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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묵지/추억의 책장 · 메모

[운명이다] 노무현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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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다

저자
노무현재단 (엮음), 유시민 (정리) 지음
출판사
돌베개 | 2010-04-26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운명이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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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재단


■ 본문 중에서


# 제1부 출세(出世) : 세속의 변호사 - 70~71p.

해마다 입시에 무슨 수석 합격자가 미디어에 나와, 장차 법관이 되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위해 일하겠다거나, 의사가 되어 헐벗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포부를 말하는 것을 들으면 혼자 쓴웃음을 짓곤 했다. 판사, 검사, 변호사, 의사들 가운데 누군들 그런 포부를 말해본 경험이 없겠는가. 이렇게 비웃으면서 자꾸 고개를 내미는 양심의 거리낌을 덮어 보려고 했다. 자기 직업에 충실하기만 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 사회에 올바르게 이바지 하는 것 아니겠느냐는 논리를 방패 삼아,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한 삶을 즐겼다.

(중략)

내 운명을 바꾸었던 '그 사건'을 만나고 나서야, 나는 판사로 변호사로 사는 동안 애써 억눌러 왔던 내면의 소리를 진지하게 듣게 되었다. 내 삶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자부했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당한 삶이라고는 더더욱 말할 수 없었다. 출세해서 좋은 일 하겠다고 혼자 다짐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래서 삶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사회와 역사에 대해서 좀더 진지하게 공부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갓 세상에 발을 내디딘 청년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나에게 다가온 새로운 삶을 받아들였다.


# 제2부 꿈 : 야권통합 - 129p.

나는 그에 대한 정치적 신뢰를 접었고, 오래 지나지 않아 갈라섰다. 계보원에게 충성을 요구하려면 이익을 챙겨 줘야 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공정성을 잃는다. 한두 사람을 챙기는 대가로 많은 사람을 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계보를 챙기고 개인적 이해관계로 사람을 묶어 둔다고 해서 정치를 잘 할 수 있는게 아니다. 지도자는 공정해야 한다. 신뢰, 헌신, 책임, 절제와 같은 덕목을 갖추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기택 대표와 일하면서 이런 것을 배웠다. 이런 경우를 두고 '반면교사'反面敎師라고 한다.


# 제2부 꿈 : 지방자치실무연구소 - 132p.

'노하우'를 개발하면서 데이터베이스를 공부했고 컴퓨터 프로그램의 종류와 원리를 익혔다. 정치 활동과 연구소의 업무 전반에 대해 직접 직무분석을 했다. 정보 축적과 재활용 시스템을 만드는 프로그램 기획안도 내 손으로 직접 썼다. 내가 원하는 시스템 전체의 구조와 요구 사항들을 종이에 일일이 적었다. 두툼한 바인더로 열 권이나 되는 주문서를 만들었다. A4지로 300쪽 정도 분량이었다. 그 다음에는 서류도 없이 받아 적게 하려면 다섯 시간에 걸쳐 설명했더니 프로그래머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프로그램을 다시 만들어 오면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다 확인했더니, 이 사람들이 나를 만나는 것 자체에 겁을 먹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일정, 인명 정보, 자료와 회계를 전부 통합했다. 인명 데이터베이스를 기초로 수천, 수만 개의 명부를 생산하고 축적하는 틀을 만들었다. 하지만 상품화해서 투자비를 회수하는 데는 실패했다. 업무 분석과 표준화가 지나치게 세밀해서 상품화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나는 이 일을 하면서 지식공유 시스템의 기본 개념을 알게 되었다.


# 제2부 꿈 : 네번째 낙선, 노사모의 탄생 - 161~165p.

"이 아픔을 잊는 데는 시간이 약이겠지요. 또 털고 일어나야지요. 농부가 밭을 탓할 수 있겠습니까?" 하루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것이 인생이라더니, 그렇게 또 새로운 날들을 맞이했다.

인터넷 세상에서 나는 '바보 노무현'이 되었다. 유리한 종로를 버리고 또 부산으로 가서 떨어진 미련한 사람. '바보 노무현'은 '청문회 스타' 이래 사람들이 붙여 주었던 여러 별명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들었다. 나는 바보가 아니다. 내가 바보라고 생각한 적도 없다. 다만 눈앞의 이익보다는 멀리 볼 때 가치 있는 것을 선택했을 뿐이다. 당장은 손해가 되는 일이 멀리 보면 이익이 될 수가 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모두 '바보처럼' 살면 나라가 잘 될 것이다.

(중략)

노사모는 창의적 아이디어로 큰 기업을 만들고서도 전셋집에 그대로 산다는 안철수 박사를 존경했다. 수천억 원의 자산을 가지고도 손수 운전을 하는 게임회사 사장을 좋아했다. 노사모의 문화를 보면서 대한민국에 새로운 주류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문화계, 법조계, 학계 등 여러 분야에서 나를 지지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 제3부 권력의 정상에서 : 김대중 대통령과 나 - 188p.

