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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묵지/추억의 책장 · 메모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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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부쩍 책 욕심이 늘고,
할 일이 산더미여도 책만 부여잡고 앉아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내가 사춘기 문학 소녀도 아니고 독서광도 아닌데, 왜 갑자기!

그저 무던히 읽히는 부담없는 책들부터 머리를 쥐어짜는 책들까지 구분도 없다.
어찌됐건 나도 원인을 알 수 없는.. 급 늘어난 독서량.
덕분에 감당안되는 책 값(?). 최근엔 회사 정보자료실을 애용한다.
오늘은 서가를 훑어보다가 시집을 꺼내 들었다. 류시화.
학부 3, 4학년 때 도서관 사서로 있으면서 제일 많이 읽고 또 읽었던 류시화.
이름만으로도 잔잔하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바다에 섬이 있다
섬 안에 또 하나의 바다가 있고
그 바다로 나가면 다시 새로운 섬
섬 안의 섬 그 안의 더 많은 바다 그리고 더 많은 섬들
그 중심에서 나는 잠이 들었다
잠들면서 꿈을 꾸었고
꿈 속에서 다시 잠이 들었다 또 꿈꾸었다
꿈 속의 꿈 그리고 그 안의 더 많은 잠 더 많은
꿈들



나무

나에게 나무가 하나 있었다
나는 그 나무에게로 가서
등을 기대어 서 있곤 했다
내가 나무여 하고 부르면 나무는
그 잎들을 은빛으로 반짝여 주고
하늘을 보고 싶다고 하면
나무는
저의 품을 열어 하늘을 보여 주었다
저녁에 내가 몸이 아플 때면
새들을 불러 크게 울어 주었다

내 집 뒤에
나무가 하나 있었다
비가 내리면 서둘러 넓은 잎을 꺼내
비를 가려주고
세상이 나에게 아무런 의미로도 다가오지 않을 때
그 바람으로 숨으로
나무는 먼저 한숨지어 주었다
내가 차마 나를 버리지 못할 때면
나무는 저의 잎을 버려
버림의 의미를 알게 해주었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류시화 시집>
류시화 지음
푸른숲,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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