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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묵지/추억의 책장 · 메모

[칼의 노래] 김훈 장편소설, 2001 동인문학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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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중에서


# 칼의 울음 - 26p.

목이야 어디로 갔건 간에 죽은 자는 죽어서 그 자신의 전쟁을 끝낸 것처럼 보였다. 이 끝없는 전쟁은 결국은 무의미한 장난이며, 이 세계도 마침내 무의미한 곳인가. 내 몸의 깊은 곳에서, 아마도 내가 알 수 없는 뼛속의 심연에서, 징징징, 칼이 우어대는 울음이 들리는 듯했다. 나는 등판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캄캄한 바다는 인광으로 뒤채었다.


# 다시 세상 속으로 - 39p.

울어지지 않는 울음 같기도 하고 슬픔 같기도 한 불덩어리가 내 몸 깊은 곳에서 치받고 올라오는 것을 나는 느꼈다. 방책, 아아 방책. 그때 나는 차라리 의금부 형틀에서 죽었기를 바랐다. 방책 없는 세상에서, 목숨이 살아남아 또다시 방책을 찾는다. 나는 겨우 대답했다.

- 방책은 물가에 있든지 없든지 할 것입니다. 연안을 다 돌아보고 나서 말씀 올리겠소이다.


# 물들이기 - 200~201p.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


라고 나는 쓰기로 했다. 김수철이 종이를 펼쳤다. 나는 붓을 들어서 썼다.


일휘소탕 혈염산하

一揮掃蕩 血染山河


'강산을 물들이도다'에서 나는 색칠할 도(塗)를 버리고 물들일 염(染)자를 골랐다. 김수철이 한동안 글자를 들여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 물들일 염자가 깊사옵니다.

- 그러하냐? 염은 공(工)이다. 옷감에 물을 들이듯이, 바다의 색을 바꾸는 것이다.

- 바다는 너무 넓습니다.

- 적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때, 나는 진실로 이 남쪽 바다를 적의 피로 염(染)하고 싶었다.


# 아무 일도 없는 바다 - 239~240p.

나는 죽음을 죽음으로써 각오할 수는 없었다. 나는 각오되지 않는 죽음이 두려웠다. 내 생물적 목숨이 끝장이 두려웠다기보다는 죽어서 더 이상 이 무내용한 고통의 세상에 손댈 수 없게 되는 운명이 두려웠다. 죽음은 돌이킬 수 없으므로, 그것은 결국 같은 말일 것이었다. 나는 고쳐 쓴다. 나는 내 생물적 목숨의 끝장이 결국 두려웠다. 이러한 세상에서 죽어 없어져서, 캄캄한 바다 밑 뻘밭에 묻혀 있을 내 백골의 허망을 나는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견딜 수 없는 세상에서, 견딜 수 없을만큼 오래오래 살고 싶었다. 바다에서, 삶은 늘 죽음을 거스르고 죽음을 가로지르는 방식으로만 가능했다. 내어줄 것은 목숨뿐이었으므로 나는 목숨을 내어줄 수는 없었다. 죽음을 가로지를 때, 나는 죽어지기 전까지는 죽음을 생각할 수 없었고 나는 늘 살아있었다. 삶과 분리된 죽음은 죽음 그 자체만으로 각오되어지지 않았다.

아마도 삶을 버린 자가 죽음을 가로지를 수는 없을 것이었는데, 바다에서 그 경계는 늘 불분명했고 경계의 불분명함은 확실했다. 길고 가파른 전투가 끝나는 저녁 바다는 죽고 부서져서 물에 뜬 것들의 쓰레기로 덮였고 화약 연기에 노을이 스몄다. 그 노을 속에서 나는 늘 살아 있었고, 살아서 기진맥진 했다.


# 사쿠라 꽃잎 - 260p.

말은 비에 젖고,

청춘은 피에 젖는구나.


나는 안위에게 죽은 적의 검명을 보여주었다. 안위가 말했다.

- 글귀가 심히 가엾어서 요사스럽습니다.

- 죽은 척후장은 몇 살이라 하더냐?

- 스물여섯이라 하더이다.

- 내력을 물었느냐?

- 소상히는 모른오나, 세습 무사의 자식이라 하더이다.

- 저 글귀가 가여우냐?

- 적이지만 준수했습니다. 내 부하였더라면 싶었습니다.

- 글이 칼을 닮았으니 필시 사나운 놈이었을 게다.

안위가 빼앗은 적의 칼은 10자루였다. 나는 또 다른 칼을 빼보았다. 오래 쓴 칼이었다. 피고랑에 녹이 슬어 있었다. 그 칼에도 검명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그 녹슨 글자들을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청춘의 날들은 흩어져가고,

널린 백골 위에 사쿠라 꽃잎 날리네.


- 이 칼을 쓰던 자를 죽였느냐?

- 배를 나포할 때 스무 명을 사살했습니다. 그때 죽은 자들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모두 다 젊은 녀석이었습니다.

- 이 또한 모진 놈이었을 게다.

적의 칼을 한 자루씩 들여다보면서, 나는 하루 종일 배를 저어온 안위를 데리고 그런 하나마나한 잡소리를 하고 있었다. 말은 비에 젖고, 청춘은 피에 젖는구나... 청춘의 날들은 흩어져가고, 널린 백골 위에 사쿠라 꽃잎 날리네... 젊은것들의 글이었다. 바다에서 내가 죽인 무수한 적들의 백골이 내 마음에 떠올랐다. 내 칼에 새겨넣은 물들일 염(染)자도 내 마음에 떠올랐다. 내 젊은 적들은 찌르고 베는 시심의 문장가들이었다. 내 젊은 적들의 문장은 칼을 닮아 있었다. 이러한 적들 수만 명이 경상 해안에 집결해 있었다. 널린 백골 이ㅜ에 사쿠라 꽃잎 날리네... 내가 죽인 백골 위에 사쿠라 꽃잎이 날려도 나는 이 바다 위에 남아 있어야 했다.


# 들리지 않는 사랑 노래 - 386~388p.

갑자기 왼쪽 가슴이 무거웠다. 나는 장대 바닥에 쓰러졌다. 군관 송희립이 방패로 내 앞을 가렸다. 송희립은 나를 선실 안으로 옮겼다. 고통은 오래 전부터 내 몸 속에서 살아왔던 것처럼 전신에 퍼져나갔다. 나는 졸음처럼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다가오는 죽음을 느꼈다.

- 지금 싸움이 한창이다. 너는 내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말라. 내 갑옷을 벗기면서 송희립은 울었다.

- 나으리, 총알은 깊지 않사옵니다.

나는 안다. 총알은 깊다. 총알은 임진년의 총알보다 훨씬 더 깊이, 제자리를 찾아서 박혀 있었다. 오랜만에 갑옷을 벗은 몸에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서늘함은 눈물겨웠다. 팔다리가 내 마음에서 멀어졌다. 몸은 희미했고 몸은 멀었고, 몸은 통제되지 않았다. (중략)

세상의 끝이... 이처럼... 가볍고... 또... 고요할 수 있다는 것이... , 칼로 베어지지 않는 적들을... 이 세상에 남겨놓고... 내가 먼저... , 관음포의 노을이... 적들 쪽으로...



<칼의 노래>

김훈 지음

생각의 나무, 2001


칼의 노래
국내도서
저자 : 김훈
출판 : 생각의나무 2001.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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