우리 역사에 그런 지도자는 없었다. 정말 오랜 기간 동안 독재와 싸웠다. 암살 위기도 겪었다. 구속당하고 연금당하고, 그것도 모자라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 그래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민주주의 노선을 견지했다. 국민의 힘으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나면 그런 사람은 보통 투표를 할 필요도 없는 수준의 지도자가 된다. 건국의 아버지와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이다. 넬슨 만델라, 바츨라프 하벨, 레흐 바웬사 대통령이 모두 그랬다. 그것이 정상이다.


# 제3부 권력의 정상에서 : 탄핵 - 237p.

5월 14일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안을 기각할 대까지, 나는 63일 동안 청와대 관저에 칩거했다.

그날 밤부터 잠을 잤다. 식사 시간에 나타나지 않으면 직원들이 계속 기다리기 때문에 세 끼 밥은 제때 먹어야 했다. 그 시간 빼고는 계속 잤다. 자도 자도 잠이 끝없이 밀려왔다. 일주일을 자고 나니 정신이 들고 기운이 났다. 책을 읽었다. 그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내가 거실에서 책을 읽으면 아내는 안방에서 읽었고, 내가 탁자에서 읽으면 아내는 소파에서 읽었다. 자리를 바꾸어 가며 낮에는 책만 읽었다. (중략)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무어라고 소리치는지는 알 수 없다. 멀리서 사람들이 외치는 함성이 아련히 들릴 뿐이다. 관저 안에서는 유리가 두꺼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용암처럼 일렁거리던 촛불 바다는 텔레비전 뉴스로만 보았다. 쉼터에서 그 소리를 들으며, 아내는 우리 편이 저렇게 많이 왔다고 좋아했지만 나는 겁이 났다. 저 사람들이 저렇게 밤마다 촛불을 들고 와서 나를 탄핵에서 구해 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내게 무엇을 요구할까? 저 사랃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그런 두려움이 촛불 시민들의 함성에 실려 왔다.


# 제3부 권력의 정상에서 : 남북정상회담 - 262p.

문제는 입장의 차이가 아니라 신뢰의 결여였다. 적극적으로 무엇을 이루려고 진심으로 노력했는가? 상대방의 신뢰를 얻기 위해 우리가 성의를 다했는가? 필요할 땐 양보를 하고 타협을 했느냐? 이것이 문제였다. 


# 제3부 권력의 정상에서 : 검찰 개혁의 실패 - 275p.

청와대를 떠난 후 정치인 노무현을 후원했던 기업인들이 숱하게 특별세무조사를 당했다. 검찰 수사까지 받아 회사가 망하는 지경으로 가는 것도 보았다. 다르게 했더라면 이런 사태를 막을 수 있었을까? 내가 과연 잘못한 것일까? 민주주의 교과서가 말하는 그대로 헌법과 법률에 따라 권력을 운용하려 했던 나의 선택이 어리석었던 것일까? 아니다. 내가 대통령으로 있으면서 권력기관을 정치적으로 악용했더라도, 영구집권을 하지 못하는 한 언젠가는 마찬가지 수모를 겪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항변할 자격조차 없었을 것이다. 국세청과 검찰에게 당한 수모보다 더 아프고 슬픈 것은, 올바른 이상을 추구한 행위를 어리석은 짓으로 모욕하는 세태, 그런 현실을 보는 것이다.


# 제3부 권력의 정상에서 : 정치 권력과 언론 권력 - 279p.

언론은 시민의 권력이어야 한다. 시민을 대신해 정치 권력과 시장 권력을 감시하고 제어함으로써, 권력이 시민의 권리와 가치를 침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언론의 사명이다. 그리고 정치 권력과 시장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공정하고 투명하게 이루어지도록 공론의 장을 관리하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다. 


# 제4부 작별 : 노무현의 실패는 노무현의 것이다 - 332p.

고향에 돌아와 살면서 해 보고 싶었던 꿈을 모두 다 접었다. 죽을 때까지 고개 숙이고 사는 것을 내 운명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재판 결과가 어떠하든 이 운명을 거역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20년 정치인생을 돌아보았다. 마치 물을 가르고 달려온 것 같았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꾸었다고 믿었는데, 돌아보니 원래 있던 그대로 돌아가 있었다. 정말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길이 다른 데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대통령은 진보를 이루는 데 적절한 자리가 아니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무엇으로,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 것일까?


# 제4부 작별 : 마지막으로 본 세상 - 334p.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경향신문


<운명이다>

노무현재단 엮음, 유시민 정리

돌베개,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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