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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묵지/추억의 책장 · 메모

행복한 독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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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세 세일즈맨, 패스트푸드 제국을 건설하다 - 레이 크록

1954년. 샌프란시스코.
멀티 믹서기 세일즈맨 레이 크록은 자신의 제품을 구입한 고객의 햄버거 가게에 찾아간다. 햄버거 가게 주인은 모리스 맥도날드와 리처드 맥도날드 형제. 크록은 햄버거를 사기 위해 가게 앞에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맥도날드 형제는 단돈 15센트에 규격화된 햄버거와 프렌치프라이를 신속하게 판매하고 있었다. 햄버거 하나가 만들어지기까지는 고작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햄버거 판매 시스템의 효율성과 단순함에 사업적 성공을 확신한 레이 크록은 다음날 맥도날드 형제를 찾아가 자신과 동업할 것을 제의한다. 그러나 현재에 만족한 맥도날드 형제는 제의를 거절한다. 하지만 레이 크록은 물러서지 않았다. 열성적으로 설득을 거듭한 끝에 맥도날드 형제의 동의를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1년 뒤, 레이 크록은 아내와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955년 시카고에 맥도날드 제 1호점을 오픈한다. 그의 나이 53세였다. 이것이 바로 훗날 패스트푸드 제국 맥도날드의 첫 출발이었다.
청결을 철두철미하게 강조한 크록은 매일 아침 제1호 매장에 나가 직접 청소를 할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크록의 이런 노력으로 맥도날드 1호점은 문을 열자마자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레이 크록은 1호점의 성공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맥도날드가 앞으로 훨씬 더 성장할 것을 예감했다. 1961년 레이 크록은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270만 달러에 맥도날드 형제의 모든 권리를 사들였다. 그 후 맥도날드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속도로 무섭게 성장해나갔다.
1961년, 본사에 일명 '햄버거 대학(Hamburger University)'을 만들어서 전국 각지의 점주들을 모아 서비스 교육을 하고, 그 과정을 마친 사람에게는 '햄버거 전공, 프렌치프라이 부전공'으로 학위도 수여했다. 1963년에는 맥도날드의 마스코트인 어릿광대 '로널드 맥도날드'를 탄생시키면서 다른 기업보다 한발 앞서 '아동 고객'을 공략했다.
1965년, 맥도날드는 938개 점포로 늘어났고, 크록이 70세가 된 7년 후에는 100억 개 이상의 햄버거를 팔아 10억 달러의 매상을 올렸다. 2010년 현재 지구상의 맥도날드 점포를 모두 합치면 3만여 개나 된다. 하루 방문객 5,000만 명, 현재까지 팔린 햄버거 수 2,000억 개, 7시간마다 전세계 어느 곳에선가 새로운 점포가 문을 여는 세계 최대 외식업체가 맥도날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새로운 도전을 하기에는 늦었다고 생각할지 모르는 53세의 세일즈맨이 이뤄낸 신화다.


# 건강을 잃으면 인생 전부를 잃는다 - 민관식 장관

한국 스포츠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고 민관식 장돤. '마당발' 이란 자신의 별명처럼 국회의원, 국회부의장, 대한약사회회장, 문교부장관, 대한체육회장 등등 그가 거쳐온 이력은 화려하다. 그의 생활신조는 "건강을 잃으면 인생 전부를 잃는다."였다. 자신의 생활 신조에 충실했던 그는 2006년 1월,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기 전날까지도 테니스를 즐긴 운동 마니아였다. 그의 사무실 문에는 '평생학습, 평생현역' 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그는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도 정계, 체육계, 학계 등 다방면에서 의욕적으로 활동하며 자신의 좌우명대로 생의 마지막까지 현역으로 살았다.
그가 평생현역으로 살 수 있었던 힘은 바로 꾸준한 운동이었다. 그는 매일 오후 2시쯤 헬스클럽에 나와 운동을 했다. 헬스클럽에서 1.5킬로미터를 걷고, 수영장으로 옮겨 물속에서 다시 1킬로미터를 걸었다. 걷기와 수영을 마치는 데만 2시간 정도가 걸렸다.
헬스클럽 회원들 사이에선 매일 2식, 시계처럼 정확한 시간에 나타나 때로는 걸쭉한 욕설을, 때로는 유머를 던지며 운동을 하는 재미있고 귀여운 할아버지로 통했다.
문교부장관 시절 전국 고등학교에 테니스장을 설치해줘 '테니스장관' 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여든을 넘은 나이에도 젊은이 못지않은 체력을 과시하며 테니스를 즐기는 민장관을 보고 어머니테니스클럽 선수들은 '베리베리 씽씽 회장님'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꾸준한 운동, 철저한 자기관리로 마지막 순간까지 현역으로 살다간 민관식 장관이야말로 평생현역의 산증인이다.


