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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묵지/추억의 책장 · 메모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 유용주 산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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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

저자
유용주 지음
출판사
| 2000-12-15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MBC 느낌표 선정도서. 가장 가벼운 짐, 크나큰 침묵등의 시집...
가격비교


MBC !느낌표 '책을 읽읍시다' 여덟 번째 선정 도서



- 11p.

하루를 열면서, 하루를 마감하면서 걷는 자만이 되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되돌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빗줄기 앞에서 다만, 걷는 자는 도달할 수 있으며, 되돌릴 수도 있다는 것을 땀이 말해준다. 독을 풀어준다.


- 13p.

병은 삶의 몸 안에 들어온 다음에야 깨닫는 법, 그러니 인간이란 축생들은 후회와 반성의 자식들이 아니던가? 병은 사람을 가르친다고 했다. 늘 그렇게 한 발자국씩 늦게야 알아듣느니, 병은 스승이다. 병은 우선 낫고자 하는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단다. 저 길에게 약속한다. 소나무에게 전봇대에게 약속한다, 모시고 살 것이라고, 극진히 대접할 것이라고, 저 썩을 대로 썩은 강물에게 맹세한다. 저 콩꽃에게, 참깨에게, 고추에게, 생강에게, 개망초에게, 쑥부쟁이에게, 아카시아에게, 저 잠자리에게, 까치에게, 멧비둘기에게 약속한다. 저 미꾸라지에게, 나를 물어뜯는 모기에게, 사마귀에게, 배를 벌렁 뒤집고 죽은 개구리에게 약속한다. 너희들을 저버리지 않겠다. 직각에 가까이 허리가 굽어도 일손을 놓지 않는 파파 할머니에게, 농약 주느라 정신이 없는 중늙은이 농사꾼에게, 나만큼이나 척추가 휜 그 옆의 아줌마에게 약속한다. 나는 나을 수 있다. 길이 나를 저버리지 않는 한 이 스승을 끝까지 모시고 살 것이다.


- 15p.

가을에는 쭉정이도 고개 숙인다. 하늘에 차마 고개 들지 못할 것들이 너무 많은 세상이다. 땅은 다 용서해주는데도 말이다. 이슬 하나까지 모두 받아들이는데도 말이다.


- 19~20p.

언 길을 얼어붙은 눈을 밟으며 언 몸으로 얼어 걷는다. 언 바람과 맞선다. 언 가족과 맞선다. 언 세상과 맞선다. 얼어붙은 삶과 맞선다. 언 하늘을 배경으로 멧비둘기가 난다. 언 땅 위에 억새가 흔들린다. 언 쑥대가 손짓한다. 언 개울가 얼음장 밑으로 울컥 뜨거운 물이 흐른다. 언 물고기가 얼음장 밑에서 몸을 녹인다.


- 27p.

잠이 안 온다. 새벽 지나 아침인데 아침 지나 햇살 퍼지는데 햇살 퍼져 바람 불어 터지는데 바람 불어 구름 면발 굵어지는데 구름 면발 굵어져 하늘 솥 그들먹해지는데 하늘 솥 그들먹해져 땅 위의 생명들 입 벌리고 노래하는데 싹이 돋는데(돋아 오를 것 다 돋아 오르는데) 초록 세상 초록 융단 펼쳐지는데 잠이 안 온다.


- 27p.

나무의 그림자는 땅을 그리워하며 땅을 닮아가지만 나무의 마음은 하늘을 그리워하며 하늘을 닮아간다. 연기가 나무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연기는 나무에서 빠져나가는 혼이다. 나무의 연기는 나무의 혼이다. 나무는 죽어서도 그림자를 끌고 다니려고 한다. 연기도 그림자가 있고 구름도 그림자가 있다. 연기가 제 몸을 송두리째 바람 살 속으로 집어 넣었을 때 나무는 드디어 완벽한 해탈을 맛보게 된다.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보아라, 저 나뭇가지 사이를 자유롭게 드나드는 바람의 살을 보아라, 바람의 결을 보아라. 


- 41~42p.

오랫동안 이 숲길을 걸었다. 비가 와도 걷고 눈이 와도 걷고 꽃이 피거나 바람 불거나 봄 여름 가을 겨울 할 것 없이 줄기차게 걸었다. 걸을수록 길을 낯익었으나 걷고 나서 뒤돌아보면 늘 새로운 모습으로 뻗어 있었다. 길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내리막길에서도 식은땀이 났다. 나무 그림자가 길어지면서 또다시 가을이다. 나도 저 나무 그림자처럼 단호하게 살고 싶었다. 저 산그늘처럼 명확하게 살고 싶었다. 고양이 시체 하나 썩는 데도 일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길은 모든 것을 감싸는 듯했으나 모든 것을 배척하기도 했다. 길은 시시각각 썩고 스며들고 새로 돋아나고 베어 넘어지고 젖어 있거나 바짝 말라 있었다. 나는 곧잘 넘어지곤 했다. 휘청거리며 겨우 걸을 때도 있었다. 땡볕은 사나웠고 그늘은 서늘했다. 숨기는 싫었다. 걸으면서 당당해지는 법을 배웠다. 피하고 싶은 것도 피하지 않았다. 외로움도 이 길의 운명이고 잊힌다는 것도 이 길의 순명이리라. 길은 휘어지고 뒤틀어지고 끊기는 듯했으나 이어져 곧바랐다. 끊기지 않았다. 정당하게 통과했다. 멀리 뻗어 늘 막막하고 아득한 길, 주저앉지는 않으리라. 땀 범벅으로 걸어가리라.


- 42p.

숲은 바람이 흔드는 것이 아니라 새들이 흔든다. 숲은 왼종일 새들이 수런거리는 말의 집이다. 수런거리는 말(言)의 잔칫날, 그래서 숲은 한시도 쉬지 않고 중얼거린다. 숲은 가두는 게 아니라 죄 풀어놓는다. 열려 있다. 그 안에는 참깨, 들깨 쏟아지는 말소리가 온종일 눈부시다. 숲은 말(言語)의 사원이다.



# 어느 게으름뱅이가 쓴 쥐똥나무 이야기

착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현실에 대한 적응력이 떨어진다는 데 있다. 현실 적응력이 없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꿈을 많이 꾼다는 데 있다. 꿈을 많이 꾸는 족속들의 대부분은 정신 병원으로 가고 극소수의 사람들만 시인이 된다. - 132p.

밥은 그릇을 닮고 정신은 육체를 닮고 눈물은 인간을 닮는다. 미워하면서 닮아간다. - 133p.



# 시작 메모가 있는 시 - 206p.

푸르름 속에는 비명이 숨어 있다.

우리 나라 어느 산천, 돌 하나에 풀 하나에 나무 하나에게 물어보자. 이 파도 검센 흙 바다에서 무엇을 빨아먹고 살아왔나. 어머니는 그렇게 죄 빨아 먹히고도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거대한 땅이다.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

유용주 지음

솔,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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