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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묵지/추억의 책장 · 메모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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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서점에 서서 읽은 책. 
두어 시간여를 그렇게 서서 선생님의 담백한 이야기를 꿀꺽 마시듯 읽었습니다. :-)




나는 다만 바퀴 없는 이들의 편이다.

그 후에 일어난 일들을 나는 날짜별로도 기억할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 겨울의 추위가 냉동보관시킨 기억은 마치 장구한 세월을 냉동보관된 식품처럼 썩은 것보다 더 기분 나쁜 신선도를 유지하고 있으니 이건 기억이 아니라 차라리 질병이다. 기억 중 나쁜 기억은 마땅히 썩어서 소멸돼야 하고, 차마 잊기 아까운 좋은 기억이라 해도 꽃 같은 것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을.



친절한 나르시시스트들

아주 오래전에 미시마 유키오의 신간을 펼쳐보다가 그가 웃통을 벗고 단단한 근육을  자랑하듯이 찍은 사진을 보고 그는 아마 나르시시스트일 거란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달리는 하루키를 보면서도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하루키의 소설을 많이 읽었고 좋아한다. 그의 문학적 가치에 대해 국내에서도 평가가 구구한 줄 알지만 내가 좋으니까 좋아할 뿐, 남들의 평가는 나하고 상관없는 일이다. 소설을 재미로 읽지 공부하려고 읽지는 않으니까. 그러나 누구에게 그를 좋아한다고 말한 적은 없다. 

놀랍게도 그는 훗카이도의 북부 사로마 호수 주변을 일주하는 100킬로미터 코스 울트라마라톤대회에도 참가해서 완주한다.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자신을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해 그를 스친 온갖 잡념, 사유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가 75킬로미터쯤 달렸을 때 그의 고통이 극에 달하면서 뭔가가 돌담을 뚫고 훌쩍 빠져나가 버린 것 같은 느낌을 맛본다. 그러고는 나는 나이고, 내가 아닌 것 같은 아주 조용한 경지를 맛보고 고통까지 사라진 기쁨을 맛본다. 그 후로는 아무 생각도 안 하고 단지 뛴다. 그가 울트라마라톤을 완주한 기록은 열한 시간 사십이 분이다. 거의 하루의 반을 달린 것이다.음식을 공급받을 때도 앉지 않고 선 채로 먹고 마신다. 앉으면 다시 못 일어설 것 같은 공포감은 그가 초인이 아님을 말해준다.
뛰다가 정 힘들 때는 좀 걷다가 뛰어도 되는데 그는 한 번도 안 걷는다. 안 걷고 달리기를 계속한 데 대한 그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그가 남기고 싶은 묘비명도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그리고 러너) 적어도 최후까지 걷지 않았다"라고 적고 있다. 그의 오만이 전율스럽다. 그는 혼자 있는 걸 좋아하고 운동도 누구하고 경쟁하고 적수를 의식하는 게 싫어서 혼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달리기를 좋아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과연 경쟁자 없는 운동이 가능할까. 아마도 그의 적수는 자기 자신일 것이다. 이 세상에 나하고 맞설 적수는 나밖에 없다는 것처럼 도저한 자신감, 우월감이 또 있을까.



내 생애의 밑줄

시간만 나면 분주하게 뭔가를 정리하다가 하루해가 갈 때가 많다. 요즘은 특히 그렇다. 그 분주함 속에서 쫓기는 것 같은 조급증과 짜증 같은 것이 섞여 있어, 이러다가는 신경줄이 끊어지고 말 것 같은 위기의식을 느낄 적도 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안 하는 심심한 시간을 갈망하면서도 그걸 제대로 누리질 못한다. 한가할 때 말고도, 외출할 적엔 외출했다가 돌아왔을 때 말끔하게 정돈된 집으로 돌아오고 싶어서, 저녁에 잠들 때는 내일 아침에 깨어났을 때 지저분한 집에서 깨어나기 싫어서, 또는 혹시 못 깨어났을 때는 남들에게 흉잡히지 않기 위해 눈에 거슬리는 것들, 늘어놓았던 것을 치우기도 하고 안 보이는 데다가 대강 틀어박기도 한다. 어쨌든 하루를 살고 난 흔적들을 마치 범죄자가 증거인멸 하듯이 깨끗이 없애고 나야 개운해서 잠이 잘 온다.

자신이 싫어하는 나를 누가 좋아해주겠는가. 
나를 스쳐 간 시간속에 치유의 효능도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이 나를 솎아 낼 때까지는 이승에서 사랑받고 싶고, 필요한 사람이고 싶고,
좋은 글도 쓰고 싶으니 계속해서 정신의 탄력만은 유지하고 싶다.
그나저나 시간은 왜 이렇게 빨리 가지. 
고통의 기억뿐 아니라 기쁨의 기억까지 신속하게 지우면서.
나 좀 살려줘. 비명을 지르며 뛰어내리고 싶게 시간은 잘도 가는구나.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박완서 산문집
현대문학,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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