# 62세에 도보로 실크로드를 횡단하다 - 베르나르 올리비에

"당신의 은퇴비용을 청산할 때가 됐습니다."
프랑스 신문기자로 일하던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예순의 나이가 되자 사회로부터 은퇴라는 통고를 받았다. 어느 날 갑자기 은퇴라는 일방적인 통고를 받기 전까지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다. 16세에 가난 때문에 학교를 그만둔 뒤로 토목공, 항만 노동자, 가게 점원, 포도주 외판원, 체육교사 등 하지 않은 일이 없을 정도였다. 독학으로 서른 살에 대입 자격시험에 합격한 후에는 30여 년간 <파리마치Paris - Match>, <르 마탱 Le Matin>, <르 피가로 Le Figaro> 등 유수 언론사에서 정치부, 경제부 기자로 밤낮없이 일을 했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예순이 됐다. 사랑하는 아내와 어머니의 죽음, 직장에서의 해고, 자녀들의 독립...... 그는 마치 침몰하는 배처럼 점점 무너져갔다. 사회에서 폐기처분됐다는 좌절감과 고독을 견디지 못해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자살까지 생각했던 그를 구한 것은 걷기였다. 순례자들의 길로 알려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걸으며 그는 지난 60년간의 삶을 돌아보았다. 그 결과 은퇴란 청산도 휴식도 고독도 아닌,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인생에서 가장 풍요로운 시기' 임을 발견한다. 은퇴가 끝이 아니라 믿기 어려운 시작임을 깨친 그는, 자신에게 선물처럼 주어진 그 황홀한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고민한다. 그리고 실크로드 1만 2,000 킬로미터를 오직 걸어서 여행하는 실크로드 도보여행을 계획한다.
4년간 1만 2,000 킬로미터에 달하는 실크로드를 오직 두 발로 걸으며 세상을 누볐던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실크로드 도보 여행기를 책으로 펴낸다. 현대판 오디세우스의 귀환이라 할 만한 대장정을 마치고 펴낸 책 <나는 걷는다 Longue marche>(전 3권)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실크로드 최초의 도보여행자라는 자신의 닉네임이나 영웅이라는 호칭을 붙이는 것도 단호히 거부했다. "그저 한 발을 기꺼이 다른 한 발 앞에 놓기를 대략 1,500만 번 정도 되풀이 하면 되는 일"이라고 했다.
이제 여든을 앞둔 그는 자신의 인생을 예순부터 시작됐다고 당당히 말한다. "은퇴는 인생에서 완전한 자유를 갖게 되는 특혜를 받는 순간이다. 과거의 '활동적' 청소년기와 성년기의 인생이 그러했든 강요된 삶이 아니라 선택된 삶이다. 비로소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은퇴란, 몹시 정신 나간 것처럼 보이는 일들까지 포함해 모든 도전을 향해 열려 있는 문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는 진정한 의미의 "'은퇴할'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다."라고 말하는 올리비에는 삶의 마지막 단계를 후회 없이 보내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계획'을 짜고 있다.


