃고 혼자 내려왔다. 여담인데 이때도 대장인 헤를리히코퍼는 젊은 메스너가 영광을 차지하는 게 배가 아파서 메스너가 기록을 세우기에 급급해 정상에 오른 걸로 만족하지 못하고 고산병에 시달리는 동생을 강제로 더 위험한 루트로 내려보내다 죽인 것이라고까지 했다. 분노한 메스너는 "나는 내 동생을 죽이지 않았다!"는 입장을 밝히며 비로소 헤르만 불을 이해하겠다는 말로 그 역시 헤를리히코퍼를 공식적으로 비난했다. 참고로 이 등정을 그린 2010년작인 독일 영화 <운명의 산 낭가 파르밧/Nanga Parbat>(2013년 국내 개봉) 에서도 헤를리히코퍼는 찌질이 악역급으로 나왔다. 그뿐만 아니라 처음에는 메스너 형제가 정상에 오르기를 적극 지지했으나 실제로 이들 형제가 정상에 오르자 태도가 돌변했다고 그려졌다.


이렇게 헤를리히코퍼가 등정에 연이어 실패할 때 체코의 이반 갈피가 3번째 도전에(1969년에 1차 실패) 나선 1971년에 4번째 정상 등정에 성공하여 이전 3번의 등정이 모두 독일인 및 독일과 합작으로 이뤄진거랑 달리 비독일 나라가 홀로 등정에 성공하여 헤를리히코퍼를 좌절시켰다. 결국 그는 낭가파르바트에 직접 오르기를 포기했고 등산가로서 묻혔으며, 되려 헤르만 불이나 메스너를 질투한 찌질이로서 등산 역사에 추하게 남았을 뿐이다.


여성으로서는 1984년 프랑스의 릴리앙 베르나르(1948~1986)가 남편인 모리스 베르나르(1941~1986)와 같이 처음으로 등정에 성공했다. 생몰연도를 보면 알겠지만 이 내외는 1986년 6월, K2 등정 도중 같이 목숨을 잃었으며 나중에 그녀의 시체를 발견하여 묻어준 등정대가 바로 한국 등정대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 7월 광주전남합동대가 등정을 시도했으나 실패, 7900미터 지점에서 정성백 대원이 실종, 아니 사망했다. 

이후 1992년 우암산악회가 첫 등정에 성공했다. 그리고 1999년에는 엄홍길 대장이 디아미르벽을 통해 등정하는 데 성공했다. 

2005년한국 루팔벽 원정대의 이현조, 김창호 대원이 라인홀트 메스너에 이어 35년 만에 루팔벽 재등에 성공하였다. 

2009년에는 고미영이 등정 후 하산하는 중에 실족하여 사망하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2016년 이탈리아 등산가 시모네 모로의 팀이 동계초등정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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