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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광기에 휩쌓인 세령호의 밤. 그 진실의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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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밤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소설일반
지은이 정유정 (은행나무,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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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운명은 때로 우리에게 감미로운 산들바람을 보내고 때론 따뜻한 태양 빛을 선사하며, 때로는 삶의 계곡에 '불행' 이라는 질풍을 불어넣고 일상을 뒤흔든다. 우리는 최선의-적어도 그렇다고 판단한- 선택으로 질풍을 피하거나 질풍에 맞서려 한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최선을 두고 최악의 패를 잡는 이해 못 할 상황도 빈번하게 벌어진다.


 어느 영화에서 처럼 추적추적 비내리는 기분을 머금은 채로 소년 서원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광기어린 사형수 최현수의 아들로 세상에 눈길을 피해 살아가는 그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온전히 표현하지도 않았다. 어린 소녀를 살해하고 광기에 휩쌓여 아내를 살해하고 마을을 수장시켜버린 희대의 살인마의 아들. 꼬리표처럼 따라붙은 살인마의 아들이란 그의 고통이 무색하리 만치 7년이 지난 하루를 평온하게 살아낸다. 아저씨 승환과 함께 그는 지난 세월을 잊어도 좋겠다 싶을만큼 일년 째 불안한 안정을 누리고 있었다. 끝없이 자신을 추적해오던 선데이매거진도 더 이상 신경쓰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런 서원에게 아버지의 현수의 사형집행일과 함께 다음날 시신을 인수하라는 전보가 날아든다. 아저씨 승환은 서원을 위해 USB를 남겨둔채 실종된다. 승환이 남긴 USB안에서 서원은 한 소설을 발견한다. 그리고 익숙한 이름 오영제를 만난다. 기억을 더듬으며 영제를 떠올리던 서원에게 7년의 밤을 숨죽이며 살게한 지난 사건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한다. 절도있는 문장을 따라 세령호를 둘러싼 의문의 살인 사건이 하나 둘 정체를 드러낸다. '인간이 사라진 이후의 세상이 이런 모습일까...' 작가가 바라본 세령호는어느 누구의 영혼이라도 송두리째 홀려버릴 만큼 매혹적이었다. 

안개에 파묻힌 그날 밤 세령호에서, 12살 소녀 세령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 두려움과 공포를 안고 살아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는게 소녀를 위해 더 나은 선택이었으리라는 비겁한 생각마저 들었다. 세령은 그날 밤 아무 생각조차 할 수 없었으리라. 개인주의가 팽배한 우리네 삶 속에서 소녀는 처절하게 혼자 남겨져야만 했다. 세령호의 모든 사람이 소녀를 죽음으로 내몬 살인자라고 해도 발뺌할 수 없을 것이다.

고통의 블랙홀로 아버지가 사라지던 그날 밤 이후, 서원은 7년을 침묵속에 살면서 세상의 모두로 부터 철저히 격리된 삶과 감정을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모습을 보여준다. 7년을 하루같이 악몽속에서 지내던 서원의 삶을 통해 작가는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무관심 속에 죽어갈 수 밖에 없었던 세령의 심리를 대신 묘사하려던 것은 아니었을까. 책의 말미에 등장한 편지에서 거대한 소용돌이처럼 드러난 진실과 맞딱뜨리며 나는 그날 밤 세령처럼 두려워 할 수 밖에 없었다. 진실의 공포가 온몸을 휘감았다. 7년을 숨죽이며 기다려온 광기어린 사내 영제가 두려웠다기 보다는 세상이 철저히 등돌린 기댈곳 없는 소녀의 현실이 더 가슴아팠다.

정유정이라는 작가에 대해 무지하리만치 몰랐지만 영제를 추적하는 승환과 서원의 이야기를 그려낸 그녀를 감히 한국판 애거사 크리스티라 칭하고 싶다. 여성 작가가 그려냈으리라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잔인한 장면까지 그녀는 압도적인 서사로 풀어낸다. 영제가 몽치를 휘두르는 그 광기의 한 장면 한 장면을 써낸 그녀의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듯 하다. 에필로그와 작가후기를 다 읽어낸 후, 몇 해 전 하정우 주연의 '추격자'를 보고 몸서리치게 악몽을 꾸던 밤이 떠오른다.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할 수 있는지, 집착과 광기가 얼마나 처절할 수 있는지 통각을 자극하는 공포였다. 오늘도 그 밤처럼 잠을 설치겠지. 그리고 서원의 악몽같은 7년의 밤도 잔인한 영화로 곧 세상과 만나게 되겠지?

I believe in the church of baseball.
 



28p.
세상에는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일들이 있다. 따돌림과 고의적 시비를 무시하는 일, 몰매를 맞으면서도 대항하지 않는 일. 침묵 속을 걷는 일도 이 범주에 들어간다.

30p.
이제는 꿈꿔도 좋을 것 같았다. 창조 이래 수많은 범상한 자들이 추구해온 범상한 바람, 여기 이곳에서 살고 싶다는 소망, 아저씨는 글을 쓰고 나는 약국에 나가면서 기왕이면 죽을 때까지 오래오래. 그러므로 세상의 눈이 이 땅을 바라볼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 했다.

43p.
경험이 가르친바, 호의는 믿을 만한게 아니었다. 유효기간은 베푸는 쪽이 그걸 거두기 전까지고, 하루짜리 호의도 부지기수였다. 고마워하며 사양하는 게 서로 낯이 서는 길이었다.

242p.
그녀가 생각하기에, 스트레스는 겁쟁이의 변명이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압박의 운명을 읾어진 존재였다. 생존을 위협하는 것은 피 터지게 싸워 거꾸러뜨려야 마땅했다. 하다못해 침이라도 뱉어줘야 했다. 그것이 그녀가 '사는 법' 이었다.

283p.
이 아이가 그의 아들입니다, 라고 하셨지요.
아이가 세상 끝에 와 있습니다, 라고 하셨지요.
아이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라고 하셨지요.
아이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습니다, 라고 하셨지요.

399p.
'안다'를 당연시하고, '인식한다'를 외면한 자신은 어리석었다. 자신의 앞가림이 먼저였고, 누군가 재미를 보면 누군가는 피를 보는 게 세상 이치라 여겼고, 재미 본 쪽이 자신이라는 행운에 취해, 던져야 마땅한 것을 던지지 않았다. '왜?' 라는 질문 말이다.

419p.
그랬다. 끝내주는 주말이었다. 죽기 좋은 밤이었다. 죽음이 두렵지도 않았다. 이미 각오한 바였다.

501p.
그 일이 내게 남긴 게 그거다. 뭔가를 쓰려고 노트북을 켜면 내 앞에는 워드화면 대신 블루 오브가 열리는 거다. 길을 찾으려 들면 들수록 넓어지고 깊어지며 광활해지는 공간. 나는 그 어둡고 푸른 우주에서 미아가 되곤 했어.



<7년의 밤>
정유정 지음
은행나무,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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