# 1,008번의 거절 끝에 KFC 창업의 첫발을 내디다. - 커넬 할랜드 샌더스

흰 수염, 흰 양복, 네모난 안경을 쓴 푸근한 인상의 할아버지. 그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세계적인 패스트푸드점 KFC의 상징인 커넬 할랜드 샌더스다. 현재 전세계 1100여 개국에 1만 3,000여 개의 점포를 가진 대형 프랜차이즈인 KFC. 그런데 그가 처음 사업을 시작한 나이를 안다면 더욱 놀랄 것이다. 65세, 더구나 당시 그의 수중엔 고작 105 달러의 자금이 전부였다.
미국 인디애나 주에서 태어난 샌더스는 초등학교를 중퇴한 후 15세부터 돈을 벌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5년간  농장 일꾼, 자동차 페인트공, 전차 차장, 보험 외판원, 철도 노동자 등의 직업을 전전하면서 박봉의 월급으로 살았다.
어릴 때부터 요리를 좋아했던 그는 39세에 식당을 개업해 어머니로부터 배운 남부 스타일의 음식을 만들어 팔았다. 닭튀김, 야채샐러드, 비스킷 등 소박하지만 맛있는 그의 음식은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대형 레스토랑으로 성공을 한다.
하지만 식당은 빚만 잔뜩 진 채 매각되고 할랜드 샌더스는 하루아침에 고작 105달러의 연금으로 살아야 하는 가난한 65세의 노인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샌더스는 거기서 좌절하지 않았다. 처음 105달러의 연금을 받았을 대 그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야. 그건 바로 닭튀김이지. 그게 바로 내가 앞으로 할 일이야."
샌더스는 그의 고물 승용차 트렁크에 직접 개발한 압력솥과 비밀 향신료, 양념묶음을 싣고 길을 떠났다. 무작정 차를 몰고 식당을 찾아다니며 자신만의 닭튀김 조리법을 설명했다. 첫 프랜차이즈 계약을 따내기까지 그는 무려 1,008번의 거절을 당했다. 그러나 샌더스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고 전국을 횡단하며 영업을 계속했고 드디어 1,009번째에 최초의 동업자를 만나게 된다.
처음 2년 동안 샌더스는 겨우 다섯 군데의 프랜차이즈를 모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샌더스의 조리법으로 닭튀김을 만든 식당들이 입소문이 나면서 점점 더 많은 식당들이 프랜차이즈 계약을 맺기 시작했다.
1960년, 그의 나이 70세. 미국과 캐나다에 200여 개가 넘는 KFC 체인점이 생기자, 샌더스는 5년간의 긴 여행을 그만두고 프랜차이즈 관리를 맡는다. 이후 프랜차이즈 사업은 혼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져버렸고, 196년 회사를 200만 달러에 매각했다. 조건은 평생 연봉 4만 달러와 이사회에 참석하는 것, 그리고 광고에 출연하고 회사의 고문으로 활동하는 것이었다.
65세의 나이로 1년에 수만 마일을 여행하며 강한 끈기와 고집을 보여준 샌더스의 이미지는 나이가 결코 장애가 될 수 없다는 KFC의 상징으로 미국 전역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은퇴에 대비해 준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일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일을 멈추면 인간은 늙기 전에 녹슬어버립니다."


# 81세, 더욱 창조적인 영화인으로 살다 - 클린트 이스트우드

서부영화 <황야의 무법자>에서는 냉소적인 표정의 총잡이로,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는 매력적인 노신사로 출연한 세계적인 영화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 그는 우리에게 알려진 영화배우라는 이력 외에도 성광한 영화감독, 영화제작자, 영화음악 작곡가, 민선시장 등 다채로운 이력으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나이 올해 81세라는 사실. 그는 81세라는 나이가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여전히 건강하고, 창조적으로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이스트우드는 미국 대공황기에 떠돌이 노동자 생활을 하던 부모 밑에서 자랐다. 오클랜드 공업전문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벌목장 인부, 소방수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배우생활은 군대에 다녀온 후 로스앤젤레스로 가서 1954년부터 시작했다. 
처음에는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트럭 운전을 하면서 단역 배우로 영화에 출연해 연기 경력을 쌓던 중 TV 시리즈물 <로하이드>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세르지오 레오네와 함께 만든 <황야의 무법자>, <석양의 무법자>, 담배 피는 그의 모습은 서부영화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부상했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망나니 형사의 원조인 <더티 해리>에서 주연 해리 캘러핸 역을 맡아 액션스타로 새롭게 태어난다. 배우로서 전성기를 이어가던 와중인 1971년 이스트우드는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로 감독 데뷔를 한다. 그의 나이 41세 때였다.
배우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지만 그의 감독 데뷔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이후 그의 초기작들 역시 장르영화의 수작 정도로 취급될 뿐이었다. 아무도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이 시대 최후의 거장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항상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하는 거장이 됐으며, 할리우드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영화제작에 관해 모든 권한을 지닌 감독이 됐다.
그가 70세가 넘어서 만든 <미스틱 리버>(2003),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4), <아버지의 깃발>(2006),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2006), <그랜토리노>(2008), <체인질링>(2008), <우리가 꿈꾸는 기적 : 인빅터스>(2009)는 어느 것 하나 걸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완성도를 보인다. 수십 차례 감독상과 제작상을 수상한 이스트우드는 2010년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영화인 1위로 뽑히기도 했다.
80을 넘은 나이에도 메가폰을 손에서 놓지 않고 열정적으로 영화를 만들고 있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야말로 평생현역의 대표주자다.


# 아흔에 재즈 음악의 꽃을 피우다 - 콤파이 세군도

"누구에게나 인생의 꽃은 핍니다.
나의 꽃은 내가 아흔이 되던 해에 피었죠.
백열다섯 살에도 아마 나는 더 살고 싶을 겁니다."

전세계에 쿠바 음악의 붐을 일으킨 재즈 밴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보컬이자 기타리스트였던 콤파이 세군도.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세군도는 10대 때부터 낮엔 담배 공장에서 일하고 밤엔 바에서 연주를 하며 아프리카와 스페인의 선율이 어우러진 쿠바 재즈를 익혔다. 이후 쿠바의 여러 그룹에서 재즈 뮤지션으로 활동했고, 1939년 부터는 12년간 클라리넷을 연주했다. 1950년대 초부터는 아바나 중심가에 있는 쿠바 음악가들의 신실인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에서 정기공연을 했다. 1956년에는 자신의 이름을 가진 그룹을 만들어 활동하며 쿠바를 대표하는 재즈 음악가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1961년 쿠바혁명으로 모든 것이 바뀌고 말았다. 피델 카스트로 정권이 들어선 뒤 공산주의 이념을 담은 포크 음악이 주류를 이룬 대신 전통 쿠바 재즈는 밀려났다. 아바나의 공연장들도 문을 닫았고 세군도 역시 그후 30여 년간 담배공자 노동자, 이발사로 전전했다.
"나의 꽃은 아흔이 되던 해에 피었다."라는 그의 말처럼 그렇게 나이 아흔이 될 무렵 예기치 않은 '구원'이 찾아왔다. 쿠바 재즈에 매료된 미국의 음악 프로듀서 라이 쿠더가 1996년 아바나에서 노장 음악가들을 찾아 나선 것. 세군도 등 일흔을 넘긴 노인 5명이 모여 6일 만에 녹음을 끝낸 앨범 한 장이 전세계에 쿠바 음악 붐을 몰고 올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이들이 과거에 공연하던 클럽 이름을 딴 앨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은 전세계에서 400만 장 이상이 팔렸고 그래미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1987년, 그가 여든 살에 만든 곡 <찬찬>은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 공연되고 있으며 쿠바의 대표적인 재즈 음악이 됐다.
빔 벤더스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에서도 세군도는 "내 나이가 아흔인데 여섯째를 낳으려는 중" 이라며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는 늘 신선했고 그를 기다리는 앞날과, 언젠가 있을 여행을 좋아했다.
2003년 콤파이 세군도는 아흔다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식에는 수천 명의 쿠바인들이 거리행렬에 동참했다. 아흔이 넘어서도 솟아오르는 영감을 잃지 않았던 세군도. 그는 전세계가 사랑한 쿠바 음악인으로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AGING SMART; 행복한 독종>
정신과 전문의 이시형 박사 지음
리더스북,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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